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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사람에겐 ‘갭이어’가 필요하다

2023.02.12

by 조소현

    일하는 사람에겐 ‘갭이어’가 필요하다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갭이어’가 필요하다.

    어떤 단어는 탄생 이유와 상관없이 토착화 과정을 겪는다. 갭이어(Gap Year)는 1960년대 영국에서 자선 기관이 봉사 교육을 위해 봉사자 세 명을 에티오피아에 보낸 것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제도화되었다. 학업이나 일을 잠시 멈추고 여행, 봉사, 교육 등 이전과는 다른 경험을 하면서 자신의 흥미와 적성을 찾아보는 시간. 무궁무진한 가능성과 애프터눈 티의 여유로운 향기가 느껴지던 단어 ‘갭이어’는 한국에 와서 직장인에게 조금 다른 용도로 쓰이게 되었다. 앞에 수식어를 붙이면 이해가 쉬워진다. 자발적 갭이어 혹은 불가항력적 갭이어.

    자발적 갭이어는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지금 가는 길이 맞을까 그 방향을 점검하기 위해 주체자가 선택하는 어떤 멈춤의 시간이다. 일의 성취에 취해 하얗게 타버린 앞선 세대를 보고 화들짝 놀란 Z세대가 주로 선택한다. 이는 일을 대하는 태도이자 직장에 바라는 조건이기도 하다. 1990년대생 설명서와 같은 책 <90년생이 온다>에는 ‘우리도 안식년을 바랍니다’ 소제목 아래 ‘유급이든 무급이든 상관없이 일정 근무 기간 후에 안식이 가능한 회사를 중심으로 구직 활동을 하는 1990년대생’ 이야기가 나온다. 직장에서 잠시 벗어나 다양한 경험을 하며 본인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모색한다. 학창 시절에 가졌다면 좋았겠지만 이제라도.

    불가항력적 갭이어는 갭이어의 존재도 쓸모도 모른 채 일과 자신을 일체화해 내달리다가 번아웃에 도달해 솔루션으로서 접하는 경우다. 사실 수식어는 내가 붙였다. 도저히 자발적 갭이어와 혼합해 설명할 길이 없어서다. 성급한 일반화를 경계해야 하지만 자발적 갭이어를 선택하는 세대보다 위 세대가 주로 겪는다. 나 역시 번아웃의 증상을 따라가다가 갭이어라는 단어에 도달했다. 몇 개월 전 <보그>의 번아웃 기사에서 문화 역사가 안나 카타리나 샤프너는 정의한다. 번아웃은 ‘휴식으로 치유할 수 없는 극도의 피로를 느끼는 증상’이라고. “번아웃이 오면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고 일의 가치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모습을 보인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나 직장 자체에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 안개가 낀 것처럼 멍하거나 집중을 잘 못하는 경우도 있다. 신경쇠약에 걸리거나 직장에서 일할 수 없는 상태가 되기도 한다.” 신체든 정신이든 건강이 악화되어 쉬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에 다다르면 24시간 팽팽하던 끈이 툭 끊어진다. 그리고 불가항력적 갭이어의 시간이 시작된다. 이직 같은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지키기 위해 멈춰 설 수밖에 없는 시간. 자발적 갭이어가 새로 고침을 하며 달리는 내비게이션이라면, 불가항력적 갭이어는 길을 잘못 들어 다시 처음부터 목적지를 검색하는 경우랄까. 아, 저 멀리서 갭이어를 탄생시킨 영국 사람들의 탄식이 영어로 들리는 것만 같다.

    번아웃의 처방으로 갭이어를 받아 든 우리의 심정은 사실 좀 복잡하다. 어떤 고민이든 일단 대학 간 후에 하라고 내몰리긴 했지만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독려 받으며 자란 세대이기 때문이다. 나름 각자의 상황에서 최선의 직업을 선택했고 하던 대로 열심히 내달렸는데 지쳐 꼬꾸라지다니. 사실 일이 곧 나 자신이 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일에 매달린 건 눈에 보이는 즉각적인 성취 때문이었다. 우리 세대의 부모는 자신들이 갖지 못한 기회를 자녀에게 주려 했지만 사실 너무 바빴다. 성적이라는 수치라도 있어야 그들의 관심을 끌 수 있었다. 성적으로 능력을 증명했고 사회로 옮겨서는 업무 성과로 자신의 쓸모를 확인했다. 얼마나 즉각적이고 만족스럽던지. 시간을 들이고 자신을 연마할수록 성과물은 더 잘 나왔다. 어느 순간부터 일을 하지 않는 상태를 견딜 수 없게 됐지만. 밀레니얼의 번아웃을 분석한 책 <요즘 애들>에는 집중 양육은 중산층의 관습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과잉보호를 받으며 자란 아이들 대부분은 늘 초긴장 상태로 그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성취에 골몰하는 어른으로 자란다고 한다. 한국갭이어 설립인이자 지금은 컨설팅에 집중하는 안시준은 “10대에 유튜브 등을 통해 행복한 삶에 관한 가치관을 흡수하는 Z세대에 비해 1980~1990년대 초반에 태어난 세대가 현실을 자각하는 시점이 늦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고 말한다. 급격하게 성장한 사회는 우리 눈을 가리고 사회적 경험보다는 학습이나 커리어적 경험을 집어넣었다고 말이다. 개인차가 있지만 많은 밀레니얼이 회사 생활을 한 지 수년을 훌쩍 넘어 이 고민에 빠진다.

    그러므로 번아웃의 증상을 감지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이 ‘갭이어 갖는 법’ 검색이라는 사실에 너무 경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산성에 가치를 두는 자들은 모든 문제를 솔루션 위주로 접근하려는 경향이 있다. 유의미해 보이는 키워드로 검색을 이어가다가 다다른 곳은 한국갭이어였다. 갭이어의 한국어 정의와 한 달 살기 문화를 만들고 정착시키는 사회적 기업이다. 싱가포르에서 몸과 마음에 상처 입은 희귀 야생동물 구조 봉사 활동 하기, 피렌체에서 명품 가방 만들고 잡트레이닝 하기 등과 같은 다양하고 특이한 프로젝트를 500여 개 제안한다. 한동안 유행하던 버킷 리스트처럼 보이기도 했고 인형 뽑기 기계 갈고리로 현실에서 나만 쏙 빼서 전혀 다른 삶에 집어넣는 활동처럼 보이기도 했다. 쉬는 감각에 익숙지 않은 우리를 위해 컨설팅도 제공한다. 단순한 적성검사는 아니다. ‘문장 완성 검사지’ 등을 통해 내면으로 파고든다. 과거를 돌아보며 본성을 회복하고 진짜 바라는 꿈을 찾는다.

    안시준 컨설턴트는 물리적 환경 변화에 따른 정서적 변화에 대해 “사람은 환경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라고 말했다. 자기 계발서나 심리 상담이 개인의 변화를 권한다면 갭이어는 환경의 변화를 얘기한다. “예를 들어 하와이에서 한 달 살기를 한다면 그들의 삶을 보며 ‘이렇게 자유롭게 살아도 무슨 일이 생기지 않는구나’ 알게 되죠. 스스로에게 엄격하게 굴며 커리어 성취를 이룬 사람이 캄보디아에 가서 몇 개월 봉사 활동을 할 수도 있죠. 거기서 만난 아이들로부터 사랑을 받는데 그 크기가 너무 크고 좋아서 지금까지 부여잡은 것들이 의미가 없었구나 싶어질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은 한국에 돌아와서 전에 추구하던 것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어요. 새롭게 만난 환경 덕분에 내 삶의 포지셔닝이 바뀔 수 있겠죠.” 바뀐 환경이 내 본성의 어느 지점을 자극할지 아무도 모른다. 알고 있지만 외면해온 것일 수도 있고, 까맣게 잊고 지내던 것일 수도 있다. 일단 환경이라도 바꿔서 진정으로 바라는 삶을 찾을 수 있는 확률을 높이는 것이다.

    물론 누구나 당장 직장을 그만두거나 수백만 원을 들여서 어딘가로 떠날 수 있는 건 아니다. 갭이어를 제도화한 나라에서 다시 태어나고 싶을 만큼 이상적으로 보이지만 워킹 맘인 나의 삶에 적용할 엄두도 나지 않는다. 다시 조직에 들어갈 수 있을까? 감이 떨어지거나 실력이 저하되진 않을까? 집을 비우는 동안 가족은 누가 건사하나? 부모님 용돈은? 아이 교육은? 지금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불안을 잠재우는 것일지도 모른다. 컨설턴트는 가족과 공간을 분리하는 식으로 내 상황에서 환경을 바꿔주거나, 삶이나 일의 태도나 기준점을 바꿔주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조언했다. 예를 들어 책임감이 강하다면 조금 약하게 하고, 낯선 사람에게 다가가기가 어렵다면 좀 더 시도하는 식으로 가장 잘하는 것과 가장 못하는 것을 바꿔보라는 것. 베스트셀러 제목대로 멈춰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이 분명히 있다.

    갭이어에 대해 인상적으로 읽은 책이 있다. 다큐멘터리스트 김진영의 <우리는 아직 무엇이든 될 수 있다>다. 번아웃으로 모든 일을 중단한 저자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일을 잠깐 멈춘 사람들을 만났고 그 이야기를 인터뷰집으로 묶어 냈다. 일을 멈춘 동안 저자는 끊임없이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이직할 거냐, 창업을 준비하는 거냐, 아니면 이제 프리랜서인 거냐라고. 모두 아니었다. 저자에게는 일과 삶에 대한 생각과 가치관에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몰랐지만 시간이 흐르자 그 시간을 갭이어로 붙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적었다. 언어가 생김으로써 자기 같은 사람들이 더 자유롭게 이 시간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한 것이다.

    각기 다른 직업을 가졌지만 공통적으로 갭이어를 가진 이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 필요를 확실히 긍정할 수 있었다. 지쳤다고 해서 휴식의 편안함만 느끼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열정호구’로서 과거를 후회하겠다는 것도, 워라밸을 찾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기쁨이자 동력이던 일과 나의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돈독하게 하기 위한 마음이 가장 컸다. 불가항력적 멈춤이라도 실패도 포기도 아니다. 일하는 목적을 잃은 채 의무적으로 일만 해내는 상황이 맞냐고 되물어볼 물리적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재정비의 목적은 자기에게 맞는 일을 더 오래 더 기꺼이 하고자 함이고 말이다. 그나저나 실제로 갭이어를 가진 사람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궁금하지 않나? 공통적으로 꼽는 변화는 자신이 진짜 원하는 일을 찾고 삶의 방향성을 스스로 조율해나가는 방법을 터득한다는 확신이다. 보상, 근무 조건, 성장 기회 등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후에 하는 선택은 확실히 과거보다 편안한 상태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다. 다시 지쳐 주저앉는 일이 생기더라도 잠시 쉬었다가 일어서면 된다는 것 역시 경험이 알려줬다.

    취재이자 실제 상황으로 임한 갭이어 컨설팅 결과를 공개하자면, 대책 마련 단계 근처쯤 간 듯하다. 삶을 잠식하는 불안, 불만, 짜증 등을 내려두고 나서 다음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조언을 마음에 새기며 나오는 길에 갭이어에 관해 (또!) 검색하다가 런던 경영대학원 교수 린다 그래튼(Lynda Gratton)이 100세 시대에 대해 한 강연을 접했다. 교육-일-퇴직으로 이어지는 ‘3단계 삶’은 이제 맞지 않다는 게 요지였다. 길어진 수명으로 시간이 많아지면 다양한 경력을 쌓게 되고 휴식과 전환기도 있는 다단계 삶을 살게 된다는 전망이었다. 그러니까 40대에도 대학에 가고 60대에도 새로운 직업을 구하게 된다는 거다. 머릿속에서 100세까지 인생을 쭈욱 늘리자 경력 10여 년 차에 잠시 멈춰도 될지 고민하는 지금이 찰나처럼 보였다. 번아웃은 시대가 만든 비극일지 몰라도 우리의 결말은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사회는 기회를 주지 않았지만 이제라도 우리는 질문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VK)

    에디터
    조소현
    포토그래퍼
    STEVEN KL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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