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를 즐기는 새로운 방식, 펍 크롤링

맥주를 마실 때 지구력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됐다. ‘펍 크롤러’들은 한자리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이 땅에 태어나 여태까지 맛보지 못한 수천, 수만 가지 맥주를 향해 묵묵히 돌격! 최고의 맥주를 찾아 헤매는 밤은 오늘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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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에 대여섯 군데의 펍을 돌며 맥주를 즐기는 ‘펍 크롤링’이 요즘 경리단길을 중심으로 유행이다. 오직 그곳에 가야만 맛볼 수 있는 맥주를 위해 순례의 길을 떠난다. 영국에서는 이를 ‘펍 크롤,’ 미국에서는 ‘바 호핑’이라고 부른다. 크롤(Crawl)은 ‘기어 다니다’라는 뜻이다.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처럼 펍을 옮겨 다니다가, 결국 ‘기어서’ 집에 가게 된다는 말도 된다. 한국식으로 표현하자면 ‘널뛰기’다. 팟캐스트 ‘토요일, 토요일은 맥주다’의 진행자이자 안암동 크래프트 비어 펍 ‘히든트랙’ 대표 정인용은 “보통 널뛰러 가자고 하죠. 혹은 ‘펍 투어’라는 말도 자주 써요”라고 말했다. 특정한 음주 시간대도 사라졌다. ‘낮술’이라고 거창하게 정의할 필요도 없다. 24시간 커피숍을 찾듯 펍 크롤러들은 크래프트 비어 펍에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커피 대신 맥주를 마신다.

펍 크롤링을 하기 가장 적당한 곳은 크래프트 맥주의 시작과 부흥을 이끈 이태원과 경리단길이다. “일단 ‘사계’에서 시작해 흑장미나 사계 페일 에일을 마셔요. 그다음에는 ‘파이루스’ 차례죠. 트로피컬 IPA를 한 잔 마셔주고 녹사평으로 넘어갑니다. 이태원과 경리단길 연결 고리가 바로 ‘메이드인퐁당’이죠. 여기서 벨지안 블론드 에일을 마시고 페일 에일이 괜찮은 ‘맥파이’와 ‘더 부쓰’로 넘어갑니다. ‘멀로니스펍앤그릴’에 도착하면 아마 인사불성일 텐데 사우디를 마시고, 요즘 가장 핫한 ‘남산 케미스트리’에서 대미를 장식하세요. 코스는 거꾸로 돌아도 됩니다.” 토토맥 공동 진행자이자 ‘밴드 오브 브루어스’ 정영진 대표가 짜준 펍 크롤링 핵심 코스다. 일곱 브루어리의 서른한 가지 맥주를 메뉴판에 올려 골라 먹는 재미를 가득 채운 남산 케미스트리는 10월 말까지 석 달간만 운영되는 팝업 스토어다. 강남에는 퐁당 크래프트 비어 컴퍼니, 미켈러바, 콜드컷츠, 밴드 오브 브루어스, 브롱스로, 홍대에서는 퀸즈에일, 온탭으로 이어지는 코스가 있다. 외국에서는 펍이 모인 거리를 걸어서 이동하거나 자전거, 지하철, 버스 등을 이용해펍을 찾아다닌다고 하지만, 핵심은 와인보다 종류가 다양하다는 ‘맥주 체험’이다.

토토맥의 또 다른 진행자 박상범은 널뛰고 있는 맥덕들은 어딜 가나 티가 난다며 이들의 특징을 들려줬다. 바에 앉아 자꾸만 질문을 하거나, 혼자 여러 잔을 한꺼번에 시키고 비교해가며 마신다거나, 여럿이 와서 각자 다른 메뉴를 시켜서 나눠 마시며 품평회를 연다는 것. ‘덕심’이 있으면 모이는 곳이 비슷하기 때문에 혼자 가도 펍 크롤링을 하다 보면 꼭 아는 사람을 만나고 옮길 때마다 멤버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기도 한다고. SNS는 가장 빠른 신상 맥주 정보 공유의 장이다. 네이버에는 ‘맥주탐험대’라는 카페도 등장했다. 펍 크롤링은 단순한 맥주 체험을 넘어 도시를 구경하고 새로운 친구를 만나는 사회적 기능까지 겸하는 셈이다.

펍 크롤링에서 음식의 자리는 크지 않다. 배가 부르면 미각이 둔해지기 때문에 준비운동 삼아 간단히 식사를 하고 ‘널뛰기’에 나서는 게 보통이다. 까스활명수마냥 어떤 기름진 음식도 소화시켜버리는 라거와 달리 에일 맥주는 그 자체로 포만감이 크고 페어링도 까다로운 편이다. 한자리에서 서른 가지 맥주를 맛볼 수 있는 ‘미켈러바’의 이남경 매니저는 맥주만 시키는 손님과 음식과 함께 시키는 손님의 비율이 7:3이라며, 이 변화를 반영해 타파스 스타일로 푸드 메뉴를 개편했다고 했다. 요즘 크래프트 비어 펍은 피자, 소시지, 햄버거 등 전통적인 맥주 안주 외에도 치즈, 하몽, 생햄 등 맥주의 맛을 풍부하게 해주는 음식으로 메뉴판을 채운다. 맥주만 주문하면 ‘안주 시키셔야 하는데요’ 하며 짝다리 짚고 서 있던 종업원들도 사라졌다. 더 다채로운 맛을 음미할 수 있도록 전용 잔의 사이즈도 다양해졌다. 미켈러바는 200ml의 작은 잔에 서빙하고, 혼자 와도 어색하지 않도록 바 좌석과 서랍 테이블 좌석도 두고 있다. 맥주에 대해 대화하는 문화를 만들고자 메뉴판에 친절한 설명도 생략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맥주에 취향이라는 잣대를 적용해야 할 만큼의 선택지라는 게 없었다. 소규모 양조장은 직영 업소에만 맥주를 공급해야 했던 법규가 비로소 풀린 게 지난해다. 그제야 펍에선 한쪽 벽면에 촘촘히 탭을 꽂을수 있게 되었다. 양조장과 판매자, 양조장과 양조장이 협업하는 케이스도 늘고, 창의적인 레시피가 세상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행복한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로 맥주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메뉴 선택이 어렵다면, 물어보면 된다. 크래프트 비어 펍에는 비어 텐더, 브루 소믈리에 등 전문가들이 상주한다. 와인을 처음 접했을 때 드라이, 스위트로 접근한 것처럼, 단맛, 신맛, 쓴맛으로 물어봐도 좋고, 기존에 좋아하는 브랜드 맥주를 들며 추천을 요청해도 좋다. 맥주의 성격에 따라 마시는 방법을 달리해봐도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향이근사한 맥주는 향부터 음미한 후 빛깔을 즐기고 목 넘김과 함께 다시 한 번 올라오는 향을 즐긴다. 나라별로 접근해보는 것도 선택지를 좁혀갈 수 있는 방법이다.

“오늘 마실 맥주를 내일로 미루지 마라.” 이태원의 한 맥줏집에 걸려 있는 이 문구를 본 맥덕들은 누구나 가슴 찡한 감동을 느낀다. 펍 크롤링은 다다익선 맥줏집 정복기가 아니다. 보리, 홉, 효모가 만들어낸 수만 가지 풍미 중 내 취향에 맞는 맥주를 찾아 나서는 길이다. 취향이란 건 수많은 선택과 경험을 통해 만들어지지 않던가. 시원하고 청량한 맥주만 마시던 과거도 행복했지만 세상은 넓고 마셔야 할 맥주는 많다는 걸 알게 된 이상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다. 최고의 맥주를 찾아 헤매는 밤은 오늘도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