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터 앤드류 볼튼과의 대화

패션 무대에는 수많은 주인공이 있다.
그러나 무대 밖에서 모든 것을 예리하게 관찰하는 사람을 소개한다.
누구보다 맛깔스럽게 패션 이야기를 들려주는 큐레이터 앤드류 볼튼과의 대화.

매년 코스튬 인스티튜트의 대형 전시를 기획하는 큐레이터 앤드류 볼튼.

매년 5월 초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열리는 갈라는 그야말로 별들의 모임이다. 1년 전에는 패션계 유명 인사들은 물론, 베컴 부부, 비욘세와 제이지, 조니 뎁과 앰버 허드, 킴 카다시안과 칸예 웨스트 등 세기의 커플들도 이곳에 입장했다. 또 헤일리 스테인펠드, 루피타 니용고, 쉐일린 우들리 같은 떠오르는 별들까지 다들 한껏 차려입은 채 레드 카펫을 밟았다. 이 박물관의 연간 기금을 마련하는 동시에 해마다 특별한 주제로 기획한 코스튬 인스티튜트의 메인 전시를 축하하기 위해서다. 다들 호화로운 파티를 즐길 무렵, 전시의 베일 뒤에서 이 광경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코스튬 인스티튜트의 큐레이터 앤드류 볼튼(Andrew Bolton)이다.

올 초 중국에서 열린 전시 프리뷰 모습.

대학에서 동양 예술을 전공하고 10여 년간 런던 V&A 박물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한 그는 2002년 뉴욕 코스튬 인스티튜트로 이직했다. 그때까지 볼튼이 기획한 대형 전시는 13번. ‘AngloMania: Tradition and Transgression in British Fashion’ ‘Superheroes: Fashion and Fantasy’ ‘Schiaparelli and Prada: Impossible Conversations’ ‘Punk: Chaos to Couture’ 등등. 무려 65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들러 역대 패션 전시의 모든 기록을 갈아치운 2011년 ‘Alexander McQueen: Savage Beauty’ 역시 그가 기획했다(엄청난 인기 덕분에 휴관인 월요일에도 특별 티켓을 판매하는가 하면, 전시 기간을 일주일 연장한 데다가 3월 14일부터는 런던 V&A 박물관에서 순회 전시되는 중).

 

패션 현대사에서 매년 의미심장한 한 획을 긋고 있는 볼튼과 코스튬 인스티튜트 기획팀이 2015년을 위해 준비한 전시는 뭘까? 이름하여 ‘China: Through the Looking Glass’. 중국 문화가 서양 복식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한눈에 감상할 수 있도록 중국 전통 의상, 미술 작품, 청자, 영화 의상 등을 함께 전시한다. 아울러 여기서 영향을 받은 하이패션까지(현재 전 세계 패션계에서 중국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는 대목). 5월 7일 공개를 앞두고 쉴 틈 없이 바쁜 앤드류 볼튼에게 이번 전시 준비 과정과 뒷이야기, 패션 큐레이터로서의 신념에 대해 질문했다.

VOGUE KOREA(이하 VK) 올해 테마를 중국으로 잡은 이유는 뭔가요?

ANDREW BOLTON(이하 AB) 유럽과 중국의 교류가 시작된 16세기 초부터 중국 문화는 전 세계 곳곳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습니다. 패션도 예외는 아닌데, 폴 푸아레부터 이브 생 로랑까지 대표적인 꾸뛰리에들이 중국 문화에서 영감을 얻어 좀더 낭만적인 컬렉션을 선보였죠. 바로 그 흥미로운 관계에 대해 한 번쯤 다룰 시기가 됐다고 판단했습니다.

 

VK 중국 문화재들을 전시하는 게 쉽진 않았을 듯한데요.

AB 최근 몇 년간 찰스 제임스, 펑크, 스키아파렐리 등을 다뤘던 것과 비교하면 좀더 복잡한 작업이긴 했어요. 그래서 아시아 예술 부서(Asian Art Department)와 합작으로 준비했습니다. 2006년 ‘AngloMania’ 전시 이후 처음으로 다른 부서와 협업한 전시죠. 사실 빅토리아&앨버트 뮤지엄에서 일할 때 중국 현대미술 부서를 담당하면서 ‘Fashioning Mao’라는 전시를 준비한 적 있어요. 당시 경험을 되살려봤죠.

VK 그러고 보니 중국은 당신의 전문 분야 중 하나군요. ‘China: Through the Looking Glass’라는 전시 제목은 어떤 의미를 담은 건가요?

AB 루이스 캐럴의 <거울 나라의 앨리스>는 여주인공 앨리스가 거울 뒤의 세계, 다시 말해 모든 게 현실과 정반대의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곳으로 모험을 떠나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그녀는 자신이 믿고 있던 시공간에 혼란을 느끼고 궁극적으로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되죠. 이 전시는 중국의 환상적인 문화를 거울 너머로 보는 느낌입니다. 중국의 문화와 역사적 배경을 모두 잊은 채 전혀 새로운 시공간에서 패션과 관련한 이야기만 나눌 수 있도록 구성한 전시죠.

VK 전시관이 크게 두 영역으로 나뉜다고 들었어요. 어떤 기준에 따른 건가요?

AB 디자이너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요소들을 중심으로 구획했습니다. 우선 ‘From Emperor to Citizen’은 중국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의 자서전 <황제에서 시민으로>의 제목에서 따온 겁니다. 청나라, 중화민국,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시절을 모두 겪은 선통제의 인생에서 영감을 얻었죠. 세 시기의 대표 의상들, 즉 청나라 황제 의상, 중화민국 시절 치파오, 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 수트가 패션 디자이너들에게 끼친 영향을 다뤘습니다.

VK 그렇다면 또 하나인 ‘Empire of Signs’ 전시관에는 어떤 것이 전시되죠?

AB 이곳은 롤랑 바르트의 책 제목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중국을 상징하는 대표 요소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전시관이죠. 옥, 도자기, 경극 배우 매란방, 서태후, 그리고 중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까지.

VK 왕가위 감독이 전시의 아트 디렉터를 맡은 게 인상 깊어요.

AB 진개가 감독의 <패왕별희>, 장예모 감독의 <홍등>,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 등 패션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준 중국 영화는 많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만큼 엄청난 영향을 끼치진 못했어요. 영화에는 늘 끝내주게 아름다운 치파오가 등장합니다. 왕가위 감독은 이번 전시의 아트 디렉터로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는 동서 문화권 모두에게 의미 있는 전시를 보여주길 원했어요. 그건 제 생각과 완벽하게 일치했죠.

VK 그렇다면 전시에는 어떤 디자이너들의 작품이 포함됐나요?

AB 이브 생 로랑 시절의 톰 포드가 중국 황실 복식을 보고 만든 화려한 스팽글 드레스, 15세기 청자를 꼭 닮은 로베르토 카발리와 알렉산더 맥퀸의 이브닝 드레스, <화양연화> 속 치파오와 비슷한 존 갈리아노의 디올 드레스, 아주 호사스러운 버전의 마오 재킷 같은 이브 생 로랑의 이브닝 드레스 등등. 무려 130여 점의 하이패션 작품들이 관람객들을 기다립니다. 또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코코 샤넬, 장 폴 고티에, 마크 제이콥스, 칼 라거펠트, 랄프 로렌, 드리스 반 노튼, 폴 푸아레, 폴 스미스, 지암바티스타 발리, 매리 카트란주 등. 디자이너 명단을 다 언급하자면 끝도 없죠.

 

VK 전시를 준비하며 가장 중요하게 여긴 건 뭔가요?

AB 일본 문화를 분석한 롤랑 바르트의 책을 보면, ‘진짜’ 일본을 알려주려고 하는 게 아닌, 이방인으로서, 여행자로서 자신의 눈에 보인 일본을 그린 거라고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이번 전시도 마찬가지죠. ‘진짜’ 중국 문화에 관해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패션사에 이름을 남긴 천재 디자이너들의 눈에 비친 중국이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으로 포장된 것이지만 패션의 영역에서 여러 사람들이 오랜 세월을 거치며 함께 만들어낸 중국의 모습이죠.

VK 2011년 전시만큼 인기를 끌 수 있을까요?

AB 맥퀸 전시는 그야말로 기록적이었습니다. 단 한 명의 디자이너를 주제로 그토록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었죠. 그에게 패션은 자신의 섬세한 감정을 표현하는 도구였습니다. 그렇기에 맥퀸 컬렉션에서 엄청난 감동을 느낄 수 있었죠. 아마 다시는 그만큼 호응을 얻는 전시를 만들지 못할 수도 있어요. 패션계가 아직 맥퀸의 이름조차 모르던 시절, 이사벨라 블로우의 권유로 런던 리츠 호텔에서 그의 초기작들을 본 적 있어요. 그는 호텔 객실을 빌려 프라이빗 프레젠테이션을 선보이고 있었죠. 이미 그때부터 모두가 그의 실력에 감탄했답니다.

VK 전시 결과는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을 겁니다. 하나의 전시를 기획하고 준비하는 과정이 그토록 매력적인 이유는 뭔가요?

AB 전혀 연관 없어 보이는 다른 주제들을 엮어 하나의 이야기로 들려주는 과정이란! 가령 세계 경기 침체기에는 패션이 오히려 더 낭만적으로 변합니다. 비오네와 스키아파렐리를 중심으로 어느 시기보다 로맨틱했던 30년대를 떠올려보세요. 이런 예상치 못한 관계들을 엮어 하나의 전시로 기획하는 일이 무척 즐겁습니다.

VK 패션에는 늘 관심이 많았나요?

AB 아주 어릴 때부터 패션을 좋아했습니다. 같은 잡지들이 창간되던 8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냈죠. 무척 강해 보이는 동시에 부드러운 면이 있는 레이 페트리(Ray Petri)의 패션 이미지에 흠뻑 빠져 지냈어요. 그때도 음악과 패션의 연관성에 관심이 많았어요. 특히 펑크 음악!

VK 그러고 보니 2013년 전시는 우연이 아니었군요. 그 외에도 당신의 흥미를 끄는 분야가 있나요?

AB 좀 뜻밖으로 여길 수 있겠지만, 저는 요리를 무척 좋아합니다. 마커스 사무엘슨 셰프에게 요리 지도를 받는 ‘Man with a Pan’ 프로젝트에도 참여한 적 있죠. 물론 요리를 즐기는 만큼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도 좋아합니다.

VK 그렇다면 당신이 추천하는 뉴욕 최고의 맛집은 어디인가요?

AB ‘레이디 엠(Lady M)’!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크레페 케이크를 만듭니다. 한 입 먹는 순간 천국에 온 기분이 들 정도죠. 안나 수이도 저의 추천으로 레이디 엠의 단골이 됐어요.

VK 또 어떤 전시들이 당신의 머릿속에서 기획되고 있나요?

AB 우선 이번 전시가 잘 마무리되길 바랍니다. 이후에 다음 프로젝트에 돌입하겠죠. 어떤 주제로 전시를 하든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동시대적 연관성을 찾으려고 합니다. 가령 기획 당시에는 <다크 나이크> <스파이더맨> 같은 영화가 대인기였죠. 패션사를 총망라해 다루지만 시대정신을 담은 전시를 기획하는 게 제 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