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과 밤을 오가는 27세 배우, 김혜준
배우 김혜준은 어느 밤에나 전구를 켜듯 등장한다.
한남동의 오래된 아파트, 나는 엘리베이터에 김혜준과 함께 탔다. 밤의 뒷골목에서 화보 촬영을 하기 전 베이스 캠프였다. 베이지색 후디에 조거 팬츠, 투명 뿔테의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을 쓴 김혜준은 그의 영화 <봄이 가도>(2018)의 학생 ‘향이’ 같았다. <봄이 가도>는 사고로 딸을 잃은 엄마(전미선)와 기적처럼 찾아온 딸 향이의 하루를 비롯해 세 편을 묶은 옴니버스 영화다. 아파트 소파에 마주 앉은 김혜준은 27세지만 그 영화에서처럼 무결한 10대의 얼굴이었다. 데뷔작인 웹 드라마 <대세는 백합>(2015)에서도 풋풋한 그를 볼 수 있다. 데뷔 기약 없는 아이돌 연습생 경주(김혜준)가 전직 아이돌 세랑(정연주)의 집에 머물면서 설렘을 느낀다. 둘의 미묘한 관계를 맑은 두 배우가 소화해내 유명 웹 사이트에 ‘갤러리’가 생성될 만큼 화제를 모았다.
김혜준은 후에 <SNL> 시즌 7의 크루가 되고, 단편영화와 드라마의 조연으로 출연했지만, 대중에게 각인된 작품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킹덤>(2019)이다. 한국형 좀비극으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이 작품에서 김혜준은 어린 계비 조씨를 맡았다. 그간 사극은 남성 간의 권력 다툼이나 여성 간의 시기 질투극으로 전개됐는데, <킹덤>의 계비 조씨는 앳된 얼굴로 남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살벌한 야망을 품는 역할이라 신선했다. 시즌 1에선 김혜준의 연기에 호불호가 있었지만 <킹덤> 시즌 2(2020)에서는 논란이 종식됐다. 그 사이 김윤석 감독의 영화 <미성년>(2019)으로 청룡영화상 신인여우상을 받았다.
김혜준은 <미성년> 출연 직전에 힘들었다고 말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미성년>의 오디션 합격 소식을 듣고 펑펑 울었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버스에 타서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어요. 마스크를 끼고 소리를 안 내려고 애쓰며 울었죠. 이전까지 오디션에 많이 떨어졌거든요. 오디션 기회가 있다는 자체로 감사하지만 실패가 반복되면서 지쳐 있었나 봐요. 합격 소식을 듣고 나서야 내 쓸모를 알아준 거 같았어요.” 아픔을 견딘 힘은 그의 인스타그램 프로필에 나와 있다. ‘해가 뜨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두우니까.’ “그 문구처럼, 이 또한 지나가리라, 힘든 일도 나중엔 별거 아닐 거라며 포기하지 않았어요.”
현재 김혜준은 드라마 <구경이>(2021)에 살인마 케이로 출연 중이다. 이영애의 타이틀 롤로 화제인 하드보일드 코믹 추적극이다. 트레이닝복을 입고 떡 진 머리의 구경이(이영애)만큼 케이의 매력은 굉장하다. 한국 드라마에서 이렇게 세고 경쾌한 여성 살인마 캐릭터가 있었던가. “진득하게 뭘 보지 못하는 성격인데 <구경이> 시나리오 1~5회를 후루룩 읽었어요. 하루 만에 케이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죠. 감독님께서 이 배역을 탐내는 배우가 많았대요. 본래도 강한 캐릭터, 액션 영화 등을 하고 싶었어요. 근래 <마이 네임>(2021)의 누아르 액션도 재밌게 봤죠. 요즘 다양한 장르와 캐릭터가 많아서 배우로서 설레요.” 의외로 김혜준은 영화 <미성년>을 위해 액션 스쿨에 다니고 영화 <변신> <싱크홀>에서도 와이어를 타며 연기한 적 있다. “액션에 열정은 있지만 몸이 안 따라주는데, 감독님이나 스턴트맨들이 저보고 감이 있대요. 앞으로 보여드릴 날이 있겠죠.”
<구경이> 캐스팅이 결정되고 김혜준은 이영애에게 전화를 걸었고, 집에 초대받았다. “선배님께서 밥도 차려주시고, 여러 얘기를 해주셨어요. 현장에선 선배님의 연기에 반응만 해도 좋은 장면이 연출되고 짜릿함도 자주 느껴요. 혹시 잘못한 게 없나 여쭈면 ‘잘하고 있다’고 격려해주시고요.” <구경이>에는 이영애와 김혜준뿐 아니라 김해숙이 거물 용국장으로 출연한다. 용국장은 구경이를 목욕탕에서 발가벗고 접견한다. 누아르에서 익숙한 남성들의 목욕탕(혹은 사우나) 장면을 여성으로 치환해 환기시켰다. 세대별 여성, 김해숙, 이영애, 김혜준의 합을 보는 것도 <구경이>의 장점이다. 김해숙과 촬영한 어느 날, 그는 김혜준에게 나지막이 “잘한다”고 말했다. “그 기분은 말로 못해요. 같이 일하는 스태프, 배우에게 에너지를 받거든요. 100여 명이 모여서 한 장면을 만든다는 유대감, 힘을 모아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한다는 성취감이 소중해요. 배우가 연기를 끊지 못하고 계속하는 이유 중 하나죠. 게다가 존경하는 대선배님이 칭찬까지 해주시니 더 울컥했어요.” 아마 김혜준의 노력이 선배들의 눈에 들었을 거다. 김혜준은 100여 명의 스태프에게 에너지를 받지만, 또 한편으론 그 100여 명 앞에 서는 것이 가장 두렵다. 초등학생 때는 발표시키면 울고, 대학교 조별 과제에 나선 적도 없다. 당연히 성인이 된 지금도 촬영 전에 유독 긴장한다. 이를 이기려고 잠꼬대를 대사로 할 정도로 연습한다. “툭 치면 튀어나올 정도로 외우고 시뮬레이션도 수십 번 해요.” 김혜준은 지금 케이 역할을 해내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에게 꿈을 물으면 “저는 현재를 가장 중시해요”라고 답한다.
케이를 보면 BBC 아메리카 드라마 <킬링 이브>의 사이코패스 킬러 빌라넬(조디 코머)도 떠오른다. 빌라넬은 살인을 게임처럼 하고, 외로워서 주변인에 집착하고 패셔너블한 의상으로 허함을 채운다 “그런 얘기를 들었지만, 케이는 좀 더 어리고 수다스럽고 해맑은 캐릭터로 잡았어요.” 심지어 귀엽기까지 하다. “<킹덤> 하면서 제 숨은 서늘함을 보았는데, <구경이>에서는 살짝 귀여움을 발견했어요. (웃음) 감독님도 케이가 무섭지 않고 귀여워 보일까 봐 걱정하셔서 연기에 더 신경 쓰고 있어요.” 물론 케이도 캐릭터를 의상으로도 보여주려 신경 썼다. 교복뿐 아니라 발랄한 치마, 레이스업 부츠, 짧은 레인코트 등이 케이를 보여주는 장치 중 하나다. “알아줘서 고마워요. 변화무쌍한 케이의 스타일을 어떻게 잡을지 감독님과 많이 상의했어요. 평소 살인을 하지 않는 케이는 ‘힙’해서 따라 입고 싶고, 연극을 주제로 살인을 저지를 땐 옷에서도 연상되길 바랐죠. 저도 그런 의상을 입으면 힘을 받는지 케이처럼 자신감 있어져요.” 김혜준의 평소 의상은 엘리베이터에서 만났을 때처럼 ‘입고 벗기 편한’ 트레이닝복, 조거 팬츠, 후디 위주다.
김혜준은 차기작으로 영화 <너와 나의 계절>에서 故 유재하의 첫사랑으로 출연한다. 청순한 김혜준을 볼 수 있을 거다. “제 또래의 밝고 착한 캐릭터를 많이 못해봐서 어려웠어요. 그렇기에 새롭고 즐거웠어요.” 김혜준은 그간 극단의 연기를 해왔다. 앞서 언급한 <봄이 가도>에 이어 <킹덤>이 그러하고, 영화 <변신>(2019)에선 악마에 씐 섬뜩한 연기를 하고, <싱크홀>(2021)에서 어리숙한 인턴으로 출연했다. 이런 상반된 얼굴을 보여줄 수 있는 힘을 물어보면 그는 <구경이>의 케이처럼 해맑게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라며 수줍게 웃는다. 인터뷰가 끝난 밤, 우린 미니버스를 타고 고양이만 배회하는 골목길에 들어섰다. 케이를 컨셉으로 사진 촬영을 시작하자 인터뷰하던 김혜준은 사라졌다. 사진에 서릿바람이 불었다. 김혜준은 원하는 만큼 낮과 밤을 오갈 수 있다. (VK)
- 피처 에디터
- 김나랑
- 포토그래퍼
- 고원태
- 패션 에디터
- 허보연
- 헤어
- 이지(E Z)
- 메이크업
- 김윤영(Prance)
- 스타일리스트
- 정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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