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아티스트 니콜라스 파티
스위스 아티스트 니콜라스 파티는 생동감 넘치는 자화상과 초현실주의적 구성으로 마그리트에 대적한다.
니콜라스 파티(Nicolas Party)의 그림은 무척 선명하며, 심하게 재미있고, 심오하게 독특하다. 그가 그린 남자는 갈색 모자를 쓰고 있다. 그 모자에는 커다란 달팽이가 놓여 있고 배경은 짙은 청색이다. 배 세 개를 그린 정물화에서 배 하나는 빨강, 하나는 노랑, 마지막 하나는 녹색으로, 이들은 서로 고양이처럼 얼싸안고 있다. 풍경화에서는 앙상한 나무의 가지가 드문드문 뻗어나가지만 서로 맞닿지는 않는다. 파티의 그림은 추상적이지만 풍경화, 정물화, 초상화라는 전통적 세 가지 장르 중 하나에 속한다. 그림 그릴 소재가 부족한 경우는 없다. “제 머릿속엔 이미지가 가득해 심한 교통 체증을 겪는 것 같아요.” 파티의 브루클린 스튜디오를 방문했을 때 그가 한 말이다. “이미지가 이렇게 외치죠. ‘이봐, 나 좀 봐. 나는 어때?’”
부시윅과 브뤼셀을 오가며 활동하는 37세의 스위스인 파티는 놀라울 만큼 다재다능하다. 그는 오일, 수채 물감, 스프레이 페인트, 아크릴로 그림을 그리고, 최근 5년 동안엔 신비롭고 연약한 재료인 파스텔도 사용했다. 조각도 한다. 나무, 플라스터, 금속으로 거대한 두상을 만들었다. 그는 현란한 수식과 기발함으로 꽉 찬 작품을 창조한다. 벽화 작업도 한다. 6월에는 사방에서 볼 수 있게 만든 120m짜리 풍경화인 일출, 일몰을 완성해 워싱턴 D.C.에 있는 허시혼 미술관 및 조각공원에 전시했다. 이 작품은 버락 오바마의 2016년 연설문에서 언급한 “무슨 일이 있어도, 태양은 아침마다 떠오른다”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파티가 로스앤젤레스 해머 뮤지엄에서 초기 벽화 작업을 했을 때 큐레이팅을 담당한 알리 수보트닉(Ali Subotnick)은 이렇게 말했다. “니콜라스는 현재와 미래로 과거를 붕괴시켰습니다. 그의 손가락은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 같으면서 아이폰을 만지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절대로 정형화된 패턴에 멈춰 서는 일이 없지요.” 상업 갤러리에서 열린 첫 번째 쇼인 <코끼리 24마리를 위한 저녁 식사>는 2011년 글래스고의 모던 인스티튜트에서 열렸다. 이 쇼는 동물을 주제로 한 시리즈의 첫 행사로, 저녁 시간 내내 펼쳐지는 일종의 연극이었다. 식탁, 의자, 접시 등 모든 장치를 파티가 만들고, 무대에서 서툰 웨이터까지 연기했다. 저녁 식사 자체가 쇼였다.
글래스고에서 선택한 손님 24명(큐레이터, 예술가, 수집가)은 코끼리처럼 보이도록 색칠한 기다란 테이블에 앉았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개성을 조금씩 덜어내고 코끼리와 하나가 되었어요.” 파티가 설명했다. “게다가 코끼리 의자 위에 앉아서는 심각해지기가 어렵죠.” 실제로 코끼리가 된 것처럼 느낀 사람이 있었는지는 논란이 있지만, 그 행사는 널리 회자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파티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 후로도 24마리의 개, 24마리의 양 등 24마리의 동물을 위한 저녁 식사가 이어졌다. “니콜라스는 놀라운 유머 감각뿐 아니라 시인과 같은 진지함을 지녔어요.” 그의 글래스고 딜러인 토비 웹스터(Toby Webster)가 말했다.
182cm가 조금 넘는 키에 날씬한 몸매, 정돈된 진한 색 머리와 턱수염을 가진 파티는 빠르게 움직이면서 신나는 에너지를 방출한다. 그는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스위스 빌레트 마을에서 자랐다. 로잔 외곽 호수 부근에 자리한 그림 같은 마을로 300명이 거주한다. 파티는 그곳의 16세기식 집에서 살았다. (찰리 채플린이 여생을 보낸 곳이 이 근처다.) 영어는 유창하고, 속사포같이 빠르며, 가끔 알아듣기 힘들다. 반다이크(Van Dyke)는 반 딕(Van Dick), 모스(Moss)는 무스(Moose)라고 발음한다. 그는 흠잡을 데 없는 이탈리아 브랜드 의상(구찌, 미쏘니, 프라다)을 입고, 스스로 새긴 문신(특히 오른발에 있는 코끼리)도 있다. 항상 갖고 다니는 물건 두 개는 아이폰만 한 크기의 스케치북과 타원형 모양의 앨빈(Alvin) 화가용 지우개이다. 운전을 하지 않고 차에 기름을 넣을 줄 모르며 병원에 가지 않는다. 결혼한 적은 없지만 3년 전 사라 블레이클리 카트라이트(Sarah Blakley-Cartwright)를 만났다. 그녀는 패기만만하고 젊은 미국 작가이자 편집자다. 둘은 여전히 함께 지내며 당연히 결혼할 분위기도 풍긴다. “만약 우리가 함께 지낸다면, 아이들을 가질 거예요. 왜냐하면 그게 인간들이 하는 일이니까요.” 파티가 말했다.
여행하지 않을 때면 그는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이 보이는 방 두 칸짜리 작업실에서 매일 9시부터 6시까지 작업한다. 갤러리를 다섯 군데(글래스고, 취리히, 브뤼셀, 밀라노, 뉴욕)나 갖고 있어서 작품을 파는 데 어려움이 없다. 내가 방문했을 때 파티는 파스텔 초상화와 풍경화를 그리고 있었다. 파스텔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하루에도 여러 번 사용하는 산업용 청소기가 방 한가운데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에는 아트 바젤 홍콩, 브뤼셀의 마그리트 뮤지엄에 보낼 작품도 있다. 파티의 작품은 늦봄에 마그리트 뮤지엄에서 벨기에 초현실주의 화가인 마그리트의 작품과 함께 전시할 예정이다. 마그리트와 파티는 심미적으로 묘하게 잘 어울린다. 이런 구상화가들의 새로운 물결 속에서, 파티는 단연 가장 독창적이면서도 장난기 많은 예술가다. “그의 작품은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와 약간 비슷해요. 혼미함이 가득한 형이상학적 그림이죠.“ 뉴욕 뉴 뮤지엄의 아트 디렉터 마시밀리아노 지오니(Massimiliano Gioni)는 이렇게 말한다. “마그리트의 기억을 머나먼 상상 속 동양… 그러니까 허구의 지형에 대한 꿈과 섞어냅니다.”
최근 파티는 브뤼셀에 널찍한 타운 하우스를 구입했는데, 그에 대해 “큰돈을 구찌와 예술품을 구입하는 데 쓰기보다는 무언가에 투자하기로 했지요”라며 웃었다. 그가 구입하는 작품은 대부분 현대미술이 아니다. 그는 경매에 나오는 ‘썩 좋지 않은’ 틴토레토(Tintoretto) 그림에 눈독을 들인다. “항상 마네보다 모네를 좋아했어요. 누구도 마네보다 모네를 더 좋아하지 않죠”라고 털어놓는다. 브뤼셀에 집과 작업실이 있지만, 이제 10년간 뉴욕에서 지낼 예정이다. 그에겐 한결같은 면은 없는 듯하다.
형과 아주 어린 여동생이 있는 파티는 둘째로 태어나 ‘환상적인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말한다. 목가적 마을에서 크면서, 주말에는 산속에 있는 가족 별장에서 스키를 타곤 했다. 아버지는 지금은 퇴직했지만, 정부에 고용된 세무사였다. 어머니는 전업주부였다가, 니콜라스가 10대가 되었을 때, 인상주의자들과 초기 현대미술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로잔 에르미타주(Hermitage) 재단 박물관에 있는 서점을 인수했다. 파티는 그곳에서 전시회를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최근 이 박물관에서 열린 16~21세기 작품 전시 <파스텔스(Pastels)>에서 그의 회화 여러 점과 큰 벽화를 선보였다. ‘파스텔스’에서는 표현 수단의 대가인 드가, 마네, 르동, 클레, 피카소 등의 작품도 전시했다.
파티에게는 어릴 때부터 두 가지 열정이 있었는데, 그 두 가지는 그림과 어리석은 짓, 즉 ‘불장난이나 물건 부수기 같은’ 부모님 모르게 저지르는 바보 같은 장난이었다. 파티가 가장 좋아한 가족은 스코틀랜드인 할머니다. 그녀가 여자 연인 때문에 남편을 떠나버려 가족들이 분개한 적이 있었다. “할머니께서는 저에게 많은 것을 주셨어요. 하루 종일 제가 얼마나 멋지고 훌륭한 아이인지 말해주셨고, 차세대 피카소가 될 거라 하셨죠”라고 그는 말한다. 할머니는 열 살 생일에 그를 파리로 데리고 가서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세 미술관을 실컷 구경시켜주셨다.
그림에 대한 열정은 처음에는 수채화, 이후에는 유화로 이어졌고, 주변의 산을 둘러싼 풍경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장난질은 그라피티와 거리 미술로 이어졌다. 열두 살이 되던 1992년에 그는 친구와 주말마다 역에 몰래 들어가 기차에 스프레이 페인트를 칠했다. 뉴욕에서 70년대와 80년대 초에 유행한 그라피티 열풍은 유럽에도 퍼져나갔고, 파티와 그의 형인 이안(Ian), 친구는 그라피티에 푹 빠졌다. 그러다 두어 번 잡히기도 했다. “엄청난 추격전이었어요. 제일 대단한 경우는 개들과 엄청나게 많은 경찰들이 쫓아올 때 밤새 도망친 거죠.” 기차에 낙서하거나 빈집에 몰래 들어가 스프레이 페인트칠을 하며 쫓겨 다니는 것이 너무 신나서 종종 학교도 빠졌다. 그 결과, 고등학교에서 퇴학당하고 졸업할 수 없었다.
부시윅의 작업실에서 나와 블레이클리 카트라이트와 함께 살고 있는 아파트로 걸어가는 길은 거리 미술로 가득했다. “저 벽에 아름다운 벽화를 그리고 싶어요.” 한쪽에 창문이 하나도 없는, 거대한 황갈색 창고를 가리키며 그가 말했다. 몇 블록 더 지나니, 사람들이 모여서 한 여성의 얘기를 유심히 듣고 있었다. “보세요, 안내원과 함께 거리 미술 투어를 하고 있네요. 가끔 사람들이 제 사진을 찍고 나서 ‘여기 사는 분이세요?’라고 묻는데, ‘아니요, 브루클린에 온 스위스 백인 꼬마예요’라고 대답해요”라고 파티는 말한다. 이 지역은 급속히 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되고 있지만, 거리 미술은 점점 늘고 있다.
파티는 2004년 로잔예술학교 졸업 후 드디어 기차2018에 낙서하길 그만두고, 전업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2009년에는 글래스고예술학교에서 예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오늘날 예술가가 되는 것은 예전보다 훨씬 더 쉽거나 훨씬 더 어렵다. 규칙이 없어 무엇이든 상관없기 때문이다. “거의 100년 동안 지속된 모더니즘의 유행은 몇 년 전에 끝났다”고 파티는 말한다. 부시윅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2층 건물인 그의 아파트는 책과 그림, 오래된 가구로 가득했다. 거실 벽에는 마르셀 뒤샹이 1917년에 발굴한 미국인 화가로 에드 루샤(Ed Ruscha), 제프 쿤스(Jeff Koons)를 비롯한 여러 예술가의 총애를 받는 화가 루이스 엘셔무스(Louis Eilshemius)의 훌륭하고 괴상한 유화가 걸려 있었다.
“2018년에 만약 당신이 그림을 그린다면, 특히 그중에서도 초상화를 그린다면, 100% 새로운 것을 만들고자 독창성을 추구할 순 없을 거예요. 아마 5% 정도는 새로울 수 있겠죠”라고 파티는 말한다. 단지 5%만이라니? “어쩌면 6%요”라고 그가 윙크를 하며 말한다. “회화는 훨씬 더 모던한 분야예요. 우리는 혁명적인 예술가들이 아니죠. 그런 사람들은 비디오 아트에 나오는데, 조던 울프슨(Jordan Wolfson) 같은 사람이 물건을 부수거나 공격적인 것을 선보이기도 하지요. 구상화로는 그 누구에게도 충격을 줄 수 없어요.”
파티의 작품이 독창성을 어느 정도 가지든 간에, 어떤 작품과도 비슷해 보이지는 않는다. 최근 예술사와 그렇게 최근은 아닌 예술사에서 영향을 받고 차용한 것을 매력 있게 섞었으며, 거장의 기술을 참신하게 일축했다. “모네는 어느 시대에나 인기가 있죠. 게다가 저는 펠릭스 발로통(Félix Vallotton)을 적어도 15년 동안 지켜봤습니다.” 지난여름 뉴욕에 있는 자신의 갤러리 카르마(Karma)에서 첫 전시회를 준비할 때, 그는 크리스티안 샤트(Christian Schad)와 밀턴 에이버리(Milton Avery)를 떠올렸다. 다른 작가의 작품에서 빌려온 이미지 조각은 파티의 그림 속에 잘 어우러진다. 프라고나르(Fragonard)의 나무와 발로통(Vallotton)의 누드, 모란디(Morandi)의 주전자,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의 꽃,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의 촛불 하나. 파티는 컴퓨터로 허시혼 미술관의 벽화를 보여주며 이렇게 말한다. “저 작품 속의 붉은 태양은 앙리 루소(Henri Rousseau)예요. 제가 어릴 때 거실에 루소의 ‘뱀 부리는 여인(The Snake Charmer)’ 포스터가 있었어요.” 이는 도용이 아니라 샘플링이다.
파티의 그림이 진정으로 명성을 얻은 것은 파스텔을 사용하면서부터였다. 18세기에 초상화를 빨리 그릴 수 있는 소재로 인기를 얻은 파스텔은 인상파와 후기인상파에 의해 두 번째 전성기를 맞았다가 일류 예술에서 거의 사라져버렸다. 2013년 파티는 파스텔에 푹 빠졌다. 그해에 그는 바이엘러(Beyeler) 미술관에 전시된 피카소의 여인 초상화를 보고 “먹먹할 정도로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그 그림에는 잊을 수 없는 이미지와 명암, 색채의 강렬함이 있었다. “그 작품을 봤을 때 ‘오, 맙소사! 내가 하고 싶은 게 바로 저거야’라고 생각했죠. 피카소의 그 그림엽서를 사고, 미술용품 가게로 직행해 파스텔 한 상자를 산 후, 피카소를 ‘따라 그리고 또 그리기’ 시작했어요. 그 후로 제가 그린 모든 얼굴의 원형이 되었지요.”
여인의 얼굴은 피카소의 고전주의 시대 작품으로, 피카소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입체파에서 벗어나 초기 그리스 및 로마 조각이라는 자신만의 유원지에서 마음껏 즐기기 시작했다. 얼굴은 부드러운 원형에다 표정이 없으며 중성 같은 느낌을 준다. 그간 정물화와 풍경화를 그리던 파티는 그다음 해에는 오로지 초상화-비록 그의 그림을 초상화라고 부르기가 적절하지 않아도-만 그렸다. 대상은 우리가 아는 모든 사람이다. 색채는 제멋대로에 예측 불가이고 다른 그 어떤 매체보다 훨씬 더 강렬하다. 감정 표현은 없으나 시각적 영향은 각인된다. 한번 보면 절대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다. 파스텔 사용으로 파티는 그라피티를 할 때와 비슷한 흥분을 맛보았다.
최근 파티는 유럽에서 돌아온 상태였다. 그와 블레이클리 카트라이트는 로잔과 밀라노에서 열린 전시회에 다녀왔다. 블레이클리 카트라이트는 파티보다 먼저 돌아와야 했는데, 뉴욕에 도착했을 때, 파티의 ‘굿모닝’ 카드가 와 있었다. “매일 아침 헤어질 때, 니콜라스가 ‘굿모닝’이란 메시지를 담은 작은 그림을 그려줘요. 직접 줄 수 없다면 그림을 사진으로 찍어서 문자메시지로 보내주죠. 하루도 빠짐없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이 커플은 3년 전 온라인에서 만났다. 첫 데이트는 센트럴 파크에서 시작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열린 반 고흐 전시회를 보러 갔고, 중국식 정원에서 첫 키스를 했다. “그는 저를 명쾌하고 신뢰가 가는 사람으로 여겼죠”라고 블레이클리는 말한다.
파티의 예술가로서 향방은 예측 불가능하다. 그는 “아마 추상화는 절대 하지 않을 거예요. 추상적 개념과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죠. 하지만 누가 알겠어요? 하고 싶다고 느끼면, 하게 되겠죠”라고 말했다. 인터뷰 내내 그는 작업실에서, 마그리트 뮤지엄 전시회에 내놓을 파스텔 작품에 매진하고 있다. 캔버스를 누비는 섬세하고도 빠른 붓놀림은 즐거운 오블리가토 같다.
결국 그가 좇는 것은 사람을 다른 세계로 보내주는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다. 어린 시절 거실에 있던 루소의 ‘뱀 부리는 여인’ 포스터가 그랬듯이. “그 포스터가 저를 진짜 정글로 데려가지 않았죠. 대신 루소의 세계로 데려가주었어요. 마치 에르제(Hergé)의 만화 틴틴(Tintin)이 그랬듯이요. 저는 사람이 만든 문화는 우리가 실존하는 현실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고 믿어요. 지금 제가 하는 어떤 것도 실제 세계에 기반하지 않습니다. 그림 속에 탄생한, 그야말로 상상의 세계에 있죠”라고 말하며 잠시 멈췄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중요한 것은 제가 예술 작업을 정말 좋아한다는 거예요. 저는 무언가를 만들고, 그것이 눈에 보이는 걸 정말 좋아합니다. 그림 하나를 완성하면, 또 하나를 시작하고 싶어요.”
추가로 한 전화 인터뷰를 끊기 전, 그는 작업 중인 이미지를 메시지로 보내주었다. 거의 마무리 단계인데, 갈색 모자를 쓴 어떤 남자가 노려보는 그림이었다. “그 모자에 달팽이를 그려 넣을 거예요.”
- 에디터
- 김나랑
- 포토그래퍼
- Stefan Ruiz
- 글쓴이
- DODIE KAZANJ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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