영화 ‘한국이 싫어서’가 10년 전의 이야기로 보여주는 현재의 한국
장강명 작가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는 2015년에 나왔다. 10년쯤 전 작품인데도 이 제목은 여전히 한국인으로 사는 누군가를 ‘긁히게’ 할 만하다. ‘국뽕’에 자주 도취되는 이들은 ‘한국이 싫으면 한국을 떠나라’라고 반응할 법하다. 그런데 주인공 ‘계나’만큼 한국을 싫어하는 한국인 중에는 ‘누구는 한국이 좋아서 한국에 사냐?’라며, 마음먹고 한국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을 질투할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정교한 ‘어그로’. 정작 소설 <한국이 싫어서>는 한국을 싫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사람이 일단 도피하고 보는 이야기다. 개인적으로는 소설을 읽는 동안 화재가 난 건물을 떠올렸다. 주인공에게 한국은 계속 머물렀다가는 일산화탄소에 질식될지도 모르는 공간이다. 이 책을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조정석과 윤아가 주연을 맡은 영화 <엑시트>가 떠오를 수 있다. 점점 다가오는 유독가스를 피해 건물과 건물 사이를 옮겨 다니며 탈출할 수밖에 없는 그들과 <한국이 싫어서>의 계나는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은 처지다. 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내가 (만날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가젤이라고 해서 사자가 오는데 가만히 서 있을 순 없잖아.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은 쳐 봐야지.”
배우 고아성이 주연을 맡고 <한여름의 판타지아>,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의 장건재 감독이 연출한 영화 <한국이 싫어서>는 기본적으로 원작에 충실하다. 누군가에게 하소연하듯 쓰인 원작의 형식도 영화 초반부, 계나가 한국을 떠나게 된 상황을 보여줄 때는 그대로 쓰인다. 다만 호주로 설정되어 있던 이민의 무대가 뉴질랜드로 바뀌었고, 영화만이 보여주는 인물들의 선택이 있다. 고아성의 존재감은 상당하다. 한국에 사는 동안 이민을 결심하기까지의 에피소드에서는 지극히 사실적인 모습인데, 뉴질랜드의 화창한 햇살과 마주하는 장면에서는 낭만밖에 없을 것 같은 얼굴을 보여준다. 여러 작품을 통해 알려진 배우로서의 개성과 tvN <온앤오프> 등의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보여준 본래의 고아성에 가까운 모습이 한데 섞인 느낌이다.
10년 전에 나온 소설을 원작으로 하지만, 영화에서 그때의 정취는 느낄 수 없다. 어디까지나 현재를 사는 한국인의 이야기라는 점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사실 주요 에피소드를 소설에서 거의 그대로 가져왔는데도 공감할 수 있다는 건, 슬픈 일이다. 원작의 계나는 명문대 졸업생이 아니었고, 추위에 매우 취약했으며, 집이 가난했다. 그녀가 처한 상황은 그녀의 삶에 고스란히 통증을 남긴다. 영화 속 계나에게 공감하는 데에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굳건한 사회의 계층구조까지 떠올릴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이미 10년 전보다 더 추운 겨울을 경험했고, 지난겨울보다 더 추울 겨울을 앞두고 있으니 말이다.
원작의 장점은 한국을 떠난 사람과 한국에 남은 사람 모두 저마다의 현실에서 최선을 다해 행복을 찾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었다. 영화 또한 그런 장점을 놓치지 않는다. 다른 나라에서 새로운 인생을 꿈꾸는 계나와 비슷한 목표를 품은 또 다른 사람들, 그리고 한국에서 나름의 인생을 꾸려가는 인물들을 놓고 한쪽을 찬양하는 식의 태도는 없다. 심지어 영화는 주인공 계나가 뉴질랜드와 한국에서 마주하는 인물을 통해 원작에 없던 차가운 비극까지 그려낸다. 이 사건들은 이 영화의 주제가 ‘청년 세대를 향한 연민과 응원’으로 보이지 않게 만든다. 현실의 냉정한 단면을 비추면서 주인공 계나를 더 넓은 고민의 영역으로 데려가는 설정이라고 할까. 그래서 계나의 마지막 선택 또한 원작과 비슷해 보이면서도 달라졌다. 원작이 어디까지나 한국 사회를 고찰하는 이야기였다면, 영화는 자신의 정체를 파악하는 이야기다. 10년 전, 원작을 본 관객에게나 보지 않은 관객에게나 곱씹을 게 많은 작품이다. 스스로 지금의 모습에서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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