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만의 세상

앤 드멀미스터가 은퇴하고 프리다 지아니니가 사표를 썼다.
그러나 현실감으로 충만한 여류 디자이너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패션 풍경을 멋지게 꾸미고 있다.
다시 돌아온 그녀들만의 세상!



구찌 계주에서 톰 포드의 배턴을 이어받아 프리다 지아니니가 한동안 전 세계 패션 트랙을 전력질주했다. 물론 두 사람 사이에 알레산드라 파키네티가 끼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배턴을 떨어뜨렸고 프리다가 그걸 다시 주워 꽤 오래 달렸다고 보는 게 옳다. 그녀에게 할당된 계주 거리와 시간은 2006년 S/S부터 2015년 F/W까지. 프리다는 철저히 입을 수 있는 옷으로 전임자와 차별을 뒀다. 게다가 그녀가 일할 때쯤 톰 포드식 섹스어필도 종지부를 찍고 불경기까지 겹치자 입을 수 있는 옷이 패션산업에서 중차대한 사안으로 떠올랐다. 프리다는 기름기 좔좔 흐르고 관능미로 충만한 상표에 그녀의 강점인 꽃바람을 곁들여 현실 감각을 주입했다. 이 노력은 높은 점수를 매길 만하다.

 

그런 면에서 도무지 끝이 안 보이는 불경기에 많은 디자이너들이 입을 만한 옷을 만들어 파는 데 집중하게 됐다는 건 여류 디자이너들 스스로 자존감을 높일 만한 업적이다. 그리하여 개막된 여자를 위해 옷을 만드는 여자 디자이너들의 시대! “여성을 위해 디자인하는 여성. 얼마나 멋진 컨셉인가!” <WWD>는 최근 일어난 여류 디자이너들의 대동단결을 보며 이렇게 보도했다. 때마침 이번 시즌 런웨이 행위예술 가운데 최고로 꼽히는 샤넬 시위를 본 뒤의 거국적 선언이었다(‘역사는 허스토리다’ ‘레이디 퍼스트’ ‘여성의 권리는 모든 권리 그 이상이다!’라는 피켓을 휘두르며 행진한 모델 무리를 떠올려보시라!). 패션 전문가들은 바로 그 장면, 그 순간이야말로 치마 길이 따위의 문제를 초월한 여성 문제라고 분석했다. 패션계에서의 여성의 권리, 이슈, 역할, 그리고 중추적 위치 등을 핵심 가치로 인정하는 현상의 마침표였다는 것.

 

이쯤에서 잠시 이런 상상을 해보자. 현재 패션계를 주름잡는 여류 디자이너들을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로 풍자하는 것 말이다. 누가 뭐래도 창조주 역할로 최고의 캐스팅은 단연 미우치아 프라다 아닐지. 패션을 통해 정치적 논조를 드러내는 데 겁 없는 그녀는 패션 여권에 대해 이렇게 전한다. “제 작업에 항상 고려했던 것들이에요. 여성 자신의 역할과 권리를 위해 투쟁하고, 특정 사상의 상징적 여성을 표현하는 일 말이죠. 모든 분야에서 그렇듯 패션계에서도 여자들은 자신을 보다 의미 있는 존재로 발전시켜왔습니다. 그래서 다른 무엇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는데 성공한 여인들을 존경합니다.”

 

현재 미우치아 프라다의 페미니스트적 신념을 좌우 검지손가락으로 나눠 계승받는 이브(‘천지창조’에서는 아담이었지만!)들이라면 피비 파일로와 스텔라 매카트니다. 올봄 셀린 쇼에는 케이트 부시의 ‘This Woman’s Work’가 울려 퍼졌다(베로니크브랑키노 쇼에서도 마찬가지). 아닌 게 아니라 그녀에게 늘 따라다니는 품평 역시 이런 식이다. “일하는 여성들을 위해 실용적인 옷들을 고안하는 것으로 유명한 여성 디자이너!” 올봄 셀린 쇼를 취재한 패션 칼럼니스트 사라 무어가 “하루하루 고된 일상 가운데 분주한 여자들을 위한 시(詩)가 존재했다”라거나 “더 이상 입는 것에 제한 받지 않는 현대 여성의 개념이 즐겁게 느껴졌다” 등의 품평을 ‘보그닷컴’에 남길 정도다. 그런가 하면 매카트니는 몇몇 강한 여자들이 성공을 거두는 현실에 꽤 만족하는 눈치다. “당대에 여자로 산다는 건 아주 흥미진진한 일입니다. 선배 세대의 변화는 물론 후배 세대에 나타날 변화까지도 알 수 있는 시대니까요.” 그러면서 그녀들의 리그, 다시 말해 여류 디자이너들끼리 한 팀이라는 연대감을 충분히 느끼고 있는 듯 하다. “그거야말로 우리에게 큰 힘을 주니까요.” 스텔라와 피비의 뒤를 이어 클로에라는 아가씨 브랜드를 위해 재능과 시간을 쏟는 클레어 웨이트 켈러 역시 여성 중심적 패션산업에 절대 동의하는 듯 하다. “최근 패션은 우리 여자들에게 현실이 아닌 일종의 컨셉이나 판타지 같았어요. 하지만 패션은 더 이상 단일 트렌드나 목소리가 아닙니다. 그 안에서 여자들이 현재보다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적은 없었어요.”

미우치아 프라다, 피비 파일로와 스텔라 매카트니, 클레어 웨이트 켈러에 이어 페미니즘의 배턴을 잇는 인물이 이번 파리 패션 위크에 첫 출전했다. 소니아 리키엘이라는 철저히 여성 중심적인 패션 가문을 통해 데뷔한 줄리 드 리브랑. “리키엘 여사가 그녀 시대에 이룬, 여성을 위해 디자인하는 여성이 되는 일에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라고 어느 인터뷰를 통해 속내를 전했다. 그리고 미우치아로부터 이어진 배턴을 이어받기 위해 또 다른 여류 디자이너들도 트랙에서 몸을 푸는 중이다. 2월부터 3월까지 열릴 2015 F/W 패션 위크에서 에르메스를 통해 데뷔할 나데쥬 바니시뷸스키, 헬무트 랭을 차지하게 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한 카테욘 아델리 등등. 다들 남자의 손에 의해 운영됐거나, 남자가 설립한 브랜드의 혈관에 에스트로겐을 주입하게 된 여성들이다.

60년대 중반 파슨스에 입학해 인턴으로 앤 클라인에서 일할 때부터 지금껏 일하는 여자들을 위해 몸 바친 인물이라면, 후배들이 보며 기립 박수를 보내지 않을까? 1992년 광고에 여자 대통령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등장시켜 선견지명을 보여준 도나 카란이야말로 동지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매달리는 디자이너다. “여자 디자이너들은 자기가 만든 옷을 실제로 입어요”라고 도나 카란은 자신 있게 말한다. “그래서 패션에 대해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을 취하게 되죠.” 반면 남자 디자이너들은 판타지적으로 접근할 때가 많다고 전한다. 그녀는 패션이 종종 너무 어린 취향으로 치우친 데다, 모든 여자들이 모델이 아니라는 사실도 덧붙인다. “여긴 현실입니다. 기본으로 내려와야 해요. 바지를 어떻게 맞도록 할 건가? 이런 문제 말이죠. 제 멘토인 앤 클라인에게 배운 게 그겁니다.”

물론 여자보다 더 여자다운 남자 디자이너들 덕분에 우리 시대 여성 소비자들은 나긋나긋한 여성미를 만끽하곤 한다. 니나 리치, 오스카 드 라 렌타, 까르벵, 드리스 반 노튼 등등. 그러나 남자 디자이너들이 늘 뮤즈를 물색하느라 바쁜데 반해 여자 디자이너는 자기 자신이 뮤즈다. 그들은 도나 카란의 말처럼 고객의 삶까지 산다. 자신이 만든 옷에 여류 디자이너들이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런 관점에서 여자의 디자인은 조금 덜 이상주의적이다. 그녀들은 옷에 관한 한 몽상가가 아니다(여기서 레이 카와쿠보, 사라 버튼만큼은 예외로 두자. 레이는 패션 예술가, 사라는 하우스 이념을 존중하며 일하는 거니까). 게다가 직접 입고 체험할 수 있으니 이 모든 소감이 디자인에 투입되는 건 당연한 말씀! 그렇다면 남자 디자이너로서 여자 앞에 엎드려 경배하는 인물이라면 어떤 마음일까? ‘여자=샤넬’이라는 명명백백한 공식이 성립되도록 계속해서 수를 쓰는 칼 라거펠트가 대표적인 예다. 이번 샤넬의 거리 시위는 여러 면에서 여자들의 전성시대가 열렸다는 화끈한 신호였다. “여자들을 100% 지지합니다!”라고 라거펠트는 기자들 앞에서 단호하게 얘기했다. “현재 패션 비즈니스를 보세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거펠트의 단언처럼 지금은 패션뿐 아니라 여성 리더십이 어느 때보다 강력한 시대다. 미셸 오바마, 앙겔라 메르켈 수상, 페이스북 최고 운영 책임자 셰릴 샌드버그, 빌 게이츠 아내인 멜린다 등은 하루가 멀다 하고 언론에 오른다(아시다시피 ‘금녀의 방’쯤으로 취급됐던 남자들의 일터를 야금야금 잠식하는 중). 게다가 경제성장이 떨어질 때도 과잉 성장하는 분야가 패션과 력셔리라고 칠 때, 이곳 패션 생태계야말로 여자들의 리더십으로 가득하다. 유명 패션, 뷰티, 시계, 보석 분야에 이름을 올린 32개 회사에서 이사회 22.5%와 경영진과 고위 간부 21%가 여자라고 <WWD>는 보도했다(에르메스, 에스티 로더, 마이클 코어스는 이사회 40% 이상이 여성). 패션산업이 매 순간 새로 태동하는 쪽을 확대해도 다를 게 없다. 최근 파슨스에는 전 세계 여성 패션학도들의 숫자가 남자를 뛰어넘었다. 여성 85%, 남성 15%라는 것.

가브리엘 샤넬, 엘자 스키아파렐리, 잔느 랑방, 마들렌 비오네, 마담 그레 등등. 패션 역사가들은 이들이 한꺼번에 밀려온 1차 대전 이후 패션계의 운명이 뒤집어졌다고 분석한다. 그런 뒤 60년대에 여성 디자이너들의 부흥기가 되돌아왔다고 전한다. 런던의 메리 퀀트, 장 뮈어, 파리의 소니아 리키엘, 엠마뉴엘 칸, 미셸 로지에 등등. 그리고 지금 앤 드멀미스터도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프리다 지아니니가 물러났지만, 여전히 여자들 곁에 여자가 있다. 토즈에서 재기에 성공한 알레산드라 파키네티, 사카이를 통해 일본식 아방가르드를 희석시켜 히트 친 아베 치토세 등등. 칸예 웨스트가 디자인한 여성복 컬렉션은 두 번 모두 망쳤지만, 올슨 자매와 빅토리아 베컴의 레이블은 갈수록 인기다. 또 미국 <보그>에 의해 차세대 디자이너로 호명된 8인의 ‘Young Guns’ 중엔 두 명의 아가씨도 끼어 있다(시몬 로샤, 다니엘 셔먼). 페미니즘이 세련된 단어로 인식된 이번 시즌, 패션계가 이를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들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