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나비가 돌아왔다
잔나비가 돌아왔다. <잔나비 소곡집 1>은 사랑스러운 손 글씨로 꾹꾹 눌러쓴 잔나비의 가을 편지다.
편지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리운 건 많을수록 좋아!”
아기공룡 둘리, 여름방학 숙제, 수수깡, 16비트 컴퓨터, 골목길 오락기, 옛 사진첩 속의 나 그리고 털북숭이 강아지… ‘가을 밤에 든 생각’ 티저 영상에 나오는 장면들이다. 잊고 지내던 서랍 속 작은 보물 상자처럼 온통 그리운 것투성이다. <잔나비 소곡집 1>의 표지 그림을 그린 엄유정 작가는 별이 반짝이는 맑은 밤하늘 아래 생각에 잠긴 소년의 모습을 담았다. 포근한 그림과 함께 앨범 속엔 잔나비의 보컬 최정훈이 연필로 쓴 가사집도 담겨 있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2집과 아직 나오지 않은 3집 사이, 그 시간과 음악적 간극을 잇는 이번 소곡집은 잔나비의 안부 인사이자 사랑스러운 가을 편지 같다. 수줍은 손글씨로 조심스레 써 내려간 편지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리운 건 많을수록 좋아!” 지난 11월 6일 오후 6시 <잔나비 소곡집 1>이 공개되었다. 이제 가을은 잔나비의 계절이다.
“가을에 어울리는 노래를 생각하며 지난 곡을 추렸어요. 그게 다 그리움에 관한 내용이더라고요. ‘나는 왜 이런 가사만 쓸까’, ‘표현의 한계인가’ 고민하며 타이틀곡 가사 작업을 병행했는데 그때 문득 ‘그리운 건 많을수록 좋아’라는 문장이 떠올랐어요. 멤버들 모두 공감했고 그게 이번 앨범의 컨셉이 된 거죠. 생각해보면 20대를 보내는 내내 저희의 주제는 그리움이었던 것 같아요. 멤버들 모두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고 서로 모여 옛날얘기하는 걸 좋아하고.”
에밀리 디킨슨과 윤동주, 한강의 시를 좋아한다는 최정훈은 짐 자무쉬 영화 <패터슨>의 주인공을 닮았다. 곱슬곱슬한 긴 머리카락과 마른 몸, 나른한 눈빛의 패터슨 씨는 패터슨시에 사는 버스 운전사로 매일 시를 쓴다. 그 역시 에밀리 디킨슨을 좋아한다. 최정훈이 곡을 쓰고 글을 입힌 잔나비의 노래 역시 한 편의 시다. 시집을 출간하자는 제안도 숱하게 받았다. “그런 건 나중에 더 잘할 수 있을 때 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요즘도 시는 정말 많이 읽는다. 그리고 시는 무심히 지나치던 우리의 일상을 새롭게 인식하도록 만든다. 그런 시를 찾는 사람은 아마 그리운 게 많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별 볼 일 없이 반복되는 하루일지라도 어제와 같은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영원히 다시 오지 않을 그날의 하늘과 우리를 스치던 바람, 그 순간의 냄새, 우연한 소란이 만들어낸 주위의 수런거림 같은 것. “제가 가장 그리운 거요?” 잠시 고민하던 최정훈이 답했다. “지나가버린 시간이죠. 그냥 다 그렇지 않나요? 기억하기 싫은 순간도 있겠지만… 지나간 건 다 그리운 것 같아요.” 잔나비는 이미 지나간 소중한 것들을 음악으로 따뜻하게 비춘다. 잔나비의 노래를 들었을 때 늘 어떤 풍경이나 장면이 떠오르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아름다운 기억은 삶에 위로가 된다. 예를 들면 이런 경우다. 별이 쏟아지던 밤,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인 태안의 한 캠핑장에선 밤새도록 잔나비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2집 <전설>이 막 세상에 나왔을 무렵이었다. 흐드러지게 핀 밤 벚꽃과 별빛 아래 모닥불, 그 앞에 모여 앉은 사람들. 지금도 잔나비의 노래를 들으면 그 밤이 생각난다. 어쩌면 실제 그랬던 것보다 더 행복했던 것처럼. “그런 얘길 들으면 항상 기분이 좋아요.” 최정훈은 진심으로 활짝 웃어 보였다. “특히 제일 좋은 건 이런 거죠.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가 나왔을 때 대학에 갓 입학한 팬이 있었는데, 자기는 ‘새내기 시절’ 하면 앞으로도 그 노래만 떠오를 것 같다고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인생의 한 시절을 함께하는 음악을 만든다는 건 얼마나 굉장한 일인가.
소곡집의 수록곡 대부분은 공연장 등에서 한 번쯤 공개한 적이 있다. ‘한걸음’은 2019 전국 투어 공연 <투게더>에서 관객들에게 선물한 미발매 앨범 <We’re Not Legend>에 짧게 소개한 적 있으며 최정훈이 일곱 살 때 키우던 초롱이와 그 딸 삼순이를 추억하며 쓴 귀여운 노래 ‘늙은 개’ 역시 같은 앨범에 실린 바 있다. ‘그 밤 그 밤’은 코로나로 인해 중단된 2020 전국 투어 공연 <넌센스 2> LP 예약 구매자들에게 선물한 미발매 앨범에 들어 있던 곡을 좀 더 다듬었다. 제목부터 푸릇푸릇한 ‘작전명 청춘’은 새파란 신인 시절 인천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무대에 서기 위한 경연을 준비하며 만든 패기 넘치는 곡이다. 최정훈은 ‘우격다짐식의 청춘’을 담은 이 노래를 한동안 부르지 않았다. “그땐 촌스럽다고 생각했어요. 한창 세련된 위로의 말이 유행했잖아요.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 뭐 그런 거요. 그런데 우린 ‘힘내! 무너질 수 있어! 일어나라, 청춘이여!’ 하고 외치니까. 어쩌면 이 말이 누군가에겐 힘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저 혼자 세련되고 싶어 그걸 부정했던 것 같아요. 사실 저도 이 노래 부를 땐 울컥한 게 있거든요.” ‘작전명 청춘’은 올해로 모두 20대가 끝나는 잔나비의 찬란했던 젊은 날의 기록이기도 하다.
“지나간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만 줄기차게 늘어놓던 그동안의 우리에 대해서 스스로 변명이 필요했다”고 이번 소곡집을 소개한 잔나비는 “그다지 진취적이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머물러 있던 그대로” 자신들의 지난 시간을 노래에 담았다. 소곡집을 준비하며 새로 쓴 ‘가을밤에 든 생각’은 바로 그런 마음이다. “그리워하는 무언가를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는 그런 곡을 만든 것 같아요. 음악적으로 예전에 저희가 좋아하던 음악을 재해석한 부분도 있고 가사도 그래요. 어린 시절의 나, 친구, 연인, 강아지 혹은 옛 동네. 무엇이 되었건 그리운 건 다 담을 수 있죠.”
음악인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지금 잔나비가 가장 그리워하는 건 무대다. 야심 차게 준비한 전국 투어 공연은 두 도시를 끝으로 취소됐다. 코로나 이후 많은 게 전과 달라졌다. “마지막 서울 앙코르 공연까지 매회 진화하는 컨셉으로 전국 투어 공연을 준비했는데 그걸 못하게 되니 아쉽죠. 약간이 아니고 심각하게 아쉬워요. 저는 애초에 다른 취미가 없다 보니 그저 계속 작업만 하면서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더라고요. 잔나비는 공연이 더 재미있는 그룹인데 이제는 기억이 잘 안 난다고 해야 하나? 공연을 하는 방법이나 그때의 열기 같은 게 조금씩 잊히는 것 같아요.” 무대에 서기 전의 긴장과 두근거림, 함성, 무대와 객석이 하나가 되는 그 찰나의 짜릿한 희열, 모든 게 끝나고 난 후의 후련함. 모니터로는 도무지 느낄 수 없는 뜨거운 감정이다. 언택트 공연이 일시적인 대안일 수는 있지만 실제 무대를 대신할 수는 없다. 최정훈은 “모니터의 댓글 보면서 ‘ㅋㅋㅋ’ 하면 와, 저 사람들 웃는다, 이모티콘 보면서 와, 함성 지른다, 그럴 수는 없지 않느냐”고 씁쓸한 농담을 했다. “빨리 코로나 시대에 적응하지 않으면 도태된다고들 하잖아요. 마치 언택트라는 게 굉장히 신박한 아이디어인 것처럼. 하지만 절대 대체될 수 없는 것들이 있어요. 특히 공연은요. 어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내년 봄 발매를 목표로 준비 중인 3집은 거의 마무리 단계다. 최정훈은 “우리가 밴드를 처음 시작한 그때부터 항상 그려온 음악을 드디어 만들어냈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다. 지금 당장 얘기할 수 있는 건 지독히 컨셉추얼한 앨범이 될 것이며 잔나비가 꿈꾸던 바로 그런 음악을 만들었다는 것. “드라마틱하고 익살스럽고 재밌고. 아, 뭐 다 있어요! 정말 멋있는 앨범입니다.” 소곡집이 지금까지 잔나비가 노래해온 온갖 그리운 것들을 담은 어린 시절의 보물 상자라면 3집은 꽤 많은 변화를 예고한다. 과거의 향수와도 안녕을 고한다. ‘가을밤에 든 생각’에는 실제로 ‘안녕(Farewell)’이라는 작별 인사가 마법 가루를 뿌리듯 신비한 사운드와 함께 여러 차례 나온다. 어떻게 보면 이번 소곡집은 잔나비가 몰고 온 레트로 열풍의 정점이자 마지막 인사인 셈이다. 변화는 일상생활에도 있다. 요즘 최정훈은 스마트폰을 쓴다. 최근엔 아이패드도 샀다. “아주 편리하게 잘 쓰고 있죠. 흐흐. 방송에선 제가 레트로를 좋아해서 구형 폰을 들고 다니는 것처럼 나왔는데 그건 아니에요. 제 생활 방식이 좀 구식인 건 있지만 그건 SNS 중독 때문이었어요.그래서 2집 작업하는 동안은 스마트폰은 곡 작업할 때 음성 녹음기로만 사용하고 음악은 MP3로, 통화는 2G 폰으로 해결했죠. 다행히 지금은 중독에서 벗어났어요. 물론 옷이나 음악은 지금도 레트로풍을 좋아하지만.”
1992년생 잔나비띠의 잔나비들은 이제 곧 서른 살이 된다. 잔나비는 ‘잔나비’라는 이름이 여전히 무척 마음에 든다. 영화 <라이온 킹>과 ‘하쿠나 마타타’가 유행하던 시절 한창 스와힐리어에 빠졌을 때 친구가 지어줬다는 귀여운 그룹명. 원숭이를 뜻하던 한자어 ‘원숭이 원(猿)’의 새김 ‘납’이 ‘나비’가 되었다는 잔나비의 어원을 보면 ‘잔’은 원래 ‘빠른’의 의미를 지닌 옛말이 변형된 것이란 설이 있던데 21세기 잔나비는 참 느린 속도로 오늘을 산다. 별다른 일 없이 조용한 일과에 반짝이는 예쁜 것들을 노래로 담으며. 잔나비는 여전히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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