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 밖의 ‘무빙’, 성공의 이유
어쩌면 관객들이 예상한 건 이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할리우드식 장르물에 한국 정서를 이식하려다 실패한 사례를 우리는 너무 많이 봤다. 한국 주부들이 새로운 식물을 발견하면 일단 김치를 만들어보듯 한국 영화계는 새로운 장르나 소재를 발견하면 일단 코믹 신파 가족 드라마를 뿌리고 본다. 슈퍼 히어로물, 화려한 출연진, 글로벌 자본에 기댄 블록버스터인데 가족, 청춘, 멜로, 휴머니즘을 섞는다? 액션 파트의 미진함을 감추기 위한 연막이거나 ‘천만 영화’ 성공 법칙의 안일한 재탕은 아닐까? 나름대로 세련된 거 해보겠다고 한국 배우들이 할리우드 제스처를 흉내 내며 껄렁대는 것도 민망하지만 ‘한국형’을 강조한 블록버스터도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그런데 <무빙>은 수많은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실패한 자리를 딛고 서서 다시 한번 드라마의 힘을 증명한다. 익숙한 슈퍼 히어로 액션에서 판타지를 줄이고 한국형 잔혹 누아르의 DNA를 끌어온 전략도 훌륭하다. 그것이 진한 가족 드라마,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적 관계, 서민적인 풍경 등과 어우러져 극적 리얼리티를 강화한다. 이 작품에는 관객들이 보고 싶은지도 모르는 채로 보고 싶어 했던 것들이 풍성하게 담겨 있다.
<무빙>은 아기자기한 청춘 드라마로 문을 연다. 하늘을 나는 능력이 있지만 그것을 제어하지 못하는 소년 봉석(이정하)은 새로 전학 온 체대 입시생 희수(고윤정)와 가까워진다. 봉석의 비행 능력으로 첫사랑에 빠진 소년의 마음을 표현한 장면은 극도로 사랑스럽고 로맨틱하다. 평생 외톨이였던 봉석이 희수를 집에 데려오자 엄마 미현(한효주)이 당황하는 장면처럼 정통 가족극을 변주한 코미디도 소소한 재미를 더해준다. 밀도 높은 액션을 기대한 팬들에게는 흐름이 느리다는 인상을 줄 수 있지만 청춘물의 범주에서는 여전히 매력적인 연출이다. 봉석과 희수는 각각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재 속에서 자랐고, 무거운 비밀이 있으며, 그 때문에 그들을 과보호하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두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정체성 탐구에 매몰되어 자기 연민, 반항, 자의식 과시로 러닝타임을 허비하는 대신 밝은 생명력으로 관객과 친밀감을 쌓아나간다. 이런 설정은 후반부에 이어질, 이들을 지키기 위한 어른들의 싸움에 몰입감을 더해줄 것이다.
봉석이 첫사랑에 빠져 있는 동안 후반부의 암울하고 폭력적인 전개를 위한 빌드업도 착실히 진행된다. 그 과정에서 오랜만에 컴백한 류승범이 놀라운 존재감을 발휘한다. 그는 원래 연기와 액션 모두에서 유연성이 탁월하고 페이소스가 있는 배우였다. 그런데 카메라 앞에서의 자유로움은 여전한 데다 내공이 더욱 단단해진 모습이다. 오랜 외국 생활도 그에게 값진 자양분이 된 듯하다. 그가 맡은 역은 어린 시절 미국에 끌려가서 살인 병기로 키워진 초능력자 ‘프랭크’다. 프랭크는 어린 초능력자들을 찾기 위해 그들의 부모 세대를 죽이고 다닌다. 악당이지만 고통스러운 과거와 결핍을 지닌 인물이다. 감정도 깊어야 할 뿐 아니라 오랜 시간 외국에서 지낸 캐릭터인 만큼 기술적 접근도 필요한 배역이다. 한국 배우들이 교포를 연기하기 어려운 건 언어뿐 아니라 표정이나 제스처 같은 비언어적 표현까지 미세하게 달라야 하기 때문인데, 류승범은 그 모든 걸 자연스럽게 해낸다. 프랭크와 미현, 봉석이 대면하는 돈가스집 장면은 <추격자>의 슈퍼마켓 장면을 방불케 하는 긴장을 자아낸다. 관객은 이미 그가 살인자라는 걸 알고, 미현은 눈치를 챘지만 모른 척 연기한다. 영문도 모르고 여기 당도한 봉석이 실수를 하는 순간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이다. 프랭크의 어둡고 처절하고 폭력적인 세계와 어린 세대 초능력자의 밝은 세계가 처음으로 충돌하는 중요한 장면인데, 그 순간 보여준 류승범의 서늘함은 오래 기억될 만하다. 또 다른 악역인 안기부 간부 역의 문성근도 고유의 선명함과 날카로움으로 캐릭터에 존재감을 부여한다. 국가권력이라는 뻔한 악을 반대편에 세우고도 이 작품이 싱겁지 않게 끝날 수 있다면 악역들의 이런 활약이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구세대 능력자들의 과거를 회상하는 중반부로 접어들면서 <무빙>은 매회 다른 장르로 변화하고 있다. 봉석의 부모인 두식(조인성)과 미현의 관계는 첩보 멜로, 희수의 아버지인 주원(류승룡) 이야기는 조폭 누아르처럼 묘사된다. 각각의 이야기가 모두 매력적이다. 그러면서 액션의 강도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무빙>의 액션은 앞서 말했듯 슈퍼 히어로물의 전형에서 살짝 벗어나 있다. 초반 액션 신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희수의 17:1 진흙탕 싸움이다. 디즈니플러스 홍보 채널에서 이 신을 리뷰한 조인성은 “<비열한 거리> 이후에 (이런 장면은) 오랜만에 보네요. 저보다 낫네요”라고 했다. 희수는 재생 능력 외에 초능력이 없기 때문에 죽도록 맞고 밟히고 찔리고 살아나서 다시 덤벼드는 게 전부다. 액션 자체는 고등학생들의 막싸움이다. 하지만 조인성의 말마따나 <비열한 거리>를 연상시키는 처절함이 눈길을 끈다. 두식과 미현의 회상에 등장한 호텔 연회장 학살, 주원의 회상에 나온 조폭 집단 린치 신 등도 판타지보다는 고어에 가깝다. 물론 프랭크가 투시 능력자와 총격전을 벌이는 장면, 주원이 <올드보이>를 연상시키는 긴 복도 액션 신에서 불 붙은 주먹을 휘두르는 것처럼 초능력자라는 설정을 활용해 기존 액션을 흥미롭게 변형하기도 한다. 강렬하면서도 다양한 액션을 고민한 흔적이 엿보인다. 후반에는 <존윅>이나 <테이큰> 스타일 총기 액션이 준비되었다고도 하고, 비행 능력자 두식, 공격력은 최고인 듯한 강훈(김도훈), 아직 과거가 밝혀지지 않은 성인 능력자들의 활약도 펼쳐질 것이다. 액션 팬에게는 좋은 소식이다. 더욱 좋은 소식은, 이 작품이 순간의 아드레날린 파티가 아니라 긴 여운을 위해 설계되었다는 점이다.
어린 봉석이 친구들 앞에서 비행 능력을 뽐내는 바람에 다른 아이가 다치자 미현은 말한다. “초능력, 그게 뭔데? 사람의 진짜 능력은 공감 능력이야. 다른 사람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 그게 가장 중요한 능력이야. 다른 사람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게 무슨 영웅이야.” <무빙>은 대의명분이 아니라 소소한 삶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 치는 영웅들의 이야기다. 우리와 다른 능력을 지녔지만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존재들의 납득할 수 있는 선택이 액션으로 이어진다. <무빙>은 슈퍼 히어로라는 외래 장르를 성공적으로 토착화한 첫 작품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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