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예린의 영감은 우울에서 온다
백예린을 보며 그의 새 노래 ‘물고기’ 한 소절이 떠올랐다. “넌 잠시 땅에서 쉬고 있는 자유롭게 나는 새였을지 몰라.”
5월 24일 발매하는 싱글 ‘물고기(Pisces)’를 들었어요. 이해받지 못해 숨 쉴 수 없는 물고기가 사랑하는 사람 곁에 있고 싶어 하는 이야기 같았어요. 어떤 마음으로 작업한 곡인가요?그동안 정규 앨범은 제가 작사, 작곡해왔지만, ‘물고기’는 구름 오빠가 만들어서 선물처럼 준 노래예요. 열아홉 살 때부터 구름 프로듀서와 함께해왔어요. 내 마음을 잘 알기에 이런 곡이 나왔죠. 2016년 ‘Bye bye my blue’도 구름 오빠가 자기 노래로 쓴 걸 내가 팬들에게 들려주고 싶다고 부탁해 발매한 곡이죠.
가사 중에 “네가 날 바로 찾을 수 있게 작은 타투를 새긴 후 다녀올게”가 인상적이에요.
제가 다른 사람들과 많이 다르다는 생각을 가끔 하거든요. 무리에 끼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이죠. 연습생 생활을 하면서 가족과 떨어져 살고 유학을 가고 학교도 옮겨 다녔어요. 마땅히 돌아갈 집이 없는 듯했는데, 블루바이닐이란 회사를 만들면서 좋은 사람들을 만났어요. 조금은 유별나고 복잡한 내 언어와 행동을 이해해주죠. 방황해도 돌아갈 수 있는 집이 생긴 듯해요. 그들에게 보내는 마음이 함축적으로 곡에 담겨 있죠.
솔로 정규 1집 <Every letter I sent you.>(2019)에 18곡, 2집 <tellusbout yourself>(2020)도 14곡 꽉 채워서 냈죠. 이번 앨범 <물고기>는 동명의 싱글 ‘물고기’를 비롯해 ‘그게 나였네(It was Me)’ ‘막내(The Loved One)’가 담겼어요. 앨범을 관통하는 줄기는 무엇인가요?
‘나’예요. 어찌 보면 뻔한 답 같지만 제겐 중요한 의미예요. ‘Square’가 수록된 1집은 나의 열정으로 움직였다기보다는 오래 기다려준 팬들을 위한 앨범이었어요. 2집도 나만을 위했다고 볼 순 없어요. <물고기>는 내가 이렇게까지 많은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인가 고민하던 시기에 내게 집중해서 만든 앨범이에요.
우울한 감정으로부터 영감을 받는다고 들었어요.
뭔가 늘 우울했어요. 좀 더 어릴 때, 그러니까 20대 초반에는 내가 남들보다 까칠하고 예민해서 정착하지 못한다고 여겼어요. 남들과 다른 나를 싫어할까 봐 먼저 다가가지 못했고요. 하지만 나를 예쁘다, 예쁘다 하며 이끌어주고, 객관적으로 단점도 지적해주는 사람들을 만났어요. 이젠 내가 모난 점이 있었구나, 어려서 그랬구나, 인정하고 변하기 시작했어요. 그렇다고 제가 다 컸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직 철부지고 애같이 굴 때도 많죠. 다만 적어도 앞서 말한 강박에서 조금 벗어났어요.
이번 앨범을 작업하며 어떤 인상적인 순간을 맞이했나요?
진짜 아파야 쉬는 성격이거든요. 어릴 때부터 계속 연습하고 활동해서인지 쉬면 안 된다는 강박이 있나 봐요. 하지만 수록곡을 꽉 채워 1·2집을 냈기에 당분간 쉬고 싶었어요. ‘물고기’를 처음 받을 때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또 준비하나 싶었죠. 그런데 집에서 혼자 가이드 녹음을 하는 순간 ‘이거다!’ 싶었어요. 사람들에게 빨리 들려주고 싶었어요. 음악을 하다 보면 음원 성적과 경제적인 부분 등 현실을 고려하잖아요. 그럼에도 하고 싶은 거 위주로 해왔지만요(웃음). 어쨌든 ‘물고기’는 그 어떤 제약에도 상관없이 부르고 싶었고 인생에서 중요한 곡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감정이 들기 쉽지 않죠?
자주는 힘들죠. 일해오며 어떤 삶과 일을 원하는지 고민해왔어요. 팬들은 평생 노래해달라지만, 과연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저는 곡을 쓰면 사람들에게 자주 물어봐요. 만나서 술 마시다가도 “나 이거 썼는데” 하면서 의견을 모으죠. 아티스트로서 자기 객관화를 오래 해왔어요. 그러다 보니 오히려 내 곡에 대해 선뜻 판단을 내리기 어려워진 면도 있죠. ‘물고기’는 남의 의견보다 하고 싶은 내 마음이 중요했어요.
활동의 끝을 고민하는군요.
그렇죠.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 안 할 수 없죠. 하지만 현실주의자 같다가도 ‘물고기’ 같은 곡을 만나면 몽상가가 돼요. 팬들은 “예린이가 행복한 게 먼저”라고 얘기해줘요. 그들에게 ‘저 너무 행복해요!’라고 말하지만 실은 무대가 끝나면 공허함과 우울이 왔어요. 그럴 때면 혹시 내가 행복하다고 거짓말하고 있지 않나 싶었어요. ‘물고기’는 어떤 의심이나 죄책감 없이 노래를 들려드릴 수 있어요.
야외무대에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Square’를 신나게 부르는 영상은 백예린의 상징이 됐죠. 이제 팬데믹으로 못다 한 공연을 할 수 있겠군요.
어제도 재즈 페스티벌에 설 준비를 했어요. 4~5년 전 무대에서 노래하며 행복하던 기억이 나서 울컥했어요.
무대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한가요?
흔히 백예린은 공연에서 제일 행복해 보인다지만, 그건 팬과 만나서 그런 거지 타고난 무대 체질은 아니에요. 부끄럼도 무척 많고 내성적이에요. 저는 개인의 성과에 집중해서 그 결과에 만족하고 싶은 성향이에요. 일을 너무 좋아해서 완벽에 가깝고 싶죠.
그런 성향이 본인을 힘들게도 하겠어요?
맞아요. 원래도 예민한데 완벽을 기하려고 하니 강박이 심해지죠. 무대가 끝나면 연주자나 스태프에게 “수고했어요, 고마워요”라고 말하지만 이어서 “저 이상하지 않았어요? 진짜 못 부르지 않았어요?”라고 물어봐요. 모니터링하면서 어디를 틀렸는지 찾고요. 사실 무대에서 노래하다가도 느끼지만요.
2019년 9월 JYP와 전속 계약을 종료하고, 독립 레이블 블루바이닐을 만들었어요. 본인이 자주 쓰는 단어 ‘블루’를 넣어 이름도 직접 지었죠.
블루가 파랗다란 뜻이지만 우울하다는 것과 감성적 의미도 있어서 가사에도 많이 썼어요. 바이닐은 한창 꽂혀 있던 문화고요.
블루바이닐에서 솔로 첫 정규 앨범 <Every letter I sent you.>가 나왔잖아요. 아티스트로서 이 시기가 터닝 포인트가 아닐까 싶은데요.
내가 대단하다고 인정하는 아티스트만큼 성과가 있다면 터닝 포인트겠죠. 그보다 블루바이닐에서 낸 앨범은 팬들에게 주는 선물이었어요. 앨범으로 내 커리어를 달리하겠다는 의도는 없었죠. 터닝 포인트를 말하기엔 갈 길이 멀어요.
개인적으로 ‘0415’(2020) 뮤직비디오를 보고 백예린의 미래가 더 궁금해졌어요. 뱀파이어 소녀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단편영화 같았어요. “블루바이닐과 백예린은 단순히 소속사와 가수가 아니다. 음악과 함께 총체적인 예술을 만들어가려 한다”는 댓글을 봤어요.
음악에 맞는 비주얼 콘텐츠 제작은 아티스트로서 당연하죠. 저희뿐 아니라 다들 일종의 예술을 하고 있다고 봐요. 내 얘기로 이루어진 노래의 세계관을 이해하고 은유적으로 표현해주는 감독과 스태프들이 감사하죠.
무대의상을 스타일리스트 없이 본인이 직접 준비하죠.
스무 살 때부터 스타일리스트와 일해본 적 없어요. 제가 어릴 때 엄마가 옷 장사를 하셨고 아버지가 음악을 하셨어요. 아버지가 무대에 오를 때 엄마가 동대문에서 사다 준 의상을 입으셨죠. 어린 딸에게 예쁜 옷 입히기도 좋아하셨고요. 제가 패션을 좋아하는 것도 엄마 영향이 커요. 한때 미술을 해서 꿈이 화가였는데 그때도 옷 그리기를 제일 좋아했어요.
요즘 백예린이 집중하는 패션은 무엇인가요?
이전부터 크로셰, 뜨개옷을 좋아했어요. 찾아보니 요즘 그 유행이 다시 오더라고요. 두 달 정도 몸이 아파서 집에서 쉴 때 실뜨개를 해서 홀터넥 원피스를 만들었어요. 그 옷 입고 외출도 했어요.
아버지가 딸의 리메이크 앨범 <선물>에 코러스로 참여하셨죠. <물고기>를 듣고 뭐라고 하시던가요?
한동안 아프고 바빠서 들려드리지 못했어요. 불효자는 웁니다(웃음).
백예린은 트렌디함과 옛날 감성을 동시에 가진 아티스트란 평을 받아요. 아버지의 영향이라 들었어요.
제가 1997년생인데 1990년생과 1991년생 친구들이 많아요. 그보다 나이 많은 사람을 만나도 말이 통해요. 7080 음악, 드라마를 잘 아니까 다들 신기해해요.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들려주고 보여주신 것들이죠.
다른 아티스트를 위한 곡도 쓰죠. 그러고 보니 친한 동료 가수 청하에게 곡을 많이 줬어요.
JYP에 있을 때 버나드 박을 위한 곡도 많이 썼어요. 동료들이 네 감성으로 알아서 써달라고 부탁하곤 해요. 내 느낌대로 쓰더라도 아티스트에게 맞는 옷으로 재단하는 과정, 그러니까 편곡이 중요하죠.
올해가 데뷔 10주년이죠. 10년이라는 시간을 압축한다면?
좋은 사람들을 만나 잘 키워졌다, 잘 자랐다. 스무 살 때까지만 해도 인생은 혼자 산다고 생각했어요.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으면서 사람은 서로 도우며 살아가야 한다는 걸 알았죠.
그간의 앨범을 LP로도 발매하고 싶어 한다고 들었어요. 지금은 1집 <Every letter I sent you.>와 함께 활동 중인 그룹 더 발룬티어스의 <The Volunteers>(2021)만 LP가 있죠.
처음엔 1집 LP를 3,000장 정도 찍었어요. 너무 많아서 안 팔리면 어쩌나 했어요. LP를 소장하고 싶어 하는 분이 그렇게 많은지 몰랐던 거죠. 1집이 점점 비싸게 되팔리는 게 안타까웠어요. 어린 팬도 많은데 부담스러운 가격이었죠. 무리해서라도 더 발매하려고요.
백예린의 LP를 듣고 싶어서 턴테이블을 구입했다는 팬도 있어요.
예술의 순기능이 아닐까요. 어릴 때 아버지가 MP3에 노래를 넣어서 주셨거든요. 열여섯 살쯤에 스트리밍 사이트가 나왔죠. 제 LP를 통해 어린 친구들이 아날로그 세대의 감성을 느낄 수 있어서 기뻐요.
더 발룬티어스를 결성한 이유가 “오아시스 관련 다큐멘터리를 본 뒤에, 솔로 아티스트로서 하지 못하는 뭔가를 넘어서고 싶어서”라는 인터뷰를 봤어요. 바람을 이뤘나요?
시도는 했어요. 시도할 때 기분이 정말 짜릿하고 새로웠어요. 하고 싶은 음악 장르가 많지만 활동하다 보면 하나의 이미지로 굳히기 쉽거든요. 아무래도 ‘예린이는 이런 노래 할 거 같아, 예린이에게 이런 노래 듣고 싶어’라는 팬들의 요청에 더 움직이게 되죠. 더 발룬티어스에선 그런 의식 없이 자유롭게 날것처럼 음악을 했어요. 세일즈나 신의 흐름, 상업적인 걱정 없이 순수하게 음악을 대하면서 행복했죠.
더 발룬티어스의 앨범도 준비 중인가요?
올해 안에 보여드리려고 노력하는 중이죠. 제가 소처럼 일하는 소띠거든요.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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