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은 패션을 위하여, 갈립 가사노프
트렌드도, 지역도, 공통된 미학도 없다. 파편화된 세계를 반영하듯 2026 LVMH 프라이즈 파이널리스트들은 패션이란 언어만 공유할 뿐이다. 그들에게 물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잃지 않는 법을.
강남구청역 근처 <보그> 사무실로 출근한 지도 벌써 5년. 그때나 지금이나 예쁜 옷을 보면 가슴이 뛰는 건 여전하지만, 솔직히 패션이 지겹게 느껴질 때도 있다. ‘좋아하던 게 업이 되어버려서’처럼 뻔한 이유는 아니고, 속도 때문이다. 인스타그램을 켤 때마다 정보가 쏟아지고, 새로운 이미지가 눈을 폭격한다. 브랜드들은 판매를 목적으로 하루가 멀다고 프리폴, 크루즈, 리조트 등 듣기 좋은 이름을 갖다 붙인 컬렉션을 공개한다.

2016년 론칭한 브랜드, 액트 넘버원(Act No°1)을 성공적으로 이끌던 갈립 가사노프(Galib Gassanoff) 역시 모든 게 ‘광속’으로 변해버린 패션계에 신물을 느꼈다. 2024년, 액트 넘버원을 떠나 홀로 ‘인스티튜션 바이 갈립 가사노프(Institution by Galib Gassanoff, 이하 인스티튜션)를 론칭한 그는 “급격한 속도는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가사노프는 카펫 하나를 만드는 데 짧게는 20일, 길게는 40일까지 걸리는 남캅카스 지역 장인들과의 협업을 통해 2026 가을/겨울 컬렉션을 완성했고, 그 옷들을 판매하는 가장 효율적인(혹은 옳은) 방법이 주문 제작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델핀 아르노부터 피비 파일로까지, 패션이라는 기계장치의 중추 역할을 하는 인물로 이뤄진 LVMH 프라이즈 심사위원단은 가사노프가 걷는 길이 일종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걸 인정이라도 하듯 인스티튜션을 2026 LVMH 프라이즈의 파이널리스트로 선정했다.

모두가 더 빨리 달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업계에서 ‘느려질 권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디자이너. <보그>가 집요하게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갈립 가사노프를 만나 장인 정신과 패션을 소비하는 이들이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인스티튜션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진행하는 한국 매체와의 첫 인터뷰입니다. 간단한 소개를 부탁해요.
조지아 출신의 갈립 가사노프라고 합니다. 13년 전 패션을 공부하기 위해 밀라노로 이사 온 뒤 쭉 이곳에서 살고 있어요. 학교를 졸업한 뒤 친구 루카 린(Luca Lin)과 함께 액트 넘버원을 론칭했고, 2년 전 브랜드를 떠나 인스티튜션을 창립했습니다.
액트 넘버원은 이름이 꽤 널리 알려진 브랜드잖아요. 그런 브랜드를 떠나 인스티튜션을 론칭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루카와 함께 일하며 정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디자인뿐 아니라 생산, 물류 등 브랜드를 운영하는 데 필수적인 부분까지 전부 말이죠. 하지만 브랜드 규모가 점점 커지니 어느 순간 거대한 톱니바퀴의 일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더군요. 일종의 ‘리셋’이 필요한 때라고 느꼈어요. 조금 더 자유롭게 제 안에 있는 것을 표현하고, 패션 시스템에 대해서도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거든요.
인스티튜션을 설명할 때 ‘플랫폼’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더군요.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아제르바이잔과 조지아 장인들이 활동할 수 있는 플랫폼이자, 그들의 기술을 후대에 전수할 수 있도록 돕는 거죠. 지금은 두 지역의 전통 공예 기법에 집중하지만, 언젠가는 다른 나라 장인들과도 협업해보고 싶어요. 특히 티베트에 흥미로운 분야의 장인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Courtesy of Sara Sibio

Courtesy of Sara Sibio
아제르바이잔 혈통으로 태어나 조지아에서 자랐죠. 각 나라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나요?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Tbilisi) 남부에서 나고 자랐어요. 오래전부터 아제르바이잔 출신 사람들이 많이 살던 지역이죠. 집에서는 아제르바이잔 음악을 듣고, 아제르바이잔 전통 음식을 먹었어요. 집을 나서면 조지아 사람들이 더 많았으니, 두 나라의 문화를 모두 경험하며 큰 셈입니다. 남캅카스 지역에는 워낙 많은 민족이 함께 살아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러 문화를 접한 것은 물론, 민족지학에도 관심을 두게 됐어요.
제가 1994년생인데, 조지아가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게 1991년이에요. 조부모님은 공산주의 이념의 영향을 크게 받았지만, 부모님 세대는 공산주의와 자유를 모두 경험했죠. 저처럼 완전한 자유를 누리며 자란 세대는 이념이 개인의 사고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아주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고요. 그때의 경험 역시 지금의 저에게 큰 영향을 준 것 같아요.
조지아와 아제르바이잔 지역의 공예에 빠지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저희 집에는 늘 카펫이 있었어요. 남캅카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색과 패턴 모두 화려한 카펫 말이죠. 저는 어릴 때부터 그런 카펫에 푹 빠졌습니다. 양치기였던 증조부의 영향을 받아 여름이면 조상들이 머물렀던 고원지대로 휴가를 떠나기도 했는데, 그곳에서 카펫을 직접 짜는 사람들을 보며 ‘손으로 무언가를 만든다’라는 행위에 매료됐죠. 정원이 있는 집에서 자랐기 때문에 곤충의 질감, 동물의 털, 뿔의 형태 등을 연구하는 걸 좋아하기도 했고요.
패션을 공부한 뒤에는 카펫 직조와 수공예 기법을 본격적으로 공부했어요. 조지아와 아제르바이잔에서 카펫 장인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일종의 위기 의식을 느꼈죠. 젊은 세대가 남캅카스의 전통 공예에 관심을 갖도록 하고, 나아가 그 맥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장인들이 만든 물건을 보며 패션과 사랑에 빠지는, 저 같은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Courtesy of Sara Sib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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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장인들과 긴밀히 협업해 지난 컬렉션을 완성했죠. 스튜디오에서 직원들과 함께 옷을 디자인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과정일 것 같아요. 그들 모두가 납기일을 맞출 수 있도록 일정을 조율하고, 당신의 디자인 의도를 완벽하게 이해시켜야 하니까요.
장인들이 컬렉션 제작 과정 전반에 걸쳐 참여하는 것은 아니에요. 조지아는 1년에 두세 번, 아제르바이잔은 1년에 한 번 정도 방문하죠. 왓츠앱으로 연락을 주고받을 때도 있고요. ‘협업’이라는 표현이 가장 알맞을 것 같습니다. 저는 장인들과 협업할 때 절대 스케치나 디자인을 보여주며 이대로 만들어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작업물을 볼 수 있을까요?”라고 물어보죠.
컬러나 패턴이 다른 카펫을 만들어달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카펫을 짜는 사람들이지, 디자이너나 재단사가 아니잖아요. 지난번에는 카펫의 크기와 비율 정도만 조정해달라고 부탁했죠. 그 카펫들을 제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 역할은 완성품을 아틀리에로 가져온 뒤, 그걸 입을 수 있도록 변형하는 것이죠.
지난 3월, 밀라노 패션 위크 중 선보인 2026 가을/겨울 컬렉션에 숨어 있는 레퍼런스를 설명해줄 수 있나요? 어떤 전통 공예 기법을 사용했고, 어떤 문화에서 영감을 받았는지 알면 비로소 컬렉션의 내러티브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컬렉션 타이틀은 제가 나고 자란 지역의 이름을 따 ‘보르찰리(Borçalı)’라고 지었습니다. 앞에서 민족지학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는데, 이번 컬렉션은 보르찰리 지역의 전통 복식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어요. 컬렉션 초반부에 등장하는 번데기 같은 실루엣의 후디드 드레스와 톱이 좋은 예죠. 보르찰리의 중년 여성들이 즐겨 착용하는 전통 모자를 참고했습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모자가 종교적 억압을 상징하지만, 조지아에서 모자는 일종의 문화이자 관습이거든요.
이번 컬렉션은 제가 보르찰리 지역의 여성에게 바치는 헌사이기도 합니다. 1918년, 조지아와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제국에서 독립한 직후 여성 투표권을 인정했어요. 유럽 국가 대부분이 여성 참정권을 인정하지 않던 시절, 제가 태어난 마을에서 한 무슬림 여성이 지역 행정 책임자로 선출된 적도 있습니다. 그녀 역시 전통 모자를 쓰고 마을 사람들을 이끌었을 테죠.

Courtesy of Sara Sib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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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보그>와의 인터뷰에서는 레디 투 웨어보다 ‘메이드 투 오더’가 브랜드와 더 어울리는 방식이라고 이야기했더군요. 그 부분을 읽으며 인스티튜션이 현대 패션의 안티테제 같다고 생각했어요. 장인 정신을 강조하고, 무엇보다 속도가 중요한 업계에 속해 있으면서도 일부러 느리게 움직이죠. 동료 디자이너들과 완전히 다른 길을 걷고 있는데, ‘동조 압력’을 느낄 때는 없나요?
큰 불안감은 없어요. 소량 생산부터 메이드 투 오더까지, 전부 인스티튜션을 처음 론칭할 때부터 갖고 있던 계획이거든요. 메이드 투 오더에 대한 제 신념은 확고합니다. 옷이란 사람이 입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잖아요. 모든 옷이 그런 건 아니지만, 인스티튜션의 옷은 정확한 치수를 재고 몸에 맞게 조정하는 과정을 꼭 거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메이드 투 오더만으로는 살아남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어서, 일부 편집숍에 입점하기도 했죠. 방향을 바꿀 생각은 없습니다. 공격적으로 확장하고 싶지도 않고요. 그렇게 되면 품질관리가 불가능해지거든요.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지켜나가며 성장하고 싶어요.
같은 인터뷰에서 ‘이 시스템이 싫다’고 이야기했더군요. 패션 업계 전반에 대한 이야기였을까요?
생산 시스템 전반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제품을 대량으로 생산한 뒤 언젠가 팔리기를 기다린다는 게 예전부터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거든요. 경영진이 디자이너에게 끊임없는 성장을 요구하고, 즉각적인 성과가 없으면 디자이너를 교체해버리는 것도 똑같습니다. 물론 그런 시스템 속에서 훌륭한 디자인을 선보이는 브랜드도 존재하지만, 급격한 성장은 불안정할 수밖에 없죠.
소비자도 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요즘 사람들은 스킨케어나 ‘건강한 음식’에 관심이 많잖아요. 저는 ‘좋은 옷’을 입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옷은 하루 종일 우리 피부와 맞닿아 있으니까요. 지나치게 유행을 좇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소비자는 패션도 일종의 ‘투자’가 될 수 있다는 걸 인지하고, 브랜드들은 고객이 투자가치를 느낄 수 있는 옷을 만들어야 하죠. 인스티튜션이 지향하는 것도 바로 그 지점입니다.

Courtesy of Sara Sibio

Courtesy of Sara Sibio
2026 LVMH 프라이즈의 파이널리스트로 선정되었습니다. 시스템이 싫어 액트 넘버원을 떠난 당신이, 대기업이 주관하는 상의 최종 9인 후보 중 한 명이 되었다는 게 상당히 흥미로운 아이러니라고 생각했어요.
비슷한 생각을 했어요.(웃음) 시스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스티튜션을 론칭한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완전히 시스템 밖에서 브랜드를 운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 분명히 하고 싶은 건, 저는 혁명을 일으키거나 제 방식을 강요하고 싶은 게 아니라는 점이에요. 단지 대안을 제시하고 싶을 뿐이죠. 지난 3월, 세미 파이널리스트들이 파리에 모여 프레젠테이션을 선보였을 때도 LVMH 관계자들에게 과잉생산에 대한 제 의견을 계속 피력했어요. 인스티튜션의 비즈니스 모델에 관심을 보이는 관계자도 많았죠.
마지막은 <보그>가 모든 LVMH 프라이즈 후보자에게 묻는 공통 질문이에요. 누가 LVMH 프라이즈의 우승자가 될 것 같나요?
글쎄요. 올해 파이널리스트들은 각기 다른 지역과 문화적 배경을 대표해서 더 어렵네요. 브랜드가 제시하는 이미지, 옷, 그리고 디자이너 본인. 이 삼박자가 가장 잘 맞아떨어지는 브랜드가 우승하지 않을까요?
현명한 답이네요. 그럼 저는 당신이 우승하기를 기도할게요!
고마워요.(웃음) 파이널리스트가 된 것만으로도 영광이지만, 세 상 중 하나를 받을 수만 있다면 정말 좋겠네요!


2026 LVMH 프라이즈 파이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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