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의 흑과 백

그저 들리는 목소리만이 단서였던 가수 정인이 새 앨범을 내고, 연인과 예능에 출연한다. 흑처럼 강렬했던 보컬의 색과 백지처럼 비어 있던 자연인의 삶이 적당히 포개진 지점을 찾은 채로.

의상은 마크 제이콥스.

한 소절의 목소리만으로 귀를 끄는 국내 여자 보컬은 여전히 희귀하다. 벌써 10년이 지났지만, 정인은 리쌍 1집 ‘러쉬’에서 피처링 보컬로 참여해 자신의 인장을 강하게 새겼다. 이름보단 목소리가 더 익숙했고, 그 목소리는 리쌍의 히트곡을 타고 흐를 때 더 익숙했다. 개성 또렷한 가수가 한 음악에서 피처링이라는 제한된 역할을 해내고 묘연히 사라지면 듣는 사람에겐 참 감질나는 일이다. 리쌍이 8집을 내기까지 그들 음악에 마침표를 찍는 목소리였고, 아쉽게 사라진 밴드 지 플라(G.fla)의 리드보컬이었던 정인이 세 번째 솔로앨범을 냈다.

2009년 가을에 나온 정인의 첫 번째 솔로앨범 제목은 <정인 from 안드로메다>였다. 가수 김C가 정인을 두고 ‘안드로메다에서 온 목소리’라고 표현한 데서 따온 것이다. 정인은 애초부터 노래를 ‘예쁘게’ ‘잘’ 부르는 데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아담한 체구에서 나오는 기이한 보컬은 이성으로 다듬어 정제해낸 것이 아니라 지닌 그대로 던지는 직구의 음색이었다. 소울 색 짙은 보컬을 구사하는 그녀가 지난해 여름 <나는 가수다 2>에 출연한다고 했을 때, 예상되는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여자 솔로계의 오아시스로 등극하거나 외면받거나. “그 어느 때보다도 특정 기호가 없는 다수 앞에서 노래를 불러야 하는 무대였죠. 내 세계를 알리자는 의도보단 재밌게 해보자는 생각이 우선이었는데, 감 좀 잡으려 할 때쯤 끝나버렸어요. 한 가지, 웬만큼 미치지 않고서는 그런 무대에서 자기 심지대로 밀고 나가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나는 가수다>가 초반과 달리 ‘대국민적’ 관심을 받는 자리에서 훌쩍 멀어진데다, 정인이 어느 순간 가사 실수로 실격 처리돼버린 건 조금 안타깝다. 그러나 그녀가 영화 <바그다드 카페> 삽입곡인 제베타 스틸의 ‘콜링 유’를 불렀을 땐, 그 곡을 부를 만한 국내 여자 가수는 정인이 제격이라는 생각을 그제서야 했다.

객원 보컬의 인상이 강했던 정인이 솔로앨범을 내고, 대중적인 예능 무대에 서고, 다시 세 번째 솔로앨범을 내기까지, 그녀는 보컬 색을 확립하는 문제를 두고 고민하는 시기를 보냈다. 보컬이 독특하면 듣는 이의 호불호가 갈리게 마련이다. “실제로 저희 큰 이모가 저보고 ‘왜 노래를 그렇게 부르냐’며 싫어했다니까요.” 그건 중요하면서도 심플한 고민이다. 그녀는 ‘노래를 어떤 식으로 불러야 하는지’를 자꾸 고민하는 접근 방식이 노래를 망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새 앨범 <그니>(‘그 여자’의 우리말)는 최대한 자기 감정에 충실하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 초점을 맞추자는 마음가짐 끝에 나왔다. 타이틀 곡은 윤건이 작곡하고, 개리가 작사한 발라드 곡이다. 지금껏 뮤지션 정인의 가능성을 끌어내고 다독여왔던 리쌍의 길은 앨범 작업 초기에만 프로듀싱을 지휘하고, 바로 정인에게 바통을 넘겼다. “타이틀 곡을 사연 있는 여자처럼 격정적으로 부른 버전도 있었어요. 하지만 결국 보통 여자가 되어 좀더 덤덤하게 다시 불렀죠. 앨범 전체적으로 그래요. 너무 기뻐 날뛰는 음악도 없고, 너무 슬퍼서 가라앉는 음악도 없어요. 제가 직접 프로듀싱을 하며 매만지다 보니 본연의 제 모습이 배어 나왔어요. 저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거든요.”

그저 들리는 목소리만이 단서였던 가수가 자기 정체를 밝히자, 여자 정인과 가수 정인을 이해할 수 있는 힌트들이 재빨리 자리를 찾았다. 지금까지 정인의 노래에서 두드러지는 건 ‘특별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앞으로 그녀의 노래를 들을 땐 30대 여자의 보편적인 감성도 느끼게 될 것이다. “노래하지 않을 때의 저는 존재감이 없어요. 친구인 가수 장기하와 배우 류현경은 저란 사람이 평소 ‘소울이 없다’고 놀리죠. 아껴뒀다 노래할 때만 쓴다고. 저는 처음부터 백지였기 때문에, 뭔가를 얹으면 더 선명하게 나타나는 사람이었나 봐요. 하지만 한 살씩 나이 들어가며 노래로 나와 내 또래가 공감할 만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느낍니다. 그게 현재 저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고요.” 가수와 작곡가의 팔자는 따로 있다고 생각하던 정인은 차츰 곡을 쓰고 노랫말을 쓰기 시작했다. 여자로 성숙해가며 보편적으로 붙잡게 되는 감정과 연인에게 털어놓고 싶은 뻔한 말들이 좀더 친근한 보컬을 타고 하나씩 완성됐다.

그 사이, 우리는 정인이 가수이자 기타리스트 조정치와 11년 차 커플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대중들이 누리는 분야에서 같은 일을 하는 커플이 공개되면 그 자체만으로 작든 크든 뉴스거리가 된다. 아는 사람만 알았던 조정치는 <무한도전>에 한 번 출연한것만으로 음악 인생 15년을 통틀어 비약적인 유명세를 탔다(지난 가을 신치림을 인터뷰 했을 때, 윤종신이 재능있는 후배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주고 싶어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정인은 조정치가 요즘처럼 이름을 알리게 될 줄은 윤종신도 전혀 짐작하지 못했을 거라고 한다). 사람들이 실력까지 담보한 뮤지션 커플을 얌전히 놔둘 리 없었다. 이들은 급기야, MBC <우리 결혼했어요>에 출연한다. “그 긴 시간을 만나왔으니 우리는 서로를 만들어주고 빚어준 셈이죠. 처음 그에게서 음악적인 면을 보고 끌린 건 아니에요. 우리는 만난 지 6년이 지나서야 음악 얘길 나누기 시작했답니다.” 정인은 방송으로 연애 생활을 노출하는 일이 흥미로운 리프레시가 될 거라며 들떠 있는 마음 반, ‘우리끼리만 재미있고 시청자는 지루해 하면 어쩌나’ 걱정하는 마음 반이다. 그러나 연인 옆에 있는 여자의 자연스러운 모습은 그 여자가 사랑에 대한 노래를 부를 때 그 노래에 힘을 실어줄 것이다. 서로 비슷한 구석이 있어 좋아하고,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잦아들어 가는(조정치는 음식 맛을 몰라 늘 먹던 메뉴만 먹는 남자였지만, 어느덧 정인이 조정치의 미각에 소울을 불어넣었다) 모습들이 정인의 음악을 더욱 보편적으로 느끼게 해줄 수도 있다.

몇 년 전까지 정인에겐 ‘전설이 되고 싶다’는 목표가 있었다. 60년대 가수 김정미처럼. “우리는 주로 확고한 세계를 세우고 묘연히 사라진 사람을 전설로 여기잖아요? 하지만 저는 완성형을 향해 계속 변하고 있어요. 좋게 얘기하면 발전하고 있죠. 그래서 전설이 되고 싶다는 목표는 포기했어요. 가까운 미래에 제가 완성될 것 같진 않거든요.” 그녀는 가수로서도 완성형을 향해 가야 하고, 여자로서 40대에 꽃 피우기 위해 지금 일에서 내공을 쌓고 싶어 한다. 흑처럼 강렬했던 보컬의 색과 백지처럼 비어 있던 자연인의 삶이 적당히 포개지는 지점을 이제 찾은 것 같다. 이대로 자연스럽게 굴러가면, 언젠가 정인은 연인과 지리산에서 결혼식을 올릴 것이다. 번잡하고 민망한 예식과 하객 무리를 피해 도망갈 계획이다. 그 지리산에선 어떤 음악이 울려 퍼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