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기도 전에 여러 모습으로 바뀌는 여자들을 위한”, 줄리 케겔스
트렌드도, 지역도, 공통된 미학도 없다. 파편화된 세계를 반영하듯 2026 LVMH 프라이즈 파이널리스트들은 패션이란 언어만 공유할 뿐이다. 그들에게 물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잃지 않는 법을.

새로움에 대한 수요가 공급을 앞지르고 “트렌드가 없는 게 트렌드”라는 말이 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평가도 의미도 달라질 소란들. 그 속에서도 묵묵히 제 갈 길을 가는 사람이 있다. 줄리 케겔스(Julie Kegels)와 그녀가 그리는 여성이 그렇다. 여러 역할을 해내는 동시에 누가 붙여주는 이름표 말고도 내면에 여러 개의 방을 들인 사람들. 그 모습이 꼭 비범하거나 비장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듯이 진지함과 유쾌함, 연약함과 매혹을 점심 식사 전에 다 꺼내 보이는 이들. 그들이 정해진 카테고리를 벗어나 해시태그를 무한 증식하며 자기만의 정원을 가꾸고 있다.

줄리 케겔스는 LVMH 프라이즈 이전부터 <보그>가 리뷰하는 이름이었다. 노드스트롬과 H. 로렌조를 비롯해 29개 스토어에 입점했고, 지난 5월 두아 리파가 데님 재킷을 입자 온라인 몰에서 ‘순식간에’ 품절됐다. 2024 봄/여름과 2025 가을/겨울 사이 매출은 33% 늘었다. 그러니 개천절 휴일을 반납하고 줄리 케겔스 쇼 리뷰를 쓰는 건 당연했는데, 정작 쇼를 보고 나면 그 피로마저 가셨다. 낯선 쇼 구성도, 브랜드가 그리는 여성에 내가 그대로 포개진다는 감각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피날레에 나선 줄리 케겔스의 표정이 그랬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숨길 수 없는 빛이 있다. 화려한 쇼를 끝낸 사람이 “아직 내 발보다 조금 더 큰 신발을 신은 듯 어색하다”고 수줍게 말한다. 그 사랑스러움을 이길 재간이 없었다.

벨기에 앤트워프 출신의 줄리 케겔스는 모교인 왕립예술학교 졸업 후 브랜드를 시작했다. 드레스가 스커트로 바뀌고 그림자가 본체와 따로 움직이는 컬렉션은 빠르게 변화하는 여성을 미처 다 따라잡지 못해 위트 있게 비틀거린다. 마침 <보그 런웨이>는 2026 가을/겨울 시즌부터 앤트워프 졸업 무대를 다루기 시작했다. 앤트워프 식스를 신화처럼 동경하며 자란 소녀가 이제 그 계보의 가장 새로운 이름으로 LVMH 프라이즈 무대에 섰다. 기묘하고 재치 있게 비틀거리는 옷을 만드는 줄리 케겔스와 나눈 대화를 전한다.

<보그 코리아> 독자에게 자신을 소개해주길.
조금은 기묘하게 움직이고 반응하는 옷을 좋아하는 벨기에 출신 디자이너라고 소개하고 싶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의 역할을 바꾸는 여성들, 그리고 그 빠른 변화를 미처 다 따라잡지 못해 위트 있게 비틀거리는 옷에 흥미를 느낀다.
어린 시절 꾸뛰르 책을 탐독하고 동네 재봉사 옆에서 넋을 잃고 바라보던 아이였다. 어떤 옷이 눈길을 사로잡았나.
비밀을 품고 있는 옷을 사랑했다. 완벽하고 전형적인 공주 드레스가 아니라, 독특한 구조나 드라마 혹은 아주 작은 결함이 있는 의상. 그때부터 이미 아름다움의 화려한 전면보다는 그 이면의 매력을 좇고 있었던 것 같다.

Julie Kegels 2026 F/W RTW

Julie Kegels 2026 F/W RTW

부모님 권유로 고등학교 때 과학을 공부했다. 패션과는 먼 분야인데, 그 시절은 어떤 시간이었나.
과학이 패션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건 사실이지만, 어쩌면 사물을 관찰하는 법을 그때 훈련받았는지도 모른다. 불행한 청소년기를 보낸 건 아니었지만, 늘 ‘다른 인생을 위한 예비 연구’를 하고 있다는 기분으로 그 시절을 보냈다.
앤트워프 식스에 매료되어 자랐고, 결국 그들의 학교에서 공부했다. 이제 새로운 세대가 주목하는 이름이 됐는데, 언제 가장 실감하나.
여전히 실감 나지 않는다. 내게 앤트워프는 신화 속 장소와도 같았으니까. 그래서 그 대단한 이름들과 같은 선상에서 내 이름이 언급되는 걸 들으면, 아직은 내 발보다 조금 더 큰 신발을 신은 듯 어색한 기분이 든다.

@juliekegels

@juliekegels
쇼가 끝나고 피날레 인사를 하러 나올 때마다 수줍어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휴일에 리뷰를 쓰다가 그 모습에 시선이 멈췄다. 무척 사랑스러운 순간이다.
인사를 하러 나가는 순간, 공들여 만든 환상이 끝나고 온전히 ‘나’라는 가감 없는 현실만 남기 때문에 수줍어지는 것 같다. 쇼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옷과 무대연출, 음악 뒤로 자신을 숨길 수 있다. 하지만 피날레 백스테이지 문이 열리면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그 순간은 무척 아름답지만 동시에 소름 끼치도록 두렵기도 하다.


Julie Kegels 2026 S/S RTW. @juliekegels

Julie Kegels 2026 S/S RTW. @juliekegels
스트랩 삭스, 펜슬 스커트, 셔츠가 데일리 유니폼이라고 들었다. 브랜드와 상관없이 옷장에서 ‘가장 줄리다운’ 한 피스는.
아마 너무 자주 입어서 낡아버린 아주 평범한 옷일 거다. 형태를 잃어버린 스커트나, 입었을 때 전체적인 착장을 아주 미묘하게 어긋나게 만드는 양말 같은 것들. 어떤 옷이 그 사람 고유의 필체가 되는 순간을 좋아한다.
컬렉션을 보면 옷만큼 ‘장면’을 디자인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다음 무대에서는 어떤 장면이 펼쳐질지 힌트를 준다면.
많은 스포일러를 할 순 없지만, ‘통제력을 잃어버리는 순간’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시작은 아주 차분하고 정돈되어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옷이나 그림자들이 주인의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행동하기 시작하는 장면을 구상 중이다.


Julie Kegels 2026 F/W RTW

Julie Kegels 2026 F/W RTW
줄리 케겔스를 입는 여성은 늘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정체성’을 지녔다. 그 다양성은 지금 세대와 어떻게 닿아 있나.
이제 정체성은 하나의 좁은 상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수많은 작은 방’을 품고 살아가는 것에 가깝다고 본다. 점심을 먹기도 전에 진지함과 유쾌함, 연약함과 매혹적인 면모, 실용적인 모습까지 이 모든 면을 한꺼번에 뿜어낼 수 있는 그런 역동적인 여성. 나는 그런 여성을 위해 옷을 만들고 싶다.
빨래집게로 집어놓은 듯 솟은 어깨, 친구의 번진 메이크업을 본뜬 프린트처럼 늘 위트와 미세한 균열이 있다. 평소 관찰을 좋아하는지, 메모도 자주 하는지 궁금하다.
끊임없이 관찰한다. 다만 아주 규칙적이거나 세련된 방식은 아니다. 휴대폰 메모장이나 영수증 뒷면에 급하게 적어두기도 하고, 때로는 그저 기억 속에 묻어두기도 한다. 어찌 보면 조금 ‘바보 같아 보이는’ 사소한 디테일을 좋아한다. 그런 불완전한 틈새에서 가장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2026 가을/겨울 쇼 무드보드에 한국 사진가 천경우 작품이 있었다(작은 TMI를 전하자면, 그는 나의 대학 지도 교수다). 영감을 찾아 먼 곳까지 탐색하는 편인가, 아니면 운명처럼 레퍼런스가 당신을 찾아오나.
직선적인 경로를 두고 영감을 찾아 헤매지는 않는다. 레퍼런스가 자연스럽게 나를 찾아오는 편이다. 다만 중요한 건 그것들이 말을 걸어올 때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도록 언제나 마음을 열어두어야 한다는 점이다. 우연히 발견한 사진이, 내가 지난 몇 달 동안 마음속으로만 앓고 있던 추상적인 느낌을 명쾌하게 설명해주기도 하니까.
빈티지 레이스, 오래된 담요, 식탁보처럼 ‘기억’이 깃든 패브릭에 오래 매료돼왔다. 지속 가능성 담론은 대개 친환경 소재로 직행하는데, 줄리는 소재 이면의 ‘내러티브’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듯하다.
내게 모든 디자인의 시작은 기억이다. 식탁보는 절대 단순한 천 조각이 아니다. 그 안에는 많은 저녁 식사와 얼룩, 손길, 격렬했던 말다툼까지 고스란히 배어 있다. 나는 그 패브릭 속에 살고 있는 ‘유령들’을 억지로 지우지 않는 것 또한 아주 훌륭한 지속 가능성이라고 믿는다.

Julie Kegels 2026 S/S RTW

Julie Kegels 2026 S/S RTW
알라이아 인턴십에서 “하나의 컬렉션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얼마나 수많은 부서가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하는지” 깨달았다고 했다. 직접 브랜드를 운영하는 지금, 그 경험 중 가장 깊이 남은 부분은.
패션은 결코 한 사람의 천재성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무리 감성적이고 아름다운 옷일지라도 그것을 뒷받침할 단단한 구조, 즉 사람, 타이밍, 생산 시스템,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다. 결국 그 황홀한 꿈을 현실로 만드는 건 조직적인 부서의 힘이다.
LVMH 프라이즈 인터뷰 시리즈 공식 엔딩 질문이다. 올해 LVMH 프라이즈 우승자는 누가 될 것 같나.
후보에 오른 모든 이가 믿을 수 없을 만큼 영리하고 재능이 넘친다. 그들을 만나볼 수 있어 정말 영광이었다. 개인적으로는 폰테(Ponte) 작업을 무척 응원하고, 사랑한다.
2026 LVMH 프라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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