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바토 데 사르노의 구찌, 무엇이 다른가?
무대 뒤에서 등장한 사바토 데 사르노가 구찌를 새로운 시대로 이끈다.
사바토 데 사르노(Sabato De Sarno)는 집에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도 초대하지 않아요.”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데 사르노가 졸고 있는 대플 닥스훈트 루체(Luce)를 마주 보고 거실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동료를 저녁 식사에 초대하는 일도 없고, 남편은 브뤼셀에 살고 있으며, 심지어 부모님도 자고 갈 수 없다. “제 공간이에요. 제가 쉬는 곳이죠.” 올해 40세지만 머리와 수염을 짧게 자른 동안의 데 사르노가 빈티지 쥬라기 공원 스웨트셔츠의 끈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일과 철저히 분리된 공간입니다.”
로마 르네상스 지구의 구불구불한 거리에 있는 아파트 벽에는 석판화 위에 글씨를 휘갈기는 그리스 아티스트 야니스 쿠넬리스(Jannis Kounellis)와 바느질한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리는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시디발 필라(Sidival Fila)의 작품이 걸려 있다. 작가이자 영화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Pier Paolo Pasolini)를 포함한 이탈리아 아이콘의 프린트도 있다. (데 사르노는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해당 포스터의 사진 촬영을 담당한 파올로 디 파올로(Paolo Di Paolo)의 전시를 연 뒤, 작품의 가치가 치솟았다고 자랑했다.) 격자무늬 천장 아래, 미니멀한 가구 위에는 다산을 상징하는 사르데냐의 조각품이 있다. 그중 하나는 짙은 보르도 컬러로, 그가 구찌의 가방과 신발, 옷에 새롭게 입힌 색이다. 그는 이 컬러와 지난 9월 첫선을 보인 런웨이 컬렉션에 ‘다시’라는 뜻의 ‘안코라(Ancora)’라는 이름을 붙였다. 만족할 줄 모른다는 의미에서 ‘좋아하는 사람과 키스할 때 멈추고 싶지 않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또 그것이 구찌의 야망이라고 했다. 바로 열정을 불어넣는 것. “사람들 마음에 구찌가 와닿으면 좋겠어요.”
루체에게 장난감을 던져주는 데 사르노 뒤로 지난 14년간 몸담았던 패션 하우스 발렌티노의 모노그램이 걸려 있다. 패션 기업 케어링은 2023년 1월 발렌티노에 몸담고 있던 그를 발탁해 자사의 주력 브랜드 구찌를 맡겼다. 한편 소파 뒤로는 2월 런웨이 쇼를 위한 아이디어가 가득한 스튜디오 문이 굳게 닫혀 있다. 옷장에는 진행 중인 작품과 구찌의 디자인 작업을 밀라노로 이전하는 이유로 포장하고 있는 상자가 가득하다. 복도에는 톰 포드의 작품을 비롯한 패션∙예술 서적이 늘어선 가운데 그의 고향 나폴리에서 만든 세라믹 손 두 개가 있다. 동생이 선물한 것으로 한 손은 뿔 사인을, 다른 한 손은 가운뎃손가락을 들고 있다. “동생은 제가 일을 안 한다고 말해요.” 데 사르노가 살짝 웃음 지었다.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죠.” 그에게는 가족이 제일 중요하다. 이틀 전에는 부모님과 동생이 수십 년간 살고 있는 북부 도시 코모에서 가족을 만났다. 참치 페스토와 오징어를 먹으며 지난 11월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에서 열린 구찌 갈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어머니는 제니퍼 로페즈와 벤 애플렉을 포함해 아들이 옷을 입힌 셀러브리티에 대해 궁금해했고, 데 사르노는 커스틴 던스트와 어떻게 통했는지, 유명인에게 유명인 대우를 받는 것이 얼마나 이상했는지 이야기해주었다. “저도 처음으로 셀러브리티였어요.” 킴 카다시안이 자기를 만나러 오고, 브래드 피트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소개받은 일을 신기한 듯 이야기했다. “전 <타이타닉>을 열다섯 번이나 봤다고요.”
4년 전 결혼한 남편 다니엘레 칼리스티(Daniele Calisti)가 갈라에 함께했다. 데 사르노는 브뤼셀에 있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에서 변호사로 일하는 칼리스티와 2012년 시칠리아섬 스트롬볼리의 검은 모래사장에서 만났다. 댄스 플로어에서 그들이 나눈 첫 키스는 예술 작품으로 가득한 데 사르노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기록되어 있지만, 집에는 남편 사진이 없다. 유일한 가족사진은 어린 시절에 찍은 것뿐이다. “이게 저예요.” 현관에서 빨간 바지와 모크넥 스웨터를 입고 보조 바퀴가 달린 미니 베스파에 앉아 있는 금발의 곱슬머리 아이를 가리켰다. 더 부끄러운 사진도 있다고 했는데, 보여달라고 하자 거절했다. “선을 넘지는 말자고요.” 그가 웃으며 말했다.
지난 10년 동안 구찌는 맥시멀리즘을 브랜드의 정신이자 사업 계획으로 삼았다. 본인의 외모와 스타일처럼 패션∙연예 산업의 선지자가 된 맥시멀리스트 미켈레의 한계를 시험하는 비전 아래 구찌의 매출은 훌쩍 뛰어 연간 100억 유로에 달했다. 하지만 패션계 각계각층을 위해 런웨이를 넓힌 미켈레는 연 150억 유로까지 매출을 늘리기 위해 디자인 방향을 바꿔 젊은 패션 마니아층을 넘어 더 부유하고 다양한 고객층을 공략하려는 케어링의 전략에 반대했다. 2022년 11월 미켈레는 구찌를 떠났고, 케어링은 이전에 미켈레와 포드가 그랬던 것처럼 브랜드를 혁신할 디자이너, 브랜드의 헤리티지를 더 가까이하고 실제로 구찌를 사 입을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 어필할 디자이너를 찾았다.
“단절이 아니라 진화를 원했습니다.” 케어링 회장이자 CEO 프랑수아 앙리 피노가 말했다. 그러고는 “브랜드의 잠재력을 실현하려면 너무 많이 노출되는 것을 삼가고, 유쾌함을 유지하며, 섹시함을 강화해 지금까지 시도한 적 없는 전략인 더 광범위한 명품 소비자층을 공략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피노는 발렌티노 남성복 및 여성복 패션 디렉터였던 데 사르노를 택했다. 구찌에서 데 사르노의 임무는 유서 깊은 브랜드를 자신과 닮도록 만드는 것이다. 도시적이고 현대적이며, 시크하면서 은근한 관능미를 자아내도록 말이다.
데 사르노의 첫 쇼는 지난 9월 밀라노에서 열렸다. GG 로고 벨트를 더한 짧은 반바지와 타이트한 화이트 탱크 톱에 그레이 울 오버 코트 룩이 쇼의 포문을 열었다. 구찌 고유의 레드와 그린이 비치는 코트의 벤트와 청키한 골드 네크리스에서도 색감이 드러났지만, 진정한 맛은 어깨에 걸친 재키 백과 플랫폼 홀스빗 로퍼의 ‘안코라 레드’라고 부르는 크림슨 컬러에서 나왔다. 로퍼는 데 사르노가 밀라노의 패션 학도로서 처음 하이패션에 빠져들던 당시의 구찌 로퍼를 연상시켰다. (데 사르노의 구찌가 유행하면 올해 사람들은 키가 훨씬 커 보일 것이다.) 컬러는 대부분 차분했다. 블랙∙블루∙화이트∙핑크 레이스 란제리 드레스에 베이지 오버 코트. 셔츠와 브라에 수놓은 크리스털과 반짝이는 프린지가 달린 힐도 등장했지만, 늘 그렇듯 노골적인 자기표현이 아니라 세련된 포인트 역할을 하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은 제 패션을 조용한 럭셔리라고 표현하는데, 전 그 반대라고 봐요.” 데 사르노가 말했다. “제 오버 코트는 큐레이팅의 결과물이에요. 테스트를 거쳐 착용감을 개선했죠.” 더 둥근 실루엣을 위해 원단 공급업체와 직조, 날실, 실의 두께까지 연구했다. “결국 보이는 건 그레이 코트지만, 그냥 그레이 코트가 아닌 거예요.” 전임자를 염두에 둔 듯, 그는 또 다른 세계를 위한 코스튬 의상을 만드는 대신 출근하고 데이트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입을 만한 옷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들이 가장 스마트하고 섹시하며 이탈리아적인 구찌 의상을 입길 바란다. “제 쇼에 온 사람들이 감탄만 하다가 다음 날이면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데 사르노가 말했다. 그는 사람들이 디자인과 품질, 숨은 디테일을 알아보고 고대하다가 4개월 후 매장에 출시되었을 때 직접 사 입길 기대한다.
정오가 다 되어가는 시간, 보통 9시까지 출근하는 데 사르노는 사무실에 가야 한다. 블랙 구찌 오버 코트를 입고 ‘My 1st LACMA’라는 메탈 태그가 달린 블랙 구찌 레더 백을 들었다. 흰색 구찌 스니커즈 텅처럼 루체의 목줄도 그린과 레드 스트라이프다. 안코라 쇼를 기념해 그의 팀이 선물한 것이다. “저보다 루체가 구찌를 더 좋아해요.” 루체에게 영감을 받아 닥스훈트처럼 길쭉한 모양의 클러치 ‘바소토’를 만들었다고 알려줬다. 데 사르노는 파르네세 광장에서 ‘하나가 아닌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이 있는’ 펠리니 스타일의 장소처럼 자기가 가는 곳과 ‘모두가 가기 때문에 가지 않는’ 와인 바같이 가지 않는 곳을 알려줬다. 판테온과 관광객으로 붐비는 거리를 피해 가며 로마의 중심에서 장인들이 없어진 것을 안타까워했다. 데 사르노는 그들과 함께 사라진 장인 정신, 훌륭한 취향, 뛰어난 품질 같은 이탈리아 전통을 구찌에 다시 불어넣고자 한다. “이탈리아다움이란 바로 노하우예요. 프랑스 브랜드 모두 이탈리아에서 생산해요. 그걸로 말 다 했죠. 디올, 샤넬 제품 역시 우리 이탈리아 사람들이 만들어요. 실제 제품을 만들어내는 사람은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 이모, 삼촌, 친척들이죠.” 데 사르노가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세계에 속한 이탈리아인’이라는 느낌을 주고 싶다. “전 이탈리아 사람이지만 ‘돌체 비타’와는 거리가 멀어요. 브뤼셀에 가고 뉴욕에 가죠. 하지만 이탈리아 사람으로서 가는 거예요. 저에게 이탈리아다움이란 우리의 특성을 세상에 내놓는 거예요.” 그에게 구찌의 옷과 매장은 이탈리아의 문화유산을 알리는 사절단이다. 거리에서 데 사르노는 쓰레기와 깨진 유리를 피해 걸었다. 로마는 그가 사랑에 빠진 적이 한 번도 없는 도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밀라노와 비교해 로마는 전혀 자유로운 도시가 아니다.) 코르소 거리에서 “루체, 가자” 하고 목줄을 살짝 당기며 구찌 본사로 들어갔다. 적어도 지금은 그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곳이다.
2023년 1월까지만 해도 패션계 일부 관계자 외에 데 사르노의 이름을 들어본 사람은 별로 없었다. 미켈레가 구찌를 떠났을 때, 후임자 후보 리스트에는 구찌의 스튜디오 디자인 디렉터 레모 마코(Remo Macco)와 구찌의 오랜 디자이너 다비데 렌네(Davide Renne)도 있었다. 하지만 내부 후보들은 충분히 노련하지 못해 외부로 눈을 돌렸다고 피노가 말했다. 내부 사람을 승진시키는 구찌의 오랜 전통을 깨는 것이었지만 숨은 인재를 찾는 케어링의 관행은 그대로였다. 바로 여기서 데 사르노가 등장했다. “거인은 구찌예요. 전 그저 사바토고요.” 위엄 있는 사무실의 프레스코화 아래에서 점심으로 리조토를 먹으며 데 사르노가 말했다. “저는 가수나 배우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된 경우가 아니에요. 20년 동안 디자이너로 일했어요. 옷을 만지고 바꾸고 만들어냈죠. 전 이 일을 할 줄 알기 때문에 뽑힌 거예요. 사람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건 또 다른 이야기지만, 전 분명 이 일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에요.”
피노는 LACMA 갈라에서 직접 느낄 수 있었던 데 사르노의 에너지뿐 아니라 성숙함과 인내심에도 놀랐다. 모든 것을 한 번에 하려 하기보다는 느리지만 확실하게, 계속된 컬렉션을 통해 자신의 작업을 쌓아가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구찌 같은 메이저 브랜드의 시장 조사와 광고 예산에도 불구하고 패션계의 성공 여부는 과학이 아니라 마술이다. 2014년 미켈레가 자신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에 앉혀달라고 요청했을 때, 피노는 그가 누군지도 몰랐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여긴 미켈레의 첫 쇼는 매우 성공적이었고 수익성 좋은 여정을 향한 특이한 시작이었다. 데 사르노가 고급스러움, 세련됨, 섹시함, 웨어러블함 등 케어링의 모든 요구를 충족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피노는 여전히 확신하는 태도다. “모든 것이 적절한 순간에 완벽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서두르지 않고 있어요.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아직까지는 순조롭습니다.”
세 형제 중 첫째인 데 사르노는 나폴리 북동쪽 작은 마을 치차노에서 부모님, 삼촌 가족, 조부모님과 함께 3층 집에서 자랐다. 여섯 자매와 함께 자수를 배우던 어머니는 열일곱 살에 그를 낳았고, 데 사르노가 이름을 물려받은 할아버지의 뒤를 따라 아버지는 건설업에 종사했다. 데 사르노는 ‘토요일’이라는 뜻의 이름 때문에 “동생 이름은 수요일이랑 목요일이야?” 같은 놀림을 받았고, 자라면서 발견한 성 정체성에 대한 조롱을 견뎌야 했다. 주변 사람들과 말하기 싫을 때는 지퍼로 닫힌 입 등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이모지가 생기기 전의 이모지인 셈이다. “어린 시절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청소년기에는 가장 추악한 곳이었어요.” 데 사르노가 치차노에 대해 말했다. 열세 살 무렵, 그는 지아니 베르사체를 롤모델로 삼기 시작했다. “베르사체는 제가 자라면 되고 싶은 사람의 상징이었어요. 게이였고, 가족에 대한 애착이 강했으며, 남부 이탈리아 출신으로 밀라노에 살았죠.”
고등학교 시절 자신을 받아들이고 자신감을 갖게 된 데 사르노는 학생들에게 성 정체성에 관해 이야기한 윤리 교사의 복귀를 요구하는 시위를 성공적으로 주도했다. 시내에서 파티를 열었고, 열다섯 살부터는 한껏 차려입고 중심가를 돌아다녔다. 사람들이 무엇을 입었는지,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살펴보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흥미로운 선택을 하기도 했는데, 한창 고스에 빠졌을 때 타이트한 바지와 살구색 실크 셔츠를 입고 검은 손톱에 에반에센스(Evanescence)의 노래를 들었다. 그 시기가 지나고선 패션을 좋아하는 아름다운 사람들과 어울렸다. 고등학생 때 로마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는 톰 포드의 레드 벨벳 재킷을 손에 넣었다. 아무도 그 재킷이 구찌인지 몰랐지만, 그는 “제가 알고 있었으니까요”라고 말했다.
데 사르노는 밀라노에 있는 패션 스쿨 이스티투토 세콜리(Istituto Secoli)에 진학했다. 다른 학교보다 ‘구체적인 것’을 가르치고 학비도 저렴했기 때문이다. 여름방학에는 서빙, 데이터 입력, 디젤(Diesel) 세일즈 등 다양한 일을 했다. 디자인 수업에서 만난 밀라노 출신 넬 라트나이아케(Nel Ratnayake)와는 금세 친구가 되었다. 항상 그들이 할 수 없는 것만 말하는 선생님 흉내를 내며 장난을 쳤지만, 데 사르노는 할 줄 아는 게 많았다. 2002년 기말고사로 줄무늬로 절개된 스커트를 만들었는데, 가만히 있을 때는 검은색이지만 움직이면 친구들에게 받은 일곱 가지 색 천이 드러났다. 그는 이 작품으로 황금바늘상을 받았다. 그 순간, 데 사르노에게 꿈이 그저 꿈이 아닌 현실이 되기 시작했다. 이 스커트는 프라다 스카우터의 눈에 띄었고, 곧 데 사르노는 프라다의 마스터 코트 메이커 델리아 코치아(Delia Coccia)의 멘토링 아래 패턴 작업을 시작했다. 라트나이아케가 뒤따라 프라다에 들어온 뒤, 둘은 구찌 쇼장 밖에서 몇 시간을 기다리기도 하고, ATM 바(ATM Bar)에서 아페리티프를 마시는가 하면, 클럽 플라스틱(Club Plastic)에서 파티를 즐기며 젊음을 만끽했다. 다른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하고, 실연당한 서로를 위로하기도 했으며, 이탈리아 러브 송을 목청껏 부르며 자전거를 타고 밀라노의 밤을 달렸다. “밀라노는 디즈니랜드 같았어요.” 데 사르노가 말했다. 작은 마을에서는 그가 지닌 열정이 그를 특이한 사람으로 만들었고, 사람들은 그의 옷차림을 이상하게 봤다. 밀라노에서 데 사르노는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었고, 입고 싶은 옷을 입을 수 있었다.
하지만 프라다에서는 디자인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프라다를 떠나 곧 돌체앤가바나에 들어가 니트웨어 작업을 시작했다. 발렌티노 디자인 팀으로부터 합류 제안을 받을 즈음 겪은 연인과의 이별은 그가 밀라노를 떠나게끔 부추겼다. 데 사르노는 황금바늘상을 전 연인의 집에 두고 26세에 로마로 떠났다. 당시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와 함께 발렌티노를 이끌던 피엘파올로 피촐리는 데 사르노의 총명함과 ‘가벼움’을 높이 샀다. 데 사르노는 실패에 굴하지 않았고, 회의 중 서먹한 분위기가 이어질 때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그라치아 키우리가 디올로 떠나며 단독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된 피촐리는 데 사르노의 멘토이자 친구 역할을 자처했다. 둘은 모두 패션 중심지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고 자랐다. 그리고 피촐리는 그런 데 사르노에게서 ‘아웃사이더’만이 가질 수 있는 강한 열망을 느꼈다. “그는 서서히 제 오른팔이 됐어요.” 시디발 필라의 작품이 걸린 근사한 사무실에 앉아 피촐리가 말했다. 근처에 위치한 구찌 사무실에서 데 사르노와 함께 점심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직후였다. 피촐리는 그가 안코라 쇼에서 자신의 비전을 실현하는 것을 보고 기뻤다. 화려하고 과장된 미켈레의 구찌와 확실히 선을 그은 쇼였다. 새로운 구찌는 기교를 부리지 않았지만 진부하지 않았으며, 그에게는 미니멀리즘이 파괴적 요소로 느껴졌다.
데 사르노의 왕좌 등극은 갑작스럽고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2022년 말 어느 금요일, 로마에서 동쪽으로 몇 시간 떨어진 아만돌라에 있는 별장으로 가는 길에 그는 남편에게 일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그때 케어링 관계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곧 면접 절차에 들어갔지만, 어느 자리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11월 말, 미켈레가 구찌를 떠난다는 소식이 발표되었고, 데 사르노는 늦잠을 자다가 구찌에 관심이 있는지 묻는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 수십 통을 받았다. 피노는 고된 면접 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실루엣 스케치를 포함한 대규모 프로젝트도 진행해야 했다. 데 사르노와 피노는 시간이 8일밖에 없었다고 했지만, 데 사르노는 “크리스마스와 새해 사이 4일뿐”이었다고 정정했다. 최종 후보 두 명이 파리에서 피노를 만났다. “엄청 떨었어요.” 데 사르노가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뛴다고 말했다. 둘은 데 사르노가 좋아하는 책과 영화, 루치오 폰타나(Lucio Fontana)의 작품, 집 인테리어 등에 대해 몇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데 사르노로 결정되었을 때, 그는 발렌티노 사무실에서 상사이자 멘토인 피촐리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가까이서 일해왔고 서로의 가족을 알고 지내는 두 친구는 감정이 벅차올랐다. “시상식장에 있는 것처럼 굴지는 않았어요.” 피촐리가 웃으며 말했지만, 둘은 데 사르노의 쾌거에 감동했다. “함께 걸어왔고, 방식은 다르지만 앞으로도 함께 나아갈 두 사람이 공유한 순간이었어요.” 데 사르노는 알레산드로 미켈레에게도 감사 메시지를 남겼다. 그가 만든 구찌의 이미지와 가치에 크게 공감했기 때문이다. 40세 생일을 맞아 치차노에 갔을 때, 그를 마을의 자랑이라고 쓴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무대 뒤에서 경력을 쌓은 데 사르노는 전면에 나서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 일인지 금방 깨달았다. 구찌에서는 아무도 그의 사무실에 들르지 않았고, 심지어 그가 있는 층을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데 사르노는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테베레강에서 경비원을 포함한 모든 직원을 초대해 파티를 열었다. 그는 VIP 구역에만 머물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댄스 플로어에서 보냈다. “다른 사람들보다 제가 더 땀을 많이 흘리고 더 취했어요.” 직원들도 기분 좋게 놀랐다고 덧붙였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에너지가 똑같아요.” 버버리, 빅토리아 베컴, 판가이아에서 일하며 지금도 데 사르노의 가장 친한 친구로 남아 있는 라트나이아케가 말했다. “생기 넘치고 순수해요. 평생 꺼지지 않을 불씨죠.”
데 사르노는 곧 자신의 팀을 꾸리기 시작했다. 뉴욕에서는 사진가 타이렐 햄프턴(Tyrell Hampton)과 친분을 쌓았다. 그는 햄프턴이 친구와 셀러브리티를 친밀하고 꾸밈없이 촬영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그에게 “새로운 구찌는 자유롭고 즐거울 거야”라고 말했다. 9월 안코라 쇼 애프터 파티에서는 리한나와 노래를 부르고 폴 메스칼, 줄리아 가너와 춤을 췄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데 사르노는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구찌의 젊음에 매료되어 자라온 글로벌 앰배서더 뉴진스 하니는 구찌의 새로운 방향에 감탄했다. “톤 다운된 스타일이 마음에 들어요. 기존보다 훨씬 더 세련되고 심플해졌어요.”
백스테이지에서 하니는 데 사르노가 셀러브리티와 사진을 찍다가 자리를 떠 가족과 인사하는 모습을 봤다. “모두 그를 껴안고 축하해줬어요.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있다니, 정말 보기 좋더라고요.” 구찌를 맡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데 사르노는 아버지가 동네 카페에서 아들 자랑을 늘어놓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들이 하는 일에 관심도 없고 로마에서 열린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도 탐탁지 않아 하던 아버지였다. “당신 아버지는 오직 당신 얘기만 한다”고 바리스타가 알려주었다.
구찌에서 오랫동안 일한 렌네가 모스키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부임한 지 불과 며칠 만에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후, 데 사르노에게 구찌의 밀라노 이전은 더 중요해졌다. (지난 11월 브뤼셀 공항에서 렌네의 장례식에 루체와 함께 참석한 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가혹하군요. 일로만 그를 알았던 게 아니고 개인적으로도 알고 지낸 사이였어요.” 렌네의 죽음을 계기로 데 사르노는 삶의 우선순위를 되돌아보았다. 브뤼셀에서 비행기로 1시간 반, 가족이 있는 코모에서 차로 30분 떨어진 밀라노로 이사하는 것은 ‘리셋’하기 위함이다. 주말에는 지금과 같이 밀라노나 브뤼셀 또는 아만돌라에서 남편을 만나겠지만 그는 모두와 더 가까이 살고 싶어 하고, 가정을 꾸릴 생각도 있다. 대리모에 대한 이탈리아 강경 우파 정부의 반대를 피해 다른 나라로 이주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는 아이를 원한다.
이제 데 사르노는 구찌 제국의 가장이 되었다. 지난 11월 초 구찌의 널찍한 원형 홀에서 그는 스튜디오 디자인 디렉터 마코와 로마 신의 모자이크 앞에 앉아 있었다. 플랫폼 로퍼, 레드 마이크로 미니스커트, 블랙 스코츠, 트리밍 재킷을 입고 걷는 모델들을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프리폴 컬렉션을 준비 중이다. “Super nice.” 데 사르노는 무언가 마음에 쏙 들 때 영어로 말한다. 인조 모피 코트에 자기가 꿰맨 크리스털 프린지가 검은색 카펫에 떨어지자 “참 사바토답네”라며 자조적으로 농담을 했다. 반짝이는 프린지 옆 테이블에는 지갑, 목걸이, 벨트, 선글라스와 형형색색의 핑크∙옐로∙그린∙오렌지 슈즈가 줄지어 놓여 있다. 새 앨리게이터 백의 핸들은 금으로 만든 것으로, 자신의 밀라노 집만큼이나 비쌀 것이라고 했다.
방 반대편에는 빛나는 우박을 맞은 듯 스키 스웨터에서 반짝거리는 자수가 흘러내리고, 데 사르노는 맞물린 블루 GG 모노그램 패브릭 패치를 재킷의 블랙 깃에 꿰맸다. (‘사진’이라고 말하면 승인됐다는 뜻이다.) 다른 재킷에는 양단 라임 그린 프린트를 걸치고, 태슬이 반짝이는 신발을 고르고는 “멋져”라고 말했다. 어떤 의상은 ‘조금 더 부르주아적’으로, 또 다른 의상은 더 ‘숙녀’답게 수정되었다. 데 사르노는 메르쿠리우스 모자이크 얼굴 위에 무릎을 꿇고 모델이 신은 갈색 샌들 끈을 묶었다. “이게 좀 더 섹시한 것 같아요.” 그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머리 뒤로 두 손을 깍지 끼며 말했다. “이 일만 하고 싶군요.” (VK)
- 사진
- Anton Corbijn
- 글
- Jason Horowi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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