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y the Kingdom

북촌 골목길에 조용히 자리한 아티스트 노보의 작업실. 달고 즐거운 인생을 기원하는 공간은 그가 설계한 유일무이한 질서와 리듬에 따라 살아 숨 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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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작품과 물건의 경계가 모호한 사물로 가득 차 있는 노보의 작업실.

하루도 땅을 파지 않는 날이 없고, 1년만 지나도 동네 분위기가 바뀌는 나라. 집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집값이 오를까, 오르지 않을까’인 우리 세대에게 고향이란 어떤 의미일까 생각한다. 설치, 회화, 타투 등 장르를 넘나들며 예술, 문화, 개인적인 경험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아티스트 노보의 작업실은 한옥이고 종로구 계동에 있다. 야트막한 담장은 구분의 의미일 뿐 은폐를 위함이 아니다. 40~50년 한자리에 살며 이웃의 사정을 알고 지내는 곳. 택배 박스에 주소나 이름이 빠져 있어도 배달되어 오는 동네에서 노보는 비로소 고향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왕십리에서 태어나서 오래 살았어요. 분당에 잠깐 살다가 성수동으로 이사 갔는데 분당은 완전 신도시로 바뀌었고, 성수동은 지금 가장 변화가 많은 동네죠. 제가 살던 아파트는 다 사라졌어요. 계동은 서울에서 유일하게 큰 틀이 바뀌지 않은 동네 같아요. 20대 중반에 와서 지금 30대 중반이니까 가장 오래 산 동네가 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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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가 품은 세월만큼 건물의 나이도 상당하다. 그는 공간을 짚어가며 과거 이력을 알려주었다. “100년 가까이 된 한옥이에요. 여기 유리문은 정자로 나가는 문이었고, 거실로 사용하는 공간은 원래 대청마루였죠. 참, 곧 동네 분들과 상의해서 집까지 올라오는 계단을 바꿀 것 같아요. 아파트는 계단 같은 걸 바꾼다는 생각도 못하잖아요. 한옥은 구조적인 즐거움이 있어요.” 나무, 흙, 돌처럼 자연 재료로 지은 한옥은 사람과 같이 늙는 집이다. 어떤 주인을 만나느냐에 따라 폭삭 망가지기도 하고 다듬어 예뻐지기도 한다. “한옥의 기본 베이스가 나무잖아요. 나무는 계속 사용해야 해요. 보살펴주지 않으면 공간이 죽어요. 예전에 이 집에 사시던 할머니는 항상 나무를 닦아주셨다고 해요. 손이 많이 가지만 그만큼 집에서 느낄 수 있는 여운이 있어요.” 그는 천장의 대들보, 서까래 등을 보며 저렇게 큰 나무가 부자재로서 자신의 공간까지 와 있는 게 늘 신기하다고 했다. “부엌 뒤에 향나무가 있는데 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제 눈으로 본 건 처음이에요. 전 주인 할머니는 찻물을 달여서 나무에 주셨대요.”

사슴뿔, 박제한 사슴 머리, 쇠머리뼈 등 동물의 뼈가 곳곳에 걸려 있다. 부러져도 단단해지는 뼈의 속성을 좋아해서 꾸준히 모으고 있다.

사슴뿔, 박제한 사슴 머리, 쇠머리뼈 등 동물의 뼈가 곳곳에 걸려 있다. 부러져도 단단해지는 뼈의 속성을 좋아해서 꾸준히 모으고 있다.

수년간 노보의 손길이 구석구석 닿은 한옥은 정말 ‘유니크’하다. 그의 작품 세계와 살아온 세월이 물건과 공기의 형태로 가득 차 있다고 하면 설명이 될까.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거실이라고 불릴 법한 공간을 중심으로 타투 작업실, 정자, 화장실 등이 규칙 없는 블록처럼 붙어 있다. 집 안을 채우고 있는 물건은 인테리어 장식품이라기보다 그의 예술 활동에 영감을 주는 요소에 가깝다. 한쪽 벽에 가득 붙어 있는 십자가, 곳곳에 놓여 있는 마리아상, 바이올린이 대표적이다. “어머니가 천주교 신자였어요. 전시할 때마다 마리아상을 새롭게 작업해서 전시회장에 둬요. 작품이라기보단, 축구로 얘기하면 열세 번째 플레이어인 거죠. 전시 시작부터 철수까지 지켜봐주는 오브제예요. 그리고 어머니가 부재한 상황에서 항상 제 옆에 바이올린이 있었어요. 연주를 하는 건 아니에요. 바이올린의 소리나 형태에서 영감을 받아서 작업을 해요.”

예술 작품과 물건의 경계가 모호한 사물로 가득 차 있는 노보의 작업실.

예술 작품과 물건의 경계가 모호한 사물로 가득 차 있는 노보의 작업실.

작업실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공간은 손님을 맞이하는 곳. 노보의 예술 활동은 자신에서 시작하지만 전혀 다른 분야의 예술가, 때로는 상업적인 브랜드, 타투를 의뢰하는 사람까지 함께 하는 작업을 꺼리지 않는다. 사람을 만나서 대화를 하는 시간으로부터 많은 에너지를 얻는 그는 대문에 ‘감락재’라는 현판을 걸어두었다. ‘달 감’에 ‘즐길 락’. 여기서 나누는 대화와 모든 것이 달고 즐겁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지은 말이다. 알파벳, 숫자 등이 기호처럼 그려져 있는 소파는 과거 전시에서 선보인 작품이다.

입춘대길의 의미를 재해석해 표현한 그림을 대문에 붙여두었다. 친구로부터 받은 선물이다.

입춘대길의 의미를 재해석해 표현한 그림을 대문에 붙여두었다. 친구로부터 받은 선물이다.

“혼자 살던 시절 심심하고 외로워서 ‘가족들’이라는 주제로 그린 그림과 인형, 절대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보물만 넣어두었다는 금고(현금이나 집문서가 아닌 사진, 편지 등이 들어 있다), 고양이에게 죽임을 당한 비둘기의 두개골, 좋아하는 잡지의 한 페이지를 넣어 걸어둔 액자, 아들이 벽에 남긴 낙서, 몇 년째 참가하고 있는 마라톤 메달 무더기… 구석구석 사연이 깃들지 않은 물건이 없는 노보의 작업실은 마치 그의 삶을 자양분 삼아 형성된 보물섬 같다. “이 공간엔 제 것이 아닌 것이 없어요. 그리고 모든 건 다 제가 두고 싶은 곳에 뒀죠. 완전히 제 왕국이에요.(웃음)”

앞으로 가장 기대되는 공간으로 꼽은 정자. 여름과 가을 창밖 풍경이 좋다.

앞으로 가장 기대되는 공간으로 꼽은 정자. 여름과 가을 창밖 풍경이 좋다.

노보는 매일 아침 아들을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걸어서 작업실에 도착한다. 사람을 만나고 작업을 하고 책을 보고 그림을 그린다. 공간을 채우고 다시 공간으로부터 영감을 받는 과정을 통해 그의 작품 세계는 새로워지고 견고해진다. “10월에 정준영 작가와 함께 하는 2인전이 있고 현대무용 공연 무대에도 오를 예정이에요. 제게는 하나하나가 도전이에요. 요즘에는 무모한 시도나 ‘말도 안 되는 걸 하고 있네’라는 생각이 드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요. 아귀가 맞고 완벽한 상태에서 완성된 상품을 보여주려고 하죠. 제가 하고 싶은 작업의 방향은, 완성체라기보다는 그 과정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을 행동해보지 않으면 얻을 수 없거든요. 딱 결과물로 단정 지을 수 없는 작업이다 보니 계속 새로운 오브제나 환경에 관심을 가지는 것 같아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으로 불리고 싶냐고요? 그냥 노보. 저는 제가 유일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