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자에게는 무료함을 느낄 시간이 반드시 필요해요”, 다니엘 델 발레
트렌드도, 지역도, 공통된 미학도 없다. 파편화된 세계를 반영하듯 2026 LVMH 프라이즈 파이널리스트들은 패션이란 언어만 공유할 뿐이다. 그들에게 물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잃지 않는 법을.

‘패션 모먼트’라는 건 분명 존재한다고 믿는다. 나이도 취향도 다른 패션 업계 사람들이 드물게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 되는 순간 말이다. 세바스티앙 메예르와 아르노 바양이라는 이름을 모두에게 각인시킨 코페르니 2023 봄/여름 컬렉션이 그랬고, 존 갈리아노가 건재함을 알린 메종 마르지엘라 2024 봄/여름 꾸뛰르 컬렉션이 그랬다.
2026 가을/겨울 시즌에도 비슷한 순간이 있었다. 런던 패션 위크 중 쇼를 선보인 다니엘 델 발레(Daniel Del Valle)의 더 밸리(THEVXLLEY)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지난 2월 전까지 나는 다니엘이라는 디자이너도, 더 밸리라는 이름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쇼가 끝난 다음 날, 인스타그램을 열자 피드는 온통 그의 컬렉션 영상으로 가득했다. 패션과 예술을 오가는 더 밸리의 컬렉션은 즉각적인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그 화병 나온 쇼 봤어?’라며 출근하자마자 동료 에디터들에게 메시지를 보낸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물론 더밸리에 주목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보그 런웨이>의 수석 평론가 사라 무어는 진작 다니엘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그가 쇼를 선보일 수 있도록 런던 패션협회를 설득했고, 최근 레이디 가가는 그의 런웨이 룩을 입고 뮤비에 등장했다.

THEVXLLEY 2026 F/W RTW

THEVXLLEY 2026 F/W RTW
불과 몇 달 만에 패션 피플이 가장 궁금해하는 이름이 됐지만, 다니엘 달 발레 본인은 정작 패션에 큰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그는 더 밸리를 ‘패션 브랜드’가 아닌 ‘정원’이라고 규정하고, 자신이 디자이너라고 불리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는다. <보그>가 철저히 자신의 흥미를 유발하는 것만 좇는 호기심 많은 예술가, 다니엘 델 발레를 만났다.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더군요. 섭외 메일을 보내면서도 ‘과연 성사될까’ 걱정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어 다행이에요.
맞아요. 더 밸리와 결이 맞는 매거진과만 인터뷰를 진행하려고 하거든요.
간단한 소개를 부탁해요.
스페인 남부 세비야 출신의 다니엘 델 발레입니다. 19세 때 런던으로 이주했고, 그 무렵부터 제 안의 창의성이 꿈틀대기 시작했어요. 몇 년 동안 손으로 직접 이런저런 오브제를 만들다가, 그것들을 하나로 묶을 틀이 필요할 것 같아 더 밸리를 론칭했습니다. 이후에는 매거진과 협업하거나 브랜드 컬렉션을 위한 이어링과 헤드피스를 제작하는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이어왔고요.

@thevxlley

@thevxlley
더 밸리만의 옷을 만들게 된 계기는요?
‘더 나르시시스트(The Narcissist)’는 총 3년에 걸쳐 완성한 프로젝트에요. 본업인 플로리스트 일을 마치고 집에 와서 오브제를 만드는 게 일종의 루틴이었죠. 어느 날 그것들을 한데 모아 바라보는데, 어떤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오브제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고 할까요? 그때 처음으로 ‘컬렉션을 디자인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25개의 조각품(룩)을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플로리스트로 일하고 있나요?
첫 컬렉션을 선보인 뒤부터는 반대로 플로리스트 일이 부업이 됐어요. 지금은 더 밸리에 집중해야 할 시기라고 느꼈거든요.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행위 자체를 즐기는 사람처럼 보여요. 조금 전에도 손으로 자그마한 철사를 구부렸다 펴기를 반복하더군요.
부모님 덕이죠. ‘예술가 집안’까지는 아니지만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할머니까지 전부 손재주가 뛰어났거든요. 어머니는 뜨개질을 좋아하셨고, 할머니는 자수를 즐기셨습니다. 아버지는 제빵사였고요. 어릴 때부터 두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보며 자란 영향이 큰 것 같습니다.
지난 런던 패션 위크 전까지만 해도 더 밸리는 제게 낯선 이름이었어요. 어느 날 아침 출근길에 인스타그램을 켰는데, 피드가 온통 더 밸리의 컬렉션 영상으로 도배되어 있는 걸 보며 ‘주목해야 할 디자이너가 한 명 나왔구나’라고 직감했죠. 컬렉션이 엄청난 호평을 받는 걸 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불과 석 달 만에 벌어진 일이라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아요. 사실은 더 밸리를 ‘브랜드’라고 부르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더 밸리는 단지 제가 하는 모든 창작 활동을 묶어 부르는 이름에 가깝죠. 컬렉션에 등장한 모든 룩을 제가 직접 만들었고, 함께 일하는 직원도 없거든요. 무척 개인적인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친구들에게 축하 문자를 받고 컬렉션이 호평받는 걸 보며 정말 뿌듯했어요.

THEVXLLEY 2026 F/W RTW

THEVXLLEY 2026 F/W RTW
컬렉션 설명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내가 천착하는 것들의 집합’이라고 표현했더군요. 제목부터 ‘더 나르시시스트’고요. 대중에게 다니엘 델 발레라는 사람을 처음으로 드러낸 셈인데, 두렵지는 않았나요? 저라면 그랬을 것 같거든요. 나를 세상에 내놓는 게 두려워 거짓말을 했을 것 같기도 하고요.
당신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이상하게도 저는 전혀 두렵지 않았어요. 물론 쇼 시작 5분 전쯤에는 ‘세상에,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죠. 하지만 두려움보다 즐거움이 더 컸어요.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고,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아이디어가 현실이 되는 순간만큼 행복한 것도 없거든요.
그 즐거움이 두려움을 덮고도 남을 만큼 컸다, 이렇게 이해해도 되겠네요?
맞아요. 무언가를 만들고 그걸 세상에 내보이기까지의 과정이 너무 즐겁기 때문에, 부정적 감정이나 기운이 끼어들 틈이 없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네요.
지난 컬렉션에서는 남부 스페인과 런던이 동시에 느껴졌어요. 상반된 두 도시에서 성장한 경험은 지금의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나요?
런던과 세비야는 무척 다른 도시입니다. 고유의 색이 강한 지역이기도 하고요. 저는 늘 그 둘 사이 어딘가에 서 있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요. 남부 스페인에서는 소재와 질감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배울 수 있었습니다.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것도 배웠죠. 반면 런던에서는 자유를 찾았습니다. 조금은 우스운 표현일 수도 있지만, 런던은 주변 사람이 뭐라고 하든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곳이거든요.

담배꽁초로 만든 티셔츠가 특히 인상적이었어요.
그 티셔츠야말로 ‘런던 그 자체’죠. 요즘 사람들이 피는 궐련 꽁초가 아니라, 빅토리아 시대에 사용하던 세라믹 담배 파이프로 만든 옷이에요. 파이프가 굉장히 저렴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안에 담배가 낄 때마다 파이프를 버렸죠. 지금도 템스강 근처에서 골동품 파이프를 쉽게 구매할 수 있습니다. 그 티셔츠에는 수백 년 전, 파이프를 쥐고 ‘가십’을 나누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셈이죠.
꽤 낭만적이네요. 당신도 흡연자인가요?
맞아요.(웃음)
저도 마찬가지예요. 인터뷰 직전에도 긴장을 풀기 위해 담배를 피우고 왔죠.
저도요!
‘더 나르시시스트’를 보며 가장 인상 깊게 느껴진 건 소재였습니다. 빵이나 껌으로 만든 옷을 보며, 울이나 면처럼 여느 디자이너가 사용하는 소재를 의도적으로 피하는 건 아닐지 생각했거든요.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 너무 즐겁다고 했잖아요. 소재를 탐구하고, 그것을 더 깊이 이해하는 과정 역시 그에 못지않게 즐거워요. ‘이걸 이렇게 활용하면 어떨까?’ 같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그게 결국 실현될 때처럼 말이에요. 하지만 어느 순간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다는 생각이 들면 흥미가 사라집니다.

실제 빵으로 만든 베스트 형태의 톱. @thevxlley

풍선껌으로 만든 톱. 냄새는 어땠는지 묻자, 다니엘은 달콤한 냄새가 났다며 웃었다. @thevxlley
결국 당신을 움직이는 건 ‘재미’군요. 최근 빠져 있는 소재가 있나요?
그런 셈이죠. 앞으로도 새로운 소재를 연구해볼 생각이에요. 요즘은 유리에 푹 빠져 있습니다. 친구의 소개로 유리공예가를 만났는데, ‘이걸로 정말 많은 걸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더 밸리의 옷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공간은 박물관 전시장이다’라고 이야기했더군요. 더 밸리를 패션 브랜드로 정의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고요. 그럼에도 전통적인 패션 쇼를 선보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솔직히 말하면 처음부터 쇼를 염두에 두고 있었어요.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나 크리스찬 디올이 활동하던 시절 선보인 ‘친밀한’ 분위기의 쇼를 예전부터 좋아했거든요.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이 쇼의 일부가 된 듯한 기분이 드는 쇼 말이에요. 갤러리에 전시할 수 있을 만큼 예술적인 옷을 만드는 동시에, 그것이 몸 위에서 어떤 실루엣을 만들어내는지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쇼를 했다고 해서 저 자신을 ‘패션 디자이너’로 규정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렇게 되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될 것 같거든요. 지금 최대 관심사는 패션이지만, 저는 그저 호기심이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예술가일 뿐입니다.

상업적인 이야기도 조금 해볼까요? 앞으로도 쇼를 선보일 계획인지, 또 ‘더 나르시시스트’ 컬렉션 피스를 판매할 생각도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커머스도 없고 편집숍에 입점하지도 않았지만, 지금 판매는 하고 있어요. ‘더 나르시시스트’의 컬렉션 룩을 조금 더 웨어러블하게 해석한 커스텀 오더를 받고 있죠. 컬렉션 피스 중 일부는 너무 무거워 20분 이상 입고 있는 게 불가능할 정도거든요. 생산 공장에 외주를 맡기거나, 같은 옷을 대량생산하는 건 저답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에 모든 커스텀 오더는 컬렉션 피스와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끝까지 제 손을 거쳐 탄생합니다. 그리고 새 컬렉션은 당분간 없을 것 같아요. 지금은 ‘더 나르시시스트’ 피스를 활용한 전시를 준비 중이거든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토론 주제가 있어요. 패션은 예술일까요?
저는 예술을 ‘소통을 위한 수단’으로 정의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패션 역시 충분히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인간은 옷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잖아요. 옷을 입는다는 것은 곧 세상에 무언가를 외치는 행위고요. 아무 생각 없이 옷을 고르거나 의도적으로 조용한 룩을 연출할 때조차도요.
어릴 때 좋아했던 디자이너나 예술가가 있었나요?
특정 디자이너나 예술가의 작법을 따라 해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조금 전 이야기한 것처럼 부모님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죠. 플라멩코나 투우 같은, 지극히 ‘스페인적인’ 문화를 보고 자란 영향도 큰 것 같고요. ‘더 나르시시스트’ 컬렉션을 디자인할 때는 도자기나 가구, 혹은 일상 속 특별한 순간에서 영감받았어요.

THEVXLLEY 2026 F/W RTW

THEVXLLEY 2026 F/W RTW
어쩌면 그 점이 더 밸리를 특별하게 만드는지도 모르겠어요. 당신은 분명 패션 디자이너지만, 동시에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아웃사이더’처럼 느껴지거든요. 우리가 여태껏 봐온 디자이너들과 아무런 공통점도 없기 때문에 흥미롭다고 해야 할까요? 지금의 패션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요?
‘패션’이라는 단어 자체가 불결한 것이 되어버렸다고 생각해요. 저는 패션이 순수해야 한다고 믿어요. 어느 순간 권력과 돈을 가진 사람들이 패션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 같습니다. 그들 때문에 패션은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했죠.
거대 기업 산하 브랜드들은 모두 1년에 수차례 쇼를 선보이곤 하잖아요. 그 사이클에 따라 만든 옷은 영혼이 결여되어 있을 수밖에 없어요. 창작자에게는 무료함을 느끼고, 새로운 무언가에 빠질 시간적 여유가 반드시 필요하거든요. 제가 한 소재에 몰두하다가 흥미를 잃고, 또 다른 소재를 찾아 나서는 것처럼 말이죠. 1년에 수백 개의 룩을 만들어야 한다면, 무언가와 깊이 사랑에 빠지고, 그것을 충분히 탐구할 시간이 있을까요?
저는 모든 인간이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해 살아간다고 믿어요. 당신은 무얼 증명하고 싶은가요?
방금 이야기와도 연결되는 답변인데요. 어떤 일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요. 저는 더 밸리를 종종 정원에 비유하곤 합니다. 식물을 키울 때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돌봐야 하는 것처럼, 모든 일에는 진심과 인내심이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시간을 들이지 않고는 좋은 결과도 얻을 수 없죠.
마지막은 <보그>가 모든 LVMH 프라이즈 후보자에게 묻는 공통 질문이에요. 누가 우승할 것 같나요?
올해는 유독 경쟁이 치열한 것 같아요. 파이널리스트 모두가 우승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우승하지 못하더라도 괜찮아요. 여러 심사위원, 그리고 세미 파이널리스트들을 만나며 정말 많은 걸 배웠거든요. 지금 저에게는 그 어떤 압박도, 불안감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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