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정장을 입은 사람들
톰 브라운만의 독보적인 20년 서사.
톰 브라운(Thom Browne)의 브랜드에 입사하는 모든 직원은 1만 달러 상당의 톰 브라운 제품으로 구성된 ‘스타터 키트’를 제공받는다. 여기에는 회색 정장 두 벌, 하얀 옥스퍼드 셔츠 다섯 벌, 회색 울 타이 한 장, 하얀 포켓 스퀘어 한 장 등이 들어 있다. 이와 더불어 제공되는 11페이지 분량의 PDF 자료에는 브라운이 ‘유니폼’(더도 말고 덜도 말고 ‘유니폼’)이라고 부르는 착장을 입는 방법이 참고 이미지와 중요 표시 등을 곁들여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맨 위 버튼은 절대 잠그지 않아야 한다. 셔츠는 다려 입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필요한 액세서리인 넥타이는 허리 밴드에 단단히 고정해 넣어야 한다. 정장 바지는 성별에 관계없이 플리츠 스커트로 대체해 착용 가능하다. 유니섹스 착장의 지지자로서 10년 넘게 남성복에 치마를 선보여온 브라운다운 결정이다. 네이비 색상은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만 허용되고 주중에는 허락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 시어서커 소재는 여름에만 착용 가능하고 하얀 스니커즈는 주말에만 신을 수 있다는 등 유니폼 착용 규칙에는 신중하게 계산된 예외 또한 포함되어 있다.
7월 초순 어느 날 오후, 나는 톰 브라운의 프랑스 본사에 방문하기 위해 파리 8구의 고급 쇼핑 거리인 몽테뉴가를 찾았다. 이틀 뒤 브라운은 처음으로 파리 오뜨 꾸뛰르 위크에 참가해 런웨이 쇼를 선보일 셈이었다. 이로써 그는 지난 50년간 펜디, 샤넬, 스키아파렐리 등 유명 꾸뛰르 하우스와 함께 오뜨 꾸뛰르 위크 런웨이에 서도록 초청받은 몇 안 되는 미국인 디자이너 중 1인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 하이패션 페스티벌의 타이밍이 썩 좋지 않게 흘러갔다. 얼마 전 파리 교외에서 한 경찰관이 차량 검문 도중 비무장 알제리계 10대 소년을 쏴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전국에서 시위가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나는 야간 비행기를 타고 파리로 날아가는 동안 도시가 상당히 불안정한 상태일 거라 여겼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몽테뉴가의 분위기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사람들은 구찌, 생 로랑, 프라다, 루이 비통 등 유러피언 플래그십 부티크가 웅장한 크림색 석회암 성벽처럼 쭉 늘어선 거리를 유유히 걷고 있었다. 30번지에는 크리스챤 디올이 75년 전 허리를 꽉 조이는 뉴 룩 실루엣을 최초로 선보였던 부티크 자리를 여전히 지키고 있었다. 뒤이어 도착한 17번지에 있는 톰 브라운 부티크는 예약제로만 열리는 곳인 데다, 겉으로 봐서는 패션 회사 본사라는 걸 짐작하기 어려운 외관을 하고 있었다. 그 베이지색 건물은 주변의 우아한 건축물 사이에서 뻐드렁니처럼 혼자 튀는 모습이어서, 제대로 찾아온 것이 맞나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던 중 건물 모퉁이에서 누가 봐도 톰 브라운 직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한 사람은 하이톱 레이스업 브로그 슈즈에 정장을 입고 있었고, 또 다른 사람은 시어서커 반바지에 그와 매치되는 허리가 들어간 조끼를, 나머지 한 사람은 슬리브리스 옥스퍼드 셔츠에 캐시미어 소재의 크롭트 베스트 차림이었다. 즉 ‘쪼그라든’ 듯한 회색 수트에, 손목 위로 짤따랗게 떨어지는 재킷 소매, 칼날처럼 얇고 좁은 라펠, 브라운이 ‘남성의 가슴골’이라고 부르는 발목이 훤히 드러나도록 발목에서 3인치는 올라온 바짓단을 특징으로 하는 전형적인 톰 브라운 앙상블의 다양한 변주였다. (브라운은 ‘미디엄 그레이’ 색상의 슈퍼 120수 울 트윌 원단을 선호한다. 연필심, 자갈, 젖은 시멘트가 떠오르는 전형적인 회색이다.) 톰 브라운 룩은 종종 미국의 TV 쇼 캐릭터 피위 허먼(Pee-wee Herman)의 익살스럽고 고지식한 복장이나, 마찬가지로TV 쇼 캐릭터인 돈 드레이퍼(Don Draper)의 사무복을 건조기에 몇 번 돌린 것 같은 모습과 비교되곤 한다. 나 역시 그 룩을 보면 로알드 달(Roald Dahl) 소설에나 나올 법한, 허구한 날 여교장의 침실에 죽은 햄스터를 숨겨둘 궁리만 하는 장난기 가득한 아이가 떠오른다.
22년 전 자신의 이름을 딴 기성복 브랜드를 론칭해 현재 58세가 된 브라운은 직원들에게 드레스 코드를 지정한 최초의 디자이너는 아니다. 마르탱 마르지엘라는 몇십 년 전부터 직원들에게 상시 기다란 하얀 가운, 즉 실험실 가운을 입게끔 했다. 브라운은 고객이 입을 옷을 디자인하는 데 체계적인 접근 방식을 택한 최초의 디자이너도 아니다. 1926년 <보그>에 실린 기사를 빌리자면, 샤넬의 리틀 블랙 드레스는 ‘취향과 관계없이 모든 여성이 즐겨 입을 수 있는 옷’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패션계에서 브라운은 하나의 아이디어를 반복함으로써 자신의 브랜드를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브랜드 중 하나로 키워냈다. 그가 직원들에게 종종 말한다는 믿기 어려울 만큼 소박한 그의 목표는 ‘회색 정장을 매력 있게 만드는 것’이다. 한때 일부 남성복 마니아들만 추종하던 브랜드였던 톰 브라운은 최근 몇 년간 과감한 패션을 주저하지 않는 이미지를 원하는 셀러브리티들이 즐겨 찾는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이탈리아의 텍스타일 대기업 제냐가 브랜드의 최대 지분을 약 5억 달러 상당의 가격으로 매입한 2018년, 예전부터 이 브랜드의 팬이었던 농구 선수 르브론 제임스(LeBron James)는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팀 동료들에게 플레이오프 게임에 착용할 똑같은 톰 브라운 수트를 선물했다. (패션 평론가 알렉산더 퓨리(Alexander Fury)는 완성도 높은 테일러링 수트 위로 근육이 울룩불룩 튀어나오는 모습을 좋아하는 ‘몸 좋은 이성애자 남자들’ 사이에서 브라운의 수트가 크게 어필하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브라운은 배우 오스카 아이삭(Oscar Isaac)에게 플리츠 스커트를 입혔고, 배우 크리스틴 바란스키(Christine Baranski)에게는 코르셋이 가미된 턱시도를 입혔다. 퀴어-페미니스트 슈퍼그룹인 보이지니어스(Boygenius) 멤버들은 현재 월드 투어에서 브라운의 커스텀 수트를 입고 초기 비틀스 같은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자신의 성 정체성을 제3의 성으로 규정한 뮤지션 자넬 모네(Janelle Monáe)는 올해 멧 갈라에 톰 브라운의 팀 버튼(Tim Burton)스러운 블랙 앤 화이트 트위드 코트와 망사로 된 거대한 후프 스커트를 입고 등장했다. 모네는 “톰 브라운의 옷을 입으니 문화 발전에 기여하는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라고 했다.
브라운은 첫 꾸뛰르 쇼를 위해 19세기에 지은 파리의 대형 오페라 하우스 ‘오페라 가르니에’를 대관했다. 브라운의 팀은 컬렉션을 냉장 보관 상자에 담아 뉴욕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몽테뉴가, 브라운의 상시 쇼룸 두 층 위에 위치한 임시 아틀리에는 쇼 준비로 정신없이 분주했다. 50여 명의 직원이 하얀 천을 씌운 높은 테이블에 달라붙어 막바지 수정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주근깨만 한 수백 개의 시퀸으로 만든 블레이저를 장식하는 직원들도 있었고, 비둘기색 울에 무아레 실크의 굽이치는 물결무늬와 비슷한 느낌으로 은색 비즈를 엮어 긴 코트를 만들고 있는 직원들도 있었다. 복도 건너편에는 임시 포토 스튜디오와 피팅 룸이 있었는데, 포토그래퍼가 바위 색의 ‘종’ 모양 가운을 입고 있는 남성 모델의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이번 컬렉션에 여러 번 등장한 그 디자인은 머튼 슬리브와 원뿔형 스커트를 과장한 룩으로, 스리피스로 이루어진 수트를 겹쳐지게 착용해 겉에서 봤을 때는 서로 연결된 한 벌인 듯한 착시를 일으키는 옷이었다. 그 와중에 브라운의 풋웨어 책임자 안나 스콧(Anna Scott)이 스틸레토 힐에 황동으로 된 작은 종을 다느라 이따금씩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똑같아 보이는 유니폼 사이로 직원들 각자의 개성이 언뜻언뜻 엿보였다. 분홍색으로 한 줄만 염색한 머리, 슬쩍 보이는 다리의 문신, 가톨릭 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이 단정한 치마에 옷핀을 달아 그나마 멋을 부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그날 검은색과 크림색 옷을 입고 갔지만, 회색이 만연한 직원들 사이에 있노라니 불타는 빨간색을 입은 듯한 느낌이었다. 이번 쇼를 위해 헤드피스를 만들어준 영국의 모자 제작 장인 스티븐 존스(Stephen Jones)가 내 야구 모자를 보더니 정중하게 모자에 있는 얼룩을 닦아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모자를 받아 든 그는 재빨리 다른 방으로 가 물수건으로 모자챙을 꼼꼼히 닦아주었다.
브라운은 피팅 룸 중앙의 대리석 테이블에 기대서 있었다. 나를 발견한 그는 내 양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맞이했다. 그는 이런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강인해 보이는 사각 턱에,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머리칼을 단정한 크루 커트로 깔끔하게 정돈했으며, 즐겨 입는 주름진 옥스퍼드 셔츠 위에 타이트한 니트 조끼를 입은 모습이었다. (그는 셔츠 주름에 대해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다면 지나치게 귀해 보이지 않도록 약간의 허술함을 더해줄 무언가가 필요한 법이죠”라고 말했다.) 포근해 보이는 울 소재 반바지 아래로는 근육질의 다리와 톰 브라운 니삭스가 돋보였다. 유니폼에 대한 브라운의 접근 방식은 변함없다. 과거 수영 선수이기도 했던 그는 무릎 부상으로 러닝 머신에서만 뛸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매일 13km를 달렸다. 그는 정장 반바지에 캐시미어 카디건 차림으로 센트럴 파크 저수지를 달리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5년 전부터 그는 긴바지를 일절 입지 않는다. 그는 파리의 리츠 호텔이나 밀라노의 포시즌스 호텔에서 레스토랑에 반바지를 입고 입장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아 곤란했던 경험을 떠올렸다. “이젠 무조건 들여보내주지만요.” 그의 말이다.
브라운의 런웨이 프레젠테이션은 섬세한 서사로 유명하지만, 그는 자신의 레퍼런스가 “프루스트보다는 벅스 버니에 가까운 스타일”이라고 말한다. 그가 연출하는 무대배경은 고전적인 학교 건물, 아이스스케이트 링크장, 가짜 눈을 뿌린 소나무 숲 등 우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지만, 종종 예상 밖의 반전 요소를 갖추고 있다. 그는 지난해 ‘토이 스토리’ 컬렉션 쇼에서 뉴욕 제이콥 K. 자비츠 컨벤션 센터(Jacob K. Javits Convention Center)를 자신의 수트를 입힌 슈타이프(Steiff) 테디 베어로 가득 채웠다. 펜실베이니아주 앨런타운(Allentown) 출신으로 7학년까지 가톨릭 학교에 다니며 미사를 돕는 복사이기도 했던 그는 수녀와 사제를 테마로 한 컬렉션을 여러 번 선보였다. 2012년 쇼에서는 내레이터가 “이들은 패션을 위해 순교했다”고 말하는 동안 모델들이 관에서 나타나는 퍼포먼스를 연출하기도 했다. 브라운의 오랜 친구이자 패션 브랜드 리버틴(Libertine) 설립자인 존슨 하티그(Johnson Hartig)는 브라운의 창의적인 비전에 대해 “뭔가 엄숙하면서도 어딘가 디스토피아적인 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순수한 장난기로 가득하죠.”
브라운은 영국 뉴 웨이브 밴드 비지지(Visage)의 곡 ‘Fade to Grey’의 첫 소절 “Oneman on a lonely platform(플랫폼에 외로이 서 있는 한 남자)”라는 가사에서 이번 꾸뛰르 쇼의 영감을 얻었다. 그는 수단 태생의 영국 슈퍼모델 알렉 웩에게 이번 쇼의 주인공을 맡기고, ‘클래식한 회색 수트를 입고 기차역에 온, 자기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소녀’ 느낌으로 연출했다. 그리고 컬렉션의 나머지 의상은 짐 옮기는 사람, 가고일(괴물 석상), 승무원, 하이패션 비둘기 한 쌍 등, 이 소녀가 기차역에서 마주친 여러 인물을 상징하는 의상으로 채웠다. 꾸뛰르 비둘기 역을 맡은 남성 모델 플로리안 데스비엔드라스(Florian DesBiendras)가 쇼 의상을 모두 갖춰 입고 15cm가 넘는 통굽 캔틸레버 슈즈를 신은 채 아틀리에 안으로 비틀거리며 걸어 들어왔다. 브라운은 목을 길게 빼고 그를 보며, “이야, 크긴 진짜 크다”고 웃으며 말했다.
브라운은 10년 넘게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의상 연구소장으로 있는 앤드류 볼튼(Andrew Bolton)과 연인 관계로 지내고 있다. 브라운이 자신의 새로운 컬렉션을 처음 개발하고 있을 때, 볼튼은 그에게 꾸뛰르의 유서 깊은 규칙을 알려주었다. 그 규칙이란, 옷은 모쪼록 ‘무게 있어 보이되, 입었을 때는 가벼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비둘기 복장은 브라운이 스위스에서 주문 제작한 파이에트 소재로 만든 딱 맞는 터틀넥 미니 드레스에 수작업으로 만든 수백 개의 회색, 녹색, 자주색 깃털이 달린 디자인이었다. 허리에 두른 스커트는 수트 재킷을 연상시키는 위트 있는 디자인으로, 과장된 어깨 패드가 짐 바구니처럼 양옆에 커다랗게 들어가 있었다.
브라운은 실력 있는 댄서이기도 한 데스비엔드라스에게 ‘새처럼 걷는 법’을 연습해달라고 주문했다. 그러자 존스가 디자인한 비둘기 머리 같은 헤드피스를 쓰고 있던 데스비엔드라스는 병든 백조를 흉내 내는 듯 날개를 퍼덕이면서 방 안을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이에 질세라 브라운도 양손을 등 뒤로 해 새의 꽁지깃처럼 만들고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뒤이어 브라운은 음악 감독과 함께 쇼에 사용할 배경음악을 점검했다. 플레이리스트에는 비지지 노래 외에도 비요크와 데이비드 보위의 다소 우울한 곡과 오페라 <디도와 아이네이아스(Dido and Aeneas)>의 아리아 두어 곡이 들어 있었다. 브라운은 모델들이 천천히 걷기를 바랐다. 대부분의 패션쇼가 15분 미만으로 진행되는 데 반해, 브라운의 쇼는 30분이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에 대해 불평하는 비평가들이 있다는 말에 브라운은 “근데 있잖아요, 굉장히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이 쇼를 준비했거든요. 그러니까 좀 여유를 가지고 즐겨주시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음악 감독은 이어서 화물 기차의 칙칙 소리와 낡은 괘종시계 소리, 비둘기 소리 등을 들려주었다. “가끔은 유치한 것도 좋더라고요.” 브라운이 말했다. 그는 오페라 가르니에 무대 위에 펠트로 만든 비둘기 똥을 여기저기 흩뿌려놓는 걸 고려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전설적인 프랑스의 바느질 공방을 언급하며 “르사주에 맡겨야만 가능하겠더라고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시간이 촉박해서 포기했다.
프랑스의 구테(Goûter, 오후 간식) 시간이 되자 홍보 담당자가 고급스러움과 평범함이 공존하는 간식을 내놓았다. 돔 페리뇽과 포테이토칩이었다. 홍보 담당자는 길쭉한 플루트 잔을 싫어하는 브라운의 취향을 고려해 둥글넓적한 쿠프 잔에 샴페인을 따르고,종이 접시에 포테이토칩을 부었다. 브라운은 영화 <7년 만의 외출>에서 마릴린 먼로의 캐릭터에 영감을 받아 이 독특한 간식 조합을 생각해냈다고 한다. “포테이토칩이 샴페인이랑 굉장히 잘 어울려요.” 접시에 담긴 포테이토칩에 손을 뻗으며 그가 말했다. 칼라 뒷부분에 작은 꼬리표처럼 달려 있던, 혹은 셔츠의 팔 부분에 둘렀던, 모든 톰 브라운 의상에는 빨간색-하얀색-파란색으로 된 그로그랭 띠가 포인트로 들어가 있다. 이 띠는 브라운이 수영 선수 시절 딴 메달에 달린 싸구려 리본에 대한 기억을 상징한다. 아일랜드-이탈리아계 가정의 사이좋은 일곱 남매 중 넷째였던 브라운은 수영 훈련을 받기 위해 새벽 4시에 일어나 등교하곤 했다. 그의 여동생 진마리 울프(Jeanmarie Wolfe)는 그 시절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남매는 서로 티격태격 경쟁하는 사이였지만, 톰이라면 뭐가 됐든 끝까지 해낼 거라는 믿음이 있었어요. 끈기가 남달랐거든요.” (현재 앨런타운에서 변호사로 일하는 울프는 거의 매일 머리부터 발끝까지 톰 브라운을 입고 다닌다.) 브라운은 10대에 미국 국가 대표 수영 선수가 되어, 노트르담 디비전 I 팀에 영입됐다. “거의 스피도만 입고 자랐어요.” 7월 말, 뉴욕 매디슨가에 있는 이탈리아식 카페 산트 암브로에우스(Sant Ambroeus)에서 다시 만난 그가 내게 한 말이다. “루틴대로 생활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죠. 루틴을 짜고 그걸 철저하게 지키는 게 아주 좋았어요.” 브라운은 여전히 엄격한 생활 습관을 지키며 산다. 2021년에 볼튼과 함께 이스트사이드 안쪽의 서턴 플레이스(Sutton Place)로 이사한 이래, 그는 매일 아침 산트 암브로에우스에서 아침 식사를 포장해간다. 설탕이 뿌려진 크루아상과 에스프레소 한 잔이다. 하지만 나와 만난 그날만큼은 안에서 식사를 하기로 하고, 벽을 따라 빨간 가죽 의자가 늘어선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서 이렇게 먹는 건 처음이군요.” 이 말을 마친 그는 매일 먹는 똑같은 메뉴를 주문했다.
브라운의 아버지 제임스(James)는 금융회사 소속 변호사이자 회계사였고, 브룩스 브라더스 수트를 입고 출근했다. 어머니 버니스(Bernice)는 로스쿨에서 제임스를 만나 결혼한 후 가정주부로 아이들을 키웠고, 50세의 나이에 변호사 시험에 또다시 합격해 카운티 변호사로 일했다. 브라운은 평범한 사무직의 길을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경영학 전공으로 대학을 졸업했고 뉴욕에서 컨설팅 일을 시작했지만, 머지않아 환멸을 느끼고 1년도 채 못 돼 그만뒀다. 그리고 얼마 후, 영국 출신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친구 폴 포춘(Paul Fortune)이 브라운을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자신의 게스트하우스에 머물게 해주겠다고 제안했고, 브라운은 그 제안을 받아들여 결국 로스앤젤레스에서 6년이나 살았다.
2020년에 세상을 떠난 포춘은 소피아 코폴라, 마크 제이콥스, 에일린 게티 같은 유명인들을 고객으로 두고 있었으며, 고급스러운 스타일로 이름이 높았다. 브라운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가톨릭 학교 출신의 게이 남성이었다. “포춘은 정말 발이 넓었어요. 그리고 세련된 취향을 가지고 있었죠. 어떻게 사는 것이 멋진 삶인지 잘 보여주는, 같이 있기만 해도 영감을 주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브라운이 그를 회상하며 말했다. 2년 뒤 브라운은 그의 게스트하우스를 떠나 로스펠리스(Los Feliz)로 독립했다. 브라운이 20대에 무명 배우였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그 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짧게나마 연기 코치 밑에서 수업을 받기도 했고 TV 광고에도 한두 편 출연하긴 했지만, 실상은 주로 제작 보조나 대본 보조 작가로 일하며 생활비를 벌었을 뿐이라고 말이다. 브라운이 쇼 비즈니스 업계에 몸담았던 짧은 경험에서 건진 것은 영국인 이름처럼 보이는 그의 이름이라고 한다. 영화배우 협회에 이미 ‘Tom Browne’이라는 사람이 등록되어 있었기에, 그때부터 톰(Thom)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브라운은 회사원으로 일하던 시절부터 브룩스 브라더스를 입었던 자신의 아버지처럼 자연스럽게 수트를 입었다. 하지만 로스앤젤레스로 온 후부터는 점차 자신만의 개성이 뚜렷이 드러나는 스타일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빈티지 옷 가게를 뒤져 클래식 남성복을 구했으며, 그렇게 구한 옷을 동네 세탁소로 가져가 바짓단을 올리고 소매를 짧게 수선해 입었다. 어디서 그런 스타일의 영감을 얻었는지 묻자 그는 존 F. 케네디의 슬림한 수트에 대한 기억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사실 케네디는 헐렁한 컬러 재킷과 신발 끈 위를 덮는 긴 길이의 바지를 자주 입었다. 그는 이에 대해 “그 디자인은 제 머릿속에 어떤 아이디어로 존재하고 있었어요. 그걸 현실로 구현하고 싶었죠”라고 말했다. 그는 너무 작은 그의 수트를 보고 돌아버리려고 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는 게 재미있었다고 말한다. 여유롭고 느긋한 분위기의 로스앤젤레스에서는 특히 더 그랬을 것이다. “지나치게 평범한 걸 못 견뎌요. 무난하기만 한 건 따분하게 느껴지죠.”
1997년 그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다. “그때 수중엔 한 푼도 없었어요. 앞이 캄캄했죠.” 다행히도 친구의 도움으로 조르지오 아르마니 도매 매장 쇼룸에 점원으로 취직했다. 당시 아르마니는 1980년대에 만들었던 파워 수트를 루스하고 찰랑찰랑한 실루엣으로 개조해 내놓았는데, 이런 스타일이 브라운의 개인적인 취향에 맞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장 높은 판매 실적을 올렸다. 그즈음 브라운은 랄프 로렌의 비서장과 친분을 쌓았고, 결국 중간 수준의 워크웨어 브랜드 클럽 모나코를 위한 남성복 디자이너를 찾던 로렌을 만나게 됐다. 로렌은 브라운이 디자이너 경력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기회를 주었다. 디자이너가 된 브라운은 미니어처 카디건, 하이 워터 팬츠 등 자신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브랜드에 적용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들과는 잘 맞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그냥 내줄 수도 없었죠. 그 아이디어가 너무 좋았거든요. 그래서 저만의 브랜드를 만들어서 직접 한번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브라운은 재봉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라인에 들어갈 수트 시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솜씨 좋은 재단사와 협력해야 했지만, 브라운의 일반적이지 않은 치수를 따라 수트를 만들어줄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브루클린의 재단 장인과 의견 차이로 작업을 진행하기 어려웠던 브라운은 퀸스에 있는 정통 양복 제작자 로코 시카렐리(Rocco Ciccarelli)에게 작업을 의뢰해, 샘플 수트 다섯 벌을 제작했다. (시카렐리는 2015년에 은퇴할 때까지 브라운의 책임 재단사로 계속 함께 일했다). 2001년 35세가 된 브라운은 자신의 집에서 맞춤 정장 사업을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샘플 수트를 입고 돌아다니며 스스로 모델이 되기도 했는데, 친구들에게 자기가 만든 수트를 사라고 권했더니 “‘너한테도 잘 안 맞는 수트를 우리가 왜 사고 싶겠어?’라는 대답이 돌아오더군요”라며 그때 일을 떠올렸다.
한 평론가는 역사적으로 맞춤 남성복의 혁신은 아주 미미한 차이에서 일어난다고 말했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 캐주얼한 워크웨어가 급부상함에 따라 대부분의 남성이 수트를 구입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제 핵심은 남성이 수트를 사고 싶게끔 만드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디자이너들은 파격적인 아이디어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동명 브랜드의 라프 시몬스, 뒤이어 디올 옴므의 에디 슬리먼은 인디 로커나 반항아 느낌을 주는 날렵한 블랙 수트를 내놓았고, 당시 구찌에 몸담았던 톰 포드는 관능적인 색감의 하이 웨이스트 벨벳 수트를 선보였다. 브라운의 슬림한 디자인은 ‘회색 플란넬 양복을 입은 남자’로 대변되는 미국인의 평범함에 기대는 동시에 그 평범함을 무색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즉 ‘남성의 가슴골’을 한껏 드러낸, 장난기 가득하면서도 상당히 특이한 룩이었다. 패션계는 처음에는 브라운을 주류에서 벗어난 흥미로운 예술가로 보았다. “너무 작고, 너무 맞춤이며, 너무 특이했어요.” 영국의 베테랑 패션 평론가 팀 블랭크스(Tim Blanks)가 당시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때 누군가 이 브랜드가 훗날 5억 달러 가치의 사업으로 성장할 거라고 했다면, 전 아마 비웃었을 겁니다.”
브라운은 친구 소개로 레이 가와쿠보의 아방가르드 패션 하우스 꼼데가르송에서 일했던 브랜드 전략가 미키 히가사(Miki Higasa)를 만나면서 든든한 지원군을 얻게 된다. 디자이너가 반복과 꾸준함을 통해 자신의 난해한 아이디어를 대중에게 이해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봐온 히가사는 브라운을 설득해 2003년 리미티드 기성복 컬렉션을 제작하도록 했고, 브라운은 머지않아 미트패킹 디스트릭트에 있는 작은 상점 앞 공간에 사업장을 얻을 수 있었다. 히가사는 이곳으로 바이어들을 초대해 브라운의 디자인을 보여주었는데, 그중에는 당시 유행을 선도하던 파리 부티크 편집숍 콜레트의 설립자 사라 안델만(Sarah Andelman)도 있었다. 매장에 방문한 안델만은 브라운의 헤비 옥스퍼드 셔츠를 주문했고, 그 후 “계속 재주문을 넣어야 했다”고 밝혔다. 뒤이어 버그도프 굿맨 소속의 한 바이어는 브라운의 컬렉션을 매장에 입점시키기로 했다. 히가사는 당시 일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버그도프 굿맨은 톰 브라운을 패션 브랜드가 입점한 3층이 아니라, 테일러링 전문 층에 입점시키고자 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이건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브랜드가 아니에요’라고 그를 설득했죠.”
2005년 뉴욕에서 브라운의 첫 남성복 런웨이가 열린 뒤 데이비드 보위가 매장을 찾았다. 브라운은 “제가 그때 입은 수트를 그대로 사가고 싶다고 하셨어요”라며 당시를 떠올렸다. 보위는 그렇게 구매해간 수트를 라디오 시티 뮤직홀에서 열린 TV 중계 콘서트에서 입었고, 그때부터 브라운의 룩은 주류 문화에 스며들었다. 갭 매장 어딜 가나 찾아볼 수 있었던 하이 워터 팬츠와 제이크루의 슬림 컷 루들로 수트는 그에게 빚을 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나 윈투어는 멧 갈라의 공동 의장으로 볼튼과 가까이서 함께 일했고, 볼튼-브라운 커플과 좋은 친구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윈투어는 브라운이 디자인한 룩의 실루엣에 대해 “이제 브라운의 룩은 하나의 패션 용어로 당당히 자리 잡았어요. 그는 우리의 관점을 완벽하게 바꿔놓았죠”라고 말했다. 톰 브라운의 직원 한 명은 과거에 회색 스커트를 입고 걸어가는 브라운을 향해 공사장 인부들이 야유를 퍼부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제는 “와, 그 톰 브라운 수트 멋지군요!”라는 소리를 듣는다.
브라운의 홍보 담당자가 내게 꾸뛰르 쇼의 공식 초대장을 전해주었다. 초대장은 와사(Wasa) 크래커만큼 두꺼운 인쇄용지에 프린트되어 있었고, 작은 네모 칸에 “가지고 계신 회색 옷 중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와주십시오”라는 요청 사항이 적혀 있었다. (브라운은 타원형을 특히 좋아하며, Gray(회색)를 영국식으로 Grey라고 적는 것을 좋아한다.) 쇼 당일, 오페라 가르니에의 보자르(Beaux-Arts) 파사드 위 하늘은 얼룩덜룩 안개 낀 살굿빛이었다. 경찰관 총격 사건으로 일어난 시위 때문에 건물 주변에는 무장한 경비원들이 서 있었다. 나는 건물 뒷문에서 브라운의 홍보 책임자로 보통 J.Z.라고 불리는 조너선 자드진스키(Jonathon Zadrzynski)를 만났다. 톰 브라운 수트를 풀 장착한 빨간 머리의 마른 남성이었다. 이 무더운 여름날에 그런 복장을 하고 있으면 쪄 죽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익숙해져서 괜찮아요”라고 대답했다. 브라운은 화려한 크라운 몰딩에 은은한 조명이 비치는 선선한 리허설실에 있었다. 그는 두 명의 여직원이 의상실용 마네킹에 입힌 아이보리색 ‘가고일’ 가운을 마지막으로 손보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쇼 시작까지 앞으로 2시간이 남아 있었다. “오늘 회색 옷 입고 오셨대요!” 자드진스키가 내 옷을 가리키며 브라운에게 말했다. 칠판 같은 회색의 릭 오웬스 드레스였다. “그렇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브라운이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는 요트, 등대, 소라 껍데기, 해초 줄기 등 바다와 관련된 자수가 수놓인 거대한 사다리꼴 블랭킷 코트의 상태를 살피러 옆방으로 갔다. 그런데 행어 뒤에서 갑자기 영국계 미국인 주얼리 디자이너이자 전직 모델 사라 제인 와일드(Sarah-Jane Wilde)가 나타나 “정말 멋져요, 톰!”이라며 찬사를 전했다. 브라운의 절친으로 종종 함께 콜라보레이션을 진행하기도 하는 와일드는 블랙 커스텀 시어서커 톰 브라운 미니 드레스에 그와 매치되는 케이프를 걸친 모습이었다. 긴 까만 머리에 블랙과 골드로 메이크업한 눈 때문에 시크한 클레오파트라처럼 보였다. “전 오늘 그냥 응원하러 왔어요.” 와일드가 내게 말했다. “톰은 스스로 구축한 자기만의 세계에서 살아요. 저는 그걸 샴페인 버블이라 부르죠.” 그리고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저는 톰 브라운이 아닌 다른 브랜드 옷은 절대 입지 않아요. 그런 황홀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벗어날 이유가 없잖아요?”
쇼 시작할 시간이 임박했을 무렵, 헤어 & 메이크업 룸에서는 영국 출신의 메이크업 아티스트 이사마야 프렌치(Isamaya Ffrench)가 팀을 이끌고 모델들의 얼굴에 메이크업을 하느라 분주했다. 비지지의 1980년대 뉴 로맨틱 룩에서 영감을 받은 메이크업인지라 다양한 네온 컬러가 사용되었는데, 쇼에서 유일하게 튀는 색상이었다. 브로드웨이 공연 제작자이자 부동산 상속자로, 이번 쇼에서 또 다른 비둘기 역을 맡은 조던 로스(Jordan Roth)가 화장대 앞에 앉아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자신의 눈썹에 풀칠을 하는 동안 물을 홀짝이고 있었다. “톰이 제게 처음으로 보낸 디자인이 바로 이 모래시계 모양에 코드피스가 달린 섬세한 조각품이었어요. 그 옷의 극도로 남성적인 동시에 극도로 여성스러운 면이 순식간에 제 마음을 사로잡았죠.” 그가 한 팔을 연극적으로 휘저으며 말했다. “오늘 쇼가 이곳에서 열린다는 게 정말 절묘하다고 느껴요. 왜냐하면 톰은 오페라틱한 패션의 정점에 있는 사람이니까요.”
게스트들이 하나둘 도착하기 시작했다. 몇몇은 백스테이지로 들어왔다. <왕좌의 게임>에서 아리아 스타크 역을 맡았던 26세의 영국 배우 메이지 윌리엄스(Maisie Williams)는 아쿠아마린 컬러의 헥터 백을 진짜 개인 양 쓰다듬으며 나타났다. (브라운의 가장 인기 있는 아이템 중 하나인 헥터 백은 그가 키우는 ‘헥터’라는 이름의 여덟 살 난 닥스훈트 개를 본떠 만든 디자인으로, 가격은 최소 1,700달러다.) 웨지우드 도자기 같은 청색의 긴 플리츠 스커트에 프레임이 강조된 코르셋, 매치되는 넥타이로 마무리한 윌리엄스의 룩에서는 예전 귀부인들이 입었을 법한 승마복 느낌이 났다.
“코르셋이 마음에 들었어요.” 윌리엄스가 한 손을 코르셋 위에 올리며 말했다. “방금 엄청 큰 샌드위치를 먹은 게 전혀 티가 안 나잖아요.” 그간 성실히 쇼를 준비해온 브라운은 긴장하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쇼 시작할 시간이 가까워지자 신경이 곤두서는 듯 보였다. “당신 담당자가 누구죠?” 그가 대열에서 벗어나 서성이던 벌키한 실크 재킷을 입은 남자 모델에게 물었다. 그러고는 또 다른 모델이 착용한 라텍스 싸이하이 부츠가 발목까지 내려온 것을 보고 “이렇게 되면 안 돼요”라고 말했다. 와일드가 내 어깨에 손을 얹더니 조심스럽게 나를 출구 쪽으로 안내했다.
브라운이 유럽에서 쇼를 처음 선보인 것은 2009년 피렌체에서 열린 피티 이마지네 우오모(Pitti Immagine Uomo) 남성복 박람회에서였다. 군사학교 강당에서 열린 그의 프레젠테이션에서는 남성 모델 40명이 똑같은 회색 크롭트 팬츠와 카키색 트렌치 코트를 입고 검은색 서류 가방을 든 채 일렬종대로 걸어 나와 똑같이 생긴 40개의 미드센추리풍 책상 옆에 섰다. 맨 앞에 선 ‘상관’이 종을 치자 남성들은 일제히 자리에 앉아 빈티지 올리베티(Olivetti) 타자기를 타닥거리기 시작했다. 빌리 와일더(Billy Wilder)의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The Apartment)>의 오프닝 장면이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난 뒤, 남성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상관의 책상에 빨간 사과를 내려놓았다. 그 이미지는 미국식 남성성에 대한 브라운의 생각을 엿볼 수 있게 했다. 그는 남성을 소년으로 되돌려놓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을 몸에 꽉 맞는 정장 안에 구겨 넣음으로써 그들을 조롱한 것일까? 패션 평론가 캐시 호린(Cathy Horyn)은 브라운의 초기 런웨이 쇼에 대해 쓴 글에서 그를 ‘안티 랄프 로렌’이라 칭하며, 로렌이 보는 미국인의 삶이란 클래식 로드스터 자동차를 탄 개츠비 스타일의 신사들이나 반짝이는 요트를 탄 커플의 이미지처럼 확장적인 데 반해, 브라운의 관점은 “점점 축소하다 못해 내부에서 파괴될 정도로 쪼그라드는 문화”라고 표현했다.
브라운은 처음에는 관념적 디자인과 상업성 사이의 균형을 찾느라 힘들었다고 말한다. 패션계 웹사이트 ‘Business of Fashion’에 따르면, 최근 몇 년간 남성복 업계는 전례없는 호황을 경험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이 호황이 전체 패션계 매출의 30%에 불과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저명한 패션 하우스를 위해 일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고객층을 확충하려는 남성복 디자이너들이 여성복, 액세서리, 향수 혹은 이른바 라이프스타일 브랜드에서 다루는 기타 분야로 넘어가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브라운은 유서 깊은 헤리티지 레이블과의 협업을 통해 패션계의 주류에 굳건히 발을 들였다. 그는 2007년부터 5년간 브룩스 브라더스에서 ‘Black Fleece’라는 캡슐 컬렉션을 디자인했다. 이 컬렉션의 수트 가격은 약 2,500달러로, 브룩스 브라더스의 전통적인 수트 가격의 두 배 가까이 되는 것이었다(하지만 브라운 자신의 레이블에 있는 수트에 비하면 절반 가격이었다). 2009년 브라운은 스키복 전문 브랜드인 몽클레르를 위해 라펠이 달린 푸퍼 코트와 빨강·하양·파랑 비니를 선보인 컬렉션도 디자인했다. 하지만 2008년 금융 위기 여파로 브라운의 사업은 파산에 이를 뻔했고, 그는 재정적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더 전통적인 길을 가게 되었다. 그리고 2011년에는 일본 도매 의류업체의 투자를 받아 처음으로 여성복 라인을 론칭해 격자무늬 스커트로 구성된 수트와 그로그랭 띠가 트리밍된 작은 케이프 등을 선보였다. 이제 그의 회사는 전 세계에 100여 개 스토어를 보유한 기업으로 성장했다.
브라운은 유행을 싫어한다고 했지만, 그의 브랜드의 높아진 위상은 <가십걸>과 <매드맨> 같은 TV 쇼의 인기에 힘입어 다시 돌아온 프레피 룩 스타일의 유행과 절묘하게 맞물렸다. 2000년대부터 폴로 랄프 로렌과 라코스테는 호황을 맞기 시작했고, 제이크루 역시 디자이너 제나 라이언스(Jenna Lyons)의 리더십으로 부활했다(참고로 라이언스는 올해 켄터키 더비에서 톰 브라운을 입었다). 이런 브랜드처럼 톰 브라운 역시 발 빠르게 아이비리그 스타일의 디자인을 내놓았다. 처음에는 빈티지 바시티 스웨터의 느낌을 살려 많은 제품에 하얀 3선을 넣은 디자인을 선보였다. 하지만 2008년에 스포츠웨어 대기업인 아디다스가 그들의 3선 로고를 도용했다며 톰 브라운에게 사용 정지 명령을 보내자, 그다음부터는 하얀 선을 하나 더해 네 줄로 만들었다(이 문제는 그렇게 해결된 듯 보였지만, 브라운이 800달러 상당의 트레이닝 바지와 후드 티 라인을 론칭하면서 또다시 불거져 나왔다. 관련해서 2021년 아디다스가 저작권 침해 소송을 제기했다가 올 초 패소했다. 브라운은 재판에 참석할 때마다 법원에 반바지를 입고 와 뉴스에 나왔다).
오늘날 많은 부유층 고객이 콰이어트 럭셔리를 선호하는 추세다. 캐시미어 슬랙스에 수천 달러를 태웠다는 걸 티 나게 보여주는 브랜드를 입는 게 오히려 격이 떨어져 보인다는 관점이다. 톰 브라운은 로로 피아나, 브루넬로 쿠치넬리 같은 절제된 분위기의 브랜드만큼 가격대가 높지만, 비교적 남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편이다. 미디어 회사 ‘Puck’의 패션 에디터 로렌 셔먼(Lauren Sherman)에 따르면, 브라운의 시그니처 디자인은 수익성이 훨씬 높은 다른 브랜드 로고보다 더 잘 알아볼 수 있는 것이 되었다. “누가 톰 브라운을 입고 있으면 바로 알아볼 수 있죠.” 셔먼의 말이다. 한때 회색 정장은 궁극의 무개성을 상징하는 의상이었다. 하지만 브라운은 그것을 개성 강한 소비자의 인증 배지로 바꿔놓았다.
꾸뛰르 쇼에는 영리한 미끼와 반전이 숨어 있었다. 게스트들은 오페라 가르니에의 뒷문으로 들어가도록 안내되었고,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메인 오페라 하우스 무대로 하나둘 모이게 됐다. 이후 빨간 벨벳으로 된 무대 커튼이 내려졌다. 빨강·하양·파랑 그로그랭 띠를 두른 튤로 만든 커다란 회색 종이 천장 서까래에 달려 있었고, 펠트로 만든 비둘기들이 펠트로 덮인 바닥 여기저기에 놓여 있었다. 각 게스트석에는 전서구가 전달했을 법한 담배 정도 크기의 두루마리가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는 “내 손안에 있는 새가 수풀에 있는 두 마리 새보다 낫다”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앞줄에는 연회색의 톰 브라운 스리피스에 챙 넓은 중절모를 쓴 다이안 키튼이 앉아 있었고(후에 키튼은 이 쇼를 ‘놀라움으로 가득한 쇼’라고 언급하며 “아시잖아요, 제가 남성 정장 좋아하는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 옆는 Z세대 인플루언서 엠마 체임벌린(Emma Chamberlain)이 ‘편하지만은 않은 옷’이라고 밝힌 크림색의 톰 브라운 레이스 코르셋을 입고 서 있었다. 체임벌린은 쇼에 장식된 비둘기 인형을 가져가고 싶어서 혼났다고 고백했다. “제일 좋아하는 동물이 비둘기거든요.”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아, 쥐도요.”
멀지 않은 곳에 네이비색 톰 브라운 시스 드레스를 입은 아요 에데비리(Ayo Edebiri)가있었다. 에데비리는 28세의 여배우로, 인기 TV 시리즈 <The Bear>에 출연해 유명해졌다. <더 베어>의 제작자 크리스토퍼 스토러(Christopher Storer)는 브라운의 광팬으로, 지난 시즌에 셰프 역을 맡았던 에데비리에게 세상에 하나뿐인 톰 브라운 셰프 재킷을 선물했다. 에데비리는 브라운에게 세트장의 뜨거운 조명 밑에서도 그 재킷이 워낙 통기성이 좋아 시원했다는 말을 전했다. “그 얘기를 하니 재미있어하셨어요. ‘제가 딱히 기능성이 좋은 제품을 만들지는 않거든요’라고 하면서요.” 에데비리의 말이다(그 회차가 방영되고 난 뒤, 브라운에게 부엌용품 주문이 쇄도했다. 브라운은 유명 셰프 “장 조르주(Jean-Georges)가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려고요”라며 농담을 던졌다).
쇼는 5시 정각에 시작할 예정이었지만, 5시에서 20분이 지나서도 게스트들은 여전히 장내를 서성이고 있었다. 유니폼을 입은 여성이 “다들 카디 비(Cardi B)를 기다리고 있어요. 차가 막히나 봐요”라고 귀띔해주었다. 몇 분 뒤, 트위드 드레스에 족히 30cm는 될 법한 금빛 헤드 드레스를 쓴 카디 비가 리드미컬하게 걸어 들어왔다. 머지않아 실내조명이 어둑해졌다. 스피커에서 현악기로 연주된 서곡이 흘러나왔고, 우레 같은 박수 소리 사운드 효과가 뒤를 이었다. 앞쪽 커튼이 위로 걷히자 붉은 벨벳으로 된 2,000석의 오페라 하우스 의자와, 선글라스에 톰 브라운 수트를 입은 골판지 인형들이 그 좌석을 가득 메우고 있는 모습이 드러났다. 골판지 인형들의 무표정한 얼굴은 으스스하면서도 너무 재치 있었다. 객석을 가득 메우기에 종이 인형만 한 것이 어디 있겠나? 이를 본 (진짜) 관객들은 순간 놀라는 듯했지만, 곧 음악에 맞춰 박수를 쳤다. 후에 윈투어는 거의 10만 달러가 들어간 이 연출을 두고 “이번 파리 패션 위크에서 가장 이야깃거리가 많았던 순간 중 하나”라고 언급했다.
이어지는 30분의 쇼 타임 동안 50가지 이상의 룩이 런웨이를 활보했다. 맨 처음 알렉 웩이 기본적인 톰 브라운 수트와 헤드스카프를 착용하고 등장했다. 그러고는 무대 한가운데 놓인 짐 가방 위에 자리를 잡고 지나가는 모델들과 눈을 맞추며 쇼가 끝날 때까지 앉아 있었다. 쇼는 자기 회고적 성격을 띠었지만, 거기에 브라운다운 극단적 정교함이 더해졌다. 브라운이 주로 애용하는 격자무늬가 들어간 코트가 등장했는데, 프린트된 무늬가 아니라 다양한 색상의 실을 하나하나 작은 유리 비즈에 십자로 교차시켜 만든 무늬였다. 그가 흔히 사용하던 키치한 바다 테마는 더 과감하고 그로테스크한 영역으로 나아갔다. 스트라이프 블레이저에 수놓인 황금색 가재 집게는 모델을 바닷속으로 끌고 들어가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브라운은 머스터드, 라벤더, 에메랄드, 캔털루프 색상의 화려한 이브닝 재킷을 선보인 2022년 컬렉션에서처럼 이미 무채색 팔레트를 벗어난 적이 있지만, 이번 꾸뛰르 쇼에서는 회색 톤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모두 회색조 안에서의 미묘한 명도 차이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반짝이는 은회색 새틴 직물과 비슷한 색상의 매트한 태피터 직물을 함께 배치한 드레스나, 허리 부분은 차콜 색상이지만 아래로 갈수록 옅은 잿빛으로 연해지는 시퀸 옹브레 팬츠 또한 그런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 꾸뛰르 쇼의 마지막에는 디자이너가 독창적으로 해석한 웨딩드레스가 등장한다. 브라운은 슈퍼모델 그레이스 엘리자베스에게 신부 역을 맡겼다. 앞서 기차역으로 들어오는 기차를 상징하는 의상을 입었던 그 모델이다. 엘리자베스는 턱시도 재킷처럼 생긴 비치는 하얀 비즈 드레스를 입고 유유히 무대 중앙으로 걸어 들어왔는데, 옷자락이 바닥을 덮고도 남을 정도로 길었기에 수영모를 쓴 남성 모델 두 명이 드레스 자락을 들고 뒤따라 들어왔다. 멀리서 본 드레스는 곱게 간 얼음으로 만든 것처럼 은은히 반짝였다. 후에 브라운이 말해주길, 이 드레스는 팀원들이 3주간 매일 18시간씩 매달려 겨우 시간 내에 완성한 것이라고 한다. 엘리자베스는 한 손에 증기 기관차 모양을 본뜬 커다란 가죽 클러치를 들고 나왔다. 열차에 열차, 또 열차로 이어지는 반복 개그를 통해 이전의 무거운 분위기에 반전을 주려는 과감한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패션 평론가 에이미 파인 콜린스(Amy Fine Collins)는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톰의 쇼에는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는 순간들이 항상 있어요. 일반적으로는 패션쇼에서 웃을 일이 전무하잖아요.” (브라운은 웨딩드레스 속에 게 모양의 보석 장식이 달린 팬티를 입혔다고 설명하며, “일종의 언어유희죠”라는 말을 덧붙였다.)
디자이너 중에는 자신의 작품을 입은 사람을 아름답게 빛내주는 이들이 있다. 랑방에서 우아한 여성 드레이프 드레스를 디자인한 故 알버 엘바즈가 그랬다. 그는 “나는 사람들을 변신시키려고 하는 게 아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그들 자신의 더 나은 버전이 될 수 있도록 도우려는 것뿐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반면, 브라운은 모델들에게 말도 안 되게 높은 구두를 신게 하거나 무거운 울 의상을 입고 천천히 걸으라고 하는 등 고통스러운 요구를 하는 것으로 비판받아왔다. 심지어 모델들의 얼굴을 가리거나, 양손을 뒤로 묶인 채 걷게 하기도 했다. 브라운은 “저는 가끔 제 옷이 그 옷을 입은 사람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게 좋아요. 모델들을 존중하지 않아서가 아니에요. 그분들을 굉장히 존중합니다. 다만 제 아이디어가 확실히 잘 드러나 보이기를 바라는 거예요.” 쇼 다음 날 아침, 브라운은 개인 고객을 맞기 위해 몽테뉴가에 있는 자신의 쇼룸으로 돌아왔다. 많은 일이 분주하게 이뤄지는 아틀리에 위층과 달리, 쇼룸은 고요하고 차분한 분위기였다. 티크 책상 위에 놓인 톰 브라운 베티베르 향초의 깨끗한 향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게스트들을 맞아주었다. 디스플레이 섹션으로 들어서자 마네킹과 랙에 예술적으로 진열된 꾸뛰르 의상이 보였다. 한 직원이 다가오더니 정중히 내 가방을(회색이지만 톰 브라운 가방은 아니었다) 백룸에 보관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어떤 직원이 “멕시코에서 가장 큰 고객”이라고 부른 한 남성이 이번 가을 기성복 컬렉션 수트를 입고 쇼룸으로 걸어 들어왔다. <모비 딕>에서 영감을 받은 프린트가 새겨진 투알 소재 수트였다. 거기에는 미술 고문이자 뉴욕 사교계 명사 샤론 코플란 후로위츠(Sharon Coplan Hurowitz)도 승마 바지 차림으로 자리했다. 전날 밤 스티븐 존스의 기울어진 찻잔 모양 헤드피스를 아슬아슬하게 머리 위에 올리고 있었던 앙상블 차림이 조금 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느낌이 났다.
브라운의 고객 관리 매니저인 마리사 헌트(Marisa Hunt)가 크리스 수나하라(Chris Sunahara)와 함께 쇼룸에 도착했다. 자칭 ‘톰 브라운 광신도’라는 그는 30대의 구글 중역으로 턱시도 테일이 달린 회색 톰 브라운 수트를 입고 있었다. 수나하라는 자신이 체중을 대폭 감량한 후 브라운의 수트에 대해 알게 되었고, 새로운 스타일을 시도해보는 데서 자유로움을 느꼈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와, 너무 비싸니까 그냥 티셔츠나 한 장 사야겠다’고 했죠.” 그가 말했다. 하지만 톰 브라운 유니폼을 완벽하게 갖췄을 때의 그 완성된 느낌은 세일즈 전략으로도 충분한 역할을 했다. 어중간하게 몇 피스만 갖춰 입는 건 아예 안 입느니만 못하다는 것이다. “톰 브라운 구두도 사야 했고, 정장, 안경까지 완벽히 다 맞춰야 했어요. 그런 식으로 점점 빠져들게 돼요.” 그는 결국 1년도 채 안 돼 60피스 이상을 구매했다. “게이 남성으로서 멋지게 차려입는 걸 늘 꿈꿔왔지만, 저 같은 몸으로는 절대로 이런 옷을 입을 수 없을 거라고 지레짐작했어요.” 말을 이어가는 그의 목소리가 점점 떨렸다. “하지만 톰 브라운을 입으면 사람들의 관심이 한 몸에 쏟아져요. 길을 걸을 때 그런 에너지를 준다는 게 너무 좋아요.”
“정말 감동받았어요.” 헌트가 수나하라에게 샴페인이 담긴 쿠프 잔을 건네며 말했다. 수나하라는 브라운이 ‘인어 사시미 드레스’라고 묘사한 아이보리색 드레스로 다가갔다. 앞면에는 메탈 소재로 된 가슴 장식과 비늘 장식이 달려 있고, 뒷면에는 삐죽삐죽 금색 생선 가시가 장식된 드레스였다. 나중에 알게 된 그 드레스의 가격은 6만 달러였다. “세상에!” 수나하라가 손으로 드레스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브라운에게 드레스에 가슴 장식 대신 식스팩을 달아 남성용 버전으로도 만들어줄 수 있는지 물었다. “남자 인어처럼요” 하고 그가 말했다. 그는 그날 빈손으로 쇼룸을 떠났지만, 다음 날 다시 와서 맞춤 정장을 새로 한 벌 주문했다. 브라운은 저명한 패션 역사학자와 함께 살고 있으면서도 패션의 역사에는 크게 관심을 두고 있지 않으며, 그런 편이 오히려 더 좋다고 한다. 그는 컬렉션을 준비할 때 무드보드를 만드는 대신 대화를 통해 자신의 비전을 팀에 전달한다. “앤드류는 매우 지적인 관점으로 접근하는 편이에요. 저는 본능대로 가는 편이고요.” 그가 말했다. 브라운이 즐겨 사용하는 바닷가재 이미지에 대한 대화를 이어가던 중, 내가 엘사 스키아파렐리가 1937년에 선보인 바닷가재 디너 드레스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그 드레스에 대해 몰랐다면 얼마나 좋을까요”라고 말하며, 다른 디자이너들이 이미 작업한 것을 아는 게 너무도 치명적이라고 했다.
평론가들 가운데 브라운의 작업을 그의 인생과 결부해 분석하려던 사람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허벅지가 훤히 드러날 정도로 짧은 반바지를 퀴어 선언으로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식으로 디자인과 개인사를 연관 짓는 것을 거부한다. “동성애자 남성, 이성애자 남성, 동성애자 여성, 이성애자 여성 모두를 존중하고 사랑합니다.” 그는 정치적인 논의와도 거리를 두려 한다. 2013년 대통령 취임식 때 미셸 오바마의 옷을 디자인했지만, 2018년 멜라니아 트럼프를 위해서도 기꺼이 옷을 디자인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당시 물의를 빚은 이 발언에 대해 묻자 그는 “퍼스트레이디라는 지위 자체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한 말이었어요. 미국인으로서의 자부심, 국가에 대한 애국심에서 비롯된 생각이었죠.” 브라운의 과묵함은 미국 패션 신에서 점점 커져가는 공인으로서 그의 역할과 상충되어 보이기도 한다. 지난 1월 그는 톰 포드의 뒤를 이어 미국 디자이너 400명을 대변하는 미국 패션 디자이너 협회장을 맡았다. 그는 CFDA 협회장이 된 직후, 모든 디자이너의 노고를 마음으로 지지하지만 해당 시즌에 열리는 디자이너들의 쇼에 직접 참석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을 전했다. 기억에 남을 만한 인상 깊은 작업을 만드는 데 집중하느라 바쁠 예정이라며 말이다.
8월 어느 날 오후, 나는 브라운과 볼튼의 집을 방문했다. 상속녀 앤 해리먼 밴더빌트(Anne Harriman Vanderbilt)를 위해 1세기 전에 지은 조지아 양식의 저택이었다. 브라운이 현관에서 나를 맞아주는 동안, 반려견 헥터가 브라운의 발치에서 펄쩍펄쩍 뛰며 높은 소리로 짖어댔다. 자기 인스타그램 계정도 있는 데다 가끔 미니어처 톰 브라운 스웨터를 입기도 하는 헥터는 아마 칼 라거펠트의 고양이 슈페트 다음으로 패션계에서 가장 유명한 펫 뮤즈일 것이다. “얜 정말 귀요미예요.” 브라운이 헥터를 안아 올린 뒤턱을 긁어주며 말했다. 브라운과 볼튼의 인테리어 취향은 화려함과 절제미가 적절히 섞인 느낌이었다. 이들은 집을 리모델링하면서 기존의 밝은 파란색 정문을 검은색으로 칠했다고 한다. 현관에는 흑백 대리석의 체커보드 바닥 타일이 깔려 있었고, 어거스터스 세인트 고든스(Augustus Saint-Gaudens)의 대형 청동 큐피드 조각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둑한 조명의 식사 공간은 예수님 초상화와 네 개의 장식용 유골함 덕에 목사관 느낌이 났다. 우리는 이스트강까지 이어진 어마어마한 규모의 잔디밭이 한눈에 내다보이는 뒤뜰 테라스로 향했다. 이 각도에서 본 강은 이들이 소유한 개인 해변처럼 보였다. 홍보 담당자가 차갑게 냉장된 작은 페리에 탄산수 여러 병과 리츠 파리(Ritz Paris) 로고가 각인된 크리스털 고블릿을 가져다주었다.
영국 랭커셔 출신의 볼튼은 창백한 흰 피부에 볼륨감 있는 회색 머리칼, 각진 광대뼈가 돋보이는 단정한 외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흰색과 회색 줄무늬의 톰 브라운 티셔츠에 톰 브라운 스니커즈와 양말을 착용한 그의 옷차림은 어딘가 테니스를 치고 온 사람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는 브라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약간 겸연쩍은 표정으로 바지는 랄프 로렌 제품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제 옷의 90%는 톰 브라운 제품이에요.” 볼튼의 말에 브라운이 “뭐 어때, 난 그 바지 좋더라”라고 답했다. “전 정말로 앤드류의 스타일이 참 멋있다고 생각해요. 사무실에서도 앤드류 얘기가 종종 나와요. ‘앤드류라면 어떻게 입을까?’ 이런 식으로요.”
브라운과 볼튼이 맨 처음 만난 것은 2005년 열린 한 패션 관련 컨퍼런스에서였지만, 볼튼은 그 전부터 브라운의 옷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저는 런던에서 새빌 로의 테일러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그가 톰을 언급하며 분통을 터뜨리던 게 기억나요.” 볼튼의 말이다. “톰에 대해 맨 처음 들은 이야기는 그가 테일러링을 깎아내리고 있다는 거였어요. 하지만 전 그 말이 동성애 혐오적인 발언이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당시 톰이 디자인한 수트를 입은 패셔너블한 게이 남성들을 두고 한 말이었으니까요. 어쩌면 지금도 그럴지도 모르죠.”
브라운과 마찬가지로 볼튼 역시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고, 패션 관련 교육을 받지 않았다. 이스트 앵글리아(East Anglia) 대학에서 인류학을 공부한 그는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 동아시아 예술관의 큐레이터로 활동한 후, 20년 전부터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일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볼튼과 브라운을 미국 패션계를 호령하는 파워 커플로 묘사했는데, 그 둘의 위치가 서로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볼튼이 기획한 메트로폴리탄 의상 연구소의 2021년 전시 <미국: 패션의 어휘(In America: A Lexicon of Fashion)>에서 전 국민적 스타일을 정립한 룩의 전당에 톰 브라운 수트가 두 점이나 들어갔으니 말이다. 하지만 정작 이들은 여전히 스스로를 패션계 아웃사이더로 보고 있으며,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 역시 ‘대부분이 패션과 무관한사람들’이라고 했다. 이들은 매년 멧 갈라에 참석하지만, 집에 누구를 초대하고 싶으냐는 물음에 볼튼은 작은 소리로 웃으며 “아무도 없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윈투어가 처음 이들의 집에 왔을 때, “뭐 하러 이렇게 으리으리한 집을 샀어요? 집에 아무도 초대 안 하잖아요. 결국 이 넓은 집에서 당신하고 톰만 썰렁하게 지낼 거잖아요”라고 했다는 기억을 떠올렸다. 둘은 쉬는 날에는 음식을 배달시켜 먹고 고전 영화를 보면서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둘 다 요리하는 걸 싫어한다).
많은 비평가들이 최근 미국 패션계의 상황을 비관적으로 보는 분위기다. 한때 뉴욕은 세계 패션의 중심지였다. 특히 마크 제이콥스, 도나 카란, 오스카 드 라 렌타, 캘빈 클라인 등이 모두 맨해튼에서 쇼를 선보였던 1980년대와 1990년대는 뉴욕 패션의 황금기였다. 하지만 이후 패션계의 중심은 유럽으로 넘어갔다. 뉴욕에서 절제된 럭셔리 브랜드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더 로우는 최근 제조 기반을 이탈리아로 이전했다. 올해 패션계에서 아마도 가장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쇼인 미국 뮤지션 퍼렐 윌리엄스의 루이 비통 남성복 컬렉션 데뷔 쇼 또한 파리 퐁네프에서 열렸다. 패션 평론가 팀 블랭크스는 미국의 패션 생태계가 “크게 한풀 꺾였다”고 말하며, “톰이 처음 미국 패션계에 등장했을 때는 업계 전반에 역동적인 힘이 느껴졌어요. 하지만 이제 그런 걸 느껴본 지 꽤 됐죠”라는 말을 남겼다.
브라운은 미국 패션 디자이너 협회장으로서 자신의 목표는 젊은 미국인 디자이너들로 하여금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유행이나 소셜 미디어의 흐름을 따르기보다 지속성을 염두에 두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저부터가 모범이 되는 것이겠죠”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사업을 어떻게 유지해야 할지 전혀 몰랐어요. 하지만 차츰 알아갔죠. 이런 면에서는 스스로 길을 찾아갈 수밖에 없어요.” 이들은 곧 발간될 브라운의 도록을 보여주었다. 편집은 볼튼이 맡았다. 그는 1년 동안 브라운의 아카이브에 있는 수없이 많은 룩을 참고해 회색의 역사에 대한 입문서를 썼다. “전부 다 앤드류가 고른 거예요.” 브라운이 말했다. “한번은 그러더라고요. 디자이너들은 자기 작업을 엄선해 보여주는 일에는 정말 형편없다고.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줄곧 그의 발치에서 졸고 있던 헥터를 일으켜 세웠다. “나가서 좀 짖고 올까, 헥키?” 브라운이 뒷문 쪽으로 가면서 말했다. “얘가 워낙 훈련이 안 돼 있어서요.” 그러자 “근데 정말 정이 많은 개예요”라고 볼튼이 말했다. “길에서 회색 정장을 입은 남자를 보면 그쪽으로 달려간다니까요.” (VK)
- 사진
- Maurizio Cattelan, Pierpaolo Ferrari
- 글
- Rachel Sy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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