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의 틸다 스윈튼
비 내리는 5월 어느 날 아침, 틸다 스윈튼이 성북동 한옥에 들어섰다. 그녀는 다소 어색할 법도 한 그림 속에 스스로를 스스럼없이 녹여냈다. 한복과 샤넬을 입고 〈보그 코리아〉와 함께한 화보 촬영 현장, 잔잔한 우국(雨國)의 풍경이 그려졌다.
“집이 매우 아름다워요. 옷은 어디 있나요? 이 각도보다는 조금 틀어진 앵글이 좋을 것 같은데요. 자세를 잡아볼게요.” 촬영 현장에서 틸다 스윈튼은 만능이었다. 스타일링과 헤어&메이크업은 물론, 카메라 앵글과 연출도 직접 체크했고, 스스로 구도를 잡아 제안하는 데도 망설이지 않았다. 틸다 스윈튼은 마치 자신의 육체를 예열하듯 톤을 조금씩 조절해갔다. 샤넬과 한복, 179cm라는 장신의 금발 모델과 한옥이라는 조합은 어색하기 마련이었지만, 그녀는 어느새 그럴듯한 그림을 뚝딱 그려냈다.
하지만 이날 틸다와의 촬영이 처음부터 순조롭게 진행된 건 아니다. 그녀는 매니지먼트를 통해 “노 로케이션, 노 트래디셔널, 그냥 모던&심플”의 컨셉을 명확히 전달해왔고, 한옥을 배경으로 한 시안에도 심드렁한 반응이었다. 세계적인 여배우가 제시하는 단호한 조건이었으니 촬영팀은 마음을 졸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까지 와서 한국 포토그래퍼와 작업하는 건데 스튜디오 촬영은 좀 아쉽지 않을까요? 샤넬과 틸다, 그리고 한국적인 멋이 어우러진다면 분명 근사한 사진이 될 것 같은데요.” 촬영팀은 그저 설득하고 설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틸다는 대스타의 괜한 고집으로 현장을 얼어붙게 만드는 타입의 배우가 아니었다. 그녀는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았고, 예정에 없던 한복과의 매치도 선뜻 마음에 들어 하며 스스로 골라 입었다. “이 옷 너무 마음에 들어요. 아름다운 곡선의 옷이에요. 오, 한복 디자이너라고요?” 다소 긴장되던 촬영장의 분위기가 온화하게 풀리는 순간이었다.
틸다 스윈튼이 한국을 찾은 건 이번이 세 번째다. 2009년 영화 <아이 엠 러브>가 상영된 부산영화제가 처음이었고, 이후 <설국열차> 내한행사로 한 번 더 서울을 방문했다. 그리고 이번 내한은 샤넬 파리-서울 크루즈쇼 참석과 <보그 코리아>와의 화보 촬영을 위함이었다. 그녀의 연인이자 아티스트인 산드라 콥, 오랜 작업 파트너인 스타일리스트 제리 스태포드가 동행했고, 아침부터 시작해 해 질 무렵까지 촬영이 이어졌다. “서울에 온다고 해서 기분이 좋았어요. 봉(준호) 감독에게도 내가 먼저 연락했습니다. 오늘도 환상적인 팀과 함께 작업하는 느낌이 매우 좋았어요.” 그녀는 열기가 넘쳤다. 비 탓에 다소 쌀쌀하던 날씨에도 틸다는 “오~ 저는 스코틀랜드에서 왔잖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라며 너스레를 떨었고, 스스로 신발, 상의를 바꿔 착용하며 촬영에 완벽을 기했다. 세세한 것 하나 놓치는 게 없었고, 더 좋은 그림을 위해서라면 수많은 NG 테이크도 감수했다. 성북동 한옥 한쪽에 자신의 세계를 슬며시 지어내듯 그녀는 홀로 한 폭의 그림이 되었다.
쉼 없이 이어지던 이날 촬영이 쉼표를 찍은 건 봉준호 감독이 방문하면서였다. 틸다 스윈튼은 이번 내한이 결정된 이후 봉준호 감독과 만나고 싶다고 전해왔다. 하지만 이 무렵 봉준호 감독은 새 영화 <옥자>의 준비를 위해 미국에 있었다. 시나리오를 쓰는 중이라고 했고, 모 잡지 인터뷰를 위해서는 화상 채팅 스카이프를 이용했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그리고 촬영 당일. 봉준호 감독은 촬영장에 잠시 들르겠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2011년 칸영화제에서의 첫 만남 이후 <설국열차> 작업, 그리고 이후 각종 영화제에서 심사위원과 게스트로 만나온 둘은 이미 친구가 돼 있었다. 둘은 전날 만나 저녁을 함께 했다고 했고, 서슴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우린 자주 봐요. 어떤 기회든 함께할 시간을 일부러 만들죠. 제가 봉 감독의 영화를 많이 봤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처음 만날 때 부터 마치 6개월 전 만난 사람 다시 보는 것처럼 친근감이 있었어요.”(틸다) 틸다 스윈튼에게 봉준호 감독은 그저 작품의 지휘봉을 쥔 영화감독이라기보다 오랜 친구에 가깝다. <설국열차> 내한 당시 틸다 스윈튼은 영화 스태프를 가족이라 부르며 친밀함을 보여줬다. 그리고 이날 촬영장에서 둘은 틸다 옷에 붙은 브로치를 떼어 서로에게 다시 달아주며 장난을 쳤다. “근데 외모가 너무 달라서(웃음) 가족으로 오해하는 경우는 없어요.”(틸다) “칸영화제에서 만나 ‘당신 팬이다’ ‘나도 네 작품 좋아한다’면서 의기투합했죠.”(봉준호) “우린 무조건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문제는 그게 언제냐였죠.”(틸다) 그래서 봉준호 감독은 본래 중년 남성으로 잡아뒀던 <설국열차>의 메이슨 역할을 여성으로 바꾸기도 했다. 확실히 고작 한 편을 함께한 사이치고는 꽤 친밀하다.
1986년 데릭 저먼의 <카라바지오>로 데뷔해 연기 경력이 30년이 넘은 배우지만, 틸다 스윈튼이 함께 작업한 감독의 수는 그리 많지 않다. 그녀는 데뷔 이후 9년 동안 데릭 저먼의 카메라 앞에만 섰고, 이후에도 웨스 앤더슨, 짐 자무시, 루카 구아다그니노 등 정해진 몇몇 감독과만 반복 작업했다. “나는 매우 아마추어적인 접근법을 가졌어요. 내가 처음 시네마를 접한 게 데릭 저먼의 작업에서였는데, 이게 나를 완전히 망쳐놨어요. 나에겐 그저 (유사)가족의 관계뿐이에요. 데릭 저먼과 영화를 만들며 가족적인 분위기에 길들었고, 이후 영화를 하면서 단 한 번도 그렇지 않은 환경에서 일해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내가 영화를 고르는 기준은 작품이 아니라 콜라보레이터죠. 배우로서 역할을 찾는 게 아니라 친구들,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느냐를 고려해요.”
틸다는 1994년데릭 저먼이 에이즈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난 뒤 한참을 밖에 나오지 못했다. 단순히 연출자가 아닌, 공통의 그림을 그려온 동료의 죽음이었기에 그랬을 것이다. 그러니까 틸다는 에이전시에 도착한 시나리오를 두세 페이지씩 넘겨가며 작품을 고르는 타입의 여배우가 아니다. 그녀는 1993년 샐리 포터와 <올란도>를 찍기 위해 올란도 분장을 한 뒤 찍은 사진집을 들고 칸영화제를 뛰어다녔고, 직접 제작과 투자에 참여한 에릭 종카의 <줄리아>, 루카 구아다그니노의 <아이 엠 러브>, 린 램지의 <케빈에 대하여> 세 편을 위해서는 무려 12년의 긴 시간을 쓰기도 했다.
“<올란도>는 5년이 걸린 것 같아요. 하지만 다 좋은 작업이었어요. 나를 더 풍요롭게 해주는 기분이었달까요. 사전 제작 단계가 긴 건 내게 문제되지 않아요. 오히려 더 흥미롭죠. 가령 당시엔 어려서 캐스팅하기 애매하던 배우가 시간이 지나 적합한 배우가 될 수도 있죠.” 틸다 스윈튼의 최신작 <어비거 스플래시>는 8월 베니스 영화제에서 공개된다. <아임 엠 러브>의 루카 구아다그니노 감독과 다시 한 번 손잡은 작품으로 봉준호 감독이 “이 영화에서 틸다는 슈퍼 섹시하다”고 호평한 영화기도 하다. 한 역할의 배우로서라기보다 한 명의 아티스트가 되어 작품을 만들어내는 틸다 스윈튼. 그래서 그녀의 영화에선 그녀의 향기가 난다.
틸다 스윈튼의 영화는 거칠게 두 종류로 나뉜다. <아이 엠 러브>나 <케빈에 대하여>, 그리고 <줄리아>와 같이 인간의 본성과 내면을 깊숙이 탐하는 종류와 분장과 메이크업으로 외모를 크게 변형해 출연한 <설국열차>와 <제로법칙의 비밀>, 그리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같은 종류. 그녀는 살인자 아들을 둔 엄마의 내면을 가슴 아프게 들고 파는(<케빈에 대하여>) 동시에 3000년 전 태어나 현대에 불시착한 드라큘라의 로맨스를 풀어내는(<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여자였고, 아들 친구와 사랑의 불구덩이에 빠진(<아이 엠 러브>) 뒤에는 뻐드렁니 의치를 낀 채 열차에 탑승(<설국열차>)하는 괴짜였다.
30년 넘는 틸다의 연기 이력을 고작 두 종류로 분류하는 게 성의 없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스크린 속 그녀는 진실하거나 기괴했다. 심지어 테리 길리엄의 영화 <제로법칙의 비밀>에서 틸다는 컴퓨터 화면 속에서만 등장한다. 또 한 번 뻐드렁니 의치를 낀 탓에 누군지 알아보는 데도 한참이 걸린다. “매우 정갈하게 정리한 구분이네요.(웃음) 그 분류가 이해되는데 저에게는 30 카테고리 정도 있는 것 같아요. 그림으로 따지면 큰 붓으로 페인트칠을 하느냐, 작은 붓으로 칠을 하느냐의 차이죠. 제 연기는 그저 영화의 프레임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틸다 스윈튼에겐 변신이란 수식어가 진부하게 들린다. 그녀는 캐릭터의 옷을 갈아입듯 연기에 임하는 게 아니라 영화의 결, 그리고 톤에 맞춰 스스로를 이입시키기 때문이다. “제 연기는 다 위장이에요. <설국열차>의 메이슨 장관이나 <제로법칙의 비밀>의 노인 쉬링크 같은 것만 큰 위장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오히려 저는 미국 교외에 사는 중산층 어머니 역이 더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어요.”
초창기 틸다가 퀴어 감독 데릭 저먼과 만들어낸 영화를 보면 틸다의 연기는 확실히 퍼포먼스에 가깝다.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실험 영화 <전쟁 레퀴엠>에서 그녀는 대사 한마디 없이 동작과 표정으로 작품에 임한다. 전쟁에 대한 반대 메시지를 마치 선언하는 듯한 이 영화에서 그녀는 일종의 퍼포머다. “나를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나를 뭐라고 묘사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배우도 아니고, 모델도 아니에요. 옛날 여권에는 직업란이 있었는데 광대나 도박사 같은 걸 썼어요.”
1995년 런던의 서펜타인 갤러리에서 그녀가 보여준 행위 예술 전시 역시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읽힌다. 그녀는 스스로 작품이 되어 자신을 전시했다. ‘The Maybe’라 이름 붙인 이 작품에서 틸다는 갤러리 중앙에 놓인 유리 상자 안에 들어가 하루 8시간씩 잠을 잤다. 틸다는 불특정 다수의 관객에게 자신을 무방비로 노출시켰고, 그 과정을 통해 공연자의 의식과 무의식을 실험했다.
“영화는 정말 좋아하는데 연기하는 걸 그리 좋아하는 것 같진 않아요. 그래도 계속 연기를 하는 건 인간 정체성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에요. 인간의 정체성은 의상 같은 거죠. 입을 때마다 변하고, 진화해요. 아이덴티티에는 여러 레이어가 있고, 그게 변하거나 충돌을 일으키거나 모순되면서 굴절을 드러내요. 저의 작업은 저라는 아이덴티티의 다양한 돌연변이가 아닐까 싶어요.” 뉴욕의 웹진 <Slant>는 틸다 스윈튼을 “결코 보통의 존재가 아닌 사람”이라 표현했는데, 확실히 그녀는 보통의 여배우와는 층위가 다른 스펙트럼을 그린다. 틸다 스윈튼에겐 세상의 경계를 흐리는 그녀만의 위장술이 있다. 그녀는 일종의 여배우 혁명이다.
틸다 스윈튼은 봉준호 감독의 신작에도 출연할 예정이다. 둘은 “계약한 건 아니에요. 우린 계약이 필요 없는 사이예요”라며 캐스팅에 대한 확언을 회피했지만 <설국열차>를 통해 한 차례 궁합을 맛본 둘이 단 한 번의 동승만으로 협업을 끝낼 것 같진 않다. “봉 감독의 현장은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에요. 작업하면서 계속 토론하고 대화할 수 있어 좋았어요. 전체적인 구조는 굉장히 견고한데 그 안에서 서로 서프라이즈를 만들어내는 식이었죠. 거시적인, 철학적인 큰 그림은 유지하면서 상세한 디테일도 놓치지 않는 재주.”(틸다) 봉준호 감독 역시 맞장구를 쳤다. “서로에게 뮤즈가 되는 관계랄까요? 배우로서의 에너지나 연기, 표현력이야 당연히 좋을 거라 예상했지만 함께 작업하면서 창작자로서 동반자란 느낌을 받았어요. 아이디어가 워낙 넘쳐나는 사람이라 전 그냥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주워 담기만 하면 됐죠.(웃음) 듀라셀 건전지 CM 속의 북 치는 장난감처럼 제가 북을 치고 있으면 틸다가 옆에 앉아 계속 탄창을 보급해주는 느낌이었어요.”(봉준호) “봉 감독은 스탠리 큐브릭과 좀 비슷해요. 매 영화 풍경은 바뀌어도 기운은 변하지 않아요. 가장 좋아하는 영화 딱 한 편을 꼽으라면 <살인의 추억>이겠지만, 모든 작품이 다른 세계, 다른 룩을 그려내고 있어서 어려운 선택이죠.”(틸다)
틸다 스윈튼의 그 탄창은 이날 촬영 현장과 인터뷰 자리에도 우수수 총알을 떨어뜨렸다. 올해 5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누군가 자신을 도발해주기를 기다렸고, 스스로 또 한 겹의 허물을 벗고 나아가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스코틀랜드의 서늘한 기운을 품고 잠시 서울을 찾았던 틸다 스윈튼. 그녀가 머문 자리에서 청명한 바람이 불었다.
- 에디터
- 이지아, 정재혁
- 포토그래퍼
- HONG JANG HYUN
- 모델
- 틸다 스윈튼(Tilda Swinton)
- 스탭
- 메이크업 / 레진 브도(Régine Bedot), 헤어 / 김정한
- 세트 스타일링
- 최서윤(Da;rak)
- 장소 협찬
- 최순우옛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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