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를 위한 영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뒤 대화의 멍석이 깔린다. 요즘 극장에선 종종 영화 이후가 더 재미나다.
작품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서로의 감상을 주고받는 시간. 지금 그 자투리 시간이 극장을 풍요롭게 한다.

지난 1월 전국 17개 스크린에 러셀 크로우가 떴다. 영화 <워터 디바이너>의 국내 개봉차 내한한 러셀 크로우가 압구정 CGV에서 열린 관객 행사 ‘CGV 스타 라이브톡’에 참석한 거였는데, 그 현장이 전국 17개 극장에서 생중계됐다. 당연히도 오프라인 티켓은 매진됐고, 온라인 생중계방 역시 ‘풀방’을 채웠다. 굳이 레드 카펫 앞에 서서 죽치고 기다리지 않아도, ‘사생팬 플레이’를 하며 매달리지 않아도, 스타와 대화할 수 있는 기회였다. CGV 스타 라이브톡은 CGV가 매달 1회 개봉작의 감독과 배우를 불러 영화 상영 이후 대화의 자리를 갖는 이벤트다. 지난 3월엔 <순수의 시대>의 배우와 감독이 주인공으로 나섰고, 2월엔 <조선명탐정 2> 팀이 관객을 만났다. SNS 토크의 이벤트화, 일종의 원격 ‘GV’ 생중계인 셈이다. CGV의 김대희 홍보팀 과장은 “관객이 영화를 가깝고 친근하게 느낄 수 있는 자리로 마련한 행사”라고 말했다. 영화도 보고 스타, 감독과 함께 수다의 자리를 가질 수 있는데 이 찬스를 마다할 관객은 별로 없다.

지금까지 GV는 사실 영화제 고유의 부대 행사였다. 부산이나 전주의 국제영화제, 서울에서 열리는 여성영화제, 혹은 예술영화 마니아들의 잔치인 서울아트시네마의 ‘친구들 영화제’ 등이 영화 상영 이후 배우, 감독과 관객의 만남의 자리로 GV(Guest Visit)를 활용했다. 혹은 개봉 영화들이 개봉 첫 주 홍보를 위해 발 벗고 나서는 프로모션용. 페스티벌이기에 가능한 포맷이었고, PR이란 목적이 있기에 나설 수 있는 인력이었다. “상업영화로는 GV를 잘할 수 없어요. GV를 하면 그만큼의 시간 동안 극장을 사용해야 하고, 그럼 상영 회차를 1회 정도 줄일 수밖에 없거든요.” KT&G 상상마당 영화 사업팀 진명현 팀장의 얘기다. 실로 짧게는 30분, 길게는 1시간 넘게도 시간을 잡아먹는 GV는 극장주 입장에서 그리 달가운 행사는 아니다. 최대한 영화를 많이 틀어, 비는 시간을 줄여 장사를 해야 돈을 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GV는 대부분 멀티플렉스 극장이 아닌 소규모의 독립, 인디 영화 상영관에서 이뤄졌다. 광고비 예산이 작은 독립영화들이 빈약한 자본의 자리를 감독, 배우들의 발품으로 메워온 거다. “<혜화, 동>을 할 때 민용근 감독님은 아마 관객과의 대화를 60번은 했을 거예요. <파수꾼>은 감독, 배우들이 총출동해 50번 정도 GV를 했고요.” 보통 개봉 영화의 GV 횟수는 10회 정도. 진명현 팀장은 “관객들은 어쨌든 배우, 감독과 근거리에서 만나고 싶어 하니, 소규모 영화들은 거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렇게 <파수꾼>과 <혜화, 동>은 독립영화로는 이례적으로 1만 관객 동원에 성공했다.

하지만 지금 영화들이 단순히 돈이 없어, 몸으로 때우는 방식으로만 GV를 활용하는 건 아니다. 이제는 배우, 감독 외에 모더레이터란 이름의 인사들이 출동하며, 극장에서의 대화를 인터넷으로 공유하는 생중계도 왕왕 이뤄진다. 진명현 팀장은 GV가 극장 인지도 향상에도 큰 도움을 줬다고 했다. “6년 전 상상마당의 평균 좌석 점유율이 13~14% 정도였어요. 그건 극장의 인지도가 낮다는 얘기예요. 그래서 GV를 더 활용했고, 결과적으로 영화도, 극장도 사는 방법이 되었죠.” 근래의 CGV 아트하우스 역시 성공적인 예다. 2007년 독립, 예술 영화 지원 방법으로 ‘무비꼴라쥬’를 론칭한 CGV는 이름을 ‘아트하우스’로 바꿔 요즘 그 어느 곳보다 활발한 관객 이벤트를 하고 있다. 영화 상영 후 감독, 혹은 평론가와 함께 이야기하는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GV는 물론, 매달 1회 이동진 평론가를 기용해 GV를 생중계하는 방식의 ‘라이브톡’도 진행한다. 관객들에게 단순히 개봉작 리스트를 보고 영화를 고르는 것 외에 영화 관람의 다양한 선택지를 제시하는 거다. 김대희 과장은 “예술영화의 저변 확대, 그리고 관객이 극장을 좀더 문화 놀이터로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노력”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런 노력이 관객 스코어로도 이어진다. CGV의 ‘아트하우스 데이’ 상영작의 평균 좌석 점유율은 40%가 넘으며, 이동진 평론가의 ‘라이브톡’ 상영의 경우 매회 인터넷 예매 5분 만에 매진되곤 한다. 그 덕에 근래에는 서울극장 역시 ‘시네마 살롱: 수다’란 이름으로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 2월 시네마테크에선 지난해 나온 한국 영화 10편을 선정해 상영하는 자리가 있었다. 그중 한 편이 장률 감독의 <경주>였는데, 장률 감독과 정성일 평론가는 이날 영화 상영 이후 관객과의 대화를 150분이나 진행했다. 러닝타임 2시간 30분짜리 영화에 GV 역시 2시간 30분이나 이어진 셈이다. 정성일 평론가는 2010년 자신이 직접 연출한 영화 <카페 느와르> 개봉 당시 GV를 새벽까지 이어 했던 적도 있다. 그만큼 영화에 대해 할 얘기는 많고, 지금까지 그 자리는 충분치 않았다는 거다. 지난 2월 대학로에서 <와일드>를 봤다. 셰릴 스트라이드의 삶을 그린 리즈 위더스푼 주연의 영화다. 이 영화는 큐레이팅 상영작이었는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뒤 큐레이터가 나와 영화에 대한 주석을 달았다. 제작 뒷이야기부터 실존 인물, 그리고 배우에 대한 이야기까지. 다소 ‘뻘쭘’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몇몇 관객은 문을 나서기 전 큐레이터에게 따로 질문을 하기도 했다. 물론 볼멘소리도 많다. GV를 할 때 실제 호응이 좋은 건 이동진, 허지웅 등 인기 모더레이터, 또는 배우가 참석하는 자리뿐이며, 대부분의 경우 별 질문 없이 사회자의 멘트로 채워진다는 후기가 종종 올라온다. 영화에 대해 토론하고 감상을 나누는 자리라기보단 SNS을 통한 입소문 마케팅을 위한 수단이란 비판 역시 있다. 진명현 팀장은 “그냥 <폭스캐쳐>를 봤으면 딱히 트위터에 올릴 말이 없어요. 근데 이동진 기자의 <폭스캐쳐>를 봤으면 무언가 디테일한 문화 체험을 한 기분을 준다”고 말했다. 가난한 영화의 궁여지책 마케팅일 수 있다. 스타 모더레이터, 셀러브리티에 기대는 화려한 행사일 수도 있다. 혹은 그저 SNS 구미에 맞는 인기 소재일 뿐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대화의 장이 성하는 건 꽤 많은 관객들이 보는 것 이상의 영화 체험을 바라기 때문 아닐까. 영화가 끝난 후, 지금 우리는 당신과 대화를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