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노동, 돌고 도는 돌봄
어화둥둥 사랑받던 내가 성장해 독립하고, 점차 누군가를 돌보는 처지가 되고 있다. 사랑의 노동에 권력이 얽히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좋은 딸 역할을 연기했지만 거기에는 내 진심이 담겨 있지 않았고, 대신 내 양심은 담겨 있었다.”
소설가이자 문화 비평가 린 틸먼(Lynne Tillman)의 책 <어머니를 돌보다>를 읽다 가슴에 내려 꽂힌 문장이다. 이 책은 작가가 병든 어머니를 11년간 돌본 경험을 직설적으로 회고한다. 어머니의 ‘밑(작가의 표현)’과 유방을 닦고, 장례를 치르며 “짐이 떠났다”고, “애도 대신 피로가 남았다”고 썼다.
나의 어머니도 나의 할머니, 그러니까 시어머니의 말년을 보살폈다. 동네에선 우리 부모님을 두고 세상 효자와 효부라고 치켜세웠다. 부모님은 한 번도 다 큰 딸에게 돌봄의 노동을 부탁하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척 외면했는지 모른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가족의 돌봄은 국가의 강제적 격리로 인해 지속되지 못했고, 요양원은 제한된 시간에만 마스크를 쓰고 병문안이 가능했다. 할머니가 평안히 가셨기를 마음으로 바랄 뿐이다. 할머니는 일하는 부모님을 대신해 나를 돌봤다. 우린 시기만 엇갈렸지 서로를 돌본 거다.
할머니가 떠나고 나도 독립하면서 어머니의 일상은 좀 편해졌을까. 스무 해 넘게 따로 살면서 간간이 안부를 전하는 정도라 정확히 알 수 없다. 어머니는 언제나 “괜찮다”고 하시니까. 나는 가끔 여행을 제안하며 ‘좋은 딸 역할을 연기’한다. 동네 사람들과 함께 가는 패키지 여행 말고 1박 2일이라도 딸과 떠났으면 하는, 어머니가 넌지시 건네는 바람을 외면할 수 없어서다. 몇 년 전부터 1년에 한 번은 역할극을 이행하려고 한다. 부모님이 70대에 접어들면서 시간의 야속함에 조급해졌고, 마흔이나 돼서 자식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나 자책감이 들어서다. 게다가 나는 따로 돌봐야 할 자녀도 없다는, 이상적이지만 부모님에겐 씁쓸한 조건도 갖고 있다.

어머니와 단둘이 떠난 첫 여행은 강원도 정선에 자리한 파크로쉬였다. 가리왕산에 자리 잡은 리조트로 주변에 가게도 몇 없다. 그곳에서 마련한 요가 클래스를 들으며 노천탕에서 몸을 담그고 피로를 푸는 힐링 여행을 계획했다. 어머니는 정적인 그곳보다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탑승한 케이블카와 집라인을 훨씬 즐거워했다. 그때 어머니가 ‘탈것’을 무척 좋아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순간적으로 낯설었는데, 그건 어머니가 아니라 스릴을 즐기는 한 여성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전에 한 여성 단체가 주최하는 ‘인터뷰 방법론’을 수강했는데, 가족을 인터뷰하고 싶어서 신청했다는 대학원생이 기억난다. 그녀는 어머니의 삶을 기록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라고 했다. 어떤 이야기를 완성했을까. 전보다 이해하게 된 어머니는 더 진한 핏줄로 그려졌을까, 온전한 객체로 서술됐을까.
이런 경험은 흔치 않다. 비혼주의자인 50대 남자 선배는 “새삼 엄마에게 적응 중”이라고 말했다. 격의 없는 그는 가족 이야기도 곧잘 했는데 최근 모자가 살림을 합치면서 돌봄의 주체가 바뀌었음을 실감한다고 했다. “적어도 우리가 친구처럼 지낼 줄 알았는데 말이야.” 이제 막 돌봄의 세계에 입성한 그는 당황스러워 보였다. “어느 날엔 엄마가 아이처럼 조르시더군. 우리 엄마가 이제야 이기적인 주장을 한번 해보는구나, 그럴 땐 기쁘다가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 나는 먼 이야기처럼 건성으로 들었다. 언젠가 닥칠 돌봄의 역할을 애써 외면하면서 말이다.
최근 어머니와 동남아시아의 리조트를 다녀왔다. 당시 감기로 골골댄 나는 거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어머니는 풀 빌라의 수영장에서 아쿠아로빅을 하고 룸서비스로 시킨 정찬을 사진 찍으며 즐거워했다. 솔직히 내가 함께 돌아다니거나 대화할 기운이 없었기에 ‘즐거우시겠지’ 자체적으로 결론을 내린 걸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딸이 지불한 가격에 상응하는 기분을 누리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제스처로 더 밝게 웃어 보이는 듯했다. 이것만 봐도 나는 여전히 어머니의 돌봄을 받는 40대 딸이다.

언젠가 이 관계가 전복될 거다. 돌봄은 순환 구조니까. 제59회 백상예술대상 연극 부문 후보에 오른 연극 <정희정>에는 두 명의 평범한 여성 정희와 희정이 등장한다. 작품은 양육하던 자녀가 독립하면, 생계를 위해 타인을 돌보다가, 늙어서 자녀 혹은 노동자에게 돌봄을 받는 ‘순환’을 그린다. 여기에서 자유로운 이가 과연 있을까. 정치학자 조안 C. 트론토(Joan C. Tronto)는 <돌봄민주주의>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생 전체를 보면 인간은 타인의 돌봄에 의존해 살아야 하는 상호 의존적인 존재”라고 말한다.
그의 명성을 빌리지 않더라도 아는 내용이다. 다만 앞서 언급한 린 틸먼의 문장처럼, 나도 양심에 의해 딸 노릇을 하지만 부담이 계속 커지는 돌봄을 상대에게 상처 주지 않고 해나갈지 모르겠다. 돌봄은 따뜻한 척하지만 권력관계가 쉽게 엉키기 쉬우니까. 사춘기에도 부모님께 고분고분하던(그런 척하던) 내가 언젠가부터 어머니의 조언에 “내가 알아서 할게요”라며 일축해버린다. 학비와 용돈을 받는 학생이 아니라 알아서 생계를 꾸리는 직장인이 된 후부터 그랬다. 내가 본격적인 돌봄 제공자가 되면 이 지루하고 피곤한 사랑의 노동에서 수직적 관계를 방어할 수 있을까.
돌봄이 ‘사랑의 수고’라는 선입견부터 버려야 한다. 돌봄을 가족의 도덕성에 의지해선 안 된다. 일본의 명철한 독설가이자 학자인 우에노 치즈코(Ueno Chizuko)는 저서 <돌봄의 사회학>에서 “좋은 돌봄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비가족적인 돌봄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한다. 국가와 시장, 제3의 영역(시민사회), 가족이 함께 분담하고 협력하는 ‘복지 다원 사회론’이 필요하다는 거다.
우리의 돌봄 세계는 어떠한가. 어머니가 할머니를 돌볼 때만 해도 그것은 가족의 의무와 책임이었고, 개인적인 비용을 들여 타인에게 요양 서비스를 요청했다. 이는 더 잘 모시지 못한다는 죄책감을 동반했다. 많은 이가 돌봄을 위탁할 때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돌봄 노동을 제공하는 이들은 보통 사회적 약자다. 트론토는 “한 집단의 권력을 보려면 그 집단이 누구에게 돌봄 노동을 맡기는지 보라”고 했다. 주로 저임금의 노동자, 여성이다.
저출생·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우리나라는 최근 ‘국민 돌봄 국가 책임제’가 이슈다. 국가가 독박 효도에서 가족을 구출해야 한다는 담론이 나오지만, 그것이 어떤 형태일지는 묘연하다. 정책 개선과 기술 발전이 도울 수도 있다. 생물학자이자 페미니즘 이론가 도나 J. 해러웨이(Donna J. Haraway)는 저서 <트러블과 함께하기>에서 인간은 비인간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생물학적 자녀를 낳아 가족을 확장하기보다 혈연을 넘어 동식물, 기계, 타인과 친족을 맺어 돌봄의 관계를 핏줄에서 지구상의 다른 존재로 확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AI 돌봄도 포함될 것이다. 복약 시간을 알려주고 “밥 먹었니?” 안부를 물으며 정서를 보듬을 로봇이나 인공지능 스피커를 떠올려본다. 지난 1월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에서 백 텀블링을 하고 빨래를 차곡차곡 개는 로봇을 봤으니, 내가 상상치 못할 휴머노이드 돌봄 서비스가 열릴 거다.
이런 이슈에는 인간만이 가능한 정서의 영역을 AI가 대체할 수 있느냐는 회의론이 꽤 있는데, 물론 공감한다. 하지만 돌봄을 개인의 시간과 신체, 정서로만 해결하는 건 가혹하다. 혹시 다가올 미래가 두려운 나의 이기적인 바람일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머니는 혀를 찰 것이다. “누가 누구를 돌본다고? 네 앞가림이나 해라.” 하긴, 나는 이 여성에게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많다. VK
- 피처 디렉터
- 김나랑
- 포토그래퍼
- 안나 그레베니티스(Anna Grevenitis)
추천기사
인기기사
지금 인기 있는 뷰티 기사
PEOPLE NOW
지금, 보그가 주목하는 인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