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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와 구원의 씻김굿, ‘더 글로리’ 파트 2

2023.03.17

by 이숙명

    치유와 구원의 씻김굿, ‘더 글로리’ 파트 2

    *스포일러가 포함된 리뷰입니다.

    상반기 최고 화제작 <더 글로리>가 마침내 막을 내렸다. 이 드라마의 매력은 ‘복수’ 자체가 아니라 평범한 여자가 ‘뒤탈 없이’ 그것을 해낸다는 점이다. 비공식 살인 면허를 가진 특수 요원이나 전관 변호사를 다섯 명쯤 살 수 있는 재력가도 아닌 사람이 불구대천을, 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여러 명을 뒤탈 없이 처리할 방법은 거의 없다. 그러니 초현실적 능력을 가진 인물이 대량 살상을 하고 유유히 빠져나가거나, 평범한 사람이 모든 걸 걸고 망나니 칼춤을 추다가 장렬히 바스러지거나, 치밀한 계획 아래 한두 명 인생 망치고 끝나는 게 보통의 복수극이다. 반면 <더 글로리>의 동은(송혜교)은 최소 여섯 명이 사망하고 두 명이 중상을 입고 한 명은 정신병원에, 서너 명은 감옥에 가는 일련의 사태를 제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일으킨다. 미행, 개인 정보 수집, 협박, 사주 등 자세히 따지면 곤란할 내용도 있지만 동은을 고발할 정도로 정신이 멀쩡한 적은 남지 않았다.

    김은숙 작가는 이 드라마를 “내가 봐도 무섭게 잘 썼더라”라고 자화자찬했는데 그건 허풍이 아니었다. 선정성 논란이나 여성 캐릭터를 응징하는 방법이 부도덕하다는 지적도 있지만 그조차 발전적 논의라 해도 좋을 만큼 성취가 크다. 이런 까다로운 설정에 이 정도 스케일, 이토록 방대한 캐릭터를 개연성 논란 없이, ‘한드’ 특유의 막판 얼버무리기도 없이 완성해낸 건 놀랍다. 김은숙은 한국어의 말맛을 가장 잘 아는 작가이자 대중의 욕망을 뼛속까지 발가벗기고 애무하는 타입의 작가인데 탄탄한 구조로 승부하는 장르에 특유의 매력이 더해지니 새로운 결의 스릴러가 탄생했다. 무엇보다 신선한 건 이 드라마가 복수를 그린 시선이다.

    <더 글로리>의 복수는 정의 구현이 아니라 치유의 수단이자 끈끈하게 달라붙은 피해 의식을 떨궈내는 씻김굿이다. 폭력으로 영혼이 파괴된 사람에게는 가해자가 자신이 미친 피해에 맞먹는 응징을 받는 게 치료의 시작이다. 하지만 공적 제재는 가해자를 포함해 사회 구성원 모두를 배려한 최소한의 처벌을 지향한다. 가해자를 응징하는 게 곧 피해자 치유라는 측면은 자주 무시된다. 사람들이 <더 글로리>에 열광하는 건 그 아쉬움을 긁어주는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친구라면 동은을 말려야 하지 않느냐”는 도영(정성일)의 말에 여정(이도현)은 답한다. “피해자들이 잃어버린 것 중에 되찾을 수 있는 게 몇 개나 된다고 생각하세요? 나의 영광과 명예, 오직 그것 뿐이죠. 누군가는 그걸 용서로 되찾고 누군가는 복수로 되찾는 거죠. 그걸 찾아야만 비로소 원점이고, 그제야 동은 후배의 열아홉 살이 시작되는 거니까요.”

    가해자들이 변명도 동정도 불가능한 절대 악으로 설정된 대목에서부터 이 드라마의 규칙은 명확히 암시되었다. 절대 피해자의 편에 서고, 복수가 자해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동은은 현남(염혜란)의 딸을 유학 보내면서 “네가 지금 낼 수 있는 유일한 용기는 외면”이라고 말한다. 살아남을 것, 자기가 자신의 2차 가해자가 되지 않을 것, 그게 이 드라마가 피해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외면이 불가능해 칼춤을 출 수밖에 없는 동은에게는 다른 안전장치가 주어진다. 혈혈단신이던 그에게 가해자 연대보다 굳건한 피해자 연대가 생기고, 저렇게 복수에만 매진하면 비용과 생존은 어찌 해결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재력 넘치는 조력자·추종자·연인 주여정도 등장한다. 피해자 연대는 복수만큼 그 후유증에 대한 이해도 일치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서로를 합리화하고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도록 북돋운다. 동은은 손명오(김건우)와 박연진(임지연)을 제거하는 데 일조한 경란(안소요)을 위로하고, 주여정의 어머니는 동은에게 여정을 도우라는 미션을 부여한다. 현남은 동은에게 웃음을 주고 부동산 사장(손숙)은 생모에게서 받지 못한 보호를 제공한다. 그들을 통해 연진뿐이던 동은의 삶이 확장되고, 살아서 봄을 맞을 이유가 생긴다.

    마지막 순간 동은은 “이제야 깨닫습니다. 저에게도 좋은 어른들이 있었다는 걸. 친구도, 날씨도, 신의 개입도요”라는 편지를 쓴다. 신의 개입이 아니고는 설명 불가한 상황이 많긴 했다. 저렇게 필요한 사람마다 협박하기 좋은 약점이 있거나 이용하기 좋게 동은에게 호감을 갖는다고? 저 무모한 계획이 저렇게 다 착착 맞아떨어지고 사람들이 다 저렇게 동은의 의도대로 움직인다고? 하지만 작품의 기세가 워낙 강해서 이 정도는 결점이 되지 못한다. 동은의 저 편지는 파괴되고 고립된 현실의 폭력 피해자들을 향한 또 하나의 메시지기도 하다. 너에게도 지금은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있을 테니 삶을 포기하지 말라는.

    작품의 메시지와 더불어 이 드라마가 남긴 또 다른 중요한 성과가 있다. 송혜교의 재평가와 새로운 스타들의 발견이다. 송혜교는 데뷔 이래 한 번도 전성기가 아닌 적이 없다. 하지만 제대로 평가받은 적도 없다. 그 이름이 미인을 뜻하는 고유명사처럼 사용되는 배우, 한류 초기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히트작을 내며 한국 드라마의 역사를 써온 배우, 의미 있는 캐릭터라면 작은 영화도 마다 않은 진중한 배우, 그게 송혜교였다. 그러나 히트작이 주로 로맨스와 드라마에 집중되었고, 워낙 스타성이 압도적이라 오히려 연기는 과소평가된 게 사실이다. <더 글로리>는 그런 송혜교에게 마지막 남은 영광의 퍼즐을 채워준 작품이다. 이 드라마에서 우리는 그의 새로운 얼굴을 보았다. 여전히 그를 하찮게 여기는 악당들 앞에 오래 준비한 덫을 놓고 웃으며 이죽대는 얼굴, 인생 최초 가해자였던 어머니 앞에 무너져 절규하는 모습, 그 모든 순간 머리털 하나에까지 어리는 스산함, 모욕과 학대에 익숙한 삶이었으나 끝내 자신을 포기하지 않은 생존자의 선명한 품위. 배우 송혜교는 과거 어느 순간보다 지금이 아름답고, 가능성으로 충만하다.

    파트 1에서 단순 악당으로 등장한 연진 무리는 파트 2에서 파멸을 맞으면서 각자의 신을 휘어잡을 기회를 얻는다. 캐릭터를 다룬 방식에는 호불호가 갈리지만 배우들이 궁금해지는 효과는 확실했다.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염혜란, 윤다경, 박지아 등 중견 배우들도 높은 관심을 받고 있다.

    드라마는 끝났다. 파트 1 리뷰에서 나는 이 드라마가 증명하는 우리 사회의 폭력 민감성 수위에 씁쓸해했다. 하지만 사회 고발성 메시지가 파급력을 갖기 위해서는 상업적인 장치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더 글로리>는 그 수위의 한계를 실험한 작품이었다. 드라마의 열기에 올라타고 싶은 언론사가 앞다퉈 심각한 학폭 사례를 보도하며 개선책을 촉구하고 있으니 실험은 성공이라 해야겠다. 그 와중에 안길호 PD가 학폭 가해자로 지목되는 아이러니한 상황도 벌어졌다. 드라마가 현실에서 많은 이야기를 끌어내면서 <더 글로리>의 메시지는 지금도 스스로 강화되고 있다. 결국 이것이 콘텐츠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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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urtesy of Netfl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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