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의 배두나라는 행성 2

한국에서는 아무도 그 정체를 규정할 수 없었던 배두나라는 행성이 지금 할리우드에서 머나먼 시간 여행을 시작한다. 워쇼스키 감독의 SF 서사극 <클라우드 아틀라스>로 ‘경이로움 그 자체’라는 호평을 받고 있는 배두나를 LA 현지에서 만났다.

부드러운 퍼 베스트가 장착된 페미닌한 블랙 가죽 트렌치코트, 벨트, 가죽 부츠 모두 마이클 코어스(Michael Kors).

“10명의 배우가 40개가 넘는 캐릭터를 소화하죠. 아마 모르긴 몰라도 내년 아카데미에서 특수분장상이나 기술상은 우리 영화가 받을 거예요. 자궁 탱크에서 태어난 저는 처음엔 레스토랑에서 서버로 일하며 감정을 콘트롤 당해요. 그러다 처음으로 친절함을 보여준 순혈 인간 짐을 만나 사랑에 빠져요. 새로운 운명을 경험하면서 온몸이 사랑에 흠뻑 젖게 되지요.” 놀랍게도 손미 451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공기 인형>과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에서 배두나가 맡은 두 개의 캐릭터를 합친 모습과 유사하다. 어느 날 인간의 말을 배우며 인간을 사랑하게 된 사랑스러운 인형(<공기 인형>)과 혁명의 불씨를 품은 경직된 이상주의자(<복수는 나의 것>)의 결합이랄까. ‘반드시 배두나여야 한다”던 워쇼스키 감독의 천재적 안목에 혀를 내두를밖에.

내년 1월, 한국에도 개봉될 영화를 위해 워쇼스키와 공동 감독인 톰 티크베어는 벌써부터 한국 방문을 고대하고 있다. “그분들은 제가 혼자 이 큰 영화의 호스트가 되면 외로워할 거라고 걱정하세요. 한국 수입사가 초청하지 않더라도 날 위해 오겠다고 할 정도예요. 너무 감사하죠.” 배두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금방이라도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라나(그녀는 워쇼스키를 라나라고 부른다)가 어떤 사람인 줄 아세요? 그는 배우가 캐릭터를 혼자 감당하도록 두지 않았죠. 마지막 촬영 땐 우느라 컷도 외치지 못했어요. 내가 울면 그도 울고 있었어요.”

패널이 달린 가죽 재킷과 스커트는 알렉산더 왕(Alexander Wang), 뱀피 브라톱은 톰 포드(Tom Ford),펠트 페도라는 A.F 반더보스트(A.F Vandervorst).

나는 배두나와 있으면서 머릿속으로 ‘진심과 정직’ ‘예의와 배려’ ‘모험과 용기’같은 너무나 클래식한 단어들을 떠올렸다. 그건 영화 <코리아>에서 그녀가 연기한 ‘리분희’처럼 선천적으로 미니멀하고 담대한 성품을 지닌 사람의 성분이었다. 엄살과 과잉이 없는 사람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주변인들의 성품에도 영향을 미친다. 호기심과 보살핌이 깃든 순수한 눈빛이 주위를 눈밭처럼 환하게 정화시킨다고 할까.

좀체 흔들림이 없는 배두나지만, 저녁식사를 마치고 깜찍한 피아트500에 올라탈 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LA에 머무는 동안 이 차를 타고 스튜디오 미팅을 다닐 거예요. 내일 드림웍스 미팅 때 몰고 가면 정말 귀엽겠죠?” 그녀가 운전대에 앉아 의기양양하게 차의 지붕을 열어 보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날 밤 마치 미국 10대 아이들처럼 오픈카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비벌리힐스를 달렸다. 습기를 머금은 부드러운 바람이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 놓았다.

이튿날, 우리는 새벽부터 사막으로 향했다. 어제와는 달리 커다란 흑백 꽃무늬 숄에 빈티지 롱스커트를 입은 배두나는 영국의 멋쟁이 할머니 같은 무드를 풍겼다. “전 뭐든 예쁜 걸 좋아해요. 아무렇게나 입은 것 같아도 다 섬세하게 고른 것들이지요.” 차창밖으로 톰 크루즈가 다닌다는 사이언톨로지 교회 사인을 바라보며(유명인사들의 교회라고 쓰여 있다) 그녀가 무심하게 말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전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한 게 아니에요. 역사상 가장 버젯이 큰 독립영화에 출연한 거지요.” “그게 무슨 뜻이죠?” “이 영화는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 대자본이 들어간 게 아니에요. 워쇼스키와 톰이 자기 뜻을 관철해서 만든 거대한 독립영화죠. 워너 브라더스에서배급을 맡긴 했지만요.” 수시로 명성에서 자신을 분리시키는 태도는 배두나의 일관된 취향이다. 스스로도 유체이탈이라고 부르는 물리적 수양을 통해 그녀가 얻는 이득은 물론 자유로움이다. <공기 인형>으로 일본에서 몇 차례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난 이후에도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드라마 <공부의 신>을 찍거나, 베를린에서 3개월 동안 할리우드 영화를 촬영한 후엔 런던으로 가서 혼자 영어 공부를 한다거나.

톱으로 사용한 뷔스티에 드레스와 쇼트 장갑은 발렌시아가(Balenciaga), 블랙 가죽 스커트는 질 샌더(Jil Sander), 가죽 롱 부츠는 알렉산더 왕(Alexander Wang).

“저는 붕 뜨는 게 없어요. 또 이러다 흘러가겠지, 하고 생각하는 쪽이 편해요. 다행히 저는 운이 아주 좋은 편이죠. <플란다스의 개>만 해도 대기실에서 졸고 있는 저를 보고 봉준호 감독이 캐스팅한 거거든요. 교만하지 않게, 게으르지 않게 나를 놓아두면 언제든 올 일은 온다고 믿어요.” 사진가와 번갈아 운전대를 잡으면서 사막을 달리는 그녀와 커피와 담배와 음악을 나누며 함께 있자니, 사려 깊은 친구와 여행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소실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끝없이 펼쳐진 도로 옆 벌판엔 야자수와 선인장의 중간쯤 되는 식물이군데군데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저거, 꼭 브로콜리 같지 않아요?”라고 그녀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블랙 가죽 터틀넥톱은 발맹(Balmain), 가죽 팬츠는 왈드립(Waldrip), 청록색 실크 롱 드레스는 A.F반더보스트(A.F Vandervorst), 메시 싸이하이 부츠는 베르사체(Versace).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 <로스트 하이웨이> 같은 기분을 느끼며 로케이션 현장에 도착해서 해가 질 때까지 열 컷의 사진을 찍었다. 도로와 모텔, 수영장과 다이너를 두루 돌아 다니며. 블론드 가발을 쓰고 검은 옷을 입은 배두나는 에드워드 호크 그림 속의 여자 같기도 했고, 데이비드 린치 영화에 나오는 ‘미스터리한 여주인공’ 같기도 했다. 실제 몇 마리의 까마귀가 뜨겁게 가열된 허공을 푸드덕거리며 날아다녔다. 정수리에 직각으로 내리꽂히는 태양 아래서 배두나는 놀라운 참을성으로 촬영에 임했다. 신경증 환자처럼 미간을 찌푸리거나 어깨를 가볍게 움츠리는 미세한 포즈 하나에 허공에 면도날을 그은 듯한 예민함이 배어 나왔다. 마지막 컷을 찍을 땐 저 멀리 돌산으로 해가 지고 있어 다들 마음이 다급해졌다. 메이크업 트레일러까지 오고 갈 여유가 없었다. 두나는 사막 위에 솟은 커다란 ‘브로콜리’ 뒤에서 훌훌 옷을 벗어 던졌다. 사방이 뚫린 LA의 황량한 벌판 한가운데서 일순 배두나라는 하얀 생명체가 오로라처럼 밝게 빛났다.

<매트릭스>를 만든 거장 워쇼스키가, 메이저 스튜디오 워너브라더스가, 유수의 미국 언론이 호들갑을 떨며 호위하는 할리우드 플래닛이 검정 드레스를 갈아 입자 어느새 사위가 깜깜해졌다. LA 시내는 이미 밤의 장막이 드리워졌다. 우리는 도로변에 있는 흔한 미국식 다이너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았다. 테이블 옆 차도에서 차들이 전조등을 켜고 달렸다. 와인과 함께 서빙된 육즙이 흥건한 스테이크를 보자, 자연인 배두나는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이런 걸 어떻게 먹나요? 전 채식주의자예요.” 그리고 동시에 “우헤헤” 터지는 웃음 소리. “피 흘리는 스테이크를 보면 입 안에 침이 고인답니다.” 촬영장에서도 “가죽 옷은 빼주세요. 전, 동물을 사랑해요”라고 동물보호론자 흉내를 내다 이내 “전, 모피 너무 사랑해요”라며 반전의 미소로 키득거리는 배두나였다. 신념은 있지만 편견은 없는 배두나, 승부 근성은 있지만 승부욕은 없는 배두나, 그리하여 ‘공존의 기쁨’과 ‘고독의 능력’을 동시에 손에 쥔 이 낙천주의자 친구가 참 대견해 보였다.

금요일 저녁, 귀가를 서두르는 차들이 빠른 속도로 달리는 할리우드대로 옆에서 먼지와 함께 와인을 마시며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따뜻한 일본 라멘을 사주고 싶어 피카디리 서커스 역으로 박지성을 불러냈다 빅 스캔들이 터진 일(“하하, 정말 우산이 한 개였기 때문에 같이 썼을 뿐인데요.”), 지금도 엄마(연극배우 김화영)가 연극 무대에 서는 것을 보면 눈물이 난다는 얘기(“전 아직도 배우로서 엄마의 테크닉을 못 따라가요.”), 남동생이랑 따뜻한 라구나비치로 여행가고 싶다는 소망, 트위터는 체질에 안 맞는다는 하소연(“내 말이 여기저기 배달되는 게 너무 이상해요.”), 그리고 자신은 북두칠성이 지키는 행운아라는 자신감(“전 운이 나빠지는 일은 하질 않죠. 질투도 안 해요.”), 이기려고 애쓰지도 않지만 지지도 않는다는 그 독창적인 삶의 자생력에 대해.

“엄마가 그러셨죠. ‘넌 얼음과 불이 공존하는 아이야’라고. 전 일할 땐 열정적이지만, 그 외엔 차가워요. 영화도 그래요. 스무 살 때부터 스태프들이 고생하는 걸 봤어요. 한 가지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정말 아름다운 거잖아요.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내 필모그래피를 깨끗하게 하고 싶었어요. 한번도 잔꾀를 부린 적이 없어요. 여전히 상처도 받지만 크리에이티브는 구속 받아서는 안 되는 존귀한 영역이라는 신념은 변함없어요. 그렇게 내가 믿는 감독들을 따르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자동차 전조등에 반사되는 창날 같은 별빛의 공격을 받은 듯,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LA라는 도시와 잘 어울렸다. 그리고 할리우드의 환호가 들꽃같이 섬세하게 새겨놓은 감성의 무늬들을 하나하나 가슴에 새겨 넣듯 두나와 나는 새벽녘에 따뜻한 굿바이 포옹을 나눴다. 한국에서는 아무도 그 정체를 규정할 수 없었던 배두나라는 행성이 이곳에서 머나먼 비행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