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피들의 과일 주스

패션이 생성되고 발현되는 축하 자리는 늘 샴페인 차지였다. 그곳에서 멋들어진 물을 마시는 게 폼 나 보인 적도 있었다. 이젠 세련된 용기에 담긴 과일 주스를 들고 마시는 게 쿨한 태도.

아이스 아메리카노 대신 알록달록한 주스를 들고 다니는 것이야말로 스타일과 건강까지 챙기는 동시대적 룩! 왼쪽 모델의 블라우스와 주홍 스커트는 미우미우(Miu Miu), 비즈 재킷은 루이 비통(Louis Vuitton), 토트백은 프라다(Prada), 시계는 애플 워치(Apple Watch), 반지들은 구찌(Gucci)와 루이 비통. 오른쪽 모델의 니트 톱과 벨트, 숄더백은 모두 루이 비통, 플리츠 스커트는 구찌, 시계는 샤넬(Chanel), 반지들은 판도라(Pandora).

아이스 아메리카노 대신 알록달록한 주스를 들고 다니는 것이야말로 스타일과 건강까지 챙기는 동시대적 룩! 왼쪽 모델의 블라우스와 주홍 스커트는 미우미우(Miu Miu), 비즈 재킷은 루이 비통(Louis Vuitton), 토트백은 프라다(Prada), 시계는 애플 워치(Apple Watch), 반지들은 구찌(Gucci)와 루이 비통. 오른쪽 모델의 니트 톱과 벨트, 숄더백은 모두 루이 비통, 플리츠 스커트는 구찌, 시계는 샤넬(Chanel), 반지들은 판도라(Pandora).

서울 패션 중심의 ‘물’이 달라졌다. 샤넬 패션쇼 때처럼 잘나가는 해외 패션 피플들이 놀러 왔거나 한류 스타들이 패션 행사장에 몰려들어서가 아니다. 이태원을 주름잡던 파티 피플들의 대대적 물갈이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물’이 바뀐 것뿐이다. 돔 페리뇽이 있을 자리에 맑고 선명한 색깔의 주스가 놓이기 시작한 것(그렇다고 황금빛 샴페인이 종적을 감춘 건 아니다). 심지어 뻔한 주스가 아니다. 파리 봉 마르셰 백화점 식품관에 진열해도 꿀리지 않을 세련된 패키지에 맛은 또 어떤가. 섬유질 찌꺼기가 혀를 휘감지 않은 개운한 식감에다 여러 과일과 채소 본연의 맛을 말 그대로 ‘라이브’로 느낄 만한 신개념 주스!

시각과 미각에 관해 유별날 만큼 까다로운 패션 피플들이 새로운 주스에 열광하고 있다. 사실 그들은 촬영장이든 행사장이든 만나기만 하면 신상 가방이나 구두, 새로운 외투와 청바지에 대해 수다를 떠는 종족이다. 하지만 언제부턴지 대화 내용을 바꿨다. 주제는? 건강. 모이면 해독 주스나 필라테스는 물론, 퍼스널 트레이너가 누군지, 혹은 지압을 잘하거나 침을 잘 놓는 용한 곳에 대해 정보를 나눴다. 그런 시기에 새로운 공간과 최신 물건에 누구보다 민첩한 촉을 지닌 홍보 담당자들이 <보그> 같은 패션 잡지사에 들를 때 어여쁜 케이크나 수입산 마카롱 대신 이런 주스를 들고 왔다. 그러자 주스가 패션 피플의 대화 가운데 음료수로 사용돼 식도를 타고 꼴깍 넘어가는 데 그치지 않고 혀끝과 입술 바깥에서 열띤 토론의 주제가 됐다. “아보카도는 얼굴 살을 안 빠지게 한대” “케일은 유난히 피부에 좋다면서?” 등등.

“어쩐 일인지 저를 포함한 패션 쪽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건강이 나빠졌어요. 그래서 다들 비슷한 고민을 털어놓기 일쑤였죠.” 신사동 가로수길과 도산공원 인근의 퀸마마 마켓 1층에서 ‘노박주스’를 운영 중인 노승미는 건강상의 문제로 인해 주스 브랜드를 론칭하게 됐다. “휴롬이 히트 친 뒤, ‘머시쥬스’ ‘스퀴즈 빌리지’ 같은 1세대 주스 브랜드가 하나둘씩 생겼고, 미란다 커의 해독 주스까지 유행하던 시기였어요.” H&M 한국 론칭부터 여러 홍보 회사에서 10여 년 넘게 일한 그녀는 주스계의 놈코어를 표방해 철저히 ‘내추럴’을 지향한다. 특히 식물로 한가득 꾸민 가로수길 노박주스 매장의 인테리어는 단숨에 디자이너 윤한희의 눈에 들었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지금 서울에서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퀸마마 마켓에 낸 두 번째 매장이다.

까다로운 패션 피플들의 시각과 미각을 사로잡은 주스들! 왼쪽부터 차례로 ‘스퀴즈 빌리지’ ‘노박주스’ ‘에너지키친’ ‘주시’ ‘콜린스 그린’.

까다로운 패션 피플들의 시각과 미각을 사로잡은 주스들! 왼쪽부터 차례로 ‘스퀴즈 빌리지’ ‘노박주스’ ‘에너지키친’ ‘주시’ ‘콜린스 그린’.

그런가 하면 ‘주시’는 요새 가로수길보다 더 잘나가는 것들로 밀집된 경리단길의 10평쯤 되는 주스 부티크다. 이곳에 가면 서울 패션계에서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 이름난 멋쟁이 셰프 박세훈을 가끔 볼 수 있다(어느 매체는 그를 ‘셀프 요리사’로 지칭했다). 그는 뉴욕에 머물던 2008년쯤 막스 거슨 박사에 의해 도입된 암 치료 요법을 주목했다. “엄격한 채식주나 화보 현장 스태프들은 수십 병씩 한꺼번에 주문하고 있다(스타급 스타일리스트 정윤기는 어느 광고 촬영장에서 주스를 맛본 뒤 몇몇 잡지사에 연락해 이런 주스는 꼭 다뤄야 한다며 소문낼 정도). 덕분에 이제 패션 쪽에서 그저 그런 주스를 마시는 사람은 드물다. 다들 건강하며 쿨한 주스를 찾는 데다 주스와 관련된 무언가를 시작하길 원한다. 최신 경향과 문화를 재빨리 대중에게 소개하는 패션 브랜드 역시 이런 주스를 마케팅으로 활용한다. 얼마 전 멀티숍 ‘플랫폼 플레이스’나 에스파드류 전문 브랜드 ‘솔루도스’는 노박주스에 러브콜을 보내 팝업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그 결과 솔루도스만을 위한 주스 메뉴를 개발해 2주 동안 가로수길 노박주스 매장에서 판매했고 에스파드류도 함께 진열하는 등의 이벤트를 곁들였다.

생과일 주스, 건강 주스, 주스 바, 주스 클렌징, 디톡스 주스, 착즙 주스 등등, 우리는 지난 몇 년 동안 주스의 급격한 변화를 목격했다. 그리고 지금도 주스는 계속 바뀌고 있다. 특히 패션 관점에서 주목할 지점은 언제 어디서든 존재감이 돋보이는 외모, 그러니까 포장이다. 주스 트렌드가 최고조에 달하고 서로 비슷비슷해 보이자 최근 주스 브랜드 사이에서는 즙을 내는 특별한 기계만큼 포장이 중요해졌다. 핸드백에 쏙 들어갈 가늘고 길쭉한 사이즈의 주시는 박세훈과 크리에이티브 집단 ‘엘리펀트’가 함께 디자인한 패키지다(엘리펀트는 주시를 함께 운영한다). 노박주스는 그래픽 디자이너 옥근남의 솜씨. “‘노박’은 패션 회사에 근무하는 남편과 저의 성을 따서 만든 이름이지만, 약초 이름이기도 해요”라고 노승미는 얘기한다. “그 열매를 라벨 디자인에도 활용했어요.” 또 카카오 프렌즈 못지않게 귀여운 심벌이나(강남구청역 인근의 ‘스퀴즈 빌리지’), 과일 성분의 신세대 화장품처럼 어여쁜 용기도 있으며(한남역 근처의 ‘에너지키친’), 현대적 이미지의 간결한 그래픽이 돋보이는 음료도 눈에 띈다(광화문 쪽의 ‘콜린스 그린’). 그리고 한남역의 ‘트라이바’, 상수역의 ‘블루 프린트’, 용강동의 ‘오주스펍’ 등등. 시내 번화가의 골목골목을 누빈다면 이런 주스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피부로 쉽게 느낄 것이다.

2000년대 후반 10 꼬르소 꼬모 서울이 오픈하자 카페 테라스에서 카푸치노가 아닌 당근 주스를 마시던 이정재는 더없이 쿨해 보였다(실제로 이정재는 귤나무로 둘러싸인 이국적 분위기에서 마시는 당근 주스야 말로 매일 마셔도 질리지 않는다고 말한 적 있다). 또 청담동 마이분 주스 바에서 우유갑 모양의 유리 패키지에 담긴 초록색 밀싹 주스나 빨강 수박 주스를 둥그런 컵에 따르는 과정이 일종의 ‘패션 다도’처럼 여겨진 적도 있다. 그리고 당대 서울 트렌드의 핵심에 주스가 있다. 박세훈는 패션 관점에서 ‘식’ 문화야말로 궁극의 액세서리라고 얘기한다. “아주 잘 차려입은 뒤, 자신의 식탁에 어떤 식기와 음식이 놓여 있느냐를 주의 깊게 보기 시작했습니다.” 아울러 뉴욕에서 ‘케일’이 힙스터 야채로 급부상한 시절을 언급하며 일상의 액세서리화에 관해 덧붙였다. “케일 칩을 들고 다니며 먹는 일이 폼 나게 보인 겁니다.”

올슨 자매와 안나 윈투어가 스타벅스를 들고 다니는 모습이 웬만한 고급 가방을 드는 것 이상으로 근사해 보이던 순간을 기억하시나. 그런 모습이 파파라치에게 찍히자 다들 얼마나 따라 했는지(솔직히 고백해보자. 한 손으로 스타벅스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신상 가방을 든 채 도로에서 택시를 잡는 것을 은근히 즐긴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바야흐로 주스가 패션 선언이 되고 있다. 그러니 샤넬 보이프렌드 손목시계를 찬 손으로는 주시의 캐럿+진저+애플+레몬 주스를 쥐거나, 에르메스+애플 워치를 찬 손으론 노박주스의 사과+비트+생강 주스를 들고 있다면? 그거야말로 스타일과 건강까지 챙긴 동시대적 ‘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