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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 멀리건에 대해 우리가 오해한 것들

2022.12.02

by 이소미

    캐리 멀리건에 대해 우리가 오해한 것들

    <서프러제트>, <프라미싱 영 우먼>, <그녀가 말했다>로 이어지는 캐리 멀리건의 최근 행보는 놀랍다. ‘제2의 오드리 헵번’이라 불리던 귀여운 소녀가 하루아침에 페미니스트의 대변인이 되다니. 하지만 돌아보면 그는 젊은 여배우에게 절대적으로 부족한 기회 속에서도 가장 복잡하고 주체적인 인물을 선택하려 노력했다. 우리가 남성 화자의 시선으로 여성 캐릭터를 해석하는 데 너무 익숙한 나머지 그들을 과소평가했을 뿐이다.

    <언 애듀케이션>은 그에게 제2의 오드리 헵번이란 별명을 안겨주었다.

    출세작 <언 애듀케이션>(2009)에서 캐리 멀리건은 깜찍한 1960년대 스타일링으로 화제를 모았다. 그는 당시 21세였지만 17세 고등학생을 연기했다. 명문대에 진학하려던 우등생이 나이 많은 남자를 만나 상류사회를 경험하면서 학업 대신 결혼으로 진로를 변경하려 한다는 게 중반부까지 스토리다. 그 과정에서 당시 유행하던 오드리 헵번 스타일이 등장한다. 캐리 멀리건의 눈웃음과 보조개, 동그란 얼굴은 그 스타일과 제법 잘 어울렸다. 아버지뻘 남자와 플러팅하는 지나치게 순수하거나 은근히 앙큼한 소녀는 할리우드, 아니 전 세계 영화 산업이 애정하는 이미지이고, 영국 출신 멀리건은 그것의 클래식한 변형처럼 보였다. 스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영화를 다시 보자. <언 애듀케이션>의 ‘제니’는 학업을 계속하라는 교사에게 “당신은 명문대 나와서 고작 하는 일이 교사냐”고 받아친다. 하지만 공부하라고 몰아붙이던 아버지가 결혼에 찬성하자 제니는 혼란에 빠진다. 제니는 지루한 삶에서 벗어날 무언가가 필요했을 뿐 ‘여자의 학력은 잘난 남편을 얻기 위한 타이틀일 뿐이니까 목적을 달성하면 팽개쳐도 좋은 것’이라는 아버지의 가치관에 동의하는 건 아니었다. 결국 남자의 결혼 사기가 밝혀진 후 제니는 학업으로 돌아간다. 이 영화의 연애는 제니가 엘리트로 성장하기 위한 ‘애듀케이션’이었던 것이다. 훌륭한 여성 성장 서사였다. 멀리건은 <언 애듀케이션>으로 영국독립영화상, 런던비평가협회, 영국아카데미, 여성영화기자협회 주연상을 휩쓸었다. 그해 아카데미 주연상 후보에도 올랐다. 하지만 그의 취향이 대중에게 뚜렷이 각인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언 애듀케이션>의 론 쉐르픽 감독. 멀리건은 여성 감독들과 잘 맞는다.

    커리어 전반전에서 멀리건은 마이클 만(<퍼블릭 에너미>(2009)), 올리버 스톤(<월 스트리트 : 머니 네버 슬립스>(2010)), 스티브 맥퀸(<셰임>(2011)), 바즈 루어만(<위대한 개츠비>(2013)), 코언 형제(<인사이드 르윈>(2013)) 등 거장들과 연달아 작업했다. 그중 크게 주목받은 건 주로 멀리건이 ‘남자의 여자’를 연기한 영화들이다.

    <드라이브>의 전설적인 엘리베이터 신. 캐리 멀리건과 라이언 고슬링.

    니콜라스 윈딩 레픈의 <드라이브>(2011)에서 멀리건은 남편이 감옥에 간 후 혼자 힘들게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으로 출연한다. 그 여자를 지키기 위해 악당들과 사투를 벌이는 이웃 남자(라이언 고슬링)가 주인공이다. 영화는 과묵하고 사연 있어 보이는 남자가 쿨한 전갈 무늬 재킷을 입고 과속으로 차를 몰거나 악당들과 잔혹하게 싸우는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드라이브>는 남성 힙스터 관객들의 전설이 되었다. 멀리건이 연기한 아이린은 완벽한 둘시네아 공주였다. 돈키호테는 ‘기사라면 모름지기 공주를 섬겨야 하는 법’이라며 가상의 공주 둘시네아를 창조했다. 폭력 영화에서도 주인공이 지켜야 하는 ‘여자여자한’ 여자는 필수다. 그리고 캐리 멀리건은 그 역할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외모를 갖추었다. 멀리건은 섬세한 연기를 해냈지만 관객에게 기억된 건 순진한 모습으로 순정남을 꼬드겨놓고 그의 파괴적인 모습에 놀라서 뒷걸음질 치는 얄미운 여자이고, 영웅의 세계 밖에서 환상으로 존재하는 ‘가질 수 없는 존재’다. 여성 관객에게 호감을 살 법한 역은 아니었다.

    <위대한 개츠비>의 데이지는 청순 팜 파탈의 대명사다.

    2013년 화제작 <위대한 개츠비>에서 캐리 멀리건은 또 한 번 순진무구한 얼굴로 남자를 뒤흔든다. 1974년 작 <위대한 개츠비>가 데이지의 신경증을 강조하며 사이코드라마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면 2013년 작은 호화롭지만 공허한 이벤트 무비였다. 캐리 멀리건의 데이지는 부주의하고 천진난만하고 무책임한 상류층 악동이다. 사랑이 전부일 것 같은 ‘남자의 여자’이기도 하다.

    멀리건이 연기한 ‘남자의 여자’ 시리즈에는 <셰임>(2011)의 대책 없는 관계 중독자 씨씨도 포함될 것이다. 역시 테스토스테론이 과다 주입된 주인공의 대립쌍으로 존재하는 에스트로겐 가득한 여자다.

    <셰임>의 애정 결핍 캐릭터 씨씨. 멀리건은 노출 신을 찍은 뒤 해방감을 느꼈다고 했다.

    전술한 영화들의 성공으로 여성스럽고 멜로드라마틱한 이미지를 얻었지만 사실 이 영화들에서 멀리건의 캐릭터는 안온한 로맨스가 아니라 혼돈과 파괴로 남자들을 이끄는 존재다. 사랑밖에 모르긴커녕 자신을 보호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고, 조금씩 망가지거나 뒤틀린 인물이다. 캐리 멀리건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마리옹 코티아르, 케이트 블란쳇, 케이트 윈슬렛 같은 사람들을 계속해서 지켜봐요. 나는 공격적이 되는 것에 두려움이 있어요. 내가 이 배우들을 존경하는 것은 그들의 모든 선택이 진정 용감하기 때문이에요. 매우 조용한 연기를 할 때조차 본능적이고 대담하죠.” 젊은 시절 그의 이미지로 인해 대상화를 피할 수 없었다 해도, 멀리건은 그 안에서 최대한 대담한 캐릭터를 창조하려 노력했다. 그것이 호감이든 비호감이든 말이다.

    캐리 멀리건은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후에도 꾸준히 연극 무대에 설 정도로 강한 연기 열정을 지닌 배우이고, 촬영장에서 유일한 여자나 가장 어린 존재이기보다 동년배 여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는 데 흥미를 느끼는 편이었다. 영화 <작은 아씨들>(2005)에서 만난 키라 나이틀리, 연극 <갈매기>(2007) 때 작은 분장실을 나눠 쓴 조 카잔과는 줄곧 친구로 지냈다. 하지만 과거에는 여성성 가득해 보이는 젊은 스타에게 여성 앙상블 영화 출연 기회가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2010년대 중반부터 영화계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검증된 연기력과 탄탄한 경력, 대담한 선택을 할 준비를 갖춘 캐리 멀리건에게 새로운 무대가 열렸다.

    페미니즘의 부흥과 더불어 주목받은 영화 <서프러제트>.

    커리어의 변화를 알린 첫 작품은 여성 참정권 투쟁가들을 다룬 <서프러제트>(2015)다. 이 영화에서 그는 1910년대 영국 세탁 공장 노동자 ‘모드’를 연기한다. 한 남자의 아내, 한 아이의 엄마로서 하루하루를 살아내던 그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갖은 부당함을 겪으며 서프러제트에 합류한다. 성향 자체가 급진적이거나 남다른 이론 교육을 받아서가 아니라 당대의 가치관을 따르던 평범한 여성이 투쟁에 내몰리는 상황을 통해 페미니즘 운동의 필연성을 설득하는 영화다. 이 영화는 젊은 페미니스트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고, 캐리 멀리건은 여성 이슈에 민감하고 도전적인 배우라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이 이미지는 그에게 두 번째 아카데미 주연상 노미네이트 기회를 준 <프라미싱 영 우먼>(2020)으로 이어졌다.

    <프라미싱 영 우먼>은 강간 문화를 신랄하게 꼬집은 블랙코미디다. 제목은 강간범의 감형 사유로 자주 언급되는 ‘전도유망한 청년(프라미싱 영 맨)’을 비꼰 것이다. 극 중 의대생이던 카산드라(캐리 멀리건)는 친구가 강간당하고 자살한 후 대학을 중퇴한다. 카산드라의 취미는 클럽에서 인사불성인 척 남자를 유인한 뒤 남자가 강간을 하려고 하면 멀쩡한 얼굴로 돌변해 그들을 응징하는 것이다. 하지만 카산드라의 분노는 그 정도로 해소되지 않는다. 가까스로 붙잡은 삶의 희망이 실망으로 바뀌고, 친구 사건의 실체가 생각보다 더 끔찍했다는 걸 알게 되고, 가해자들은 잘 먹고 잘 사는 중이라는 소식까지 듣자 카산드라는 폭주한다. 그가 빙글빙글 웃으며 2차 가해자들을 궁지로 몰아넣을 때, 관객들은 캐리 멀리건에게서 볼 수 없던 짙은 광기와 카리스마를 목격하게 된다.

    은은하게 돌아 있는 캐릭터, <프라미싱 영 우먼>의 카산드라.

    <프라미싱 영 우먼>은 작품을 둘러싼 사건으로도 화제를 모았다. <버라이어티> 잡지의 남성 평론가는 ‘캐리 멀리건이 훌륭한 배우긴 하지만 다층적인 내면을 지닌 명백한 팜 파탈 역에는 약간 이상한 선택이다. 프로듀서인 마고 로비가 그 역할에 더 잘 어울렸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캐리 멀리건이 남자들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위장한 모습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혹평했다. 그건 ‘여자가 화려하지 않으면 남자가 강간을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즉 여성이 강간의 원인을 제공한다’는 고전적 편견을 연상시키는 발언이었고, 그 편견은 이 영화가 정면으로 비판하는 강간 문화의 주요 쟁점이기도 하다. 캐리 멀리건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 미소지니한 리뷰에 반박했다. “기본적으로 내가 이런 종류의 계략을 수행할 수 있을 만큼 화끈하지 않다는 거죠. 미치겠더군요. ‘진짜로? 이 영화에 대해 이렇게 속 보이는 글을 쓴다고? 지금? 2020년인데?’ 믿을 수가 없었어요.” 그는 개인적으로 자존심이 상하지는 않았다. 다만 “여배우의 외모가 이렇게 큰 언론 매체에서 비판받을 수 있고, 그것이 합리적인 비판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을 우려했습니다”라고 밝혔다. 그후 <버라이어티>는 리뷰를 유지한 채 편집자의 사과 멘트를 추가했다.

    저널리즘의 역할을 묻는 영화 <그녀가 말했다>.

    신작 <그녀가 말했다>에서 캐리 멀리건은 또 한 번 여성들의 대변인이 된다. <그녀가 말했다>는 할리우드 거물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범죄를 폭로한 <뉴욕타임스> 기자들에 관한 영화다. 2명의 여성 조디 칸토, 메건 투헤이가 그 주인공이다. 그들은 ‘할리우드 스타들에게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다른 여자들은 어떻겠는가’라는 문제의식을 갖고 집요하게 사건을 추적했다. 그들의 목표는 거물을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었다. 그들은 피해자들을 끈질기게 설득해 증언하게 만들고, 관계자들의 협박에 대처하기 위해 방대한 증거를 수집하고, 법률 문서를 작성하듯 반론의 여지가 없는 기사를 완성해갔다. 2017년 10월 5일 공개된 기사에는 배우 애슐리 주드의 실명 증언이 담겼다. 기사는 즉각 반향을 일으켰다. 일주일 안에 안젤리나 졸리, 기네스 팰트로, 로잔나 아퀘트가 기사를 지지하고 나섰다. 미투 운동이 해일이 되는 순간이었다.

    조디 칸토와 메건 투헤이는 취재 뒷이야기를 책으로 썼다. 그것이 영화 <그녀가 말했다>의 원작이다. 기사의 신뢰도와 파급력에 결정적 역할을 한 애슐리 주드도 직접 출연한다. 영화는 여기에 칸토와 투헤이의 사생활 얘기를 더했다. 투헤이는 이 시대 가장 위대한 저널리즘 리포트를 준비하던 당시 산후우울증을 겪고 있었다. 그를 연기한 캐리 멀리건도 2015년 둘째 아이를 낳고 산후우울증을 겪었다. <더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캐리 멀리건은 그것이 투헤이를 더 깊이 이해하는 단서였음을 밝혔다. “메건(투헤이)과 처음으로 나눈 대화도 산후우울증에 대한 것이었어요. 저도 비슷하게 막막하고 힘들었거든요.” 투헤이가 왜 그토록 취재에 매달렸는지도 이해가 간다고 했다. “그런 격정을 겪을 땐 무언가 단단한 것을 그러잡고 싶어지죠.”

    조디 칸토와 배우 조 카잔도 일과 육아를 주제로 많은 이야기를 했다. 남자들의 업적을 이야기할 때는 “애는 누가 봤나요”라고 묻지 않지만 여자들의 업적에는 그런 질문이 따를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조 카잔이 뉴욕에서 <그녀가 말했다> 촬영을 시작하는 날 그의 파트너 폴 다노도 캘리포니아에서 스필버그 감독의 신작 촬영에 들어갔다. 할리우드 스타 커플인 이들에겐 유모가 있지만 그럼에도 카잔의 부모가 뉴욕에 와서 석 달 동안 아이를 봐주어야 했다. 여성 제작자, 여성 감독, 여성 주인공으로 이루어진 <그녀가 말했다> 팀이 일과 육아 사이 치열한 분투를 중요하게 다룬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가 말했다>는 팬데믹 기간 뉴욕에서 촬영되었다. 사진은 감독과 주연 배우들.

    <그녀가 말했다>는 여성주의 서사로, 그리고 저널리즘의 역할을 묻는 장엄한 드라마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캐리 멀리건의 연기에도 극찬이 쏟아졌다. 시상식 시즌이 기대된다. 우리는 이 영화에서 캐리 멀리건의 또 다른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소녀는 영원히 어리지 않다. 남자들의 시선 속에 존재하던 예쁜 여배우는 깊고 단단한 인상을 두른 채 영화를 장악하러 돌아왔다.

    프리랜스 에디터
    이숙명
    포토
    Courtesy Photos,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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