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유동성이라는 이름의 공항 예술

2018.03.16

by VOGUE

    유동성이라는 이름의 공항 예술

    혹자는 화성인을 데리고 한 군데만 가야 한다면 현대 문명을 관통하는 공항으로 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예술에 관심 있는 화성인이라면 더 좋아할 것이다. 소설가 백민석이 현대 문명의 유동성을 새겨 넣은 예술품을 보기 위해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로 갔다.

    자비에 베이앙, Great Mobile(East, West), 6.65×18.5m, Stainless steel, aluminium, polyester resin, polyurethane paint, epoxy paint, 2017.
    미지의 세계와 시간으로 이동하는 여행의 본질을 표현한 모빌 조각으로 3층 출국장 진입부에 위치해 있다.

    유동성은 경제에만 쓰이는 단어가 아니다. ‘액체와 같이 흘러 움직이는 성질’이라는 뜻의 유동성은, 현대사회의 성격을 가장 잘 말해주는 핵심어이기도 하다. 인터넷의 경계 없이 흘러 다니는 유동적인 정보는 어느덧 현대 문명의 대표적인 상징이 됐다. 비트코인이 바로 그렇다. 블록체인 기술에 기댄 이 가상화폐는 어떤 정부나 중앙은행의 통제도 받지 않은 채 흘러 다닌다. 달러화나 주식처럼, 금과 기업 가치라는 실물에 기반을 두고 있지도 않다. 최근에 나타난 눈에 띄는 현대 문물인 가상통화는 유동성이라는 현대 문명의 성질을 극단까지 추구한다.

    지난 1월 18일,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이 문을 열었다. 그동안 제1터미널에서 체크인을 하기 위해 길고 지루한 줄을 서봤던 여행객에게는 반갑게 들릴 소식이다. 비행기를 타고 장거리 여행을 할 때 꼭 거쳐야 하는 공항도 현실 세계에 구현된 유동성의 장소다. 공항은 현실에 존재하는 어떤 장소보다 유동적이다. 우리는 공항을 통해 평소에는 그토록 넘기 까다로운 국경을 바람처럼 넘나들고, 조상들이 했듯이 걸어서라면 수개월이 걸린 먼 나라를 하루 만에 오가고, 옛날이라면 접근이 불가능했을 대륙과 대양의 외진 곳도 편안히 좌석에 앉아 지나친다. 공항이 가지는 유동성은 인터넷 전산망에 흘러 다니는 전기신호 다음으로 자유롭고 빠르다. 그런 공항의 새로운 터미널에 예술 작품이 전시됐다. 이름도 아트와 에어포트를 합친 ‘아트포트’다.

    율리어스 포프, Bit.Fall
    각 11.4×4.8m(총 2점), Pump, software, water, truss, 2018.
    세계 각국의 실시간 검색어를 9개 국어로 추출,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다국적 문화 텍스트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1층 수하물 수취구역(서편)에 설치되어 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계단과 에스컬레이터의 수직 통로에 있는 대형 모빌 작품이다. 프랑스 예술가 자비에 베이앙(Xavier Veilhan)의 ‘그레이트 모빌(Great Mobile)’은 건축물에서 딱히 처리하기 어려운 유휴 공간을 시각적인 즐거움으로 채운다. 부드럽게 처리된 파란색 계통의 조각은 바람이 없는 공항 실내에서 허공에 둥실 떠 있는 부표처럼 보인다. 부표는 선을 그을 수 없는 바다에서 항로를 알려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부표는 바닷길을 떠난 선원과 여행객들의 불안한 마음을 잡아주고 감춰진 위험의 요소를 돌아가거나 피하게 해준다. 부표는 수면에 가볍게 떠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위치를 이탈하지 않도록 해저에 단단히 연결해둔다. 겉모습은 가벼워 작은 물결에도 흔들리지만, 부표의 항로 표지라는 역할은 결코 떠내려가면 안 될 만큼 무겁다.

    ‘그레이트 모빌’ 역시 가볍고 무겁다. 여행객의 눈과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을 만큼 충분히 부담 없고, 그러면서도 파란색 계통의 색을 써 하늘길을 나서거나 돌아온 이의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힌다. 파란색은 심리에 안정감을 더해주는 색이다. 공항 관계자는 이 작품이 제2터미널 아트포트의 랜드마크라고 설명한다. 하늘길의 입구에 설치된 부표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공항을 찾은 여행객들의 마음에 예술의 형식으로 가볍게 드리워진 닻의 역할을 한다.

    체크인을 하고 수하물 수취구역에 들어가면 율리어스 포프(Julius Popp)의 설치 작품을 보게 된다. 벽과 나란히 서 있는 이 작품은 전에 없는 형식으로 여행객들을 즐겁게 한다. 물방울로 된 글자들이 하늘에서 떨어진다. ‘OWL’ ‘GETS’라는 글자가 가로 2m, 높이 1.5m는 족히 되어 보인다. 글자들은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새에 허공에 머물다 사라진다. 채 0.2초도 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짧은 순간에도 무슨 글자인지 읽을 수 있을 만큼 정확한 형태를 갖춘다. 잠깐 멈춰서 작품을 보는 동안에도 수백 개의 글자들이 실시간으로 지나간다.

    디자인 비채, Media Cloud,
    7.5×2.5m(동편), 11×9m(서편), LED, steel, kiosk, 2018.
    3층 면세구역 유휴 공간이 세계 각국의 여행지를 간접경험할 수 있는 인터랙티브 미디어 라운지로 변신했다.

    율리어스 포프의 ‘비트.폴(Bit.Fall)’은 제목 그대로 ‘비트 폴’이라는 기계장치로 물방울 글자들을 만들어내는 작품이다. 컴퓨터로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를 모아 비트 폴 머신에 보내면, 머신이 물방울이 떨어지는 속도를 조절해서 허공에 글자들을 구현하는 방식이다. ‘비트.폴’에는 전통적인 미술 작품에서는 볼 수 없던 재료가 들어 있다. 스테인리스 스틸, 알루미늄과 함께 ‘Code’가 포함되어 있다. 코드란 부호로, 컴퓨터 프로그램에 쓰이는 데이터를 말한다. ‘비트.폴’ 역시 앞서 말한 비트코인과 마찬가지로 현실 세계의 실물에 기반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인터넷의 정보는 허공에 그려진 물방울 글자처럼 가볍게 떠다니고 잠깐만 머물며, 경계마저 유동적인 세상을 끊임없이 흘러 다니며 소비된다.

    수하물 수취구역에서 눈을 돌려보면 김병주의 설치 작품 ‘앰비규어스 월(Ambiguous Wall)’도 있다. 공항 벽 한 면에 가로 20m, 세로 4.7m 크기로 서울의 풍경을 압축해 보여준다. 서울역 구 역사가 한편에 보이고 다른 편에는 서울 관광 코스에서 빠지지 않는 광화문의 전경이 펼쳐진다. 독립문도 눈에 띈다. 하지만 구 역사든 광화문이든 작품에 형상화된 명소는 파스텔 톤의 온화한 색으로 채색되어 있어 실물이 주는 시각적 무게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겉모습도 실물처럼 면과 면으로 이뤄져 있지 않고, 스틸로 된 직선으로 직조되어 있다. 따라서 석조 건물의 외관이 가지는 육중한 색과 중량감은 성기고 가벼운 추상적인 질감을 갖게 된다.

    이것이 ‘앰비규어스 월’이 거대한 크기에도 불구하고 여행객들에게 부담스럽게 다가오지 않는 이유다. 작품은 크고 육중한 역사적인 기념물을 온화한 채색의 직선으로 해체해, 베틀에 넣고 씨줄과 날줄을 엮어 날렵하게 피륙을 짜듯 새로운 풍경으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 작품의 사이즈는 크고 소재는 무겁지만, 작품은 여행객들에게 무엇도 요구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여행객들의 눈에 마치 잔상처럼 남아, 서울 시내에 들어섰을 때 실제 풍경 위에 애매모호한 베일처럼 드리워질 것이다. 작품은 직선을 가로세로로 짜 넣기만 한 것이 아니라 부조처럼 이곳저곳이 입체적으로 튀어나와 있다. 건축물의 귀퉁이 부분인데, 좌우로 지나다니며 보면 작품의 소실점이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간단한 시각적 효과로, 이 효과가 벽면에 고정된 작품에 유동성을 실어준다. 따라서 여행객들은 한 지점에 고착되어 있는 서울 풍경만 보게 되지 않는다. 육중하지만 가볍고, 고정됐지만 흘러 다니며, 오래됐지만 신선한 서울의 또 다른 잔상을 작품에서 얻어간다.

    김병주, Ambiguous Wall, 20×4.7m,
    Stainless steel, urethane coating, 2018.
    대한민국의 첫 관문에서 만나는 서울의 건축물을 통해 예술적 시공간을 완성한다. 랜드마크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은 1층 수하물 수취구역(동편)에서 만날 수 있다.

    면세구역으로 올라가면 지니 서의 ‘윙즈 오브 비전(Wings of Vision)’을 만난다. 사전 정보 없이 이 작품과 마주하는 여행객이라면 이것이 무려 1.5km나 되는 기나긴 예술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공항을 떠날 수도 있다. 그만큼 공항 시설과 잘 어우러져 있다. 주변 경관과의 어울림은 다중 이용 장소에 설치되는 예술 작품이 갖춰야 할 미덕이다. 탑승지역에는 여행객들에게 낯익은 면세품 상점이 늘어서 있다. 이 작은 임시 구조물을 파빌리온이라고 하는데 ‘윙즈 오브 비전’은 파빌리온의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따라서 별도의 공간을 요구하지 않고, 공항의 이용에도 방해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시각적으로 공항에 산뜻한 기운을 더한다. 창밖의 구름을 실내로 끌어온 듯한 구름 문양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색의 변화도 구현하고 있다. 동쪽 윙 지역에서 새벽녘의 어슴푸레한 청색 구름으로 시작해, 서쪽 윙 지역에서 황혼 녘의 노을빛으로 가득한 구름으로 마무리된다.

    구름은 탑승 게이트의 전면 유리창을 통해 내다보이는 바깥세상의 반영이다. 공항이 국경을 넘나드는 유동성의 장소인 것처럼 ‘윙즈 오브 비전’의 구름 역시 안과 밖, 인공물과 자연의 경계를 넘나드는 유동성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그렇게 이 작품은 벽면을 장식하는 일러스트처럼 자연스레 여행객과 만난다. 예술 작품이라고 구태여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고 감상할 것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저 흘러가는 구름처럼, 곧 비행기를 타고 떠날 여행길처럼, 흘러가는 유동성의 시선으로, 귓전에 들리는 부담 없는 리듬의 배경음악처럼 존재한다.

    지니 서, Wings of Vision, 각 60~100×3.6m, Sheet vinyl, 2017.
    시간과 빛의 흐름을 담은 구름 속의 산책을 표현하는 작품으로 탑승 게이트(윙 지역)로 이동하는 1.5km 길의 동쪽과 서쪽으로 펼쳐진다.

    ‘윙즈 오브 비전’도 그렇지만, 제2터미널에 설치된 모든 예술 작품이 공항 시설에 너무도 자연스럽고 눈에 띄지 않게 어우러져 있어 내심 놀랐다. 나의 소감으로는 ‘공항에 스며들어 있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것 같다. 예술 작품이라고 튀어 보인 다면 공항을 찾은 정신없고 바쁜 여행객들 눈에 편치 않을 것이다. 하긴 공항 자체가 너무 커서 아트포트의 대형 작품이 상대적으로 커 보이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강희라, Hello, 2018. 광화문, 에펠탑 등 각 나라의 랜드마크를 한글 자모 형태의 발광체로 형상화한 키네틱 아트.

    공항 측에서는 작가들에게 작품을 의뢰하면서 사전에 별다른 주문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작가들은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대개 유동성과 관련이 있는 작품을 제작했다. 공항이라는 장소가 가지는 보편적인 이미지가 이들로 하여금 유동성을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그레이트 모빌’의 ‘Mobile’은 말 그대로 쉽고 빠른 이동성을 의미하고, ‘비트.폴’은 빛의 속도로 흘러 다니는 인터넷의 ‘비트’를 가져와 구현한 작품이며, ‘앰비규어스 월’ 역시 해체와 구축의 과정을 거쳐 소실점이 흘러 다니는 유동적인 서울 풍경을 재창조했다. ‘윙즈 오브 비전’은 아예 제목에 날개라는 말을 포함시켰다. 자세히 소개는 하지 않았지만 디자인 비채의 ‘미디어 클라우드(Media Cloud)’ 역시 허공에 매달린 스크린 위에 잘 알려진 명화가 흘러가도록 설치된 미디어 아트다. 클림트나 이중섭, 고흐의 대중적인 작품이 구름처럼 굽이진 스크린을, 공항의 하늘을 이리저리 흘러 다닌다.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은 사전에 요구하지도, 서로 협의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꾸려진 ‘현대 문명의 유동성’을 주제로 한 기획전의 공간이 되었다. 이는 공항이 현대 문명에서 현대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선사하는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유동성의 상징인 공항이라는 장소에서 유동성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예술 작품과 속성을 공유하며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에디터
      윤혜정
      포토그래퍼
      김선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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