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움츠러들지 않는 도전 정신으로, 영국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 이상은

2025.10.01

움츠러들지 않는 도전 정신으로, 영국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 이상은

드레스덴을 떠나 2년 전 런던에 안착한 이상은. 영국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로 데뷔 20주년을 자축한 그가 움츠러들지 않는 도전 정신으로 런던의 공기를 바꾼다.

리본 장식 드레스는 데이비드 코마(David Koma), 타비 발레 플랫 슈즈는 크리스틴(Christen), 귀고리는 치퍼(Chiefer).

런던 도심에서 차로 1시간 거리에 자리한 애딩턴 궁전(Addington Palace). 고(故)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느긋한 식사를 즐겼으며 지금은 고풍스러운 웨딩 베뉴로 각광받는 오래된 저택에 이상은이 약속 시간보다 다소 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183cm의 큰 키에 발레리나치고도 마른 체구, 문득문득 미간을 찌푸릴 정도로 무언가를 강렬하게 응시하는 그에게서 어쩐지 무용수의 우아함보다는 체조 선수의 단단함과 강인함이 느껴졌다(그는 트레이닝복에 온(On) 스니커즈를 신고 촬영장에 등장했다).

이번 <보그> 촬영은 간발의 차로 런던에서 진행됐다. 2023년부터 영국국립발레단에서 수석 무용수로 활약 중인 이상은은 지난 5월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공연 <워킹 매드 & 블리스>에 서울시발레단 객원 수석 자격으로 참여하느라 서울을 찾았고, 한동안 머물렀다. 무려 15년 만에 고국에서 펼치는 무대이자 한국에서 그가 처음 선보이는 컨템퍼러리 발레 작품이었기에 의미가 남달랐다. “작품이 좋았다는 말이 특히 인상적이었어요. 주로 유럽에서 선보여온 작품이니까요. 해외에 머무는 동안 한국 관객들의 발레에 대한 관심과 열의가 한층 진중해졌다는 사실을 체감했죠.”

스팽글 튜브 톱 드레스는 서비스(SRVC), 초커로 연출한 체인 팔찌는 치퍼(Chiefer).

이상은은 태생적으로 새로움에 대한 갈망과 모험심이 강했다. 고등학생 때 참가한 로잔 콩쿠르를 기점으로 다양한 안무가와 작업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고, 이후 꾸준히 해외 진출에 도전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절호의 기회. 당시 소속된 유니버설 발레단에서 2008년 국내 초연한 컨템퍼러리 작품의 대명사 <인 더 미들, 썸왓 엘리베이티드>의 발레 마스터로 내한한 로라 그레이엄(Laura Graham)에게 적극적으로 조언을 구한 끝에 2010년 드레스덴 젬퍼오퍼 발레단에 입단했다. 군무 단원에서 수석 무용수가 되기까지 드레스덴에서 보낸 12년은 안무가 윌리엄 포사이스(William Forsythe)와 데이비드 도슨(David Dawson), 피나 바우쉬의 도발적인 컨템퍼러리 작품을 마음껏 연구하고 재해석할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드레이프 스커트 디테일의 코르셋 드레스는 엘리 미스너(Ellie Misner), 귀고리는 치퍼(Chiefer).

이상은의 도전은 거기에 머물지 않았다. 드레스덴 젬퍼오퍼 발레단에서 동고동락한 예술감독 아론 S. 왓킨(Aaron S. Watkin)을 따라 2년 전 영국국립발레단으로 무대를 옮긴 이상은은 새로운 마음으로 세 번째 시즌을 맞았다. “마흔을 앞두고 <잠자는 숲속의 미녀> ‘오로라’ 공주로 데뷔해요. 어느새 흰머리도 조금씩 나고 있지만, 지금이야말로 내 몸과 작품에 대한 이해도가 어느 때보다 높은 시기라 걱정보단 기대가 큽니다.” 특히 흥미를 보인 아츠코 쿠도의 라텍스 의상을 입고 관능적인 캣우먼으로 변신한 이상은이 호탕하게 웃으며 <보그> 촬영의 피날레를 향해 주저 없이 나아갔다.

블랙 드레스는 에델린 리(Edeline Lee), 오른손 약지에 착용한 반지와 귀고리는 치퍼(Chiefer).

영국국립발레단(ENB)에 입단한 지 2년이 지났군요. 런던 생활은 이제 익숙한가요?

드레스덴 젬퍼오퍼 발레단의 아론 S. 왓킨이 ENB 단장으로 부임하면서 같이 왔기 때문에 적응하기 수월한 면이 있었어요. 단장이 바뀌면 무용수 구성에도 변화가 많아지는데 최근까지도 새로운 무용수들이 많이 들어왔죠. 다 함께 새로운 흐름을 만드는 중이에요.

발레단을 대표하는 6명의 수석 무용수 중 한 명으로서 지금 가장 집중하는 목표는 무엇인가요? 인터뷰 마치고 바로 연습하러 간다고 했죠?

새 시즌에 선보일 케네스 맥밀란(Kenneth MacMillan)의 <잠자는 숲속의 미녀> 연습에 매진하고 있어요. ENB에서도 2018년 이후 오랜만에 올리는 무대이고, 저도 이번에 ‘오로라’ 공주로 데뷔하게 되어서 감회가 남다릅니다. 이 외에도 <R:Evolution>과 <호두까기 인형>, <지젤> 등의 작품과 외부 작업을 위해 요즘은 아침 10시부터 저녁 8시까지 빠듯하게 연습하며 지내고 있어요. 고되지만 즐겁습니다.

라텍스 톱, 슬릿 스커트는 아츠코 쿠도(Atsuko Kudo), 체인 벨트는 시몬 로샤(Simone Rocha), 스트래피 힐은 두하(Duha), 귀고리는 치퍼(Chiefer).

지난 5월, 15년 만에 서울시발레단 객원 수석 무용수 자격으로 한국에서 공연을 펼쳤습니다. 요한 잉거의 작품 <워킹 매드 & 블리스>였죠. 시간이 조금 흘렀지만 그날의 소회를 듣고 싶어요.

오랜만의 공연인 만큼 취재 요청도 많이 들어와서 감사했어요. 개인적으로는 오랜만에 한국 무용수들과 호흡을 맞춰서 재미있었고, 한편으로는 제가 해외에 나가 있는 동안 한국 관객들의 시선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체감하는 기회였어요. 갈라 공연이 워낙 많아졌고, 전막 공연에 대한 한국 관객의 욕구를 크게 느꼈는데 발레인으로서 긍정적인 사인으로 보였어요.

지난해 창단한 서울시발레단에서 새로 호흡을 맞추며 15년 전 유니버설 발레단(UBC)에서 활동할 때에 비해 격세지감을 느낀 순간이 있다면요?

UBC에서는 제가 제일 막내였거든요.(웃음) 서울시발레단에서는 해외에서 활동하던 친구들, 평소 알고 지내던 친구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죠. 원래 현대무용을 했던 이정우라는 친구처럼 연극을 하거나 다른 분야에서 춤을 추다가 다시 발레로 전향한 경우도 있었고요. 그런데 그런 다양성이 좋아 보였어요. 이런 컴퍼니가 생겨남으로써 다양한 배경을 지닌 무용수들이 같은 관심과 목표를 공유할 수 있다면 발레단에서 선보일 수 있는 무용도 훨씬 다채로워질 테니까요.

라텍스 톱은 아츠코 쿠도(Atsuko Kudo), 귀고리는 치퍼(Chiefer).

인생 첫 콩쿠르였던 로잔 콩쿠르에서 간접 체험한 유럽인의 문화와 발레를 대하는 태도, 분위기에 긍정적인 영향을 받아 적극적으로 해외 진출을 꿈꿨어요. 첫 목적지였던 드레스덴 젬퍼오퍼 발레단의 군무 단원에서 수석 무용수가 되기까지 16년을 보내며 무엇을 얻었나요?

해외 발레단을 꿈꾼 데는 다양한 안무가와 협업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중요하게 작용했어요. 그런데 막상 드레스덴 젬퍼오퍼 발레단에 입단하고 보니 다른 무용수들에게 배우는 것이 정말 컸어요. 어떤 무용수를 만나고, 내 경험치가 얼마나 쌓이느냐에 따라 같은 작품이라도 매번 다른 해석과 호흡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깨닫는 것도 많았죠. 그런 경험을 통해 더 단단하고 성숙한 무용수가 될 수 있었어요. 스페인, 미국, 이탈리아, 프랑스 등 각지에서 몰려든 이방인 친구들끼리 서로 의지하며 쌓은 우정도 매우 소중하고요.

윌리엄 포사이스와 데이비드 도슨, 피나 바우쉬 등 세계적인 안무가들의 전위적인 춤과 작품을 마음껏 연구할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회상합니다. 특히 애착이 가는 컨템퍼러리 작품이 있다면요?

피나 바우쉬의 댄스 오페라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아>는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였어요. 동작이 아주 복잡하다거나 특별히 어려운 연출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내가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무의미한 동작의 나열이 돼버리는 것을 보고 춤에 대한 책임감을 느꼈죠. 손끝, 눈짓 하나에 의미를 실으려 노력한 시간을 통해 또 한 단계 성장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라메 니트 드레이프 드레스는 에델린 리(Edeline Lee), 타비 발레 플랫 슈즈는 크리스틴(Christen), 귀고리는 치퍼(Chiefer).

아론 S. 왓킨 단장의 설득이 결정적이었지만, 75년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국립발레단으로 옮겨 가기 전 고유한 전통과 역사를 중시하는 영국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에 대한 부담을 느꼈다고요. 어떤 확신으로 두려움을 극복했나요?

서른아홉에 발레단을 옮기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죠. 하지만 런던의 낯선 공기에서 얻을 수 있는 좋은 자극이 많을 거라 기대했어요. ‘내가 쌓아온 것을 보여주겠다’는 마음보다 ‘영국에서 이런 것도 한번 배워볼까?’ 하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용기를 얻었죠. 드레스덴은 컨템퍼러리 발레 중심이었다면 ENB는 클래식 발레와 컨템퍼러리 발레의 비중이 50:50 정도인데 오랜만에 학창 시절에 배운 것을 끄집어내는 순간들이 매번 새롭게 다가와요.

확실히 런던에서의 삶은 더 ‘시끄럽겠죠’? 빈 시간에는 어떤 식으로 영감을 흡수하며 일상을 만끽하나요?

런던은 확실히 대도시예요.(웃음) 로열 발레단의 <오네긴>이나 새들러스 웰스에서 상연한 해외 컨템퍼러리 작품도 즐겨 봤고, 이 외에도 세계 최고 수준의 전시, 공연, 페스티벌을 30분 거리에서 즐길 수 있어요. 드레스덴에서는 비슷한 기회를 누리려면 무조건 비행기를 타야 했는데 말이죠. 그럴 때 내가 문화 중심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체감해요.

라메 니트 드레이프 드레스는 에델린 리(Edeline Lee), 귀고리는 치퍼(Chiefer).

8,500석 규모의 로열 앨버트 홀에서 선보인 엄청난 스케일의 <백조의 호수> 공연을 지난 6월 국내 극장에서도 볼 수 있었어요. 사방이 관중으로 둘러싸인 무대 한가운데서 32회전 푸에테를 완벽하게 수행하는 모습이 엄청난 희열을 이끌어냈습니다.

<백조의 호수>에 도전할 때마다 클래식 발레가 보여줄 수 있는 테크닉의 정수가 어떤 것인지 매번 새롭게 깨달아요. 맨 처음 <백조의 호수> 전막 무대에 데뷔한 때가 스물일곱 살쯤이었을 거예요. 그 후 꾸준히 시도해온 작품이지만 하면 할수록 어렵고, 백조(오데트)와 흑조(오딜)를 완벽하게 오가는 것 역시 아직도 정신적으로 힘에 부치죠. 하지만 그럼에도 다시 도전하고 싶고, 그만큼 이번 기회를 통해 어떤 부분에서 더 발전할 수 있을지 계속 기대하게 되는 작품이에요.

데뷔 20주년이지만 “여전히 배우는 것이 재미있다”고 말합니다. 최근 춤에 관해 무엇이든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다면요?

점점 발레를 보는 관점이 달라져요. 더블 피루엣과 아라베스크의 ‘라인’에만 신경을 쏟던 시기는 지났죠. 이젠 작품 전체 흐름이 더 중요해요. 긴 시간 관객의 입장에서도 수많은 작품을 보러 다니며 느낀 것이, 디테일을 떠나 이유 없이 사로잡혔던(Captivated) 공연이 가슴에 더 오래 남는다는 사실이에요. 그걸 깨달은 후 동작 하나에 집중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관객의 몰입도를 높일 수 있는지 고민하게 됐죠.

자수 장식 오프숄더 드레스와 프린지 장식 슬링백 슈즈는 에르뎀(Erdem).

‘나이 듦’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나요?

신체 나이를 결코 무시할 수 없고, 점점 체력 소모도 많아지지만, 지금은 발레단마다 재활 프로그램을 잘 갖추고 있어 모든 무용수들이 실질적인 도움을 많이 받고 있어요. 나이가 들수록 내 몸과 작품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기 때문에 더 효율적으로 몸을 쓰게 된다는 것도 긍정적인 신호죠. 어느새 흰머리도 조금씩 나고, 마흔을 앞두고 오로라 공주로 데뷔하게 됐지만, 제 경험을 믿고 계속 무대에 설 거예요.

깃털 장식 오페라 코트는 브라이언 드 카르발류(Brian De Carvalho).

무용수로서 언제 가장 자유롭다고 느끼나요?

무대에서 가장 자유로워요. 연습할 때는 사소한 동작에 집중하다 보니 그런 느낌을 거의 못 받거든요. 하지만 공연할 때는 연습한 것을 뒤로하고 최대한 상황에 몰입하려 애쓰는 편이에요. 그러다 보면 예상치 못한 디테일을 강조하는 식으로 무대에서 즉흥적인 뭔가를 만들어내기도 하죠. 그럴 때 자유로움을 느껴요. 그런 희열을 누리기 위해 계속 발레를 하고요. VK

ART & CULTURE

“일상에서 발레가 보편화되길 바랍니다. 현대인에게 얼마나 좋은 운동인데요!” 10년 전 국립발레단의 강수진 예술감독을 인터뷰할 때, 그녀는 발레야말로 우리에게 절실하다고 피력했다. 그때만 해도 발레는 우아함을 넘어 고고한 이미지, 높은 기술적 난도 때문에 선택받은 자만 입성 가능한 이상향으로 여겼고, 우리는 관람 예술로 만족했다. 하지만 최근 셀러브리티를 비롯한 많은 이가 일상에서 발레를 시도하고 있다. 발레야말로 현대인의 욕구를 충족하는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전신의 근력, 유연성, 균형 감각을 높이고 체형 교정에 유용하다는 신체적 이점 외에도, 춤과 음악, 패션이 함께해 자기표현이 가능한 매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너 뷰티’, 동적이되 정적인 발레를 통해 내적으로 몰입하며 명상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바야흐로 명상의 시대 아닌가. 발레의 친밀한 확장을 반가워하며, 그 절정에 있는 발레리나와 패션의 만남을 주선했다.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 수석 무용수 서희, 영국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 이상은, 파리 오페라 발레단 에투알 박세은, 이들이 펼쳐내는 춤 한 벌.

    피처 에디터
    류가영
    컨트리뷰팅 패션 에디터
    송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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