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디 가문의 조용한 혁명, ‘이 카살리 델 피노’ 농장
펜디 가문의 유기농 농장 ‘이 카살리 델 피노’는 자연의 리듬을 패션 신에 불어넣는 일라리아 벤투리니 펜디의 실천적 공간이다.

로마 북부 외곽을 지나고 있다. 도심을 벗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도시의 혼란이 아주 멀게만 느껴진다. ‘이 카살리 델 피노(I Casali del Pino)’에 가까워지자 푸른 하늘을 찌를 듯 솟은 장엄한 해송이 우리를 맞이한다. 비포장도로를 따라 길게 늘어선 소나무가 장관을 이룬다. 언덕과 들판에는 양 떼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크레메라(Cremera) 하천이 계곡으로 이어지고 다양한 생물이 서식하는 습지와 언덕의 땅 174만㎡(약 52만7,000평)에 일라리아 벤투리니 펜디(Ilaria Venturini Fendi)가 유기농 농장을 세웠다. 그야말로 그녀가 꿈꾸던 작은 천국이다. 일라리아 벤투리니 펜디는 자신을 행운아라고 여긴다. 패션계에서 명성을 떨쳤을 뿐 아니라 농장을 통해 정신적 고향을 찾았으니 말이다. 그녀는 로마 자택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그곳에서 “농업 기반의 창의적인 기업가가 된 기분이에요. 자연으로 돌아가 지속 가능성을 추구한 개인적인 경험이 성공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예죠”라며 흡족함을 드러냈다.


일라리아 벤투리니 펜디는 안나 펜디(Anna Fendi)의 셋째 딸이다. (어머니 안나는 펜디의 창립자인 에도아르도와 아델레 펜디 부부의 다섯 딸 중 둘째로 하우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약했다.) 일라리아 역시 지금의 라이프스타일을 선택하기 전 어머니를 따라 유서 깊은 패션 하우스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그녀의 첫 커리어는 샤넬에서 칼 라거펠트와 함께한 것이었고 이후 로마로 돌아와 가족 회사에 입사해 펜디시메(Fendissime) 액세서리 라인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와 펜디 슈즈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간직해온 자연에 대한 사랑은 꺾지 못했다. 결국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연을 향한 오랜 사랑에 인생을 걸었다. 그렇게 2004년 그녀는 지난 삶을 뒤로한 채 패션에서 농업으로 전향했다. 이 카살리 델 피노를 인수한 뒤, 오가닉 라이프를 실천하기로 결심했다. 먼저 지역의 기후와 지형을 세심히 살핀 다음, 건물 고유의 가치를 살리는 복원 작업에 착수했다. 그때부터 그녀의 삶은 패션 캘린더가 아니라 자연의 주기에 따라 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2년이 지나자 불현듯 패션을 향한 열정이 다시 피어올랐고, 2006년 리사이클링 소재 액세서리 브랜드 카르미나 캠퍼스(Carmina Campus)를 창립했다. 당시 재활용 소재를 사용해 고품질 액세서리를 만드는 아이디어는 선구적이라고 평가받았다. 현재 브랜드 운영의 본거지 역시 자연스럽게 이 카살리 델 피노가 되었다.
“패션에서 오가닉 라이프로 전환하며, 자연과 제가 끈끈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음을 재발견했어요. 이를 통해 잠시 쉬고 있던 창의력이 샘솟는 계기가 되었죠. 그렇게 지속 가능한 디자인 브랜드 카르미나 캠퍼스가 탄생했어요. 이곳에서 보낼 하루를 떠올리며, 오늘 아침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일어났어요. 땅을 일구는 데 전념하면서 야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답니다.” 그녀의 기분 좋은 고백이 이어진다. 일라리아는 매일 농장에서 자연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근거리에서 생산된 식재료를 소비하는 ‘킬로미터 0(km Zero)’와 생물 다양성 등에도 관심이 깊다. 농장 일과 가방, 가구 컬렉션 디자인을 번갈아 하며 개발도상국의 매립지로 흘러가 환경을 오염시키는 폐기물, 재료 등에 그녀는 새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을 이어간다.

“카르미나 캠퍼스에서 작업하는 동안에는 저를 둘러싼 자연에서 영감을 얻고, 자연의 순리를 따르죠. 카르미나 캠퍼스는 이 카살리 델 피노에서 시작된 ‘지속 가능성의 여정’을 담고 있다고 보면 돼요. 겨우내 땅이 힘을 되찾는 사이 재활용과 순환 경제에 기반한 아이디어를 구체화했어요. 수년간 패션계 캘린더를 살피고 전 세계 클라이언트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카르미나 캠퍼스에도 일종의 ‘킬로미터 0’ 생산을 적용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특히 팬데믹 직후에요. 더 이상 촉박한 패션계의 마감에 쫓기지 않고, 자연의 흐름에 따라 일하고 있어요. 현재는 로마에 있는 리퓨즈(Re(f)use) 매장에서 저만의 디자인과 마케팅 방식을 바탕으로 액세서리, 가방, 가구 등을 제작하고 있답니다.” 그녀는 단순 기계화(2.0), 자동화를 지나 데이터 기반의 연결, 예측을 통해 농업 생산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농업 4.0의 필요성을 깊이 체감한다. 오래전부터 농장에서 진정한 유기농 생산을 보장하는 ‘킬로미터 0’와 농업 생태학을 실천하려 애써왔다. 그녀는 이 같은 개념이 농업을 넘어 다른 분야로 확산된다면 분명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거라 확신한다. 더욱이 여러 분야를 넘어 패션계에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절감한다. “생각은 세계적으로, 행동은 지역적으로!” 말이다.
이 카살리 델 피노에는 800마리 이상의 양을 기른다. 양은 화학물질을 일절 사용하지 않은 언덕에서 자유롭게 풀을 뜯으며 서식한다. 농장 역시 여러 작물을 돌려 심는 윤작을 통해 토양의 힘이 고르게 유지된다. 가공실 옆 매장에서는 유기농 치즈와 살라미에 와인 한 잔을 곁들여 즐길 수 있다. 이곳에서는 숙성된 다양한 종류의 페코리노 치즈, 꿀, 잼, 파스타, 비스킷 등을 선보이는데 모두 농장에서 정성스럽게 관리하고 만든 것들이다.
이탈리아 전통 농가 민박 ‘아그리투리스모(Agriturismo)’도 자리하는데, 16개 객실은 심플하면서도 바닥재부터 가구까지 개성이 드러난다. 초기에는 폐허나 다름없었으나 세심한 공사 끝에 완성되었다. 건물 외관을 비롯해 모든 건축 요소를 그대로 보존했으며 어머니 안나 펜디와 언니 실비아의 도움을 받아 인테리어를 진행했다. 농가 복원에 반영된 현대 건축 요소는 5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다목적 홀에 있는 태양열 벽난로가 유일하다.


오래된 벽돌 아치와 석재 바닥재가 깔린 대형 벽난로가 자리하는 조식 식당에서는 농장에서 생산된 유기농 잼, 페이스트리, 치즈와 살라미까지 풍성하게 제공된다. 또한 호텔에서는 숲길을 따라 산책하거나, 유물이 많이 발견되는 이 지역의 고고학 유적지에서 승마를 즐기는 등 야외 활동이 가능하다. (에트루리아인의 고대 수도였던 베이이(Veii)가 있었던 마을에 호텔이 위치한다.) 투숙객은 물론 방문객도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생파스타 만들기나 치즈 장인과 함께 하는 치즈 만들기 등 다양한 요리 프로그램도 준비되어 있다.
가장 큰 레스토랑은 다목적 홀에 자리한다. 셰프는 텃밭에서 기른 채소, 농장에서 직접 생산한 리코타 치즈를 비롯해 다양한 치즈와 수제 파스타는 물론,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전통 과자 칸투치(Cantucci), 와인으로 반죽한 전통 도넛 참벨리네 알 비노(Ciambelline al Vino) 등 창의력을 가미해 식재료 본연의 맛이 더 돋보이는 메뉴를 선보인다. 과수원에서 수확한 과일을 잼으로 만들고, 그 잼은 달콤한 타르트 크로스타타(Crostata)를 만드는 데 활용된다. 이곳의 살라미와 치즈, 심지어 정성껏 기른 양고기까지 모두 진정한 유기농의 결실이다. 작은 레스토랑은 프라이빗한 파티를 위한 것으로 추운 날씨에 대비해 커다란 벽난로가 자리한다. 화창한 날에는 넓은 야외 잔디밭에 테이블을 마련해 자유롭게 식사를 즐길 수 있다.

일라리아 벤투리니 펜디는 무엇보다 자연을 사랑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이 카살리 델 피노가 자연과 대지의 관계를 다시 사유하는 장소가 되길 바란다. 이런 바람을 담아 매년 4월 말 ‘플로라컬트(FloraCult)’라는 아마추어 원예 시장을 직접 연다. 이 행사는 원예 애호가 수천 명이 꾸준히 찾는 연례행사로 자리 잡았다. 플로라컬트는 원예 문화 확산과 식물에 대한 지식 교류를 지향하며, 문화적 전환과 개인의 생태적 인식, 환경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한 녹지 접근법을 제안한다.
계절이 순환하듯 자연에 대한 그녀의 아이디어 역시 갱신을 거듭한다. 빠른 생산과 소비를 전제로 한 패션계에서 한발 물러나, 다른 리듬을 모색하는 방식으로. VL
- 컨트리뷰팅 에디터
- 유승현
- 글
- Elisabetta Caprotti
- 사진
- Courtesy of I Casali del P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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