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와 의자

의자에 앉아 있는 여자. 고단하면 앉는 게 당연한데 이게 특별한 현상 축에나 들까? 이번 시즌 패션 피플들이 원하는 여성상이 바로 ‘의자에 앉은 여인’. 바야흐로 의자가 가구, 조형물을 뛰어넘어 우리 여자들의 ‘베프’가 됐다!

노랑 페인트를 묻혀 붓으로 그은 듯한 블랙 팬츠 수트와 구두는 메종 마르탱 마르지엘라, 골판지 의자는 프랭크 게리(at 마이분), 가발은 위나인.

“? ” <보그> 편집장은 지난달 <보그 리빙> 마감 중, 디자이너 윤한희의 집이 레이아웃된 페이지를 최종 점검하며 다이닝룸에 놓인 희한한 의자 사진에 물음표를 표기했다. 의자의 출처를 명확히 밝히라는 뜻이다. 그건 이탈리아 가구회사 카사마니아가 무릎 꿇고 앉은 전라의 남자 뒷모습(허리와 엉덩이, 다리까지)의 실제 사이즈를 본 떠 만든 디자인. <보그 리빙> 표지(건축가 마영범 집 다이닝룸의 흰 의자)부터 마지막 페이지(에르메스 광고 속 직사각형 의자)까지 쫙 훑어본 얼마 후, 새로운 패션 계절의 시작을 알리는 메시지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슈퍼 브랜드의 광고 사진들이 이메일을 통해 <보그> 편집부에 속속 배달된 것. 그 가운데 유독 눈에 들어온 건, 카라와 에디의 맹활약, 수주의 샤넬 입성, 프레야와 마리아칼라, 그리고 엘리제의 컴백 등이 아니었다. 그들이 엉덩이로 깔아 뭉개고 있는 형형색색의 의자다.

가을 광고에서 의자에 앉은 여인의 초상은 하나같이 상상력을 건드리고 있다. 프라다(“나 오늘 한가해요”라고 대사 치는 모노 드라마 여주인공. 실제로 광고 필름은 연극 연습 중인 배우가 컨셉), 루이 비통(하녀가 방을 치우든 말든 계속되는 파티에 지친 기색으로 의자에 널브러진 콜걸), 발렌시아가(양손을 의자 뒤로 결박당한 채 앉은 음전한 여인. 가진 건 무릎 위에 놓은 핸드백뿐), 셀린(중동 여행 중 이국적인 호텔 로비에서 한숨 돌리는 서양인. 누군가 위에서 내려보자 다소곳하게 가슴에 손을 갖다대고 다리를 꼬며 자신을 방어한다), 샤넬(새하얀 우주선 안에서 노닥거리는 돈 많은 아가씨들. 중력으로 의자가 자빠져도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 미쏘니(공들여 만든 독특한 패턴의 조형물을 해변가 바위로 옮겨 그 위에 허리를 꼿꼿이 세워 앉은 행위 예술가) 등등. 보시다시피 웬만한 단편영화 소재로 써도 될 만큼 여자와 의자 사이에 풍부한 스토리텔링이 가능하다는 말씀!

의자에 앉은 여인들 사이를 지나자 당대 유행의 간판이 눈에 띈다. 이탈리아 <보그> 최신호 표지와 ‘Next Level’ 화보 주인공은 늘 그렇듯 새 옷이다. 하지만 이번엔 공동 주연이다. 모델과 모델, 모델과 유명인사가 아닌, 모델과 의자다. 랄프 로렌의 양털 가운으로 휘감은 신인 모델 아만다 머피는 영화 <울버린>의 야시다 회장이 누운 최첨단 의료 침대를 쏙빼닮은 ‘롤리팝 셰즈’ 앞에 우뚝 섰고, 이탈리아 가구 회사 모로소에서 빌린 ‘Paper Planes’ 의자는 루이 비통의 잿빛 의상과 짝을 맞췄으며, 쪽빛 꼬깔꼰 같은 베르너 팬톤의 ‘Cone Chair’는 발렌티노 남색 점프수트와 환상의 아다지오를 이뤘다. 프랭크 게리의 또 다른 역작 ‘Wiggle Chair’는 특유의 골판지 느낌이 셀린의 시리얼색 레이어드 룩의 일부처럼 보일 정도다. 쇼 후반부의 체크 의상은? Tord Boontje의 ‘Shadowy Chair’를 구성하는 흑백 체크나 마법사 같은 형태와 기이한 조화. 그런가 하면 꼼데가르쏭의 처절한 느낌의 묶임 장식 검정 팬츠 수트는 존슨 트레이딩 갤러리에 전시된 한국 작가 이광호의 PVC 꼬임 의자와 사촌지간 같다. 또 토쿠진 요시오카가 알루미늄 포일처럼 광 나는 소재로 기묘한 양감을 완성한 ‘Memory Chair’는 프라다의 은색 드레스가 차지했다.





사실 감각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의자가 쓸 만한 ‘물건’으로 통용된 지는 꽤 오래됐다. 건축가는 물론 패션 디자이너마저 부업으로 의자를 만드는 시대다. 게다가 패션 화보나 인물 촬영에서는 일부러 애쓰지 않아도 찍다 보면 어느새 와 있는 소품이 의자다. 뷰파인더 앞에 ‘뻘쭘’하게 서서 손과 다리를 어찌할 바 모를 때, 모델이나 인물에게 여유와 안정을 줄 만한 게 의자니 말이다. 게다가 등받이 하나만으로도 별별 연기와 상황 연출이 가능하지 않나. 인터넷 검색창에 ‘여자’와 ‘의자’를 입력해 보시라. 의자에 앉은 여인들의 모습이 수도 없이 뜬다. 그 가운데 어느 블로그에 실린 소파와 벤치, 그리고 여인에 관한 명화 3부작에서 의자를 향한 댓글 하나는 압권이다. “온 국민의 침대이기도 한, 애욕의 데카당스!”

패션과 <보그> 안으로 좀더 확대해 보면 애욕의 데카당스와 여자의 상관관계를 좀더 실감나게 즐길 수 있다. 지난 15년간 패션쇼의 결정적 장면들로 편집된 <보그> 단행본 <The Show>에도 여자와 의자의 매혹적 순간이 기록돼 있다. 파리 바가텔 공원에 마련된 디올의 회색 그네 의자에 앉아 웃음을 흘리는 샬롬 할로우, 실물보다 훨씬 큰 디올의 메달리언 체어에 기댄 샬롬(타원형 등받이로 익숙한 메달리언 체어야말로 여자를 위한 의자), 잭 포즌 무대에 쌓인 황금색 클래식 의자들, 그리고 의자 커버를 벗겨 즉석에서 옷을 만든 후세인 살라얀! 또 베로니크 브랑키노를 기억하시는지. 1974년 영화 <엠마뉴엘>에서 실비아 크리스텔이 진주 목걸이만 걸치고 상의 탈의한 채 앉아 있던 소품이 라탄 의자가 아니었다면 나른한 에로티시즘에 김 샜을지 모른다. 보시다시피 의자는 옷이 되고, 남자 친구의 어깨를 대신하는가 하면, 캣워크의 신성한 파사드로서 위용을 뽐내고 있다.

한편 깡마른 케이트 모스 옆에도 인상적인 의자가 놓인 적 있다. 1995년 <보그> 표지를 찍을 때 전라의 그녀 곁 새빨간 팬톤 체어는 홀딱 벗은 이브에게 수작 부리는 붉은 뱀처럼 야하고 관능적이었다. 70년대 생 트로페즈의 어느 호텔 방에서 서 있는 남자를 마주보고 흰 소파에 다리를 벌리고 앉은 원피스 차림의 여인(요즘 말로 치면 ‘쩍벌녀’)도 <보그>에서 추억할 수 있다. 우리가 헬무트 뉴튼 사진을 거론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대표작 말이다. 의자에 앉아야만 그런 도발적 자세가 가능하다. 마크 제이콥스의 루이 비통 10주년을 기념해 그레이스 코딩턴이 애니 리보비츠와 찍은 화보도 명장면이다. 신인 모델 네댓 명이 모인 뒤쪽 벽에 걸린 나무 의자들은 비로소 가구 기능을 벗어나 건축적 형태를 보였다. 마리오 테스티노가 <보그>를 위해 여인의 초상을 표현할 때 꼭 한번 등장하는 세트로 와장창 쌓은 의자도 포함된다. 살짝 허풍 떨자면, 타다시 카와마타(의자나 궤짝 등을 집채만큼 쌓아 예술로 승화시키는 일본 작가) 작품 못지않은 규모감에 압도될 정도.

패션과 예술, 대중문화 안에서 여자와 의자의 풍경은 보다 다채로운 모습으로 등장한다. 디올의 그 유명한 메달리언 체어, 의 화이트 의상이 압권이었던 샤론 스톤, 마르니가 디자인한 형형색색의 의자들, 의자 커버를 벗기자 옷이 된 후세인 샬라얀 쇼, 칼 라거펠트가 촬영한 영상을 감상하기 위해 의자에 푹 주저앉은 톱 모델들, 의자를 수없이쌓아 조형물을 만든 타다시 카와마타의 작품, 라탄 의자를 무대에 사용한 베로니크 브랑키노.

그런가 하면 마돈나는 2009년 가을, 낡은 카페의 나무 의자에 앉아 화난 듯 한쪽 다리를 치켜세우고 루이 비통 광고에 나온 적 있다. 그건 ‘의자 댄스, 화끈한 무대’ ‘의자 댄스, 잠재된 관능미 폭발’ ‘의자 댄스, 쩍벌 포즈로 섹시미’ 등의 제목을 달고 나오는 요즘 아이돌 여가수들의 섹시 댄스에 무한 영감을 준 장면인 게 분명하다. 반면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미란다는 집무실 의자에 앉아 머뭇거리는 앤드리아를 향해 ‘니 위에 나 있어’라는 식으로 꽉꽉 밟는다. 의자에 앉아 있었기에 눈을 치켜뜬 채 올려볼 수 있는 것.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여자와 의자 사이의 화학작용 가운데 압권은 따로 있다. <원초적 본능>에서 샤론 스톤이 취조 중에 의자에 앉아 다리 한 번 바꿔 꼬았을 뿐인데, 전 세계 수컷들의 리비도가 일시에 마비되지 않았나. 이렇듯 여자가 밤무대 무희에서 위대한 여왕으로 넘나들 수 있도록 분위기 잡는 건 침대가 아니다. 의자다. 카린 로이펠트가 패션쇼 맨 앞줄 의자에 앉아 그 유명한 ‘다리 세 번 꼬기’를 자신의 전매특허로 만들었듯, ‘뼛속까지 패피’ 놀이를 할 수 있는 소도구 역시 의자다.

얼마 전 어느 방송 프로그램에서 가구점을 벗어나 화랑, 그리고 최근엔 미술품 경매에 나온 의자에 대해 다뤘다. 스티브 잡스 덕분에 더 유명해진 르 코르뷔지에의 1928년 작 그랑 꽁포르 LC2, 달리의 레다 체어, 아르네 야콥센의 에그 체어는 물론, 작고한 이브 생 로랑의 드래곤스 체어가 경매에서 422억원에 낙찰됐다는 소식까지 다뤘다. 그러나 프로그램의 메시지는 따로 있었다. 한국에서도 의자가 예술품이고 재테크 수단이 되고 있다며 “세금 탈루의 온상으로 자주 이용되는 그림이나 조각과 달리 의자는 생활 가구라는 인식이 있어 새로운 투자처로 부상하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부동산 경기도 안 좋고 주가도 불안한 요즘, 갈 곳 없는 돈이 의자에 몰리고 있다’라는 것. 이렇듯 의자의 패러다임은 바뀌었다. 아울러 당대 여자들에게도 새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패션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라면 그 의미를 더 생생히 체험할 수 있다).

피카소와 마티스도 의자에 앉은 여인을 자주 묘사했다. 그리고 이브를 만든 창조주보다 여자를 더 잘 아는 듯 보이는 마르니의 콘수엘로 카스틸리오니마저 여자들을 위해 색색의 콜롬비안 록킹 체어를 만드는 중이다. 바야흐로 의자는 그저 골반과 무릎 관절을 굽혀 앉기 위한 단순한 가구가 아니다. 성적 매력이든 정숙한 태도든 거만한 모습이든 엄격한 자세든 뭐든 여성미를 표현할 최적의‘물건’으로 추앙받게 됐다. 그 가운데 올 누드의 남자가 무릎 꿇은 형태의 카사마니아 의자에 여자가 앉는다면? 우리 여자들에게 이보다 더 짜릿한 승리의 순간이 또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