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온 여성 작가 3인의 삼중주
지금 광화문 일민미술관에서는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온 여성 작가 3인의 개인전이 열린다. 관습적인 주류의 언어로 쓰인 미술사 바깥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소리 내는 윤석남(b.1939), 홍승혜(b.1959), 이은새(b.1987)의 특별한 삼중주.
#1 이은새의 거울
포켓몬, 텔레그램, 더 지니어스. 작가와의 대화 중 알게 된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소한 관심사 몇 가지. 이은새는 요즘 20~30대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미술계의 새로운 스타다. 지난해 갤러리2에서 열린 드로잉 전시 <As Usual: 늘 마시던 걸로>는 교통도 불편한 평창동 언덕길의 조용한 주택가를 들썩이게 했다. 전시장을 가득 메운 힙스터 무리들은 쉴 새 없이 스마트폰으로 작품을 촬영했으며 한동안 SNS의 화제였다. 이은새의 작품이 이토록 인기 있는 이유가 뭘까? 작가의 작업 소재는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여러 상황과 풍경(자신이 경험하거나 목격한 사건) 혹은 책 속의 문장, 영화, 뉴스 같은 미디어를 통해 그가 접한 장면들이다. 그렇다면 작가 개인을 둘러싼 주변을 살피는 게 앞으로 얘기할 전시 <디어 마이 헤잍-엔젤-갓>에 대한 작은 힌트가 되진 않을까?
이은새의 인스타그램 프로필 이미지는 보라색 슬라임처럼 생긴 메타몽이다. 어떤 포켓몬으로든 변신할 수 있는 남다른 개성을 지닌 변신의 천재. 만우절 이벤트로 게임사에서 만든 8비트 레트로풍의 도트 캐릭터이다. 텔레그램을 종종 이용하며 작가 홈페이지에선 그가 장난스레 만든 텔레그램 이모티콘 스티커를 다운받을 수 있다. 그렇다고 낯선 이들과의 소통을 즐기는 외향적인 타입은 아니다. SNS의 업로드 주기는 간헐적이며 실제로 작업에 관해 얘기할 때도 단정 지어 말하길 주저하는 편이다. 마침표 없이 흘러가는 생각과 감정의 나열, 백지 가운데 모호하게 뜬 부호들. 이은새는 머릿속에 고정되지 않은 액체 상태의 상념을 그림으로 이미지화한다. 일민미술관 1층에서의 이번 전시는 그런 뒤엉키고 혼란스러운 현재 상태의 불명확한 반영이며, 제목 ‘디어 마이 헤잍-엔젤-갓’은 “친애하고 증오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숭배하는” 회화에 대한 작가의 비교적 솔직한 심정이다.
“전시를 준비하면서 고민이 많았어요. 몇 차례 전시를 하면서 너무 괴로웠거든요. 후회와 죄책감이 몰려오고, 그래서 그림을 그리는 게 더 어려워지고… 이번에 매체를 옮겨 조각을 시도한 건 이런 고통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었는지도 몰라요.” 답답하게 느껴지던 기존 회화의 프레임 구조를 처음으로 탈피한 그는 공간을 캔버스 삼아 철을 회화의 재료로 끌어들였다. 단단한 철을 자르고 연마하는 일은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모래주머니를 차고 선을 긋는 느낌’이었다. 부드러운 물감과는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거칠고 단단한 철로 공간에 그림을 그린다는 건 색다른 해방감인 동시에 또 다른 벽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가위로 종이를 자르는 것보다 쉽게 철을 확확 녹여 형태를 변형시키는 데 큰 매력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여전히 미감이나 어떤 규칙을 포기하지 못하는 제 자신을 발견하고 복합적인 감정이 들더군요.” 작가로서의 고통스러운 마음과는 별개로 전시 제목은 꽤나 엉뚱한 곳에서 튀어나왔다. tvN의 예능 프로그램 <더 지니어스> 시리즈가 파생시킨 은어 ‘혐젤갓’을 혹시 기억하는지. 시청자들은 일부 참가자에 대한 불만과 비난, 칭찬을 ‘혐오, 엔젤(Angel), 갓(God)’ 세 가지로 압축해서 마치 낙인을 찍듯 이 중 한 단어를 이름 앞에 붙여 별명처럼 불렀다. 물론 시청자의 마음은 매회 쉽게 바뀌었고 종국엔 종합 버전이 탄생한다. “당시엔 어떻게 사람한테 그런 표현을 쓰는지 이해가 안 됐는데 지금 제가 회화를 앞에 놓고 하고 있는 게 같은 맥락인 것 같더라고요.” 이은새의 작품을 보는 관객의 기분 역시 해괴하긴 마찬가지다. 천사 같은 얼굴로 악마 같은 표정을 짓는, 귀여운데 좀 무섭고, 웃긴데 왠지 긴장되는, 겁 많게 생긴 커다란 눈으로 사납게 달려드는 성난 사람들을 마주하는 기분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나는 은빛이고 정확하며 선입견이 없다/ 무엇이든 보면 즉시 삼키고/ 있는 그대로일 뿐, 사랑이나 증오로 흐려지지 않는다/ 나는 잔혹하지 않고, 다만 충실할 뿐/ 모서리가 네 개인 작은 신의 눈…” 최영미 시인이 번역한 실비아 플라스의 시 ‘거울’이 어쩌면 이은새의 이번 전시에 대한 적절한 표현이 될지도 모르겠다. 거울처럼 반사되는 은색 필름으로 덮인 전시장에서 관객은 작품을 보는 동시에 벽에 비치는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뿌옇게 번지고 다소 왜곡되어 나타나는 은빛 거울 속 관객의 모습은 자신의 불완전함과 동요를 내비치는 작가의 작품과 같은 프레임 안에 놓이게 된다. “몇 년간 인물에 집중한 작업을 주로 해왔는데 제가 생산한 이미지가 유통되는 과정을 보면서 생각이 많아졌어요. 성별을 떠나 사람들은 누구나 사회의 프레임 안에 갇히거나 타인을 가두게 되잖아요. 저 역시 그런 경험을 해왔고, 그런 편향된 시선의 맞은편에서 무비판적으로 소비되는 이미지를 뒤집어보고 싶다든지, 틀을 비틀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던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은 저도 모르겠어요. 제가 생산한 이미지 역시 어떻게 보면 똑같은 구조 안에 다시 들어가버리는 건 아닌지. 여성의 신체를 대상화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의도와는 별개로 저의 이야기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건 아닌지. 오히려 해로운 방식으로 소비되는 건 아닌지. 이런저런 명분을 붙였지만 사실은 나 또한 자극적인 이미지를 좋아해서 그린 건 아닌지. 개인적 욕망과 가치관이 부딪치는 상황인데 어느 한쪽에 설 수도 없어요. 지금은 다 뒤엉켜 있어 그 위에 서 있는 일이 힘든 것 같아요. 다른 분들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저는 제가 고민하는 바를 그냥 이렇게 보여줄 뿐이에요.”
어지러운 짐 더미 사이에 맨발로 멍하니 앉은 작가의 자화상 ‘과부하의 밤’(2021)이 지금의 심리 상태라면, ‘개를 찾습니다’(2021)와 ‘주인을 찾습니다’(2021)는 엇갈린 현재의 상황, 맹렬한 눈빛의 고양이가 맥없이 늘어진 강아지의 목덜미를 물고 있는 ‘더블’(2021)은 어찌할 수 없는 작가의 난감한 입장을 대변한다. 이 사랑스럽고 앙증맞은 두 존재는 작가의 반려묘와 그 고양이가 집에서 물고 다니는 인형이다. “여러 장난감을 줘봤는데 항상 그 친구가 선택하는 건 딱 자기랑 비슷한 덩치와 색깔의 강아지 인형이더라고요. 참 귀여운 장면인데 어떻게 보면 가엾기도 해요.” 무료함을 달랠 길 없는 고양이의 덧없는 욕망과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는 장난감의 슬픈 운명이랄까. 이은새의 작품은 설명을 듣고 나면 더 재미있다. 모호한 이미지로 어렵고 심오한 이야기를 쏟아내는 게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생활 속 수수께끼 같다. 기꺼이 문제를 풀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불꽃 같은 붉은 페인팅과 거침없는 붓질이 언뜻 파괴적인 내용의 추상회화처럼 보이는 ‘산성 핑크와 녹은 블랙’ (2021)은 또 어떤가. “그냥 제모 중인 다리예요. 분홍색 제모 크림이 녹아서 흐물흐물해진 털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지는 장면인데 역겹기도 하지만 그게 또 너무 멋있어 보이는 거예요. 보기 싫어서 없애버리려 하던 것들이 다시 밑에서 뒤섞이고. 이번 신작이 전에 비해 추상에 가깝다는 얘기를 많이들 하시는데 실은 정말 단순하고 명확한 이미지들이죠.” 지루하고 심각한 형이상학자들의 뒤통수를 치는 난센스 퀴즈, 말로는 통할 수 없고 문자로는 세울 수 없는 진리를 담은 선문답이다. 생각해보라. 피카소의 ‘게르니카’(1937)가 스페인 내전 당시 인간의 부조리와 전쟁의 참상을 다룬 세기의 명작인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나,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서 부조리와 비극은 어느 평범한 날의 욕실에서도 얼마든지 피어나는 법이다. 팬데믹 시국에도 털은 열심히 자라고 신체의 해방을 외치면서도 미에 대한 욕망은 좀처럼 떨쳐내기 힘들다. “말로 하면 정말 노골적이고 유치한 그런 것들이지만 그림은 한 번에 확 뱉어지지 않는 간접적인 표현을 만들어내죠. ‘이것이다’라고 단정 짓는 대신 또 다른 이야기를 꺼내볼 수 있는 태도. 전 그게 회화가 가진 매력이 아닌가 합니다.” 틀에 박힌 사고를 변형시키거나 굴절시키는 평화적 방법으로서 회화는 미덥잖은 언어 대신 압축과 은유, 왜곡된 이미지와 그 모순을 감추고 연결하는 기묘하고 아름다운 힘을 발휘한다. 이은새는 그 해체의 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다. 잔잔한 물에 던진 돌이 만드는 파동, 변화의 찰나, 일상의 균열. 기성의 표현 속에 존재하는 작은 비밀이 폭로되는 그 순간을 주시하라.
#2 홍승혜의 무대
홍승혜의 무대는 사각의 모니터 화면에서부터 출발한다. PC의 혁신으로 불리던 ‘윈도우 95’가 막 보급되던 1990년대 말, 도스 체제의 컴퓨터 그래픽이 만들어내는 기하학무늬의 무궁무진한 변신과 속도에 매료된 그는 픽셀 기반의 컴퓨터 드로잉 작업을 입체 조각과 3차원 공간 작업으로 확장시켜왔다. “포토샵 3.0으로 시작했는데 지금도 제가 하는 작업은 기술적으로는 단순해요. 로테크죠.” 서울대와 파리 국립미술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한 그가 물감 대신 컴퓨터의 최소 단위인 픽셀을 택한 건 세포 분열이라도 하듯 화면 속에서 자유롭게 형태가 변모하는 이 네모 입자가 물질을 이루는 최초의 씨앗(원자)처럼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한 인터뷰에서 당시의 경험에 대해 “화면은 픽셀로 이뤄진 우주였고, 픽셀은 싹이 돋고 자라고 증식하는 자연계처럼 느껴졌다”고 밝힌 바 있다. 1997년 국제갤러리 전시 <유기적 기하학>을 시작으로 홍승혜는 픽셀의 네모 구조를 벽돌처럼 쌓아 평면 작업부터 그 일부를 본뜬 가구와 기물, 창과 문, 나아가 집과 광장(<광장사각>, 아뜰리에 에르메스, 2012)까지 우리를 둘러싼 주변 사물과 세계를 구축한다.
일민미술관 2층의 <무대에 관하여>는 홍승혜가 처음 시도하는 협업 퍼포먼스이자 연출자로서 지휘한 무대극이다. 픽셀에 근거한 구조물과 장치가 가설된 이곳엔 원형 무대가 있다. 다양한 재료로 빚어진 이 인물(혹은 의인화된) 조각들은 작가의 가까운 이웃이기도 한 조각가 4인의 분신이다. 퍼포먼스가 진행되는 매주 토요일에는 배우 다섯 명이 전시장 안을 돌아다닌다. 각각 예술가, 성우, 관객, 공주, 연인으로 분한 이들은 일종의 움직이는 조각들이다. 관객 뒤를 그림자처럼 쫓으며 전시장의 작품과 배우들의 상태를 점검하는 이는 예술가, 분홍색 원피스 차림의 덩치 큰 남자 배우는 공주, 커다란 인형 탈을 쓴 사람은 성우다. “공주는 진짜 공주라기보단 사랑받는 막내딸 같은 자신이 되고 싶은 캐릭터를 연기해요.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목소리로 상대를 대하는 성우는 자신의 얼굴을 그대로 확대한 가면을 쓰고 있죠. 그리고 연인은 끊임없이 자신의 사랑을 찾고 기다리는 역할을 합니다. 미술관이라는 비일상적 공간에서 이뤄지는 일상의 연극적 재현이죠.”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없는 이 공간에선 실제 관객과 배우의 구분도 모호해진다. 연출자로서 작가는 대략의 설정과 함께 협업자들에게 ‘각자의 캐릭터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주문은 그뿐이었다. 협업자 아홉 명은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조형예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홍승혜의 제자들로 이 무대는 각자의 개성과 연출된 상황, 즉흥과 우연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신기하게도 이 모두는 조화롭고 근사하다. “모두가 서로 다른 세계를 구가하고 있는데 그게 잘 어울린다면, 그건 어쩌면 다양성의 공존이야말로 새로운 아름다움의 출발점이란 뜻 아닐까요?”
이 극에 짜인 대본은 없으나 악보는 있다. 벽면의 악보는 역시 픽셀로 구성된 비주얼 코드로 공주는 그 앞에서 노
래를 부르거나 스마트폰으로 악기를 연주하기도 한다. 바닥에 적힌 숫자는 배우들의 움직임을 활성화하는 무보
(舞譜, 춤의 동작을 악보처럼 일정한 기호나 그림으로 기록한 것)로, ‘하나둘셋넷, 둘둘셋넷, 셋둘셋넷, 넷둘셋
넷’ 리듬을 탄다. 무대 중앙에서는 물방울 등 자연의 소리, 일상의 소음을 접목한 전위적인 현대 음악 같은 사운
드가 흘러나온다. 이 배경음악은 홍승혜가 ‘개러지밴드’ 앱(작곡 소프트웨어)으로 직접 작곡한 것이다. “괜찮죠?
스티브 잡스가 참 좋은 선물을 주고 갔어요(웃음). 누구나 손쉽게 음악을 만들 수 있죠. 개러지밴드의 특징이 아
마추어성인데 저한테는 그런 아마추어 정신이 중요하기도 하고요. 제가 항상 겁 없이 새로운 걸 시도할 수 있었
던 이유니까요. 덕분에 ‘나의 개러지밴드’라는 가상의 픽토그램 밴드를 만든 적도 있어요(2016, 스페이스 윌링앤
딜링).” 음악 소리에 맞춰 춤을 추는 건 배우뿐만이 아니다. 원형 무대를 비추는 서치라이트는 음악을 타고 천천
히 움직이며 공간을 탐색한다. 그리고 무대 위의 조각들을 하나씩 비출 때마다 조각들의 독백이 시작된다. 인간(혹은 인간 형태의 바위, 산, 기계 등)을 창조한 조물주, 조각가 네 명이 들려주는 태초의 이야기다.
“어느 순간부터 장소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그 장소에 뭔가를 끌어들이는 것, 제 작업이 장소가 되는 데 관심이 생기더라고요. 오랜 시간 작업을 해오다 보니 궁극적인 제 관심사는 그거였어요. 장소성과 그 장소의 뼈대가 되는 물건과 사람, 바닥과 조명, 심지어 이제 무대까지 왔네요. 무대 연출을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사람들과의 인터랙션, 그러니까 진짜 유기적인 대상과 저의 기하학적 형태가 뒤섞이는 거죠. 인공과 자연이 결합된 상태, 그게 이 세상의 모습인 것 같아요.” 생활 속의 쓰임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는 가구, 사람들이 오가는 건축물처럼 홍승혜가 말하는 ‘유기적 기하학’이란 우리 일상의 풍경이다. 실제로 작가가 픽셀의 그리드를 조합, 반복한 작업은 차갑고 건조한 기하학적 단위가 조금씩 어긋나게 연결됨으로써 따뜻한 체온과 정서가 있는 유기체의 형태로 완성된다. 픽셀로 만든 사람 모양의 조형물 ‘공중무도회’는 대표적인 예다. 경기도 화성시에 문을 연 복합 문화 공간 로얄엑스파크의 10m 높이 보이드 공간에서 처음 선보인 ‘공중무도회’는 이번엔 ‘옐로 스테이지’, ‘블루 스테이지’로 명명된 벽 앞에 설치되어 관객의 움직임에 따라 마치 조각이 춤을 추는 듯한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조각의 배경이 되는 두 개의 컬러 스테이지는 옛날 컴퓨터 모니터의 4:3 비율에 맞춰져 있다. 전시장 내의 또 다른 스크린은 요즘 모니터 비율인 16:9다. 여기에선 말랑말랑한 네모가 등장한다.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1915)을 연상시키는 이 네모는 스크린이라는 또 다른 프레임 안에서 공처럼 부드럽게 움직인다. “이 작품의 제목이 ‘말레비치에의 경의’예요. 기하학적 추상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말레비치와 몬드리안 두 사람은 제 스승이자 조상이죠. 화면을 1분만 봐주세요. 녹아내리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나요?”
전시장 내의 벤치와 의자 역시 홍승혜가 직접 디자인한 것이다. 문승지 디자이너와 함께한 2인전을 비롯, 건축과 디자인을 미술에 접목해온 그는 종종 전시를 위한 가구를 만들어왔다. 이번에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누구나 될 수 있는’ 엔초 마리의 정신이 힌트가 되었다. 이탈리아 디자이너 엔초 마리는 만인을 위한 디자인을 꿈꾸던 사상가로 누구나 쉽게 자신이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 사용할 수 있도록 테이블, 의자, 침대 등 19가지 기본 가구의 설계 도면과 사진을 묶은 책 <아우토프로제타치오네(Autoprogettazione)>를 발간하기도 했다. “이전의 제 가구는 제 평면 작업처럼 미니멀한 모습이었는데, 외모가 단순할수록 내부 구조는 복잡해져요. 숨 막히는 지점이 생기더라고요. 피로를 느끼던 차에 엔초 마리의 ‘구조가 다 드러나는 쉬운 가구’를 알게 됐죠. 신선하더라고요. 여기 있는 가구는 저의 원래 작업과 엔초 마리의 작업이 결합된 형태예요. 불필요한 낭비가 없도록 원래 합판의 전장을 그대로 벤치 상판에 적용한다든지 경제적 측면도 고려했죠. 이번 전시의 주제와도 연결되고요.”
중심도 위계도 없는 그리드(Grid), 이 평등하고 조용한 터전, 사각 모니터 속의 픽셀은 점점 부풀어 올라 화이트 큐브라는 현실 공간이 된다. 사람들이 이곳에 입장하는 순간 관객과 배우, 무대와 객석의 구분은 불명확해지고 예술과 일상의 경계는 사라진다. “당신이 배우입니다. 우리의 삶이 무대입니다.” 홍승혜는 예술이 얼마든지 평범한 일상에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술이 우리의 삶을 흥미롭게 함으로써 우리의 삶이 예술보다 더 흥미로워질 수 있다고 믿는다. 중간자의 위치에서 서로 다른 것들의 유기적 공존을 꿈꾸는 홍승혜의 기하학적 유토피아. 공교롭게도 그는 미술계의 중견 작가로서 전시가 열리는 장소 역시 미술관의 중간층이다. 중간계란 본래 판타지 소설에서도 마법사와 요정, 인간이 공존하던 제3의 시간대, 초월적 세계다.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홍승혜의 무대는 2월 6일까지 관객을 초대한다.
#3 윤석남의 초상
1939년 만주 출생. 여든을 훌쩍 넘긴 작가의 손은 상처투성이다. 오랜 세월 붓을 쥔 탓에 뼈마디가 비틀리고 휜 채로 굳어버렸다. “역사예요. 예쁘진 않지만 부끄럽지도 않아요. 자랑스럽지.” 성실히 살아온 화가로서의 정체성을 몸의 일부로 새긴 윤석남은 이 땅의 여성을 그림으로 기록해온 ‘허스토리’의 산증인이자 한국 여성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다. 1982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미술회관(현 아르코 미술관)에서 데뷔할 때부터 그는 줄곧 주류의 시선 바깥에 선 여성의 삶을 다뤄왔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여성 작가 최초로 이중섭미술상과 2019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현재 일민미술관 3층에서 열리는 <소리 없이 외치다>전에서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린 초기 유화 작품부터 오늘날까지 그가 작업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이 되어준 친구들의 초상화를 만날 수 있다. 작가의 일생 전부가 담긴 셈이다. 올해는 첫 개인전을 연 지 꼭 4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저로서는 굉장히 의의가 있죠. 젊은 작가, 중견 작가 그리고 저까지 함께 전시를 하게 됐으니까요. ‘계속 그림을 그리니까 이런 날도 오는구나’ 기분이 좋습니다.”
어머니는 그의 작업의 출발점이다. 마흔이 넘어 뒤늦게 화가로서 새 삶을 시작한 그는 어머니의 얼굴을 그리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다. 자신이 태어난 세계와의 연결 고리, 어린아이였던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이어주는 증명체, 홀로 6남매를 키워낸 강인한 여성. 윤석남의 아버지는 소설가 등으로 활약하며 한국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서>를 만든 영화감독 윤백남이다. 하지만 해방 이후 일찍 세상을 떠난 탓에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건 어머니였다. 몇 년 전 전시를 앞두고 경기도 화성의 작업실에서 <보그>와 만난 그는 작업실 한쪽에 놓인 어머니의 흑백사진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어머니의 삶, 그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어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처음 작업을 시작할 때부터 ‘이 땅에 여성으로 태어난 나는 누구인가’ 하는 여성 의식이 있었어요. 무엇을 그릴지에 대해선 걱정할 필요가 없었죠. 전 그저 제 이야기를 계속 끄집어내기만 하면 됐으니까요.” 지금도 그는 매일 작업실로 출퇴근하며 앞치마를 두르고 캔버스 앞에서 그 목소리를 듣는다.
1980년대 정치 상황을 풍자한 회화 작업, 일상의 풍경에 천착하던 시기에 그린 미공개 드로잉과 자화상이 전시된 전시장에선 옛 노량진 수산시장의 모습도 볼 수 있다. 파라솔 아래 앉아 생선을 파는 상인을 보며 작가는 추억을 더듬는다. “제가 구반포에 살았거든요. 그때 노량진 시장에 참 많이 다녔는데, 한 새벽 3시쯤 가면 거긴 이미 대낮이에요.” 작품은 곧 작가의 경험과 생각의 흔적이다. 평범한 주부였던 그가 작업실이라는 자기만의 방을 갖게 된 건 미술에 입문하고 난 후였다. “덜컥 작업실부터 얻었으니 욕심이 도척이에요(웃음). 운이 좋았단 생각이 들어요. 먹고사는 문제에서 좀 해방될 만큼 경제적 여유가 생겼거든요. 이젠 작업실이 곧 나죠.” 설치 작업의 연작으로 전시장 중앙을 차지한 2021년 버전의 ‘그린룸’은 생명과 자연에 대한 경외로 가득한 작가의 방이다. 널빤지 고목에선 연꽃이 자라나고 작가의 상상 속 온갖 자연의 문양이 벽을 가득 메웠다. 동심을 자극하는 바닥의 푸른 구슬은 잔잔한 물결처럼 반짝인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덕분에 요즘은 해외에서도 구슬치기를 안다. “아쉽게도 전 그 드라마를 아직 못 봤어요. 아주 재밌다면서요? 구슬은 전작 ‘핑크룸’에도 등장하는데 그때와는 의미가 좀 달라졌죠. 구슬로 꽉 채운 핑크룸은 나조차도 들어갈 수 없는 방이었어요. 저에겐 희망이자 절망인 양가적 느낌이었죠. 이번엔 얼마든지 들어와도 좋아요. 원한다면 구슬도 가져가세요.” 그린룸 옆엔 여성의 얼굴들이 새겨진 나무들이 숲을 이룬다. 버려진 나무를 깎아 눈, 코, 입을 그리고 먹으로 옷을 입힌 그의 작품은 소탈하기 그지없다. 특유의 따뜻한 질감을 두고 작가는 ‘할머니의 피부 같다’고 표현한 바 있다. “오랫동안 팽창과 수축을 반복한 이 나무들은 더 이상 망가지지 않아요. 여기엔 시간이 깃들어 있잖아요. 제가 그 시간을 훔쳐온 거죠(웃음).”
작가의 초기작과 최근 작품을 한자리에서 보며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변화는 그림의 대상이 되는 인물들의 표정이다. 과거의 여성들이 경직된 자세와 굳은 표정 일색이라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 얼굴들은 자유롭고 천진해진다. 세상과 타자를 바라보는 작가의 마음이 그만큼 넉넉해졌다는 뜻일 것이다. “아무래도 지금은 마음이 편안해졌달까? 처음 그림을 시작한 게 40대잖아요. 그땐 오로지 나, 내 생각밖에 못하는 거예요. 세월이 지나니까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더라고요. 타인을 이해하는 폭도 넓어지고 자꾸 주변을 돌아보게 돼요.” 전시장 입구에서 먼저 관객을 맞이하는 작가의 일본인 친구들의 모습은 그 변화의 뚜렷한 예다. 한국화에 바탕을 둔 이 전신 채색화 속 주인공들은 1996년 그가 일본 가마쿠라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 때 만난 컬렉터와 큐레이터, 전시 전반에 큰 도움을 준 재일 교포 통역가로 지금까지도 연락을 주고받는 작가의 든든한 조력자들이다. “당시 일본 전시에서 작품이 꽤 팔렸어요. 특히 이분(시노부 이케다)은 제 작품을 처음 사준 분이라 잊을 수가 없어요. 그 전까지 한국에선 하나도 안 팔렸거든요.” 컬렉터라는 존재는 작품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전업 미술 작가가 작업을 지속할 수 있는 큰 힘이다. 재능 있는 여성 작가들이 일찍 사라지는 데 아쉬움을 표한 그는 친구들에게 은혜를 갚는 의미로 한지에 실물 크기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런데 작품을 보내줬더니 별로 마음에 안 드나 봐요. 하하. 예쁘지 않게 그려서 그런가.” 옷차림과 배경, 소품, 몸짓, 표정, 눈빛 등에서 저마다의 개성을 짐작할 수 있는 이들은 모두 씩씩하고 유쾌해 보인다.
이번 전시에선 소개되지 않았지만 2000년대 이후 윤석남의 작업을 대표하는 여성 독립운동가의 초상화 시리즈에서도 인물의 개성을 담뿍 담아낸 작가의 능청스럽고 거침없는 붓질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유관순, 김마리아를 비롯, 영화 <암살>과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남자현, 윤희순 등 작가는 남성 중심의 시대 상황에서 그저 누군가의 ‘며느리, 아내, 엄마’로 이름 없이 잊혀갔던 이들의 모습을 따뜻한 체온을 지닌 한 인간이자 생활인으로 그려낸다. 지금까지 서른다섯 명의 초상화를 완성한 그는 앞으로 100명을 채우는 게 목표다. “가부장제 시대의 평범한 여성들이 총을 들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거든요. 나라를 뺏겼다는 건 나를 뺏긴 것과 마찬가지 아니었을까요? 결국은 나를 찾기 위해 나선 거겠죠. ‘이 땅의 여성’이라는 자각으로부터 시작된 독립운동이 곧 스스로 자아를 찾는 과정이지 않았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자료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작가의 상상력으로 100년 전 이 땅의 여성들은 다시 살아 숨을 쉰다. 2022년의 여느 화가에겐 까마득한 옛날 얘기겠지만 윤석남에겐 자신이 살아온 시대의 기록이다. “자칫 올드하고 구태의연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내 나이니까 할 수 있는 마지막 작업이 아닌가 싶어요. 요즘 젊은 작가가 이런 작업을 한다면 타당성이 없는 거죠. 하지만 저는 해방 전에 태어난 사람이잖아요. 제가 어릴 땐 시내에 버스가 한두 대나 있었나? 소가 끄는 마차로 이사를 다녔으니까(웃음). 한국의 엄청난 변화를 몸으로 다 겪었어요.”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21세기의 거의 유일한 기록으로 남게 될 이 그림은 오직 윤석남이기에 가능한 작업일 것이다.
봄부터 여성 독립운동가 작업에 집중하려고 한다는 그는 서서히 주변을 정리하는 중이다. 그의 남은 바람은 건강이 허락하는 한 끝까지 작업을 지속하고 싶다는 것. “침대에 누운 순간에도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그 이상의 꿈이 어디 있겠어요? 세계적으로 알려진 유명한 작가가 되면 물론 좋겠죠. 그렇지만 안 알려져도 할 수 없는 거예요. 윤석남이라는 한 아티스트가 뉴욕이든 샌프란시스코든 전시를 하잖아요. 그럼 됐지, 뭐(웃음).” 앞치마를 두르고 그림을 그리는 화가. 언밸런스한 스타일의 흰 단발머리, 형형한 눈빛, 붓을 쥔 손가락. 윤석남의 초상화는 언제나 예술가 그 자체로 존재할 것이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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