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드 인 코리아’ 팀의 수상한 초대
선한 손길일까, 사악한 덫일까? 각자의 꿈과 욕망을 품고 1970년대 대한민국에서 서로를 직면한 〈메이드 인 코리아〉의 현빈, 정우성, 우도환, 서은수, 정성일, 노재원, 박용우를 동시대로 소환했다.

그 남자의 미스터리, 현빈

정석과도 같은 블랙 수트에 타이를 매고, 매끄럽게 가르마를 탄 현빈이 내 앞에 앉았다. 어쩐지 오랜만인 듯한 기분이었다. 그를 이렇게 가깝게 마주한 것은. <사랑의 불시착> 이후 그가 드라마로 돌아온 것은 6년 만이다. 디즈니+가 연말연시를 겨냥해 공개하는 새 시리즈 <메이드 인 코리아>에서 현빈은 1970년대 격동의 대한민국에서 주어진 위치에 만족하지 않고 은밀한 야망을 조금씩 드러내는 중앙정보부 부산지부 정보과장 백기태로 등장한다. <보그> 화보 촬영을 함께한 정우성, 우도환, 서은수, 정성일, 노재원, 박용우 등 폭넓은 세대를 대표하는 연기파 군단이 그를 중심으로 얽히고설키기에 어깨가 한층 무겁다. 작품 잘 봤다는 이야기로(인터뷰 준비를 위해 작품이 공개되기 전 시리즈 몇 화를 미리 본 상태였다) 말문을 연 내게 아직 편집본을 보지 못한 현빈이 되물었다. “아, 그래요? 정말 궁금해요. 어떻게 잘 나왔나요?”
현빈, 아니 백기태의 첫인상은 경계감을 자극한다. 지덕체의 눈부신 균형감과 카리스마가 도입부에서부터 빛을 발하지만, 어쩐지 영웅적인 인상은 아니다. 일본 공산주의 단체에 의해 납북될 위기에 처한 비행기에 승객으로 탑승한 백기태는 놀라운 언변과 몸싸움 실력으로 판도를 뒤바꾸지만 동기는 한없이 수상하다.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한 하이재킹 상황에서 기내에 의외의 인물이 타고 있었다는 새로운 설정이 신선하게 느껴졌어요. 백기태가 거기에 왜 탔는지 추적하며 남은 이야기를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내 편과 네 편이 확실치 않은 상황, 여섯 편의 에피소드 내내 현빈의 얼굴은 낯설다. 로맨스물에서 빛을 발한 낭만적인 매력은 철저히 자취를 감췄고, 액션물에서 돋보인 카리스마는 한층 서늘해졌다. 다소 쓸쓸한 모습으로 등장한 영화 <만추>(2011)나 <하얼빈>(2024)에 비해서는 삶에 대한 더 강렬한 욕망이 느껴지지만, 처음으로 악역에 도전한 <협상>(2018)보다는 한층 은근하다. 그래서 인간적이다. “나쁜 놈이라고 할 수도 있죠. 하지만 그럼에도 기태가 계속 그 방향으로 나아가려 몸부림치는 데는 가정사가 미친 영향이 있습니다. 다시는 그때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지가 자꾸만 욕심을 합리화하게 하죠. 그런 집념을 확고하게 믿고 전진하는 기태가 오히려 제 눈에는 아슬아슬하게 느껴져요.”
군 제대 후 중앙정보부의 핵심 인사가 된 백기태는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의 산증인이자 두 동생(그중 한 명이 우도환이 맡은 백기현이다)을 건사하는 가장으로서 권력의 사다리를 타기 위해 계속 기회를 엿본다. 칼같은 가르마와 네이비 핀스트라이프 수트 차림의 백기태에게서는 내 눈앞의 다정하고 살가운 현빈의 모습을 기대할 수 없다. “13~14kg 정도 증량했어요.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느낌을 원했죠. 중앙정보부가 지닌 권력과 위압감이 한 치도 흐트러짐 없는 외적인 모습을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나길 바랐거든요.” ‘비즈니스’를 위해 일본을 자주 오고 간다는 설정상 일본어에도 공을 들여야 했다. 그가 일본어 연기에 도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어설프게 들릴까 봐 걱정했습니다. 첫 촬영이 하이재킹 신이었는데, 저 빼고 다 일본 배우였거든요. 그 안에서 제가 일본어로 상황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부담이 컸죠.” 그러나 걱정되진 않는다. 운동, 음악, 요리, 손재주 등 많은 영역에서 실제로 다재다능한 그가 배우로서 어설픈 모습을 보여준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 말이다. 모든 장르, 모든 역할에 현빈은 언제나 능숙하게 스며들었다. “역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금처럼 외국어를 구사해야 한다든지, 사투리를 배워야 한다든지, 혹은 외적으로 변화가 필요하다 싶으면 최소한 3개월은 투자해요. 어느 정도는 해봐야 알겠더라고요. 해봤는데 안 되겠다 싶으면요? 감독님께 과감하게 상의를 드려야죠. 그럼 감독님이 알아서 해주시겠죠.(웃음)”
<내부자들> <마약왕> <남산의 부장들>을 연출한 우민호 감독에게 <메이드 인 코리아>에 앞서 전작 <하얼빈>을 맨 처음 제안받았을 때 현빈은 여러 번 고사했고, 우민호 감독은 끈질기게 설득했다. 그 결과 지난 11월 열린 제46회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하얼빈>으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현빈은 다음과 같이 수상 소감을 전했다.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 수많은 일을 겪으셨던 그분들의 고통과 괴로움, 좌절, 그럼에도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과 모든 무게감을 감히 헤아릴 수도, 상상할 수도 없었고, 감당해낼 자신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게 해낼 수 있다고, 함께 의미 있는 작품을 만들어보자고 끝까지 이끌어주신 감독님 덕분에 제가 여기 서 있습니다.” 유난히 ‘차갑고, 뿌연’ 작품으로 회고하는 <하얼빈>의 여운은 그만큼 짙다. “매 작품에 빠져 지내는 동안 저라는 사람도 조금씩 바뀌었겠죠. 하지만 <하얼빈> 이후에는 특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요.” 마침 실제 삶에서도 많은 책임이 주어지는 시기였다. “<하얼빈>을 촬영할 당시 모든 게 맞물렸어요. 결혼도 하고, 아이도 태어났죠. 어쩔 수 없는 심경의 변화가 찾아왔고, 연기와 가정에서 모두 무게감이 느껴졌어요.” 통한의 이야기를 이해할 정도로 아이가 자랐을 때, 아버지로서 함께 <하얼빈>을 감상하는 현빈의 마음은 또 어떨까? 20년 넘게 연기를 해왔지만 아직 많은 것이 베일에 싸여 있다.

고등학교 때부터 연극부 생활에 푹 빠져 지낸 현빈은 2003년 <논스톱 4>를 통해 대중의 눈에 띄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 찾아온 작품이 <내 이름은 김삼순>이다. 까칠한 매력을 발산하는 연하남 현진헌으로 활약하며 최고 시청률 50%를 견인해낸 그는 곧바로 스타가 됐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당시 스물넷이었던 청춘 배우가 “순간에 도취되면 안 된다”는 부모님의 조언을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과거 인터뷰를 끝없이 거슬러 가봐도 그에게서 한결같이 느껴지는 초연함은 그를 ‘야망이 없는 배우’로 호도하게 할 정도였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겸허한 삶의 대전제가 일찍이 내면에 단단히 뿌리내리자 현빈은 흔들리지 않았다. 신인 때부터 줄곧 맡겨진 주연의 기회를 통과하면서도, <내 이름은 김삼순> <시크릿 가든> <사랑의 불시착>으로 거둔 주기적인 신드롬 속에서도 현빈의 마음가짐은 변함같이 건강했다. “처음엔 잘 몰랐는데 오히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니 느껴지더라고요. 타이틀 롤에 대한 부담, 책임감 같은 것들이요. 연기는 할수록 힘들어요. 자꾸만 어려워져서 싫어지기도 하죠. 오히려 신인 때는 심플했어요. 내 것만 잘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이것도 보이고, 이게 나을까 저게 나을까 생각도 많아지고, 그중에서 결국 선택해야 하는데 그게 참 쉽지가 않죠. 복기도, 후회도 많이 합니다.” 최근 그는 손석구가 등장한 인터뷰 영상을 보며 깊이 공감했다. “석구 씨가 부산에서 촬영했는데 연기가 뭔가 석연치 않았대요. 서울 올라오는 내내 차 안에서 그 대사를 되뇌었다는데 그게 어떤 말인지 너무 잘 알겠더라고요. 미련이 생길 수밖에 없거든요.”
“3화는 어떠셨어요?” 대화가 무르익을 때쯤 그가 또다시 질문했다. 백기태와 배금지(조여정)를 주축으로 전개되는 3화는 그가 특히 즐겁게 연기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아마 여정 누나와의 마지막 촬영 신이었을 거예요. 각자 캐릭터에 완벽히 몰두한 상황에서 모든 대사가 후루룩 맞아떨어진 느낌이 있었죠. 모니터링하던 감독님도 너무 편해 보였다고 하더라고요.” 현장이 물 흐르듯 흘러간다고 느껴질 때, 요즘 현빈은 배우로서 충만함을 느낀다. 그런 기분 좋은 파도를 부드럽게 타기 위해 정답처럼 느껴지는 태도는 마음을 열어두는 것. “최대한 준비하지만, 그게 정답이 아닐 수 있어요. 현장에 갈 때 가장 설레는 점은 제작진이나 다른 배우들과 교류하면서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를 만나게 되고, 그에 맞춰 내 연기도 달라진다는 것이죠. 이번에 <메이드 인 코리아>를 촬영하면서도 그랬어요. 정말 다양한 배우들이 출연하잖아요. 리허설을 거듭하며 각자의 생각과 준비한 연기를 맞춰가는 과정에서 배운 게 정말 많았죠. 할수록 어렵지만, 요즘 제가 느끼는 연기의 재미는 바로 그런 거예요.”
<보그> 촬영이 끝난 후 그는 작품 홍보를 위해 유튜브를 촬영하러 간다고 했다. 영화 <하얼빈>이 개봉했을 때도 ‘짠한형 신동엽’을 비롯한 유튜브 채널에 모습을 비치며 대중과 만난 그는 더 어렸을 땐 내 길이 아니라고 확신했던 낯선 무대를 어떤 마음으로 누비고 있을까. “여전히 전 재미있는 사람은 아니에요.(웃음) 하지만 시대가 변했고 유튜브 매체도 정말 많아졌잖아요.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한편으로는 제가 경험해보지 않은 콘텐츠니까 한번 도전해보자고, 이왕이면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져보려는 거죠.” <메이드 인 코리아> 공개를 앞두고 이미 시즌 2를 촬영 중인 그의 마음은 미지의 영역에도 기대를 걸 정도로 간절하다. “잘돼야죠. 드라마 한 편이 아니라 영화 여섯 편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퀄리티에 집중해서 만든 작품이에요. 농담이지만, 날씨가 너무 추워서 아무도 집 밖으로 안 나가셨으면 좋겠습니다. 게다가 시즌 2는 훨씬 재밌을 거예요.” 그의 행보와 언어에서 느껴지던 담백한 분위기 때문에 긴 시간 나는 그를 오해했다. 현빈은 초연한 사람이 아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뜨거운 열정보다 차가운 열정 쪽에 조금 더 가까울 뿐. 촬영에 집중하고 틈틈이 가족을 돌보며 정신없이 지나간 2025년이지만, 그는 매 순간 삶의 주도권을 꼭 붙든 채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현빈에게서 리더의 향기가 나는 이유다. 그런 그가 이끄는 세상은 어떨까? 적어도 <메이드 인 코리아>에서는 의견이 분분할 듯하다. 류가영 <보그> 피처 에디터
영리하고 유연한 축, 정우성

대사의 행간에서 틈을 발견하고, 대본에서 새로 뭔가를 그려볼 수 있는 여백과 여지를 탐색하기. 적극적인 배우의 영리한 연기란 바로 그곳에서 시작되는 일일지도 모른다. 배우 정우성이 <메이드 인 코리아> 합류를 결심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배우로서 뭔가 할 게 있다는 게 보이면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요.” 자신만의 시선으로 인물의 이면을 발견하고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기쁨이 정우성을 움직여 검사 장건영을 그려보게 했다.
1970년대. 한편으로는 정부와 제도 안에서 부와 권력을 쟁취하려는 야심만만한 인물들이 기승을 부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부정한 방식으로 제 몫을 챙기려는 이들을 추적해 들어가는 무리가 팽팽하게 맞선다. 장건영은 후자를 대표하는 인물로 타협 없이 불의를 파헤치는 외골수 검사다. 투박한 안경 너머 장건영의 고집스러운 표정이, 강직해 보이는 인상이 엿보인다. 멋 부리는 것 없이 검박한 차림새 또한 그의 단정한 면모와 기개를 짐작하게 한다. “장건영은 권력의 시대에 자신만의 소신을 지키고 정의를 사수하는 인물입니다. 그만큼 순수하고 누구보다 치열하죠.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 눈에는 얼마간 돌출돼 보일 수도 있어요.”

정우성은 장건영의 돌출, 일종의 뾰족함에 입체성을 부여해나갔다. “장건영이라는 캐릭터를 봤을 때, 어떤 식으로든 뭔가를 만들 수 있겠다는 그림이 그려지더군요. 상당한 긴장감을 품고 있는 인물인데 그에게 얼마간 숨 쉴 틈을 주고 싶더라고요.” 배우가 인물을 해석하고 인물에게 고유의 성격을 부여하자 유머와 위트를 잃지 않는 장건영이 탄생했다. 태세를 전환하거나 불리한 상황을 돌파하는 방편으로 장건영은 특유의 호방한 웃음을 보이거나 흥얼거리거나 흐느적대는 몸짓을 해보이는데 그것이 특히 인상적이다. “캐릭터를 디자인해볼 여지가 많았어요. 이를테면 장건영은 종종 ‘하하하’ 하고 웃는데 그 웃음을 어느 정도 크기로 어떤 톤으로 할 것인가가 관건이었죠. 리딩 때 내가 해석한 대로 웃어 보였는데 감독님이 좋아하시더라고요. 우민호 감독님은 누구보다 배우를 잘 관찰하고, 배우가 해석한 것이 전체 드라마의 톤을 해치지 않는다면 적극적으로 지지해주는 분이거든요.” 그뿐인가. “문어체의 대사를 입말로 풀어보기도 하고, 어순을 바꾸기도 하며, 호흡을 유난히 많이 넣어보거나, 실없는 농담도 해 보이며” 인물을 다면적으로 빚어나갔다. 그리하여 “좀 더 인간적이고 날것 냄새를 풍기는 장건영”이 우리 앞에 우뚝 서 있다.
정우성은 <하얼빈>에서 마적단 박점출 역으로 특별 출연하며 우민호 감독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짧은 출연이었지만 감독님께서 뭔가를 봐주신 것 같아요. 저는 상대 배우의 호흡이 미묘하게 달라지면 그에 맞춰 테이크마다 다른 연기를 하는데, 그러다 보면 계산하지 않은 데서 팽팽한 긴장이 생기죠. 그런 점을 좋게 봐주신 게 아닐까 싶어요.” 본격적으로 <메이드 인 코리아>에서 만나 좀 더 긴 호흡으로 손발을 맞춰보면서 감독을 향한 정우성의 신뢰감은 한층 더 깊어졌다. “내가 해석하고 준비한 방식으로 장건영을 덧대나가는데 감독님께서 그것을 절대적으로 믿어주셨어요. 배우란 늘 스스로 결정해가며 연기해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불확실성에 대한 고민이 있기 마련이죠. 그럴 때 바로 옆에서 감독님이 ‘괜찮다, 그게 맞다’고 말해주면 제대로 탄력을 받게 돼요. 덕분에 한창 작업 중인 시즌 2도 아주 재밌게 촬영하고 있습니다.”
출중한 배우들의 강력한 캐릭터 드라마가 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함께하는 배우들과의 호흡도 볼만하다. “장건영과 백기태가 숙명적인 대립 관계에 있다 보니 서로 팽팽하게 맞섭니다. 현장에서도 그래요. 현빈 배우와는 주고받는 호흡을 해 보이기보다는 서로가 서로를 비트는 호흡을 많이 쓰는데 그게 참 재밌더라고요.” 후배 배우들의 연기 역시 신선한 자극이 된다. “장건영 곁에서 같이 움직이는 오예진 수사관의 서은수 배우는 애드리브가 많은 현장에서도 순발력 있게 그때그때 맞는 리액션을 너무 잘 보여줘서 놀랐습니다. 노재원 배우도 자기만의 호흡을 대담하게 해 보이고. 후배 배우들이 현장에서 보여주는 유연함이 상당히 인상적이었어요. 제가 연기하던 초창기에는 주된 감정의 무게에 눌려 유연함을 발휘하기 쉽지 않았는데 그런 것이 없는 게 좋아 보이더군요.” 배우로서 꾸준히 연기하는 일 못지않게 틈틈이 그는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도 하고, 때론 기획자이자 제작자의 면모도 보여줬다. “데뷔 이후 현장은 제게 늘 하나의 ‘판’이었어요. 현장의 모든 게 궁금해 늘 관찰했고, 자연스럽게 도전해왔죠. 영화나 드라마 작업이란 누구 하나의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드는 일이라는 걸 일찍이 인정하게 됐어요. 그러다 보니 아이디어가 있으면 거침없이 감독님께 전하고 적용해봐요.” 그런 경험과 기질을 자산 삼아 그는 언제든 또 새로운 것을 만들고 기획하고 시도해볼 게 분명하다. 당장은 <메이드 인 코리아> 공개를 기다리며 시즌 2 촬영에 집중하고 있다. “이번 작품의 기대 포인트? 당연히 현빈, 백기태죠.(웃음) 거기에 드라마 규모, 시대를 재현하는 방식, 다양한 캐릭터를 보는 재미도 있을 겁니다. 시즌 2의 장건영이요? 어떤 예상도 하실 필요 없습니다. 작정하고 나올 예정이니까!” 정지혜 영화 저널리스트
이번에는 액션 대신 치열한 고뇌, 우도환

우도환은 얼굴만큼 몸의 이미지가 강렬한 배우다. 많은 작품에서 액션 연기를 했고, 그때마다 몸을 드러내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드라마 <더 킹 : 영원의 군주>(2020)에서는 왕의 절친이자 근위대장으로서 액션의 중심에 섰고, 넷플릭스 시리즈 <사냥개들>(2023)에서 연기한 김건우는 복싱 유망주다운 액션과 몸의 기세를 보여주었다. 우도환은 <사냥개들2>에서 다시 김건우를 만났고, 현재 제작 중인 영화 <열대야>에서 불법 격투기 도박장을 전전하는 전직 프로 복서를 연기한다. 분명 우도환은 앞으로도 몸과 함께 기억될 것이다. 그래서 반대로 <메이드 인 코리아>의 우도환은 유독 도드라져 보일 것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액션을 하지 않는다. 수년간 운동으로 다져온 몸은 육군 장교의 군복 속에 감춰둔다. 대신 시청자는 우도환을 통해 가족과 대의 사이에서 고뇌하는 남자를 보게 될 것이다. “끊임없이 갈등하는 캐릭터예요. 감독님은 ‘햄릿’과 비슷하다고 자주 이야기했죠. 자신이 서게 될 곳이 어디인지를 놓고 고민하는 인물인데, 그런 모습을 겉으로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니 외로운 사람이기도 해요. 제게는 그런 부분이 매력적이었어요.” 사연을 알고 나면, 그의 이번 선택에 담긴 의미를 알 수 있다.
<메이드 인 코리아>에서 우도환이 연기한 백기현은 백기태(현빈)의 막냇동생이다. 가난한 집에서 형과 누나의 보살핌을 받고 자란 뒤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장교가 된 남자. 게다가 수석 졸업으로 출세까지 보장받은 엘리트 군인이다. 이력만 놓고 보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어 보이지만, 가정에서의 위치는 다르다. 형이 볼 때 여전히 그는 ‘막내’고, 막내가 볼 때 형은 여전히 닿기 어려운 존재다. 백기현의 고민은 그처럼 어느 집에나 있을 법한 어색하고 불편한 감정에서 시작한다. “형을 존경하지만, 형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마음도 있는 거죠. 어렸을 때는 당연히 형이 하라는 대로만 해서 자신의 뜻은 존중받지 못했을 거예요. 또 설정상 형은 중앙정보부 요직에 있는 사람이잖아요. 어디서든 형 안부를 묻는 이들이 많았을 거고요. 그만큼 또 버겁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는 거죠.” 2화에 등장하는 형제의 식사 장면은 그런 감정을 압축해 보여준다. 어머니의 제삿날, 오랜만에 모인 가족의 풍경은 전혀 따뜻하지 않다. 동생은 무릎을 꿇은 채 형이 따라주는 술을 받고, 극존칭을 쓴다. 형을 대하는 자세라기보다는 5성 장군 앞에 선 이등병의 모습에 가깝다. 그런데 원래 대본에는 그렇게 쓰이지 않았다고 한다. “저의 첫 촬영이었는데, 리허설을 본 감독님이 더 극존칭으로 밀어보자고 하셨죠. 아버지가 없는 집에서 기태는 막내를 더 혹독하게 훈육했을 거고, 그래서 동생에게 형은 정말 어려운 존재였을 것이다, 이런 설정이었어요. 형도 군인이었으니까 더 말을 편하게 하지 못했을 거고요. 저도 그런 방향으로 캐릭터를 잡았어요.” 짧은 장면이었지만, 이 집안의 위계와 정서, 백기현이 평생 부담해온 무게가 응축되어 있었다.
그렇게 존재만으로도 불편한 형은 이후 백기현에게 더 큰 딜레마를 안긴다. 권력의 중심으로 다가서기 위해 선을 넘은 백기태는 검사 장건영(정우성)의 표적이 되고, 그의 수사망은 백기현에게까지 뻗는다. 형의 진실에 다가갈수록 백기현이 놓인 선택의 기로에는 더 깊은 골이 파인다. 가족에게 등을 돌릴 것인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기준을 꺾을 것인가. 어디까지가 혈육을 지키는 일이고, 어디서부터는 국가와 자신을 속이는 일이 되는지. 우도환은 ‘형제’라는 설정이 이 갈등을 받아들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동안 여러 작품에서 남자들의 ‘브로맨스’를 연기해왔지만, ‘친형제’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친구 사이의 진한 감정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려면 특별한 서사가 필요하지만, 가족끼리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형제가 서로를 위하는 건 설명할 필요가 없잖아요. 그 마음이 깔려 있으니까, 불편해도 불편하다고 쉽게 말할 수 없고요. 그래서 두 사람 사이에 다툼이 생기면 파장이 더 크게 느껴져요. 저로서는 이미 갈등의 개연성이 바닥에 깔려 있는 상태에서 출발한 셈이었죠.” 극 중 백기현에게는 브로맨스를 즐길 여유가 없지만, 현장에서 우도환은 묵직한 브로맨스를 실감할 수 있었다. 정우성과 현빈, 배우가 되기 훨씬 전부터 선망하던 선배들과 작품을 함께할 수 있다는 건, 그가 <메이드 인 코리아>를 선택한 이유의 절반 이상이었다. “두 선배님이 한 작품에 함께 나오는 경우가 흔치 않잖아요.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두 분과 같이할 수 있을까 싶었죠. 게다가 영화가 아니라 시리즈니까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도 길고요. 저로서는 안 할 이유가 없었어요.” 촬영 첫날, 현빈을 처음 만난 우도환은 ‘멋’을 느꼈다. 동시에 “10년 후에 후배들이 나를 이렇게 봐줄까” 싶었다. 정우성과의 첫 만남에서는 “열심히 하겠다”는 말부터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건 필요 없다고 하셨어요.(웃음) 그냥 재미있게 하라고, ‘네가 더 재밌게 놀아야 이 작품이 산다’고 해주셨죠. 모든 후배에게 늘 그렇게 말씀하세요. 두 분 다 현장 분위기를 유쾌하게 이끌어주셔서, 한 분이라도 계시면 저는 그냥 든든했어요.”
우도환이 작품에서 군복을 입은 건 <더 킹 : 영원의 군주>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당시 해군 장교의 정복을 입고 등장했던 그는 이번에는 육군 장교의 정복과 평복을 입는다. “정복은 확실히 불편해요. 실제 군인들도 자주 입는 옷이 아니잖아요. 모자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도 않고요. 그래도 입는 순간 행동에 큰 도움을 받았어요.” 당연히 과거 군 생활의 기억도 함께 떠올렸다. “군인 역할을 할 때는 예전에 썼던 말투를 떠올리게 돼요. 약간 딱딱하고 건조한 어투 같은 것들이요. 그런 것들이 자유로운 감정을 자꾸 정리하게 하잖아요. 말투나 옷의 불편함 등이 군인이라는 직업의 틀을 먼저 잡아주죠.” 그는 팬들 또한 이번 작품에서 ‘군인 우도환’의 이미지를 새롭게 봐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구레나룻까지 일자로 다듬은 1970년대 장교의 외형부터 일상에서도 국가를 먼저 떠올리는 태도, 그리고 그 속에서 아직 완전히 단단해지지 못한 젊은 장교의 마음까지. 특히 이미 그 시기를 지나온 형 백기태의 눈에는 조금 더 자라야 하는 동생의 모습이 비쳐야 한다고 여겼다. “사춘기라고 봐야 할까요. 눈빛이나 화를 내는 톤에서 아직 덜 여문 구석이 느껴지면 좋겠다 싶었어요. 시즌 1의 백기현에게는 그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았거든요.” <메이드 인 코리아>에서 우도환이 보여주는 건, 경계에 서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인물이다.
가정에서, 군대라는 세계에서,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두 가지 정의 사이에 놓인 남자의 성장통이라고 할까. 한동안 액션의 중심에 선 인물을 연기했던 우도환에게는 그만큼 다른 얼굴을 꺼내 보일 수 있는 기회였을 것이다. 역시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기도 했다. “배우는 공상을 하는 게 일의 한 부분인 직업이잖아요. 공상을 통해 군인도, 복서도 되죠. 다른 일을 했다면 쓸데없는 상상처럼 여겨졌겠죠. 연기를 하다 보면 그런 공상으로 만들어낸 마인드셋이 완벽하게 됐다고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이 일이 정말 재밌다고 실감해요.”
그래서 그동안 우도환이 작품을 선택해온 흐름은 새로운 공상을 향해 코스를 조금씩 바꿔온 여정처럼 보인다. 그는 늘 ‘그때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먼저 물었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지금 작품의 성격이 다음 작품을 선택하는 방향이 된다. 강렬한 액션 신을 위해 뛰어야 했던 <사냥개들>을 마치고는 방황하는 청춘의 로맨스 <Mr. 플랑크톤>(2024)으로 방향을 틀었고, 다시 영화 <열대야>에서 격투기 도박장을 전전하는 전직 복서를 연기한 뒤 <메이드 인 코리아>의 고뇌하는 군인을 선택한 것처럼 말이다. “이번에는 어떤 장르를 할지 정해두고 제안하신 작품의 대본을 보는 편이에요.” 그렇게 액션, 코미디, 로맨스, 시대극 등을 거쳐왔지만, 다양한 장르를 오가는 움직임이 필모그래피를 화려하게 꾸미려는 전략은 아니다. 배우로서 자기 안의 여러 얼굴을 시간차를 두고 꺼내 보이려는 태도다. 시간이 지나 돌이켜보면 <메이드 인 코리아>의 백기현 또한 지금의 얼굴을 남길 수 있었던 작품으로 간직될 것이다. 액션은 잠시 숨겨놓고 내면의 갈등을 몸으로 표현했던 기억으로 말이다. “예전에 비하면 지금은 현장에서도 좀 더 많은 것을 보려고 하는 편이에요. 제가 맡은 캐릭터와 연기만 보고 있어서는 안 되고 숲을 봐야 하니까요. 그래서 내 연기가 이 작품을 어떻게 흘러가게 만들지 고민하게 돼요. 한 장면 한 장면 쌓아가는 느낌에 가까워요.” 우도환은 여전히 다음 장르와 다음 얼굴을 고르는 중이다. 그가 선택해온 작품 목록은 언젠가 한 배우가 어떤 속도로, 어떤 몸과 마음으로 성장해왔는지 보여주는 한 편의 긴 영화가 될 것이다. 강병진 영화 저널리스트
몸이 부서져도 멈추지 않을 여자, 서은수

서은수가 연기한 오예진은 신임 수사관이다. ‘미스 오’로 불리며 남성 수사관들에게 커피를 타주고 사무실을 청소하던 그녀는 장건영(정우성) 검사에게 발탁되면서 ‘수사관’이란 직함을 되찾는다. 이때 그녀의 숨겨진 능력도 함께 드러난다. 태권도장을 운영했던 아버지 덕에 길러진 뛰어난 싸움 실력부터 남자에게 뒤지지 않는 강인한 체력, 어떻게든 범죄자를 놓치지 않는 근성, 게다가 사법 고시 1차를 패스한 경력까지. 드라마 <황금빛 내 인생>과 <리갈하이>에서 보여준, 쉽게 좌절하지 않는 청춘의 얼굴로 서은수를 기억하고 있다면 오예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낭만닥터 김사부>와 <수사반장 1958>의 단아하고 차분한 이미지를 먼저 떠올린다면, 히피 펌을 한 그녀가 부산 사투리를 쏟아내는 모습에서 의외의 재미를 경험할 것이다. 본인도 그럴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정말 잘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저도 부산에서 나고 자랐거든요. 지금도 집에 가자마자 사투리부터 튀어나오죠. 사회 초년생으로서 서울에 올라와 무작정 부딪혀본 경험도 있었고, ‘세상을 아름답게 보면 안 됩니까?’라고 말하는 예진이처럼 긍정적인 성격도 있고요.” 그녀는 그렇게 자신과 겹쳐놓고 보게 된 오예진을 “도화지 같은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서은수는 대본에서 느낀 자신감을 손 편지로 풀어 썼다. 시대의 제약 속에서도 대한민국 최초의 여검사를 꿈꿀 만큼 패기가 넘치지만, 현실에 순응하며 잠시 멈춰 살아가는 사람, 장건영 검사를 만나 다시 꿈을 품게 되는 열혈 수사관, 하지만 권력에 부딪히며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깨닫는 청춘. 편지에는 이런 문장이 빽빽이 적혀 있었다. 우민호 감독은 “잘 봤네”라는 짧은 말로 답했고, 첫 미팅 자리에서 캐스팅이 결정됐다. “집으로 가는 길에 환호성을 질렀죠.(웃음)” 서은수는 “우민호 감독님의 <내부자들> <마약왕> <남산의 부장들>을 모두 ‘N차 관람’할 정도로 엄청난 팬이었다”고 말했다. 배우로서 인상적인 건 역시 “어떤 작품이든 눈에 안 띄는 캐릭터가 하나도 없다”는 거였다. 현장에서도 우민호 감독은 의외의 아이디어를 던졌고 서은수는 그것들을 오예진에게 하나씩 채워갔다. 그렇게 만들어진 오예진은 처음보다 더 뜨거운 캐릭터가 되었다. 감독이 가장 많이 강조한 건 ‘에지’였다. “그 시대에 남자들로 가득한 세계에서 살아남은 여성이라면 그 사람만이 가진 ‘에지’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죠.” 서은수는 유튜브를 통해 1970년대 여성들을 인터뷰한 영상부터 찾아봤다. ‘생각보다 쑥스러움이 적고 생존 본능이 더 강하게 보였던’ 그 시대 여성의 공기를 따라가본 서은수는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버티고 있었을 법한 억척스러운 여성을 떠올렸다. 그녀의 상상을 도와준 건 실제로 그 시절을 살아낸 할머니였다. 그때 일을 들려달라고 부탁하는 한편, 할머니가 읽어준 대본의 톤을 참고해 1970년대 부산 사투리를 익혔다. 작품 속 오예진의 말투는 그렇게 연구한 것과 순발력이 더해진 결과물이다. “대본에 사투리 그대로 적혀 있어도, 상황에 따라 조금 다르게 리액션을 하는 게 입에 잘 붙더라고요. ‘막’ ‘아니’ ‘저~’ 이런 추임새도 제가 느끼는 대로 붙이곤 했어요.”
말투에 더해진 외형의 변화는 오예진의 ‘에지’를 완성했다. 처음 분장 팀이 준비한 오예진의 헤어스타일은 배우 본인에게도 익숙한 긴 생머리였다. 그러던 어느 날 우민호 감독이 한 장의 사진을 내밀었다. 얇은 로드로 빽빽하게 말린 히피 펌의 여성이 있었다. 서은수는 “과연 어울릴까” 걱정했지만, 테스트를 마치고 나서야 깨달았다. “단순히 헤어스타일이 아니라 이 캐릭터가 전혀 다른 인물이 되더라고요.” 촬영 기간 동안 분장 팀은 매일 2시간 가까이 서은수의 머리를 말았다. 배우에게는 그 시간이 ‘예진이로 변신하는 의식’ 같은 순간이었다. 히피 펌에 가죽 재킷, 나팔바지를 입고 현장에 서면, 그동안 ‘단아한 이미지’로 묶여 있던 얼굴에서 전혀 다른 온도의 기운이 끓어올랐다. 서은수는 오예진이 “뜨거운 화로 같은 여자”라고 말한다. 가야 하는 길이 용암으로 덮여 있어도 일단 들이받고 보는 사람. 몸이 부서져도, 팔다리가 잘려나가도 질주를 멈추지 않을 것 같은 친구. 그런 기질이 가장 또렷이 드러나는 장면이 용의자를 추적하기 위해 산길을 내달리는 시퀀스다. <마녀(魔女) Part2. The Other One(마녀 2)>(2022)에서 초인적인 힘을 가진 강화 군인 조현을 연기하며 합을 맞추는 액션을 경험했지만, <메이드 인 코리아>의 액션은 그와는 전혀 다른 날것의 연기를 요구했다. “<마녀 2>에서는 손만 뻗어도 상대가 날아갔죠.(웃음) 이번에는 머리를 잡고 늘어지면서 어디 하나 부러져도 모를 정도의 열정으로 버티는 싸움이었어요. 그래서 오히려 더 재미있었고요.” 대본에는 ‘예진이 달려가서 발 차기 한다’ 정도의 지문만 적혀 있었다. 그런데 현장에서 우민호 감독은 “우사인 볼트처럼, 지금 네가 톰 크루즈라고 여기고 질주해봐”라고 주문했다. 그 말에 밀려 산길을 미친 듯이 내달리며 상대를 덮치는 동작, 숨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호흡, 몸싸움의 리듬이 하나씩 생겼다. “예진이는 누가 자신을 건드렸을 때 눈이 돌아버리는 사람이거든요. 남들보다 몇 배로 돌아버리는 거죠. 패기가 광기로 변할 수 있다는 게 예진이의 매력이에요.” 컷이 떨어지자 감독의 첫마디는 “야, 예진아. 너 1호 여검사 할 수 있겠다!”였다. 함께한 정우성도 응원을 보탰다. “혼자 액션을 찍고 있으면 위에서 뛰어 내려오셔서 ‘방금 너무 잘했어, 근데 이렇게 하면 더 웃길 것 같아’라고 얘기해주세요. 후배와 같이 만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느껴져서 늘 감사했어요.” 오예진의 질주는 그렇게 감독과 동료가 건넨 아이디어와 격려, 운동으로 다진 체력이 더해져 완성됐다.
<마녀 2>에 이어 <메이드 인 코리아>를 본다면, 서은수가 배우로서 품고 있는 갈망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전의 그녀는 주로 사랑받기보다는 먼저 사랑해서 마음 아파하는 여성을 연기했다. 그들을 통해 대중의 호감을 얻은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마음 한쪽에는 ‘나에게 다른 얼굴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마녀 2>의 조현은 그런 욕구를 마음껏 해소한 작품이다. 전자레인지 하나 없는 방에서 닭 가슴살을 세면대에 중탕해 4개월 동안 먹고, 푸시업을 하다 못해 제주도 헬스장을 등록해 그곳에서 살다시피 하며 몸을 만들었던 시간. 영어 대사를 밤새 중얼거리다가 잠들고, 촬영이 끝나자 동료들이 ‘전역 파티’를 열어준 기억이 함께 남아 있다. 관객으로서 좋아하는 작품 스타일을 묻자 역시 ‘액션’이라고 말했다. “<F1 더 무비>처럼 도파민이 터지는 영화를 좋아해요. 배우로서 액션 연기에 대한 욕심도 정말 많고요. 연기하다가 몸이 다친 줄도 모르고 액션에 몰두했을 때의 희열과 뿌듯함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액션 영화를 또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동시에 해마다 다시 꺼내 보는 영화 목록에는 <조 블랙의 사랑> <클로저> <노트북> <패밀리 맨> 같은 영화가 나란히 놓인다. 볼 때마다 다른 감정을 발견하게 되는 러브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배우나 관객으로서 서은수가 바라보는 세계는 그처럼 넓은 편이다. “연기를 정말 오래 하고 싶거든요. 그래서 기회가 있으면 다른 색깔을 보여드리려고요. 저는 멀리 보고 있어요. 앞으로 연기를 통해 보여줄 건 정말 많아요.”
데뷔 10주년을 앞둔 지금, 연기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스물세 살이던 지난 2016년 드라마 <질투의 화신> 현장에서 처음 카메라 앞에 섰을 때를, 그녀는 ‘공포의 현장’으로 기억한다. 카메라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고,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대사는 토씨 하나 틀리면 안 된다고 믿었고, 그러다 보니 몸과 마음이 동시에 굳어버렸다. 지금은 ‘여유’를 연습하는 중이다. “예전에는 ‘틀리면 안 돼’였다면, 지금은 ‘후회하지 말자’는 감정에 더 가까워요. 촬영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후회가 남는 게 너무 싫거든요.” 그래서 요즘 그녀가 현장에서 가장 자주 꺼내 쓰는 말은 “한 번만 다시 갈게요”다. 한 번 더 못 갈 정도로 최선을 다해보자는 마음으로, 매 장면과 매 테이크를 쌓아간다. 그 바탕에는 생활 전체를 지탱하는 루틴이 있다. “평소 아침마다 5km씩 달려요. 하루를 운동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지만, 운동을 끝냈을 때의 기쁨이 그만큼 크죠.” 새해 소망을 묻자 돌아온 대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현재 촬영 중인 <메이드 인 코리아> 시즌 2를 잘 마무리하고, 새 필모그래피가 많은 사랑을 받는 것. 지금 함께하고 있는 ‘최고의 사람들’과 또 다른 작품에서 다시 만날 기회가 주어진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며,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건강했으면 하는 것이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하프 마라톤에도 도전해보고 싶다는 소망도 있다. 러닝으로 하루를 여는 루틴처럼 서은수는 앞으로도 꾸준하고 일정한 속도로 연기를 쌓아갈 것이다. 강병진 영화 저널리스트
말하지 않아도, 정성일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특유의 묵직한 분위기가 있다. 일부러 힘을 과시하지 않아도, 소란 떨며 움직이지 않아도 모든 게 그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실세란 그런 것이라는 듯이. 배우 정성일이 연기하는 <메이드 인 코리아>의 대통령 경호실장 천석중은 그런 카리스마를 갖춘 인물이다. 사람 대신 돈을 믿는 타고난 전략가. 요란 떨지 않아도 주변이 그를 향해 움직인다. “대본 자체가 매우 흥미로웠어요. 내용을 풀어가는 방식이나 캐릭터가 저마다 입체감 있게 그려지는 면모나. 감독님, 배우들까지 좋으니 합류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죠.”
그 가운데서도 천석중만의 매력은 뭘까. “자신의 모든 걸 드러내지 않지만, 속으로는 누구보다 빠르게 머리가 돌아가고 정세에 대한 판단 또한 빨라요. 그는 절대로 일인자의 자리를 노리지 않아요. 철저하게 이인자의 자리를 지키죠. 하지만 그라고 왜 일인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 없겠어요. 그런 마음을 악착같이 드러내지 않을 뿐이죠. 그러다 보니 사람을 믿지 않아요. 철저히 계산적이죠.” 겉으로는 무표정하지만, 끓어오르는 욕망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 칼을 갈고 있다가 상대가 방심한 틈에 뒤통수를 내리치는 무시무시한 인물. 연기하는 입장에서는 그런 여러 얼굴을 숨긴 인물을 만들어가는 맛이 있었을 것이다.
“‘나에겐 권력과 힘이 있어’라며 드러내놓고 표현하기보다는 그저 무던히 자신이 있는 자리에 앉아 있는 인물이 천석중이에요. 그가 뭘 더 하기보다는 주변에서 그의 아우라를 자연히 만들어준달까요. 강압적으로 뭔가를 해 보이려고 할 필요가 없죠. 그냥 주변 인물을 한 명 한 명 천천히 바라보고 대하는 식이거든요. 그 가운데 만들어지는 아우라를 표현하려고 노력했어요.” 자체 발산하는 연기가 아니라 주변 인물을 통해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를 만든다. 말이야 쉽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액션보다 리액션의 연기. 상대 배우의 연기를 집중해서 보고 듣고 그것을 잘 받아안아야만 가능한 연기랄까. “상대방의 에너지와 연기를 ‘받는다’는 게 아주 중요해요. 저 또한 가능하다면 연기할 때 상대 배우가 내게 주는 것들을 잘 받아안으려고 했어요. 내가 뭔가를 더 하는 것보다는 주변 배우, 인물들이 만들어주는 석중의 자리, 석중의 분위기가 있으니까요. 그것을 감지하고 조심스럽게 제가 맡은 역할을 수행했죠.” 그런 만큼 촬영 현장에서 보이고 들리는 것에 좀 더 열린 자세로 임하려고 시도했을 것이다. 현장의 유동성과 즉흥성이 주는 재미를 받아들이면서 말이다.
한편 느릿하고 말수 적은 천석중이 대구 사투리를 쓰게 된 데는 정성일의 적극적인 제안이 있었다. “감독님께서 첫 미팅 자리에서 제안하셨어요. 그간 수트 입는 역할을 많이 해서 그런지 기존 이미지와 어떻게든 달리 가보고 싶다고 하시면서 사투리를 써보면 어떨까 하시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이번 드라마에서도, 오늘도 역시 깔끔하고 단정하고 멀끔한 수트 차림이다. “당시 권력을 잡은 사람들 가운데 경상도 사람이 많았다는 데 착안해 대구 사투리를 써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침 고향이 대구이기도 하고, 감독님께서 흔쾌히 좋다고 해주셨죠. 사투리는 잘못 쓰면 가볍거나 공격적으로 느껴질 수 있기에 단어 선택이나 어미 처리에 좀 더 신경을 썼어요. 그런데 서울에 산 지 꽤 되다 보니 사투리를 많이 잊어버렸더라고요. 고향 친구들과 통화하며 도움을 많이 받았죠. 친구들이 엄청나게 뿌듯해하더군요.(웃음)”
작품마다 선택 이유나 동기는 다르지만 그간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언제나 선택의 영순위는 재밌는 이야기였다. “‘대본 첫 장을 넘겼을 때 끝까지 읽어 내려갈 수 있는지’가 중요해요. 내가 맡게 될 역할과 상관없이 이야기 자체가 재밌어야 저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죠. 역할로 보면 뻔한 것보다는 짧게 나오더라도 입체적인 인물이거나 개성이 뚜렷할 때 마음이 가요. 이번 작품도 그런 이유로 선택했고요.”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영화와 드라마를 종횡무진하는 그는 틈틈이 무대에도 선다. “무대, 공연은 제 연기의 베이스예요. 지금도 무대에 오르고, 공연을 보러 다니며 에너지를 얻고, 채우고, 공부하고, 숨을 고르죠. NG랄 게 없는 라이브, 호흡을 길게 가져가며 집중력을 유지하는 게 공연의 재미예요. 반면 영화나 드라마 현장은 상황과 변수에 따라 순발력을 발휘하고 순간 집중도를 높이는 작업이죠. 그게 또 매력이고요. 이번 현장도 그런 순간을 만들어가는 즐거움이 컸어요.” 정성일의 내년은 더 기대된다. 세세히 말할 순 없지만 작업해둔 작품을 하나씩 착실하게 공개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작품마다 다르게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할 거라는 전언. “현재 <메이드 인 코리아> 시즌 2 촬영 외에 다른 계획은 없습니다. 무탈하고 건강하게 한 해를 잘 마무리하자는 마음뿐이에요.” 정지혜 영화 저널리스트
무섭게 지펴지는 용기, 노재원

머리칼 한 올까지 흘러내림 없이 뒤로 바짝 넘긴 헤어스타일, 깔끔하고 멋스러운 수트에 홀스터 착용까지. <메이드 인 코리아>에서 그가 맡은 중앙정보부의 표 과장, 표학수의 인상적인 등장을 묘사해봤다. 그간 배우 노재원이 극 중에서 보여준 모습과 많이 다른 차림이라 저절로 눈길이 간다. “머리칼을 완전히 뒤로 붙여보자고 제안했어요. 사실 저는 이마도 넓고, 구레나룻 쪽을 다 드러내면 어딘가 낯설게 보일 수도 있는데, 그런 것 상관없이 이런 외양이 표학수라는 캐릭터를 보여줄 수 있다고 여겼죠.” 표학수는 백기태(현빈)와 중앙정보부 동기이자 그를 향한 묘한 견제의 눈빛과 태도를 보이는 인물이다. 특히 중앙정보부 국장 황국평(박용우)과 대통령 경호실장 천석중(정성일)을 잇는 중요한 가교 역할로 극의 긴장감을 끌어올린다. 그가 품고 있는 성공을 향한 야망과 욕망 역시 감지되지만, 좀처럼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잠행하고 자기만의 때를 기다리는 듯하다.
“우민호 감독님과 첫 미팅 자리였어요. 전에 참여한 드라마를 잘 보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2~3분 정도 짧은 인사를 나눴을까. 곧바로 ‘같이해보자. 현빈 배우와 둘이 있는 모습이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하셨죠. 제가 맡게 될 역할도 그 자리에서 바로 들었지만, 무엇보다 감독님과 함께한다는 기쁨이 가장 컸어요.”
노재원은 자신이 맡은 인물에 집중하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베테랑 선배 배우들과 함께하는 현장인 만큼 어깨너머로 보고 배울 점이 정말 많았어요. 하지만 그런 마음가짐으로 현장에 가면 연기가 잘 안되더라고요. 선배들과 사담을 나누고 관계가 만들어지면 맡은 역할로만 상대 배우를 바라보는 게 어려워지니까요. 저 역시 극 중 표학수로서 온전히 서 있을 수 없으니 패기 있게 연기하기 위해서라도 말수를 줄이고 좀 더 인물에 집중하려 애썼어요.” 배우로서 마음을 다잡는 진중한 과정이었다고나 할까. “그러면서 속으로 혼자 그랬죠. ‘나는 이런저런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고, 나름대로 산전수전도 겪었으니 연기에 임할 땐 스스로에게 지지 않겠다’고요. 때때로 현장이 낯설게 느껴지고, 괜히 긴장되고 무서우니까, 마음 상태를 달리 가져가기 위한 저만의 방법이었죠.”
그렇게 노재원은 흔들림 없이 자기만의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현장에 단단히 뿌리내렸고, 연기의 밀도는 높아졌다. 그와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현장의 우연성과 즉흥성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려 했다. 특히 표학수는 대본상 모습보다 리허설을 거치고 동선을 확인하고 배우들과 만나며 달라진 지점이 더 많았다. “처음 대본을 봤을 땐 표학수가 흠결도 없고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묵묵히 제 삶을 꾸려가는 현명하고 총명한 사람이라고 느꼈어요. 그런데 막상 촬영하며 만들어가다 보니 생각보다 그가 욕심을 드러내는 신이 많더라고요. 웃기면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이었죠. 그런 설정 덕분에 캐릭터를 좀 더 입체적으로 만들 수 있었어요. 감독님께서도 현장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많이 제안해주셨는데 그런 즉흥성을 받아들이는 작업이 너무 즐겁더라고요.” 한 예로 노재원이 첫 촬영 때의 일화를 들려줬다. “너무 긴장됐어요. ‘컷’ 하고 감독님께서 오시더니 ‘나쁘지 않다. 그런데 표학수만의 뭐 없나? 같이 만들어보자’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애드리브를 해봤더니 아주 좋아하시며 ‘이거다!’라고 말씀해주셨죠. 대사가 없는 일종의 리액션 장면이라 흘려보낼 수도 있는 컷이었는데, 저만의 뭔가를 만들어주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캐릭터에 대한 감독님의 애정이 느껴졌죠. 그날부터 뭐든 해도 되겠구나 싶어 마음이 놓였어요.” 배우가 좀 더 편안하게 새로운 것을 시도해볼 수 있게끔 제안하고, 배우의 시도가 구체적인 그림이 되게 하는 현장. 그것이 배우의 긴장된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동료의식과 일할 맛을 만들어냈다.
그런 현장의 경험을 이어받아 노재원은 연말연시 <메이드 인 코리아> 시즌 2 촬영에 집중할 계획이다. 그러면서 배우로서 바라는 건 단 하나, ‘온 진심을 다해 모든 걸 쏟아부을 수 있는 인물과 만나는 것’. “맡은 캐릭터만 생각하며 살고 있어요. 제게는 연기가 전부니까요. 배우로서 여러모로 변화하는 시기이니 이때를 잘 보내면 또 다른 깊이 있는 연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다음 작품도 빨리 만나고 싶어요. 당장 내일이라도요!(웃음)” 정지혜 영화 저널리스트
최대한 덜어내고 단순해지는 시간, 박용우

박용우에게 2025년은 작품으로 꽉 찬 해였다. 그동안 차곡차곡 촬영해둔 작품이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공개되며 한 해를 빼곡히 채웠기 때문이다. 디즈니+ 시리즈 <메스를 든 사냥꾼>에 이어 드라마 <은수 좋은 날>이 공개됐고, 영화 <넌센스>가 개봉했다. 그리고 <메이드 인 코리아>다. 물론 치밀하게 계획한 결과는 아니다. “계획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죠.” 그가 진짜 바란 건 조금 다른 지점이다. “작품을 많이 한다기보다 이 배우는 다양한 역할을 한다는 느낌이 났으면 좋겠어요. 조금 다르게 말하면, 이 사람은 계속 나와도 질리지 않는다는 느낌이었으면 하죠.” 그의 바람처럼 지난 1년 동안 박용우가 연기한 캐릭터는 질릴 새가 없었다. 친절한 세탁소 사장으로 가장해 20년 동안 잠복한 사이코패스 살인마(<메스를 든 사냥꾼>)부터 가족의 재결합을 위해 비리를 저지르는 경찰(<은수 좋은 날>), 마음이 아픈 사람들의 상처를 후벼 파는 것인지, 보듬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웃음 치료사(<넌센스>)까지. 하나의 카테고리로 규정할 수 없는 캐릭터를 이끌어왔으니 말이다. 그리고 <메이드 인 코리아>에서 그는 고문실의 비명과 함께 등장한다.
박용우가 연기한 황국평은 중앙정보부 부산지부 국장이란 지위를 이용해 암흑가로부터 뒷돈을 거둬들인다. 다만 그의 목표가 돈은 아니다. 비밀 금고에 쌓인 돈은 누군가에게 상납된다. 그렇게 쌓인 돈은 더 위에 있는 누군가에게 또 상납될 것이다. 상납의 대가로 그가 얻는 건 당연히 출세다. 더 높은 지위로의 출세, 더 많은 돈, 더 많은 상납, 새로운 권력. 그렇게 쌓인 오만함. 박용우는 황국평이 “단적으로 보면 오만하지만, 스스로는 자신감으로 가득한 것처럼 보이려고 애쓰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남한테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많이 신경 쓰면서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이죠. 그러다가도 정말 잘 보여야 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무너져버리는 인물이고요.” 우민호 감독은 인물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만들기 위해 여러 장치를 얹었다. 황국평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부하 직원에게 일부러 보여주려는 듯 턴테이블에 클래식 LP를 올리고, 위스키를 따르고, 시가를 피운다. 방금 전까지 고문실에서 손에 피를 묻혔던 상황을 떠올릴 때, 필요 이상으로 고급스러운 취향이다. “과시하려는 거죠. 나는 매우 고급스러운 사람이야. 동시에 어떤 상황에서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고 빈구석도 없는 것처럼 보이려고 일부러 하는 행동이요.” 여기에 황국평을 완성하는 또 하나의 설정이 더해졌다. <메이드 인 코리아>에서 황국평은 수시로 머리를 매만진다. 편한 자리에서는 거울을 보며 만지고, 초조한 상황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머리에 손을 올린다. 그러면서 “가발 쓴 거 아니냐?”는 놀림에 화를 억누른다. 가발이 맞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이다. “대본에 없던 설정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감독님이 ‘가발’을 제안했죠. 사실 저는 처음 대본을 읽었을 때 고민했거든요. 야심도 있고 에너지도 넘치고 출세욕이 강한 인물인 건 알겠는데, 어떻게 하면 더 다채롭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때 감독님이 가발을 설정하면서 표현 방식이 많아진 거죠. 언제나 헤어스타일을 신경 쓸 수밖에 없다는 게,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콤플렉스를 지녔다는 의미도 될 수 있으니까요.” 그의 가발은 무채색 수트와 셔츠를 맞춰 입은 남자들 사이에서 황국평을 한 뼘 다르게 보이게 만드는 한 수가 됐다. 그렇게 만들어진 황국평은 <메이드 인 코리아>에서 중심인물인 백기태(현빈)에게 결정적 의문을 갖게 만든다. 나의 상사도 납작 엎드려서 모시는 저 사람은 누구인가. 나의 상사가 저 사람에게 갖다 바친 돈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황국평에게 영감을 받은 백기태의 선택은 이 이야기의 가장 핵심적인 사건으로 확장된다. 말하자면 황국평은 권력과 위계가 유지될 수 있었던 유구한 방식,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박용우가 우민호 감독의 선택을 받은 배경에는 오래된 이야기가 하나 있다. 두 사람은 같은 대학 연극영화과 선후배 사이다. 아직 구체적인 목표는 없던 시절. 박용우는 연기가 아닌 연출을 위주로 공부했고, 우민호 감독 또한 명확한 진로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박용우는 우민호 감독을 배우로 캐스팅해 단편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졸업 후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두 사람은 재회했다. 당시 <하얼빈>을 준비하던 우민호 감독은 이후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기회가 되면 같이해보자”는 말을 남겼다. 당연히 박용우는 “같이하면 너무 좋겠다”고 답했다. 그리고 1년 후 우민호 감독이 <메이드 인 코리아>의 황국평을 제안한 것이다. “제 작품 중에 <카센타>(2019)라는 영화가 있어요. 그 작품에 나온 제 모습이 감독님에게 인상적이었나 봐요. 그런데 그런 걸 떠나서 학창 시절에 만났던 선배와 함께 각각 감독과 배우의 역할로 작품을 같이 만드는 게 특별한 느낌이었어요.” 그렇게 처음 경험한 우민호 감독의 현장에서 박용우는 오랜만에 ‘현장성의 재미’를 느꼈다. 그가 본 우민호 감독은 현장에서 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동선과 설정을 과감히 바꾸는 스타일의 연출자였다. “제가 신인이었을 때는 그런 현장이 종종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예산과 스케줄이 빡빡하기 때문에 현장에서 변화를 만드는 게 쉽지 않죠. 그런데 우민호 감독님은 그런 변주에 아주 자유롭더라고요. 배우 입장에서는 오히려 부담이 될 수도 있지만, 이제는 저도 그런 방식의 작업을 즐길 만큼 여유가 있어서 더 흥미로웠어요.”
<메이드 인 코리아> 현장에서 경험한 재미는 현재 그가 찾아가는 연기 방향과도 맞닿아 있다. 많은 것을 미리 계산하기보다는, 현장에서 경험한 느낌을 따르는 것이다. “어떤 일이든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했다가, 시간이 지나면 생각과 준비가 점점 많아지면서 복잡해지는 순간이 오잖아요. 저는 지금 다시 그걸 덜어내고 단순해지려는 과정인 것 같아요.” 물론 캐릭터의 전사를 고민하고, 감독과 충분히 대화를 나누는 과정은 여전히 중요하다. 다만 카메라 앞에 선 순간만큼은 “정말로 그 상황을 처음 겪는 사람”에 가까워지고 싶다. “대사도 외웠고, 설정도 잘 알지만, 현장에서는 최대한 ‘모르는 상태’로 반응하려고 해요. 그게 참 어렵지만, 결국 기술이기도 하고요. 누군가에게 총을 쏘는 장면을 연기할 때도 그 순간 느껴지는 대로 목을 조를 수도 있고, 주먹을 쥘 수도 있고, 그냥 바라보기만 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미리 짜둔 그림보다 현장에서 발견되는 작은 틈, 계획에 없던 호흡의 흔들림이 있을 때 그는 자신의 연기가 조금 더 본질에 가까워지는 경험을 하고 있다.
<메이드 인 코리아>의 황국평까지, 지난 1년 동안 박용우가 보여준 캐릭터를 한마디로 분류하면 ‘악역’일 것이다. 하지만 박용우가 연기한 악한 인물들은 경계를 넘나드는 경우가 많았다. <메스를 든 사냥꾼>의 윤조균은 20년 동안 잠복해온 사이코패스 살인마지만, 딸과의 관계에서 흔들리는 인물이다. <은수 좋은 날>의 비리 경찰 장태구에게는 가족에 대한 애착이 있고, <넌센스>에서 보험 사기범으로 의심받는 강순규는 진심 어린 태도로 현실에 억눌린 사람들의 숨통을 틔워주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과거 한국 영화계가 그에게 요구한 악인들 또한 경계에 서 있었다. <혈의 누>(2005)에서 연쇄살인 사건의 중심에 서 있던 김인권에게는 누구나 납득할 만한 아픔이 있었고, <핸드폰>(2009)의 정이규에게도 그의 내면에는 짙은 외로움이 크게 자리했다. 우민호 감독이 그의 연기를 흥미롭게 봤다는 <카센타>에서도 박용우가 연기한 김재구는 구조적인 가난을 버리려다 점점 수렁에 빠지는 일종의 생계형 범죄자였다. 그리고 <메이드 인 코리아>의 황국평 또한 그가 자신보다 위에 있는 사람들 앞에서 굽신거리는 모습을 보면, 나름의 사연이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인물이다. 박용우는 “이제 내가 맡는 모든 배역에서 연민이 느껴질 것 같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이성적으로 ‘이 캐릭터에 관객이 연민을 느끼게 해야 돼’라는 식으로 표현했어요. 그랬다면 지금의 저는 모든 사람이 멋있는 부분과 짠하고 지질한 부분을 다 갖고 있다고 여기죠. 연기할 때는 그런 모습을 70% 보여주느냐, 20%만 드러내느냐를 놓고 고민해요. 그렇게 저만 표현할 수 있는 방식으로 캐릭터를 풍성하게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물론 뻔하게 보이지 않으려는 건 모든 배우의 공통된 소망이자 과제다. 박용우는 “다만 그 방법이 과거와 지금은 다르다”고 강조한다. “예전에는 미리 다 정해놓고 연기를 했어요. ‘여기서는 시선을 피해야지’ ‘여기서는 고개를 살짝만 돌려야지’ 같은 것들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뻔해질 것 같아서였죠.” 그때와 비교할 때, 지금은 현장에서 호흡하며 찾아가는 중이다. “감독님이 ‘그냥 계속 쳐다봤으면 좋겠다’고 하면, 예전 같으면 ‘그럼 너무 뻔해지지 않나?’를 먼저 생각했을 거예요. 지금은 그냥 쳐다보는 거죠. 대신 제가 쳐다보는 상대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숨을 어떻게 쉬는지에 따라 제 안에서 조금씩 다른 게 나와요. 그게 진짜 재밌어요.” 인공지능이 언젠가 배우를 대신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반복해서 등장하는 시대지만, 박용우는 적어도 그 작은 차이만큼은 “기계가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고 믿는다. 단순해지려는 연습을 멈추지 않는 이유 또한 그런 믿음에서 비롯된다. 박용우는 “직관적인 게 가장 본질적이고 다채롭다”고 말했다. “이렇게 믿는 방향대로 간다면, 나중에는 관객이 ‘저 배우는 대사 안 하고 가만있어도 사연이 느껴지고 연기가 되는구나’라고 여길 정도가 됐으면 좋겠어요.” 그의 바람 섞인 말에 “최근에 본 작품에서 그렇게 느낄 수 있는 장면이 많았다”고 답했다. 박용우는 손사래를 쳤다. “더 잘해야 해요. 아직 멀었어요.” 강병진 영화 저널리스트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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