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어머니의 보따리
얼핏 뭉툭해 보이는 손끝이 야물게도 옹쳐 맨 매듭을 날렵하게 풀어낸다. 빛은 바랬고 더께로 쌓인 세월 위를 때 묻은 손길이 익숙하게도 쓰다듬어 광을 활활 보탠다. 엄마의 엄마, 그 엄마의 엄마가 아끼고 아껴 물려준 물건들이 보자기를 벗어내고 자태를 드러내면 족히 백번은 했을 얘기는 어김없이 똑같이 다시 시작된다.
때맞춰 엄마의 눈은 반딧불이처럼 반짝이고 물기가 생긴 목소리에 활기 가득한 박자가 더해진다. 그렇게 몇 번이고 묶였다 풀어졌다 하던 엄마의 보따리가 유산이라는 이름으로 꽃비 흐드러지게 내리는 분당의 한 마당에 당도했다. 딸이었다가 엄마였다가 마침내 할머니가 되어 애틋하게도 애장품을 물려주신 이름들이 보자기 꾸러미 위에 붙어 ‘나래비’를 섰다. 유희경, 박필순, 차윤진, 마종진, 이석희, 임영희, 정종숙, 오원엽, 이영림, 박우대. 할머니가 된 엄마의 출생 연도 혹은 생몰 연도를 나란히 쓰다 말았다.
어차피 누군가의 마음에는 영원히 살 이름이라. 물건의 이름과 소재, 제작 시기 따위도 함께 쓰려다 도리어 말았다. 그 어느 마음이 대물린 혈맥은 물성 대신 자기 엄마의 얼굴과 목소리로 기억될 것이라서. 엄마의 유산은 구본창의 아름다운 파인더에 담겨 이렇게 실렸다. 막, 보따리를 풀 참이다.
스무 살, 개성의 봄 유희경에게는 딸이 없었다. 하나 있는 아들은 다 키워 잃었다. 냉철하고 정확하다는 말은 정 없고 차갑다는 말 같아 듣기 싫었지만 그건 성격이라 어쩔 수 없었다. 이화여대에서 복식을 오래 가르쳐 따르는 문하는 번성했지만 자식은 자식이었고 학생은 학생이었다. 나이가 들어 강단에서 내려갈 즈음 허영의 조카가 찾아왔다. 허영의 조카는 훗날 유희경의 딸이 되었다. 김혜순이 삼촌의 심부름으로 장순례의 후수를 빌리러 유희경에게 가지 않았다면 유희경과 김혜순 모두 조금은 다른 노년과 중년을 보내게 되었을 것이다. 한국 복식학 박사 1호에 빛나는 유희경은 한복에 관한 한 손톱만 한 것도 허투루 여기지 않는 김혜순이 예뻤다. 김혜순은 일견 냉정해 보이나 한없이 따뜻한 품을 내주는 스승이 말도 못하게 좋았다. 김혜순과 유희경은 스승이 노환으로 투병하기 직전까지 25년간의 아침을 함께 나눴다. 김혜순이 금싸라기처럼 비싼 고양이 똥 커피콩을 갈아 내려드려도 마다하고 믹스 커피 한 잔과 다디단 팥소가 가득 든 곰보빵을 좋아한 유희경. 25년이 한결같았던 그 아침은 왕의 복식에 관한 금과옥조가 내려지는 수업이었고 날씨 얘기만으로도 알찼던 일상이었다. 서울깍쟁이 유희경은 김혜순의 고향인 순천 땅을 밟은 것이 인생 최초의 남도행이었다. 그날 유희경은 김혜순의 어머니를 보고 “이렇게 귀한 딸을 복식계의 내 딸로 내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했다. 유희경은 귀하고 값진 것을 김혜순에게 많이도 물려줬다. 고증하겠다고 나서게 생긴 귀하디귀한 옷감, 사료가 되고도 남을 전통 한복, 옷본, 고서까지 아까운 것 없이 건네는 스승의 손은 다를 것 없는 엄마의 마음이었다. 김혜순은 유희경과 <왕의 복식>을 같이 썼고 수많은 해외 행사에도 함께했다. 여든 무렵의 유희경은 곰보빵과 믹스 커피가 있는 그 달콤한 아침에 작은 상자 하나를 김혜순에게 건넸다. “이건 내가 정말 아끼는 건데, 내가 이화여대에 들어갔다고 여대생이라면 이런 걸 들어야지 하고 우리 큰오빠가 사준 백이야. 오빠가 그때 개성에서 은행 지점장을 하고 있었잖아. 개성으로 놀러 오라 해서 갔을 때 주더라고. 들지도 않고 정말 귀하게 가지고 있었어. 이거 김혜순에게 줄게.” 자줏빛과 보랏빛이 자개처럼 오묘하게 빛나는 실크 백이었다. 양손으로 받아 드니 한껏 깃을 벌린 공작이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예부터 소문이 자자했던 개성의 자수 솜씨는 일품이었고 얼마나 손질을 잘해뒀는지 실오라기 하나 터진 곳 없이 금속 잠금과 체인까지 완벽한 모습 그대로였다. 그렇게 김혜순의 품으로 온 1940년 개성의 봄빛 서린 백은 그대로 모셔뒀다가 이윽고 오늘을 맞았다. 그 백 안에 가득 찬 유희경의 싱그러운 젊음과 청춘의 환희가 느껴져서 김혜순은 그것을 들고 다닐 수는 없었다. 이따금씩 보자기를 풀어 거풍을 하고 그늘 묻은 햇살을 쏘이며 스승의 행복했던 시간과 그 시간을 고스란히 선사해준 마음을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했다. 지금 유희경 여사는 101세로 건강이 좋지 못하다. 김혜순은 유희경이 준 많은 것을 모두 유희경이 석좌교수로 있었던 원광대학교에 보관 및 기증했고 올해 역사적 가치를 꼼꼼하게 챙겨 만든 기증 보고서가 나온다. 스승이자 엄마인 유희경의 정신이 맑은 날, 이 가방으로 생기를 되찾아볼까. 원광대학교 기증 보고서로 기쁨을 만들어볼까. 제자이고 딸인 김혜순은 고민 중이다.
영원한 엄마 밥 엄마 박우대, 할머니 박우대가 화가 박우대가 된 것은 1922년생인 그녀가 86세가 되던 해였다. 엄마 박우대를 작가 박우대로 만든 것은 조선대 미대 교수로 있는 딸 한선주의 색연필이었다. 엄마, 치매도 방지 하고 심심하지도 않고. 엄마 잘 그리시잖아. 그냥 해봐요. 미대 교수 딸이 사다준 질 좋고 커다란 스케치북을 기어코 마다하고 신문 전단, 박스 뒤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나이가 여든넷. 증손녀가 가까이 살아 그 아이 재미있게 해주겠다고 마음이 서자 그림은 곧 몇 상자가 되었다. 아기 호랑이를 업은 엄마 호랑이를 그려서 손녀가 먹고 남은 아이스바 나무 스틱을 클립으로 고정해 팥이나 쌀 등 곡식을 담은 함지에 꽂는 식으로 인형극을 했다. 증손녀는 어떤 만화보다 영화보다 할머니 그림 연극에 집중했다. 정확하거나 세밀하지 않은 채로 완벽하게도 사랑스러운 동물과 꽃과 나무가 매일 엄마의 무대에 올랐다. 그러면서 엄마는 증손녀와 함께 문방구에서 1,000원짜리 스케치북을 하나씩 나눠 산 뒤 종일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는 재미에 더해진 그림 선물하는 기쁨은 엄마를 신나게 했다. 엄마는 윷판을 만들어 나눠주고 새해가 되면 띠에 맞는 동물을 그려 자석을 붙여 진료받는 의사 선생님들에게 모두 선물하며 동네 화백으로서 명성을 다지는 여든다섯이 된다. “박마리아 할머니는 베레모도 안 쓰고 전시회도 안 했는데 왜 화가로 불리는 거야?” 시기 어린 동네 할머니의 말에 속이 상한 할머니와 엄마를 위해 가족이 나서서 전시회를 열어준 해가 여든여섯. 아원갤러리 개관 후 최고의 관람객이 모여들었고 언론이 떠들썩했던 색연필 화가 박우대 전시회가 바로 그것이다. 작품은 정말 많이도 팔려나갔고 엄마는 정말 창피해하셨지만 화가라는 호칭도 이내 자랑스러워하셨다. 색연필 화가로서의 절정은 그 후 4년간 지속되었다. 스케치북 스무 권이 넘도록 다작하셨고 색이 선을 삐져나가는 것을 못 견디는 마음을 키워 수채화도 많이 그리셨다. 그리면 그리는 대로 그려지는 색연필처럼, 생각과는 달리, 생각보다 많이 혹은 적게 번지는 물에 갠 물감처럼 엄마의 사랑은 많이 전해졌고 번졌고 스며들었다. 엄마의 자식으로 태어난 8남매는 돌아가시는 그때까지 경쟁적으로 엄마에게 사랑을 헌사했지만 엄마에 비해서는 턱없이 부족했다. 엄마는 2012년, 아흔 살로 숨을 거두셨다. 여자로 90년, 엄마로 70년, 화가로 6년. 알차고 복된 삶이셨다. 평소 바람대로 덥지도 춥지도 않은 때에 자는 듯 영면에 이르렀다. 엄마는 자신의 재산 중 일부를 8남매가 모일 때의 밥값이라고 정해 남기셨다. 손이 번성해 한 번에 만나면 수십 명이 될 수도 있으니 돌아가며 내더라도 누구 하나는 꼭 부담이 될 테고 나눠 내더라도 때에 따라 그게 힘이 들 수도 있다고. 그러니 엄마가 밥을 사는 걸로 해서 엄마 밥을 얻어먹는 재미로라도 자주 만나 웃고 살라는 지혜 가득한 유산이었다. 누가 좋은 일이 생기면 엄마가 주는 거야, 누가 크게 아프면 엄마가 또 주는 거야 하고 엄마의 그 돈을 아직도 형제끼리 감사하며 나눠 받고 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엄마가 사주는 밥을 먹는 사람이 있을까? 이렇게 행복한 자문을 하게 해준 엄마는 찾아보기 어렵겠다고 정년이 가까워오는 다섯 번째 딸 한선주는 크게 웃는다. 곧 화가 박우대 여사의 기일이다. 증손녀 지우를 위해 하겐다즈, 홍삼톤 박스를 오려 붙여 그려줬던 이 그림들이 실린 <보그>가 올해의 큰 선물이 될 거라고. 돋보기도 쓰지 않고 꽃과 새, 나무를 그린 엄마의 색연필 끝이 손에 잡힐 듯이 그리워지는 5월이 될 거라고, 여전히 휴대전화의 배경 화면이 엄마 얼굴인 딸이 말한다.
기록은 역사다 할머니의 일기가 국가기록원에 있는 사람 손 들어보세요! 살펴볼 필요도 없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손녀는 안다. 일기도 힘든데 국가기록원이라니. 그렇다면 이렇게 묻는다면? 할머니 일기가 56년 치 있는 사람? 그 일기의 요약본, 그 요약본의 간추린 목차가 있는 사람? 당연히 없나? 할머니가 투병 중에 그린 그림 달력이 있는 사람? 또 할머니 그림책이 있는 사람? 이것도 너무 지나친가? 그럼 평생 옷이라는 건 사지 않고 할머니가 만든 옷만으로도 여생을 보낼 수 있는 이모가 있는 사람? 말도 안 된다고 슬슬 지겨워지는 질문인가? 그럼 이 정도는 어떤가? 닳은 바닥만 기워 오히려 톡톡해진 덧버선이 신발 상자로 가득 있는 사람? 이제 손을 한두 명 드는 것도 같다. 일기와 옷과 그림과 덧버선이 동일인이라면? 서둘러 손을 내리게 되나? 스타일리스트 최성이의 할머니, 경운박물관 부관장 박경자의 어머니 임영희 여사가 이 엄청나고 대단한 그분이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의 전신인 경성사범학교를 수석 졸업해 교사로 일하다 치과 의사인 남편을 만나 부산에 신접살림을 냈다. 친정인 양평과는 말도 물도 다 낯선 새색시의 객창감과 외로움이 일기 쓰기의 시작이었다. 돌아가시기 한 해 전 국가기록원 영구 기증에 부쳐 한 인터뷰에서 할머니는 “일기는 내 동반자, 친구, 거울입니다. 70년 넘게 일기를 쓰면서 외로움을 달랬어요. 늙은이가 끄적인 일기장이 나라의 귀중한 역사라고 하니 그저 영광일 뿐이에요”라고 말했다. “1946년 11월 24일 25일. 양념이 모자라 다시 장만해 하느라고 이틀에 걸쳐서 김장을 했다. 독이 모자라 몇 번이나 옮겨냈는지. 하도 남쪽으로 내려와 북과는 기후가 달라 이렇게 하면 시어진다 저거 넣으면 시어진다 국물을 해도 안 된다 하니 처음에는 정신이 다 어벙벙해지더만. 여기서는 그냥 막 짜게 맵게 안 하면 시어져 못 먹게 되는 모양이다.” 만 93세의 생일날 국가기록원 기증이 확정되었고 엄마는 그 일기를 딸과 손자들이 보지 못하게 될 것을 걱정해 그 모든 일기의 요약본을 그다음 해에 돌아가시기 전까지 마련해두셨다. 그리고 몸이 아주 힘들어질 때까지도 꽃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생을 정리하셨다. 2016년 할머니는 할머니를 제외한 일상을 영위할 수 없을 정도로 딸과 손녀의 삶 켜켜이 흔적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수많은 흔적이 유물과 유산으로 이름표를 바꿔 달고 딸과 손녀의 삶을 슬픔으로 넘치도록 채웠다. 같은 시간 같은 길을 돌며 산책을 즐긴 정다운 할머니, 입원해서까지도 스타킹을 벗지 않았던 멋쟁이 할머니, 외출할 때는 반드시 장갑을 꼈던 고운 할머니. 장갑은 군데군데 기워진 바늘땀으로, 올이 나간 스타킹은 모두 때워둔 매듭으로, 동일한 시간에 나타나지 않는 할머니의 부재를 슬퍼하는 이웃의 눈물로 할머니는 여전히 모녀와 함께한다. 최성이는 다시 질문할 수도 있다. 혹시 할머니의 일기와 수필을 워드로 필사하는 엄마가 있는 사람?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사준 1960년산 시계를 새것처럼 닦고 보관하는 엄마가 있는 사람? 기록은 역사다. 개인의 기록은 국가의 역사가 된다. 그 역사를 위한 기록의 가장 큰 힘은 개인의 노력이다. 임영희 여사의 기록은 박경자의 노력으로 이 나라의 역사가 되어가는 중이다.
오, 나의 아름다운 어머니 1980년대 후반까지 나의 어머니는 한복을 입었다. 그것은 성장의 의미가 아니라 일상복을 갖춰 입으셨다고 말하는 쪽이 맞을 것 같다, 쪽을 찌어 비녀를 하셨고 저고리에는 알맞게 화려하고 예쁜 브로치가 늘 달려 있었다. 엄마가 학교에 오면 아이들이 수업을 하다 말고 모두 창밖을 내다보며 소리를 지를 정도로 눈에 띄는 맵시를 가지고 계셨다. 예쁘고 고운 것에 대한 평가가 야박한 나의 눈에도 우리 엄마는 무척 아름다웠다. 키는 작으셨지만 미모는 대단했다. 굳이 보태자면 엄마는 태가 좋으셨다. 우아한 세련미가 풍겼다. 내 머릿속에 예쁜 엄마는 지나쳤다가도 다시 보게 되었을 때 멀리 보이는 모습이다. 그게 내가 가진 엄마의 이미지다. 한복의 아름다움과 엄마의 그 이미지는 통해 있다. 한복은 보자마자 깜짝 놀라듯 예쁜 게 아니라 스쳐간 뒤 돌아보고 또 돌아보게 하는 멋이 그 아름다움의 정수다. 엄마를 생각하면 돌아봐도 또 돌아봐도 아름다웠던 서른 몇 살, 마흔 몇 살의 한복 입은 엄마가 동시다발적으로 떠오른다. 집에는 궁에서 나온 금은보화가 많았다. 엄마가 가진 장신구는 하나같이 마음을 빼앗는 수준의 압도적 미학을 갖춘 것들이었다. 산호, 비취, 진주, 금이 전부인 듯했던 시절, 엄마는 그것들이 독자적으로 혹은 모여서 예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다 가지고 있었다. 그중 진주 브로치는 엄마가 1940년대부터 가지고 있던 것으로 썩 마음에 드는 엄마의 물건 중 하나다. 천연 진주가 박힌 왕관 모양의 브로치를 달았던 엄마는 여전히 내 기억 안에서는 젊고 매력적이다. 엄마의 백에는 항상 다림질로 잘 마름된 하얀 손수건이 들어 있었다. 정갈하고 깔끔한 성격 그대로 정비되어 있던 가방 속, 언제나 잘 접혀 있던 깨끗하고 향기롭던 손수건. 그것은 넘어진 아이의 무릎을 털었고, 살갗이 일어난 무릎 때문에 터진 울음을 훔쳤고, 볼이 얼며 흐르는 콧물도 닦았고, 입가에 가득 묻은 고물도 털어냈다. 수가 놓인 실크 손수건은 엄마의 화려하고도 깔끔한 접촉으로 아이와 엄마 사이를 매개했다. 이 손수건을 보면 어린 내가, 여린 피부가, 어리고 따뜻했던 엄마의 눈과 손길이 한꺼번에 느껴진다. 그 옷은 아마 자주색 벨벳 치마저고리일 것이다. 여전히 아름다운 나의 어머니는 여든네 살, 정종숙 여사다. 나는 한복을 만드는 김영석이다.
엄마의 마당 할머니의 경대 1996년 83세의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중학생이던 나는 증조할머니의 부음에 한달음에 달려가 목전에 위패를 보고도 그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증조할머니의 첫 손녀인 나의 엄마와 첫 증손녀였던 나는 증조할머니의 영원한 첫사랑이었다. 동네에서 하도 깔끔하고 까다로워 까치 할머니로 불렸던 증조할머니는 유독 엄마와 나에게만은 말랑말랑했다. 까다롭고 깔끔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엄마의 결벽증 가까운 정갈한 성품도 주효했겠지만 가까이에서 보는 증조할머니의 엄마에 대한 너그러움은 어떤 개연성을 뛰어넘는 범주였다. 서랍 달린 경대. 이 경대를 보며 몇 번이고 되뇌신 얘기를 알아듣게 된 후 알게 된 그 이유는 두고두고 아프다. 증조할머니에게 엄마는 한동안 손녀가 아니라 딸이었다. 여섯 살짜리 딸이 있는 지금의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엄마가 세 살이 되던 해 할머니는 그녀를 여수의 증조할머니에게 맡기고 목포로 이사를 간 것. 연년생으로 아들을 연달아 낳아 힘겨웠을 할머니가 할아버지와 함께 사업을 하게 되니 아직 40대인 증조할머니에게 큰딸을 맡긴다는 것도 그 시절이라면 아주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리라. 그렇게 세 살 김혜순은 마흔세 살 오원엽 할머니의 손에서 4년을 자라게 된다. 목포로 간 엄마는 자주 오지 않았고 어려서부터 떼 없어 ‘땡깡’ 쓸 줄 몰랐던 손녀는 엄마의 부재를 할머니에게 불평불만으로 표현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다만, 이따금씩 엄마가 오겠다고 한 날짜, 시간이 되면 하염없이 앉아 물끄러미 마당을 보고 있는 모습으로 증조할머니의 애간장을 다 녹였다고. 자신이 엄마를 무척이나 기다린다는 것을 할머니는 모르게 하고 싶었던 속이 말간 일곱 살짜리. 그 모습이 허파가 뒤집어지게 짠해 어린 것을 불러다 모른 척 경대 앞에 앉혀 머리를 빗겨주면 그 마당이 못내 못 미더워 제 얼굴보다 마당을 비춰 보며 굵은 눈물을 소리도 없이 툼벙툼벙 흘렸다는 단장의 서랍 달린 경대가 바로 이것이다. 증조할머니가 시집오며 가져온 경대 서랍 안에는 증조할머니의 반지, 브로치, 참빗, 주민등록증이 있었고. 티도 못 내고 엄마가 고픈 어린 것을 달랠 요량의 단것도 가득 들어 있었다. “혜순아, 요것 녹여 먹고 있으면 느 엄마 곰새 온다.” “아니이, 할머니 나는 한나도 안 보고 잡어.” 단 사탕을 쓰게 굴리며 빙긋 웃던 손녀를 “민경아, 느 에미가 요 경대 앞에 혼자 뽀도시 앉어 사탕을 빨며 세상 스럽게 쫄쫄 울었다”며 어제처럼 안타까워하던 까치 증조할머니.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시자마자 엄마는 가장 먼저 이 서랍 경대를 집으로 가져왔다. 1915년생 오원엽 할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온 1930년대의 서랍 경대는 2021년 증손녀 정민경 집에서 2016년생 고손녀 정예담을 비추고 있다. 서랍엔 증조할머니의 물건이 그대로 있다. 사탕은 없다.
엄마라는 아기의 옷 한양대 무용과 교수인 고현정의 손에서 나온 옷은 쭉 펴봐야 한 팔 길이가 되지 않는 실크 원피스였다. 겉은 실크, 안은 보드랍고 포근한 면을 댄 신생아용 긴 원피스였다. 1949년생인 엄마 송유숙의 옷이다. 팔은 한 뼘이나 될까 가슴 폭도 역시 한 뼘이 되려나 넘치려나. 뽀얗고 사랑스러운 원피스는 쪼글쪼글한 주름 위로 납작한 플랫 칼라에도 레이스가 달려 있고 베이비핑크 실로 된 프렌치 스티치와 주황색 보석 단추가 달려 있다. 엄마가 서울에서 태어났을 때 할아버지는 부산에 계셨는데 귀여운 딸을 볼 생각에 단박에 올라온 할아버지 손에 들려 있던 것이 바로 이 옷이다. 신이 나서 고를 수 있는 것 중 가장 좋은 것을 골랐을 할아버지의 기분이 손에 잡힐 듯 느껴진다. 젖을 토한 자국이 남아 있고 접혀 있던 주름으로 세월을 가늠해보지만 그래도 72년 전의 옷이라는 것이 도대체 믿어지지가 않는다. 7년 2개월 전이라면 모를까. 1949년, 한국전쟁이 나기도 전에 만들어진 옷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것은 훌륭한 만듦새와 세련된 디자인이 그 이유는 아닐 것이다. 든든하고 다정한 엄마는 아기도 어린이도 없이 엄마로 태어났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 할머니 앞에서는 엄마가 딸이라고 해도 내 엄마가 사전적 의미의 딸로 보이진 않는 것이 딸이 된 자들의 이상한 시선이다. 내가 좋은 우리 엄마는 어떤 각도에서 봐도 그냥 엄마일 뿐. 아기였던 때도 어린이, 소녀, 처녀인 때도 감히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심지어 고현정의 어머니 송유숙 여사는 이 옷을 귀하게 보관하고 있었던 이유도 혹시 자녀가 결혼해 아이가 생기지 않으면 엄마가 입었던 아기 옷이 도움이 된다는 할머니의 할머니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자기의 아이 때 옷 역시 내 아이의 아이를 위한 효험으로 간직하는 사람들이다. 엄마는 엄마로 태어난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렇게 엄마로만 사는 건지. 그런 엄마의 딸로 사는, 아직 미혼인 딸은 엄마가 좋아도 너무 좋다.
대대손손 호건 호건은 명절, 돌과 생일에 두루마기 위에 전복을 입고 복건 대신 쓰는 건이다. 아이가 씩씩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호랑이의 상을 건 위에 형상화한 것에서 기원한 이름으로 호랑이의 눈썹, 눈, 수염, 이빨, 귀를 건의 이마 부분에 수놓았으며, 길상어문을 금박으로 새겨 모든 기원을 나타냈다. 겉감은 검정 사로 하고 안감은 남색 사로 받쳐 색의 조화를 꾀했고 여기에 기원이 쓰인 금박이 더욱 장식적으로 돋보이도록 했다. 양가 자제의 쓰개의 한 종류였다. 유희경의 <한국복식사연구>를 참고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른 호건의 정의다. 이 호건의 정의를 어느 명문가에서는 한 가지 더 첨언해 전수 중이다. 할머니가, 증조할머니가, 고조할머니가 직접 만들어 입혀 자손의 수복강녕을 빈 손자의 관모로 자손들은 기억하게 될 것이다. 바느질 솜씨 대단했던 어머니 이석희 여사는 자신의 아들은 물론 손자와 증손을 위해서까지 직접 호건을 만들었다. 촬영한 호건은 1982년 막내딸 계호의 아들을 위해 만든 것으로 두루마기와 전복까지 일습을 갖춰 미국으로 보내졌다. 할머니의 정성 깃든 한복을 입은 손자의 돌잔치는 그 옷만으로도 뜻깊었다. 정작, 나중에 사진을 본 어머니는 옷을 제대로 입히지 못했다고 막내딸을 나무랐다고. 이계호는 호건이 호랑이 모습을 한 건이라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어머니가 호건을 처음 만든 것은 1970년대에 치른 첫 조카의 돌잔치 때였다. 어머니가 젊었을 때다. 어머니는 호건이 신기하고 지혜가 있는 옷이라 하면서 1995년에는 관심 있어 하는 막내 이계호를 위해 호건을 만들 수 있는 본을 그려주셨다. 그림대로만 하면 바로 할 수 있도록 상세하고 친절한 설명이 가득하다. 어머니의 그림, 글씨에 넘치듯 담긴 배려와 사랑이 그대로 감지된다. 이계호에게 호건은 두 개가 있다. 손자들 것을 모두 만들어주시고 증손자들 것을 만들기 시작할 때 막내다운 기지로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아들의 미래의 아들, 먼 훗날의 자신의 손자를 위해 하나 더 만들어달라고 졸랐다. 마흔에 낳은 막내, 큰언니와는 열일곱 살이나 차이 나는 막둥이 손에는 그래서 두 개의 호건과 호건을 만들 수 있는 옷본이 들어왔다. 이계호는 어머니 이석희 여사를 모두가 그리워하는 품이 넓고 격이 높은 분이라고 말한다. 이석희 여사는 100세 생일에 자손들이 어머니의 백수를 크게 기념하는 책을 출간해 각별한 축하를 받았고 2018년 105세의 나이로 평화롭게 영면에 드셨다.
그녀의 꽃, 모자 스타일리스트 서은영은 스타일리스트가 아닌 어머니 이영림 여사의 스타일에 매 순간 놀란다. 이 놀라움은 ‘아이고, 깜짝이야’가 아닌 ‘어머나,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의 감정이다. 감탄과 경외심으로 탄성이 나오고 이내 한 발짝 떨어져 사진부터 찍고 싶게 만드는 스타일링이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진다. 혁신적이고 위트가 넘치는데 사랑스럽고 우아하다. 언제부터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때부터 엄마는 모자를 썼다. 모자 없이 외출하는 일은 없다. 모자가 없으면 꽃이나 리본이 크게 달린 헤어밴드를 한다. 머리맡에 엘리자베스 여왕의 책이 놓일 때부터였는지 테이트 모던에서 프리다 칼로 전시를 본 뒤인지. 굳이 유추하자면 모자에 대한 사랑은 엘리자베스, 헤어밴드나 모자 등의 헤어피스에 코르사주를 붙이는 건 프리다에게서 영감을 받으신 것일까? 해외 출장이 잦은 딸이 “엄마 뭐 사다줘?” 하면 엄마는 처음 들은 질문인 양 변함없이 “응, 모자나 코르사주”. 코르사주도 모자도 사오라는 말씀이셨으리라 생각하고 둘 다 혹은 최소 둘 중 하나는 한국 땅을 밟는다. 엄마는 자신을 꾸민다. 자신을 꾸미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누가 보라고도 아니고 누가 보거나 말거나도 아니다. 당신이 좋아 당신을 꾸미는 거라 꾸민 당신에게 시선이 모이는 것은 이해는 하지만 즐기지는 않는다는 정도. 패션의 본고장 프랑스, 할머니들이 겁나게 멋 내는 러시아, 힙하고 쿨한 영국에서도 거리의 모든 시선은 엄마를 향한다. 혹시 옆 사람이 못 봤을까 봐 팔꿈치로 옆구리까지 쳐가며 엄마를 보도록 주의를 집중시킨다. 그 분주한 힌트와 수신호 사이에 이해 당사자인 딸이 다 당혹스러울 때에도 엄마는 룩과 무드에 맞는 걸음걸이로 흐트러짐이 없었다. 구사마 야요이도 울고 갈 도트 아디다스 트랙 점퍼에 블랙 팬츠, 엄마의 얼굴만 한 살굿빛 코르사주 모자를 쓴 엄마. 이세이 미야케의 플리츠 같으나 그것보다 더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병아리 개나리 섞은 노랑에 명도 대비가 가장 극악무도한 블랙 라인이 드리워져 흡사 꿀벌처럼 보이는 원피스와 얼굴의 두 배는 될 것 같은 벨벳 리본을 한 엄마. 같은 단지 옆 동에 사는 딸의 집 혹은 동네 개 산책 중에 만난 모습이 이 정도다. 쓰레기를 버리러 갈 때에도 예뻐야 한다는 것이 엄마의 지론이니 옆 동이나 산책은 디폴트값보다는 더했을 것이라고 봐야 하나. 값과 모양에 상관없이 세상의 모자는 엄마에게 가면 환골탈태한다. 자라, H&M에 들러 코르사주나 리본을 사서 붙여서 표정이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다. 비싼 것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좋은 것을 해체하고 재조합해 더 가치 있는 것을 만드는 엄마를 서은영은 존경한다. 엄마의 감각은 늘 맞고 언제나 옳다. “얼마나 좋니. 자기에게 정성을 쏟는 게. 너는 옷을 너무 못 입어서 큰일이야. 그래서 시집을 못 가는 걸 거야. 옷을 그렇게 입고 사람을 만나며 사업을 하다니 너는 정말…” 진심 걱정인 얼굴이다. 서은영은 요즘 더 흉흉하고 강퍅해진 사람들과 여러 사건을 보며 엄마를 자주 떠올린다. 정성을 쏟는다는 것. 자신에게 정성을 쏟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이 많다면 남을 힘들게 할까, 해치게 될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엄마는 어느 날부터 자신은 63세라고 말한다. 실제 예순셋부터 그렇게 했는지 그 이후였는지 모르지만 엄마는 나이 들지 않는 중이다. 실제 나이는 엄청나게 많지만. 엄마는 예순넷이 되지 않은 채로 오늘도 실버 스니커즈와 벌룬 원피스를 차리고 초여름을 걷는다. 여전히 사람들은 엄마를 보고 놀라 환호하고 딸은 자랑스럽고 엄마는 상관없다. 목련이 피었다 떨어졌고 겹벚꽃은 초록 잎에 밀려 비처럼 흩날렸다. 이 계절, 여전히 활짝 피어 있는 꽃은 엄마 모자의 코르사주, 그리고 코르사주보다 더 예쁜 엄마, 이렇게 둘뿐이다.
고름에 묶여 서울 구경 통영에서 결혼한 신혼부부가 서울로 신혼여행을 왔다. 화신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고 한일관에서 밥을 먹고 창경원도 가고 비원도 가는 일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때는 1942년. 해방도 되기 전, 전쟁이 일어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한 한참 전의 서울에 통영의 새 신랑 신부는 깃털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청춘을 거닐었다. 화신백화점에서 손에는 끼지도 못할 두껍고 실한 호박 반지를 서울 여행 온 기념으로 사준 신랑. 신부는 저고리 고름에 걸어 매듭을 지어 노리개처럼 멋을 냈다. 서울은 재미있는 게 많았고 좋은 것도 많았다. 신랑 신부의 기억은 각각의 저장고를 짓겠지만 화신백화점이 명쾌하게 찍힌 케이스, 호박 가락지 한 쌍을 지닌 신부는 영원히 박제될 행복한 기억의 한 자락을 갖게 된 것이다. 신부는 곧 엄마가 되었다. 엄마의 물건을 어려서부터 신기해하고 좋아라 한 딸은 엄마가 그 상자를 열 때마다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볼 때마다 손가락에 꼈다가 뺐다. 딸이 엄마가 되는 사이 엄마는 할머니가 되었다. 할머니는 딸과 손녀 앞에 신혼여행차 서울에서 산 화신백화점 호박 쌍가락지를 몇 번이고 보여주었다. 박경리의 <토지>, <김약국의 딸들>에서도 등장하는 꽃같이 어여뻤던 1923년생 박필순은 2019년 96세를 일기로 이 생을 마감했다. 고 박필순 여사의 물건은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뜻이 매우 깊은 것이 많아 국내의 많은 박물관에 기증, 보관되었다. 이 일을 맨 앞에 서서 가장 큰 힘을 쏟은 건 딸 송유숙과 손녀 고현정이다.
초여름빛 모시 저고리 독일에서 유학 중이던 스물일곱의 구본창은 누나들의 다급한 전화로 급히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어머니가 위독하시다고 했다. 김수현이 <청춘의 덫>에서 윤희를 통해 말했듯 위독은 죽음과 맞닿아 있는 단어다. 두렵고 어리둥절한 황망함의 크기가 커도 너무 컸다. 어머니가 아프다는 것을 알았지만 쉰여덟 어머니의 죽음을 예상하기에 스물일곱 아들의 나이는 너무 어렸다. 그렇게 아주 잠깐, 물리적으로는 짧아도 너무 짧은 찰나. 마음에는 영원히 잊히지 않는 억겁의 시간으로 남은 마지막 해후를 끝으로 어머니는 이 땅의 삶에서 떠나셨다. 3남 3녀의 슬픔과 서러움은 깊고 진했다. 타인의 부고는 애도가 전부이지만 가족의 부고는 슬픔에서 달아날 기회를 전혀 주지 않는다. 장례가 끝나자 누나들은 어머니의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슬퍼서, 안타까워서 기다리고 미루기에는 망자의 살림 정리는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버리는 것 외에는 길이 없어 보였다. 어머니를 여읜 것도 폐부 깊은 곳에서부터 눈물이 마르지 않는데 어머니의 손길 가득한 정겨운 살림이 치울 것, 버릴 것으로 분류되는 게 가슴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곧 독일로 돌아가야 했지만 누나들 곁에서 “그거 나 줘”, “그것도 내가 가질게” 했다. 도자기, 그릇, 반지, 놋주걱 등 어머니의 유품은 구본창의 살림이 되었다. 그중에 보이자마자 갖겠다고 해 지금까지 잘 간직하고 있는 것이 이 모시 저고리다. 1922년 개성에서 태어나 이남으로 내려와 자식을 여섯 낳고 미혼 시누이 둘까지 함께 대가족을 일궈 살아냈던 어머니가 그 옥색 저고리에 온통 있었다. 제사가 다달이 들어차고 시누이 둘을 출가시키고 아들 셋 딸 셋을 팍팍한 살림에서 어떻게든 일궈 먹이고 입혔던 검박했던 어머니가 그 자신 그대로 멋을 내신 옷이 옥색 모시 저고리였다. 풀 껍질로 만든 모시라도 녹색과 청색 사이 빛이 많이 들고 물이 가득 찬 것 같은 색상도 엄마 같았다. 사이사이 어머님 생각이 사무치게 들 때는 이제는 별로 없다. 그저 편안한 날, 바람 좋은 날, 햇살 좋은 날 어머니 물건을 꺼내본다. 그릇은 면보로 닦기도 하고 반지는 껴보기도 한다. 그리고 이 모시 저고리는 괜히 속고름이 비치는 어머님 마음께를 가만한 한숨으로 눌러본다. 작품을 하다 빛이 나른한 옅은 옥색을 보면 어머니 저고리가 떠오른다. 초여름도, 청포도도 함께 생각나고 할 수 있는 것만 대답하고 대답했다면 최선을 다해 최고로 잘해내라던 어머니 목소리도 더불어 영사된다. 저고리가 떠오르면 여름이 온다는 것, 그래서 봄이 익기 전부터 어머니의 모시 저고리가 생각난다.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동경대 요업과를 졸업한 미술 학도가 고향 큰 과수원에 그림을 그리러 왔다가 그 집 막내딸에게 반한다. 최 진사 댁도 아닌데 “그중에서도 셋째 따님이 제일 예쁘다던데”는 법칙처럼 맞아떨어졌다. 그 시절 장안에 파다하던 그 잘생긴 유학파 미술 학도가 과수원집 막내에게 반해 결혼하자 졸랐다의 주인공 두 분 되시겠다. 1910년생인 신랑은 1911년생 신부를 맞이해 딸 둘과 아들 셋을 낳고 행복하고 다 복하고 유복하게, 복 자가 들어간 좋은 것은 다 누리셨다. 첫눈에 반한 색시는 여든이 되어서까지 마음 설레게 좋은 내 편이어서 남편은 사업차 돌아다니다 좋은 것, 귀한 것을 보면 가리지 않고 아내에게 선물했는데 이 경대는 그렇게 받은 선물 중에서도 아내가 가장 아끼고 좋아한 것이었다. 아내는 시어머니가 되어서도 이 경대를 보고 분을 바르고 세어가는 흰 머리카락에 얕은 한숨을 쉬었고 늘어가는 검버섯에 웃음을 지었다. 시아버지가 해다 주신 것들이 모두 아주 좋고 무척 많아 시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모두 중앙박물관에 뜻깊게 기증하시는 것으로 그 사랑을 베풀었다. 그 와중에도 품에서 놓지 않은 것이 바로 이 경대다. 시어머니 차윤진 여사의 100년은 족히 넘었을 역사를 가진, 옻칠에 나전 장식을 한 경대. 거울이면서 거울이기만 할 수는 없는 이 애틋한 유산은 며느리 서성희의 화장대에 올라 오늘 또 하루의 역사를 보태는 중이다. 백설공주가 와 물어봐도 백설이의 새어머니께서 물어보셔도 이 거울을 보고 묻는다면 바로 당신이라고 말해줄 거울이 오늘로 백 몇 살 며칠을 보내고 있다.
사실(‘사실’처럼 하나 마나 한 말이 있을까. 지금까지는 다 아니라는 말도 아니고. 이제부터 제대로 들으라는 경고도 아니고. 그러나 사실이라고 말하는 말버릇을 가진 사람은 어떤 사건 전에 도사리고 있던 먼저의 진실을 밝히려고 할 때, ‘말은 안 했지만 실지에 있어서’라는 수준의 말로는 ‘사실은 말이야’로 시작하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것도 없다. 그래서 그다지 좋은 시작이 아닌 건 알지만 하게 되고 만다), 그 처음은 이게 아니었다. 엄마의 살림을 살피는 기획안이 테이블 위에 나눠졌다. 평생 베를 짠 엄마의 물레, 한쪽이 닳아 이제는 호떡 같던 얼굴이 떡국떡이 되어버린 놋주걱, 닦고 닦아 거울보다 삼라만상이 더 잘 비치는 나전 옷장, 시집갈 날을 받아놓고 옷장은 못 사가고 옷장 대신 걸 옥양목에 아롱다롱 십자수를 놓은 횃댓보, 100년이 넘은 씨된장이 숨 쉬고 있는 달 항아리 같은 독 등. 갈 수만 있다면 사리원까지라도 갈 판이었다. 오래된 물건의 미혹에 관해서라면 버금갈 수 없는 이 시대 최고의 아티스트 구본창과 이름 석 자가 아이콘이 된 패션계의 거장 서영희가 머리를 맞대자 엄마들의 살림이 애장품과 생활용품, 귀중품 등으로 나뉘었고 의미와 아름다움의 종류가 지선을 뻗었다. 엄마를 생각하게 하는 게 비단 주걱과 항아리뿐일까. 숨을 좀 깊이 마시면 돌아가신 지 30년이 되었건만 그 살냄새가 날 것 같은 스카프 하나를 담는 게 더 엄마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결론에 이르자 열 명의 엄마의 물건이 모아졌고 급기야 수십 점의 유산을 만나게 했다.
실제로 찍은 것만 요만큼일 뿐, 구경만 실컷 하고 되돌려보낸 것, 다 가지고 오지 못한 것, 말하면서 생각난 것, 그리움 못 이겨 이역만리 들고 간 형제에게 있는 것 등. 집집마다 숟가락 수만큼이나 추억도 방울방울이었다. 이 이야기를 모두 들었고 이 물건들을 부드럽게 살핀 사진작가 구본창은 엄마의 유산 그 자체였다. 자신도 어머니의 저고리를 꺼내놨지만 지금 어느 모던 주얼리 갤러리에서 오늘 오전 첫 출시로 만난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진주 반지를 새끼손가락에 끼웠을 땐 단조의 탄식이 낮게 깔렸다. 그는 정민경이 할머니를 기다리는 엄마의 애절한 마음을 읽어낸 서랍 경대를 찍을 때엔 마당에 깃든 오후 햇빛을 끌어다가 기다려도 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는 딸의 서정을 담아냈고, 코르사주를 달아 모자를 꾸미는 서은영의 엄마의 미감을 향해 조리개를 조일 때에는 독일 유학 시절 벼룩시장에서 이유도 모르면서 비싼 값을 치르고 온 두상본을 함께 놓는 것으로 리듬을 더했다. 물건을 찍는 게 아니라 이야기를 찍는 것이 무엇인지 구본창은 말 한마디 없이 역설했다. 열 살도 되기 전에 읽은 <꿈을 찍는 사진사>가 내용과 상관없이 떠오른 건 그가 찍고 나면 이야기가 더욱 생생하게 느껴지는 매혹을 당해서였을 것이다.
1911년생 엄마의 이야기가 2000년생의 딸들에게 사마천의 <사기>처럼 읽히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없지 않았다. 100년 전 엄마의 물건이 박물관에 있는 유물, 옥션에 나오는 골동품과 과연 다르게 느껴질까 하는 쪽의 기우는 곧 휘발됐다. 간명한 이치, 두 음절의 치트 키가 바로 ‘코어’였다. 엄마라는 두 글자는 일어나던 고민을 가라앉혔다. 엄마의 물건은 골동품이 아니고 엄마의 물건은 유물이 아니다. 엄마의 시간과 마음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아는 자식에게 그 물건은 100년 전 역사적 의미의 무엇이 아니라 지금 마음이 가슴 한가운데 위치한다는 것을 증거하는 찌르르한 저림, 뭉클한 감정으로 존재한다. 엄마들의 물건은 사연으로 유산, 보물이 된다. 대개 자식들은 엄마 얘기에 수다가 늘어진다. 스튜디오에 모인 물건들은 하나같이 이야기가 넘쳤다. 물건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해 맑고 깊게, 요컨대 고요하게 드러내는 구본창의 작품에서도 이번에는 자불자불 말소리가 들린다. 지혜롭고 사랑스러운 엄마들의 오감이 서린 유산에 귀를 대보기를 권한다. 눈이 읽어낸 소리보다 귀가 감지한 심상이 더 따뜻하고 달콤하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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