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동시대 대중문화예술을 이야기하다 #2

2023.08.09

by 김나랑

동시대 대중문화예술을 이야기하다 #2

이제 동시대 대중문화예술의 출발은 아시아다. 한국, 일본, 대만, 홍콩, 태국, 필리핀, 싱가포르, 인도의 쿨 키즈!

SAI VERSAILLES

1995년생 사이 베르사유(Sai Versailles)는 목소리를 내는 일에 결코 주저함이 없다. “친구들은 제가 ‘독하다’고들 해요. 언제나 확신에 차 있고, 외향적이라고 하죠. 독립적인 성향에서 비롯된 인상 같아요.” 마닐라에서 저널리스트 겸 DJ로 활약 중인 베르사유는 여행과 교육을 중시하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열렬한 잡지 키드였던 그녀는 어려서부터 패션지를 탐독했으며, 한때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미란다 프리슬리가 되기를 꿈꿨다. “2008년부터 2013년까지 패션 블로그를 운영했는데 반응이 꽤 좋았어요. 덕분에 2012 런던 패션 위크에 초대되기도 했죠. 그러면서 매거진 업계에서 일할 기회가 생겼어요. 학교 공부와 아르바이트, 취미인 글쓰기를 병행하며 정말 열심히 살았죠.”

17세부터 런던에서 홀로 유학하며 언론사와 NGO, 라디오 방송국에서도 경험을 쌓은 베르사유는 그 후 더 진중한 저널리스트가 되기를 꿈꾸기 시작했다. “천주교가 빈민을 위한 보건 정책에 미친 영향을 다룬 기사를 준비하며 사회적인 이야기를 더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침 옥스퍼드대로부터 2년짜리 대학원 과정을 제안받아 인터넷의 발달이 필리핀 독립 영화계에 미친 영향에 대한 논문을 쓰게 되었죠. 학교에서 시간제 연구원으로 일하며 일종의 프리랜스 저널리스트가 된 거예요.” 책과 기사, 음악과 영화 등 문화에 관한 그녀만의 인사이트를 전하는 플랫폼 ‘Cultural Learnings’를 시작하게 된 것도 이때다. “하고 싶은 말,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말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저널리스트가 됐어요. 누군가 공식적으로 인정해준 것도 아닌데 스스로 저널리스트라고 소개하기 조심스럽기도 하지만, 저널리즘은 제가 쓰고 싶은 글의 성격을 정확히 대변해요. 정보와 사실, 의견을 모으고 정리하는 것에 자신이 있거든요.”

브렉시트와 코로나19를 경험한 세대로 그녀는 시대의 흐름에 떠밀려 자연스럽게 다시 고향 마닐라로 돌아왔다. 해외에서 공부하며 글로벌한 시선을 장착한 베르사유에게 러브콜을 보낸 매체도 많았지만, 그녀는 자기만의 플랫폼을 통해 목소리를 냈다. 마닐라 커뮤니티 라디오(MCR)의 도움으로 또 다른 꿈이었던 DJ에도 도전했다. “글쓰기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어 좋더라고요. 서로 다른 곡으로 음악의 새로운 맥락을 탄생시킬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어요.” 그녀는 특히 1990년대와 2000년대 유로 댄스 음악을 좋아한다. “안타깝게도 마닐라에는 유서 깊은 공간이 많지 않아요. 사도마소디스코(SadoMasoDisco) 같은 근사한 커뮤니티와 함께 꾸준히 공연을 펼치면서 일시적 유행이 오래갈 유산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열광적인 리스너를 모아 마닐라에 근사한 뮤직 신을 만들어보려고요.”

위대한 언론인 헌터 S. 톰슨부터 가수 스컹크 아난시와 페이스리스, 영화감독 가스파 노에와 데이비드 린치, 예술가 백남준과 안젤름 키퍼까지, 그녀의 롤모델은 수없이 많다. 여기에 소중한 영감을 선사하는 예술가 친구들도 빼놓을 수 없다. DJ이자 최고의 대화 상대인 파트너 숀 바티스타(Sean Bautista), 베르사유의 DJ 크루 버블 갱(Bubble Gang), 마닐라의 퀴어 테크노 파티 엘리펀트(Elephant) 크루들과 MCR 동료 등등. “최근까지 이들과 나누는 음악 얘기에 푹 빠져 있었는데 다시 스토리텔링에 집중하려고요. 최근에는 패션에도 관심이 많아졌어요. 그러던 차에 <보그>의 연락을 받아 신기했죠. 예상치 못한 행보가 저를 과연 어디로 데려갈지 정말 기대돼요.”

GONGKAN

방콕의 어느 한적한 주택가에 자리한 아티스트 공칸(Gongkan)의 스튜디오는 주소지를 따라가다 보면 금세 눈에 띈다. 표식은 타원형 창문. 공칸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그니처 마크인 ‘텔레포트 홀(Teleport Hole)’이다. 후프 형태 오브제를 두르고 <보그> 카메라를 응시한 그가 설명했다. “제 작품 속 모든 텔레포트 홀은 무한한 자유와 상상력을 상징합니다.”

페인팅을 좋아하던 그는 일찍부터 예술가 기질이 다분했지만 공칸의 첫 직업은 광고 에이전시의 아트 디렉터였다. “클라이언트를 위해 뭔가를 끊임없이 만들어냈지만 정작 거기에 자신이 담기지는 않았죠. 곧바로 순수예술을 공부하기 위해 뉴욕으로 떠났습니다. 스스로 예술성을 증명하기 위해 접근이 쉬운 스트리트 아트를 선택했고요. 작품을 모아 크고 작은 갤러리에 선보이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저를 예술가로 인정하기 시작했어요.” 그때 떠올린 텔레포트 홀은 뉴욕에서 경험한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한 분투의 결과였다. “힘든 시기를 보내는 나 자신을 다른 세계로 옮겨놓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그림에 텔레포트 홀을 그려 넣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텔레포트 홀은 실제로 그를 새로운 세상과 연결시켜주었다.

공칸의 세계관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크고 작은 ‘포털’은 여정, 발견, 해방을 겨냥한다. 2021년 첫 번째 개인전에서 선보인 그의 대표작 ‘Black Hole’ 역시 마찬가지다.“사회가 개인, 특히 취약한 개인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막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행복과 성공의 이미지가 지배하는 SNS에서도 진정한 고통과 슬픔을 표현하기가 힘들죠. 예술가로서 이런 문화적 금기에 직면하고자 해요. 우울과 불안의 정서를 가감 없이 그려내는 방식으로요. 자신의 무의식을 기꺼이 들여다봐야 합니다.”

공칸은 무라카미 다카시, 패트리샤 피치니니, 올라퍼 엘리아슨처럼 독특한 물성을 지닌 재료로 아름답고 기묘한 세계를 창조하는 아티스트를 존경한다. 특히 쿠사마 야요이에게서 받은 영향은 남다르다. “여성이자 예술가로서 겪은 온갖 어려움에도 꿋꿋하게 자신만의 예술을 펼쳤잖아요.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고 아름답게 표현해 따뜻한 잔상을 남기는 것이 저의 목표입니다.” 예술혼을 발휘하는 데 집중하는 아티스트도 많지만 공칸에겐 작품으로 관객에게 가닿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개인적인 메시지를 관객과 공유할 때 안도감을 느껴요. 많은 사람이 제 작품을 보며 자신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지만 이제까지 표현할 수 없었다고 했어요. 그래서 위로가 되었다고요. 불쾌한 감정을 공유하는 친구가 생긴 것 같아 기쁘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정말 뿌듯하더라고요.” 그는 요즘 우울증에 대해 조사하고 있다. “정신 건강은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니까요. 예술보다 훨씬 더요.”

최근 한국에서 열린 개인전 <공적이면서도 사적인: Public but Private> 일정을 마치고 귀국한 공칸은 당분간 여행에 마음을 쏟을 작정이다. 다가올 전시와 프로젝트의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다. “최근 2년 동안 NFT 시리즈에 몰두하고 있어요. 드디어 출시가 임박했는데 시간 여행을 주제로 조금 복잡한 세계관을 구상했죠.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 인터랙티브 아트도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답니다.”

DOROTHY LAU

도로시 라우(Dorothy Lau)는 젠지 시대와 걸맞게 직업을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멀티플레이어다. 호주의 로열 멜버른 공과대학(RMIT)에서 파인아트 석사과정을 밟는 동안 홍콩으로 귀국한 도로시는 아트 바젤 홍콩에서 초상화 시리즈 ‘파라-셀브즈(Para-Selves)’를 선보였고, 다양한 로컬 뮤지션의 뮤직비디오나 광고를 제작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싱어송라이터다.

“‘GTDL 크리에이티브’라는 프로덕션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아트 디렉션, 스타일링, 코스튬 디자인 등 다양한 일을 하죠. 클라이언트는 로컬 밴드 디어 제인(Dear Jane), 칸토 팝 가수 차메인 퐁(Charmaine Fong)과 아이돌 그룹 미러(Mirror)가 있고, 후지필름, 라 메르, 듀렉스 같은 브랜드와도 작업했어요. 최근엔 가수 고거기(Leo Ku)의 뮤직비디오 시리즈를 디렉팅했죠. 어릴 때 노래방에서 그의 노래를 불렀기에 아주 뜻깊었어요.”

호주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도로시는 단 하나의 꿈을 갖고 홍콩으로 돌아왔다. 가수가 되겠다는 것. 지난 6년간 뮤직 신에서 크리에이티브로서 경력을 쌓으며 지난해엔 음원도 냈다. “어린 나이에 이 업계에 진입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석사과정을 밟고 돈도 벌어야 해서 마냥 원하는 걸 할 수 없었죠. 그러다 뮤지션 친구들을 만났고,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던 중 그들이 어시스턴트 자리를 제안했어요. 그때부터 디렉팅과 스타일링 프로젝트를 시작해 3년 만에 스튜디오를 설립했습니다.”

타이포 지역의 한 고층 빌딩에 있는 도로시의 스튜디오는 천연 염색 중인 의상, 피아노,페인팅 작업 등으로 가득하다. 다양한 예술을 향한 선망이 가득한 공간이랄까. “언젠간 제 작업물을 한데 모은 프로젝트를 선보이고 싶어요. 전시 혹은 콘서트 형태로요. 작업마다 달라 보일 수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통의 컨셉이 있죠.”

최근 도로시는 홍콩 영화계에 관심을 두고 있다. “요즘 들어 홍콩에 좋은 영화가 꽤 나오고 있어요. 이들 작품에서 영감과 힘을 얻어 작업을 이어갑니다.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신선한 비주얼과 이야기를 선보이고 싶어요.” 그녀의 꿈은 동경하는 뮤지션 프랭크 오션처럼 성공적인 음악 커리어를 쌓고, 패션을 공부한 뒤 런던에서 살아보는 것이다.“ 그때쯤이면 자부심 가득한 작품을 만들어 세상에 선보일 수 있겠죠?”

    포토그래퍼
    Renzo Navarro(Sai Versailles), Nucha Jaitip(Gongkan), Kiu Ka Yee(Dorothy Lau)
    Camille Park(Gongkan), 김예은(Dorothy Lau)
    헤어
    Marco Li(Dorothy Lau)
    메이크업
    Slo Lopez(Sai Versailles), Cathy Zhang(Dorothy Lau)
    어시스턴트
    Sean Bautista(Sai Versail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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