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길 것만 남긴다는 것, 제인 리

2026.06.19

남길 것만 남긴다는 것, 제인 리

트렌드도, 지역도, 공통된 미학도 없다. 파편화된 세계를 반영하듯 2026 LVMH 프라이즈 파이널리스트들은 패션이란 언어만 공유할 뿐이다. 그들에게 물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잃지 않는 법을.

섬네일 디자인 한다혜, 허단비

달든 쓰든, 오가는 말을 적당히 흘려들어야 한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은 1년 차. 리(LII)에 콜드 메일을 보냈고, 뉴욕에서 날아온 프레스 담당자의 답은 군더더기 없이 간결했다. 그 말투를 괜히 흉내 내며 일정과 질문을 주고받던 참이었다(다른 브랜드 일본인 담당자에게는 세심하고 긴 메일을 주고받았으니). 내내 담백하던 담당자가 답변을 보내오며 “제인이 답변하면서 즐거웠대(Zane thanks you for this thoughtful interview. He really enjoyed answering it)“라고 한마디 덧붙였을 때도 인사치레로 여겼다.

하지만 답장을 열어보니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싶어졌다. “어린 시절 옷을 뜯어 글루 건으로 이어 붙였을 때 엄마 반응이 어땠느냐”는 물음에, 제인 리는 “타인의 평가에서 자유로워지는 법을 배웠다”는 답을 보내왔다. 그에게 의미 없는 시간이란 없었겠구나. 보통 부모에게 주체를 넘겨 혼났거나 칭찬받거나 둘 중 하나로 남을 에피소드를, 제인은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진 출발점으로 기억한다. 그 태도는 설득하기 위해 장식을 더하는 대신, 필요 없는 것을 덜어내 본질만 남기는 브랜드 ‘리’로 곧게 자랐다.

@zaneliqz

리는 LVMH 프라이즈 이전부터 이미 주목받던 이름이다. <보그>가 ‘One to Watch’로 꼽았고, 에센스가 단독 컬렉션을 주문했으며, 그레타 리가 레드 카펫에서 입었다. 쇼 다음 날 스무 곳의 스토어에서 연락이 왔다는 일화도 있다. 그리고 2026 LVMH 프라이즈 세미파이널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며 전 세계 패션계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됐다. 파괴적이고 아방가르드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옷을 가장 본질적인 형태로 환원하려는 퓨어리스트(Purist, 순수주의자) 같은 집요함과 철저한 실용성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뉴욕을 기반으로 전 세계 바이어의 러브콜을 받으며 단숨에 글로벌 패션 신의 총아로 떠오른 이 젊은 디자이너는 1990년대 미니멀리즘과 하이 꾸뛰르의 유산을 동시대 스마트폰 세대의 시선으로 엮어낸다.

@lvmhprize

많은 선택지를 가진 서울이나 도쿄의 젊은이가 리의 옷을 일상에 들여놓을 때 성공을 실감한다는 이 다정하고 단단한 디자이너. 장식을 덜어내고 가장 단단한 것만 남기는 제인 리와 대화를 나눴다.

<보그 코리아> 독자에게 직접 ’리(LII)’를 소개해주길.

리는 영화, 음악, 예술에 관심이 많은 이들을 위한 실용적이면서도 디자인 지향적인 데일리 워드로브다. 20세기 중반의 미국 미술과 1990년대 스포츠웨어 같은 ‘과거’에서 영감을 받는 동시에 ‘미래’를 바라보기도 한다. 이 모든 요소에서 영향을 받지만, 결국 그 영감의 원천을 가장 본질적인 형태로 덜어내길 지향한다.

엄마의 뷰티 살롱에 놓여 있던 잡지로 패션을 처음 접했다고 들었다. 이제 그 세계의 중심에 섰다. 가장 실감 나는 순간은.

그동안 스타일리스트, 사진가, 매거진으로부터 과분한 지지를 받아왔지만, 가장 소중하고 실감 나는 순간은 따로 있다. 많은 선택지를 가진 서울이나 도쿄의 젊은이가 리를 입고 데일리 룩 태그를 걸어줄 때다. 우리가 만든 옷을 누군가 일상에 기꺼이 들여놓고 싶어 한다는 사실 자체가 내겐 더없이 영광스러운 고백처럼 다가온다.

@zaneliqz

어릴 때 엄마 옷을 가위로 자르고 글루 건으로 붙여 리폼했다고 고백했다. 엄마의 반응은 어땠나.

그때도 이해하지 못하셨고 지금도 종종 이해하지 못하신다. 하지만 덕분에 엄마에게 가장 값진 선물을 얻었다. 타인의 평가나 인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다. 엄마는 어떤 것이 타당성을 얻기 위해 굳이 남에게 공감을 얻거나 이해받을 필요는 없다는 걸 은연중에 알려주셨다. 내가 삶을 살아가고 디자인을 할 때 느끼는 표현의 자유는 상당 부분 그런 성장 배경에서 비롯됐다.

@l__i_i

컬렉션을 보며 종이접기를 떠올렸다. “모든 작업을 사각형, 박스, 가느다란 띠 같은 평평한 상태에서 시작한다”고 말했다.

디자인에 화려함을 더하기 전, 사물을 가장 기본적인 형태로 환원하는 과정일 뿐이다. 옷이 장식이나 기교를 갖추기 전에 근본적이고 실용적인 목적을 지녀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싶지 않다.

에어 포스 1 뒤꿈치에 달린 사각형 플랩, 접힌 헴라인 사이로 고개를 내민 포켓 등 형태를 파괴한다기보다 끝나야 할 지점보다 조금 더 나아간 듯한 디테일이 많다. 이런 ’경계(Edge)’를 다룰 때 어떤 생각을 하나.

대개 옷이 일상에서 주변 환경이나 움직임에 의해 자연스럽게 변형되는 뉘앙스를 포착했다. 자전거를 타다가 바지 밑단이 롤업된다든가, 길거리에서 종이를 밟았을 때 흡사 신발의 연장선처럼 보이는 순간처럼. 다만 희화화되지 않도록 선을 지킨다. 내가 디자인에 절대 주입하지 않으려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유머’다. 사람들은 똑똑하고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어 하지, 장난처럼 보이고 싶어 하지는 않으니까.

LII 2026 F/W RTW

LII 2026 S/S Menswear. @l__i_i

LII 2026 S/S Menswear. @l__i_i

쇼 음악으로 딥 하우스를 즐겨 튼다. 작업할 때도 음악을 듣나. 추천 트랙이 있다면.

언제나 음악을 틀어놓고 일한다. 요즘은 왕페이의 ’지기지피(知己知彼)’를 무한 반복해서 듣고 있다.

2026 봄/여름 레디 투 웨어 컬렉션에서는 영화 <메모리아>에서 힌트를 얻어 옷이 내는 소리가 기억을 촉발하는 방식을 다뤘다.

첫 런웨이 쇼였기 때문에, 옷이 사진에서 런웨이로 옮겨 갈 때 무엇이 달라지는지, 우리가 새로 활용할 수 있는 강점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그때 찾아낸 무기가 ‘소리’였다. 물론 열정을 쏟아부은 쇼 음악도 있지만, 여성이 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아우라 중 하나는 옷이 만들어내는 소리다. 바닥을 디디는 힐 소리, 서로 부딪치는 주얼리의 마찰음, 트렌치 코트의 서걱거리는 종이 같은 소리. 이 모든 것이 한 사람이 주는 전체적인 인상을 완성한다.

LII 2026 S/S RTW

LII 2026 S/S RTW

LII 2026 S/S RTW

1990년대 캘빈클라인, 헬무트 랭의 미니멀리즘과 마담 그레, 발렌시아가의 꾸뛰르 드레이핑. 상반된 두 세계를 리에서 블렌딩할 때 기준점은.

나는 스마트폰 네이티브 세대라 이전 시대의 모든 아카이브를 동시에 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두 세계를 시간을 두고 직접 겪어본 위 세대와 달리, 내게 이 두 영역은 그리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영감을 주는 디자이너와 그 시대의 유산을 어떻게 하면 더 실용적이고 입기 편하게 전할 수 있을지 고민할 뿐이다.

“미니멀리즘의 황량함, 균일성, 정밀함은 오히려 더 의도적이고 강력한 메시지”라고 했다. 미니멀리즘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 말에 쾌감을 느꼈다. 리에서 그 메시지는 어떻게 구현되나.

현대 패션에서 흔히 ‘미니멀’이라고 하면 회색이나 흰색 실크, 혹은 리넨 소재를 떠올린다. 하지만 나는 엘스워스 켈리, 댄 플래빈, 도널드 저드처럼 20세기 중반의 미술가에게서 영감을 받는다. 이들은 거대한 담론, 선명한 컬러, 정형화되지 않은 재료를 지극히 퓨어리스트적인 방식으로 탐구했다.

LII 2024 F/W RTW. @l__i_i
LII 2025 S/S RTW. @l__i_i

LII 2025 S/S RTW. @l__i_i

LII 2025 F/W RTW. @l__i_i

LII 2024 F/W Menswear. @l__i_i

뉴욕 패션을 만드는 중국인, 여성복을 만드는 남성. 자신의 위치를 “익숙하지 않은 것을 해석하는 자리”라고 했다. 이 포지션을 어떻게 즐기나.

패션 디자인은 관객, 즉 옷을 입는 이들과 나누는 완벽한 대화다. 비록 이 세계에 이방인으로 들어왔을지라도, 피드백을 듣고 사람들이 무엇에 공감하고 무엇에 공감하지 못하는지 지켜보며 서서히 내부자로 진화하고 있다. 이 포지션이 주는 보람찬 부분 중 하나는 내가 언제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으며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큰 위안이 된다.

18세에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팬데믹이 터졌고, 브루클린 아파트에 고립됐다. 그런 고립의 시간이 시야를 넓혀주기도 한다. 그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나.

사실 그 당시에는 지금의 남편이자 당시 남자 친구의 아파트에서 지내고 있었다. 15년 동안 쉼 없이 일해온 그에게는 일종의 달콤한 휴식이자 리셋 시간이었겠지만, 이제 막 커리어를 시작하며 세상으로 돌진할 준비가 되어 있던 나는 처음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뉴욕에 막 이주해 제대로 둘러보지도 못한 채 갇혀버렸으니까. 하지만 그 시간 동안 남편이 영화, 음악, 예술에 대해 정말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돌이켜보면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그 시기에 더 많은 것을 배웠을지도 모르겠다.

@jasonrider

남편인 스타일리스트 제이슨 라이더가 “디자인을 제외한 리의 거의 모든 영역에 관여한다”고 들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피드백을 받을 때의 장단점은.

성격이 거의 정반대다. 남편은 꽤 감성적이고 리액션이 좋으며 사교적이지만, 나는 차분하고 내성적인 편이다. 그래서 상호 보완이 잘된다. 제이슨은 내가 미처 신경 쓰지 못하는 부분에 추진력을 더하고, 나는 우리가 신중하게 장기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도록 중심을 잡는다. 단점이라면 둘 다 눈만 뜨면 하루 종일, 장소 불문 일 이야기를 쏟아내기 때문에 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는 휴식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처럼 단 두 명이 이끌어가는 작은 규모의 브랜드에서는 기꺼이 감수해야 할 필수적인 과정이다.

LVMH 프라이즈 인터뷰 시리즈 공식 엔딩 질문이다. 올해 LVMH 프라이즈 우승자는 누가 될 것 같나.

수십 년간의 예술성과 전문성을 축적해온, 엄청난 영감을 주는 디자이너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이 있다. 내가 감히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현명하고 올바른 판단으로 주인공을 가려내리라 믿는다.

2026 LVMH 프라이즈

하솔휘

하솔휘

웹 에디터

2025년 4월 <보그>에서 시작했습니다. 패션 감각이 필요한 모든 분야의 글을 씁니다. 많이 듣고, 다니고, 읽고, 고민하면서 제대로 된 글을 재밌게 쓸 줄 아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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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혜

한다혜

디지털 디자이너

귀엽고 멋지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이를 직접 구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영상 디자인을 전공했으며, 2022년 여름 <보그> 디지털 팀에 합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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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네일 디자인
한다혜, 허단비
포토
Instagram, GoRunway, Courtesy of L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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