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아이콘이 된 대중문화 스타들

지금 패션 아이콘이 되기 위한 최고의 후보는 아티스트나 은막의 스타가 아니다.
결코 고상하다고 할 수 없던 대중문화 스타들이 패션 무대를 후끈 달구고 있다.

“<보그>의 오랜 전통 중 하나이자 <보그>를 편집하는 기쁨 중 하나는 언제라도 문화를 정의하고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세상 모습과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을 다룰 수 있다는 겁니다.” 지난 4월호 미국 <보그> 편집장의 글은 의미심장한 문장으로 시작됐다. 누구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는 안나 윈투어가 왜 <보그>의 전통까지 거론하며 이런 발언을 했을까. 그건 최근 <보그> 커버 가운데 가장 큰 논란에 휩싸인 커플을 향한 옹호이며 변명이었다. “우리는 모두 그 역할이 지금 킴과 칸예에 의해 완벽히 실현되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 있을 겁니다.”

랑방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는 킴 카다시안과 약혼자(올여름 파리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릴 예정)인 칸예 웨스트가 그녀를 뒤에서 껴안고 있는 커버는 미국 <보그> 역사상 가장 큰 논쟁거리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다. 미국의 많은 매체들은 과연 이 팝스타와 리얼리티 스타의 조합이 <보그> 명성에 어울리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또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은 온갖 패러디로 넘쳐났다. 배우 세스 로건과 제임스 프랑코는 자신의 얼굴을 커버에 합성했고, 사라 미셸 겔러는 정기구독을 취소하겠다는 트윗을 날렸다. 대체 무엇이 ‘문제적 커버’를 만들었을까.

가장 큰 이유는 킴 카다시안이라는 존재다. 패리스 힐튼의 친구이자 섹스 비디오(고의로 누출했다는 의혹에 시달렸다)의 주인공으로 세상에 알려진 이 할리우드 출신 아가씨는 배우도 아니고 가수도 아니다. 미국 케이블 채널에서 방영 중인 <Keeping up with the Kardashians>란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카다시안 일가의 가장 유명한 둘째 딸이라는 게 유명세의 전부다. 한국으로 치면 <인간극장>이나 <아빠! 어디가?> 정도의 프로그램 속 등장인물이 엄청난 인기를 얻은 것이다. 2007년 첫 방송 후, 무려 아홉 번째 시즌이 방영되고 있는 장수 프로그램과 킴의 매력은 쉽게 설명하기 어렵다. 그녀는 2년 전만 해도 미국 <보그>가 개최한 파티에 참석 금지 명령을 받을 만큼 대중문화의 B급 아이콘이었다. 그러니 <보그> 커버를 위해 애니 레보비츠의 카메라 앞에 선 것은 여러모로 이슈가 될 만한 일이다.

놀라운 패션 신분의 수직 상승 뒤에는 사귄 지 2년 된 칸예 웨스트가 있었다. 지독한 패션 마니아로 소문난 칸예와 열애를 시작한 후, 패션계는 서서히 그녀에게 은혜를 베풀기 시작했다. 오뜨 꾸뛰르 쇼에 초대하는가 하면, 샤넬 디너 파티에 참석하는 일이 ‘뉴 카다시안’의 새 모습이었다. 덕분에 육감적인 몸매를 맘껏 드러내기 위해 에르베 레제의 밴드 드레스만 고집하던 스타일도 바뀌었다. 셀린의 풍성한 코트와 맥카트니 드레스를 선택하며 한껏 우아해졌다(지나치게 육감적인 몸매로 인해 디올 톱은 크롭트 톱으로 변하고, 랑방 팬츠는 스키니로 변했지만). 지방시의 리카르도 티시는 임신한 그녀를 위해 맞춤 드레스를 선물했고, 알버 엘바즈와 피비 파일로는 유아복을 따로 만들어 선물할 정도였다.

대중문화 스타가 패션 상류사회에 입성한 사건은 카다시안 말고도 또 있었다. 지난해 MTV 뮤직비디오 어워즈에서 브라와 팬티만 입고 민망한 춤을 선보이며 논란의 중심에 선 마일리 사이러스. 디즈니 채널의 귀여운 꼬마 소녀가 치른 도발적인 성인식은 그야말로 기가 딱 막힐 정도. 혀를 입 밖으로 내밀고 골반을 마구 흔드는 ‘트워킹’이라는 춤은 선전성만큼이나 코믹했다. 테리 리처드슨이 촬영한 뮤직비디오 속에서 올 누드인 채 혀로 망치를 게걸스럽게 핥는 동작은 팝스타의 성 상품화라는 민망한 주제마저 요란하게 건드렸다. 하지만 문제아를 사랑하는 마크 제이콥스가 올봄 광고 캠페인 모델로 마일리를 점찍자 상황이 달라졌다. 촬영부터 평탄치 않았다. 10년 넘게 제이콥스와 함께한 사진가 유르겐 텔러가 마일리와의 촬영을 거부한 것. 결국 유르겐 텔러 대신 데이비드 심스에게 촬영을 맡기는 것으로 광고 제작이 일단락됐다. 그런 마일리스의 악명이 호재로 작용한 걸까. 미국 <W>는 봄을 알리는 3월호 커버로 마일리를 섭외했고, 독일 <보그>를 위해 마리오 테스티노 역시 마일리를 마릴린 먼로로 환생시켰다.

이렇듯 미국 대중문화 속 패션 스타는 계속해서 탄생 중이다. 킴 카다시안의 이복동생(아빠가 다르다)인 켄달 제너는 마크 제이콥스와 자일스, 샤넬 쇼를 통해 패션계에 데뷔했고, 미국 <보그> 인스타그램 화보에 모델로 출연했다. 또 한국의 막장 드라마 못지않은 사건들이 일어나는 미국의 리얼리티 시리즈 <리얼 하우스와이프>에 출연한 지지 하디드도 카린 로이펠트의 간택을 받았다. 엄마가 부잣집 안주인이라는 것만 제외하곤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어린 모델이 케이트 업튼의 뒤를 이어 건강한 톱 모델 자리에 오를 수 있을진 아직 미지수지만 말이다.

우아한 여배우나 축복받은 톱 모델들만이 차지할 수 있던 패션 아이콘이라는 지위가 보시다시피 이제 누구에게나 활짝 열렸다. 복잡한 사생활과 의심스러운 재능의 여가수들이 인스타그램의 하트를 수십만 개씩 선물 받는 요즘, 리얼리티 시리즈 출신의 무명인들이 패션 아이콘의 왕관을 차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물론 이런 사례가 역사상 최초는 아니다. 80년 전 대공황 시절, 브렌다 프레지어라는 열일곱 살짜리 소녀가 <라이프>지 커버에 등장했다. 이 소녀가 38년 당시 최고 영향력을 자랑하던 매체의 커버를 장식한 이유? 단지 사교계에서 최고 인기 소녀였다는 사실 하나였다. 유명하기 때문에 더 유명해진 소녀. 알고 보면 카다시안의 롤모델은 케이트 모스나 니콜 키드먼이 아닌, 브렌다 프레지어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