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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아 코폴라는 영화계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나?

2024.03.11

by VOGUE

    소피아 코폴라는 영화계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나?

    유명 영화감독의 2세가 유명한 감독이 된 경우는 할리우드에서 극히 드물다. 소피아 코폴라가 확신에 차서 말한다. 남들보다 쉬운 길을 간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계에서 살아남는 것은 누구라도 쉽지 않다고.

    마리 앙투아네트부터 프리실라 프레슬리까지 소피아 코폴라 영화의 주인공들은 엄청난 특권을 누린다. 그러나 그들에게 주체성은 거의 없다.

    1971년 5월 14일, 엘레노어 코폴라(Eleanor Coppola)는 맨해튼의 한 병원에서 셋째 아이를 출산하기 위해 진통을 겪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Francis Ford Coppola) 감독은 할렘에서 영화 <대부>를 촬영하는 중이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쥐고 있던 캠코더를 든 채 병원으로 직행했다. 아이가 나오는 순간을 촬영하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이 ‘딸이다!’라고 외치는 순간, 아버지는 깜짝 놀라 카메라를 떨어뜨릴 뻔했대요. 엄마도 거기에 있었죠. 상황에 집중하려고 애쓰면서요.” 소피아 코폴라(Sofia Coppola)는 자신의 출산 영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가족들은 이 영상을 수년 동안 여러 차례 돌려 봤고, 엘레노어는 자신이 제작한 페미니즘 예술 작품의 일부로 쓰기도 했다. 이후에도 포드 코폴라는 딸 소피아의 모습을 카메라에 즐겨 담았는데 소피아의 탄생 영상은 그 첫 번째 시리즈였다. 소피아가 태어난 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프란시스는 그녀를 <대부>에 출연시켰다. 공식적인 그녀의 스크린 데뷔. 영화에서 코를레오네 범죄 조직원들이 라이벌 갱스터들을 한 명씩 살해하는 동안 두목인 마이클 코를레오네가 그의 갓 태어난 조카의 머리에 성유를 바르는데 그 아기가 바로 소피아다.

    셀즈닉(Selznicks)과 메이어(Mayers), 워너(Warners), 휴스턴(Hustons), 버그만-로셀리니(Bergman-Rossellinis), 폰다(Fondas) 등 할리우드에서 저명한 영화 가문은 많았지만 코폴라 가문처럼 세대에 걸쳐 유명 감독을 배출한 가족은 거의 없다. 어린 시절을 카메라 앞에서 보낸 소피아는 카메라 뒤에서 자신의 경력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8편의 장편영화를 연출하며 같은 세대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고, 시각적으로 독특한 영화감독 중 한 명이 되었다. 2003년에 개봉한 두 번째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를 통해 아카데미 각본상·감독상 후보에 올랐고, 각본상을 수상했다. 감독상을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해당 부문 후보에 이름을 올린 최초의 미국 여성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물론 누구나 가질 수 없는 풍부한 자원이 그녀의 그런 경력에 크게 뒷받침이 된 것도 사실이다. 그녀의 모든 영화가 탄생한 곳은 제작사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회사 아메리칸 조이트로프(American Zoetrope). 1999년 데뷔작인 <처녀 자살 소동>을 만들 때는 유명 스타 캐슬린 터너(Kathleen Turner)를 캐스팅할 수 있었는데 10대 소녀 역할로 출연한 아버지의 영화 <페기 수 결혼하다>를 통해 맺은 인연의 덕을 봤다. 네 번째 영화 <썸웨어>는 할리우드의 고급 호텔 샤토 마몽에서 촬영 허가를 얻었는데 젊었을 때 그녀가 이 호텔의 단골손님이자 호텔 수영장의 회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대형 영화사의 영화가 넘쳐나는 할리우드에서, 특히 남성이 여전히 지배적인 업계에서 여성 감독이 그런 식의 허가를 받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소피아는 자신과 같이 특혜를 받은 사람이 불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그녀는 강조한다. “제가 쉽게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업계에서 일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쉽지 않아요.”

    소피아를 처음 만난 것은 2021년 가을이었다. 웨스트 빌리지에 자리한 그녀의 집 근처에서 우린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야심 찬 프로젝트에 집중하며 2년을 쏟은 후였다. 1913년 작인 이디스 워튼(Edith Wharton)의 소설 <그 지방의 관습>을 원작으로 한 애플 TV+ 미니시리즈 제작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소설을 5개 에피소드로 각색하고, 주인공에는 플로렌스 퓨를 캐스팅했다. 퓨가 맡은 역할은 대호황 시대 맨해튼 사교계에 들어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중서부 출신 언딘 스프라그. 소피아는 워튼과 마찬가지로 보기 드문 환경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묘사하고, 엄청난 특권을 누리는 반면 주체성은 거의 없는 여성 캐릭터에 대한 통찰력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그녀의 영화 중에 가장 많은 제작비가 들어간 <마리 앙투아네트>의 예산은 4,000만 달러, 약 530억원이었는데 할리우드 기준에서는 ‘적당한’ 수준이었다. <그 지방의 관습>의 경우 그녀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마리 앙투아네트> 5편을 만드는 비용이 들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아침 식사 자리에서 그녀는 “애플이 제작을 취소했으며 자금 지원을 중단했다”고 털어놓았다. 소피아의 목소리는 조용했고, 높은 광대뼈와 오뚝한 코를 가진 얼굴도 평온했다. “정말 실망스러워요. 애플은 무한한 자원을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제작이 진행되는 동안 그녀는 예산 책정부터 대본 작업까지 모든 것을 경영진(대부분 남자들)과 논의했다. “그들은 언딘의 캐릭터를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녀는 회상했다. “물론 언딘은 상당히 ‘비호감’이에요. 하지만 <소프라노스>의 주인공 토니 소프라노도 마찬가지죠!”

    소피아는 아빠가 영화 제작사와 논쟁하는 모습을 익숙하게 보며 자랐다. <대부>가 성공했지만 프란시스가 원하는 영화를 찍을 정도의 충분한 투자로 이어지지 않았고, 그래서 프란시스는 독립적으로 영화를 제작하다가 파산 직전까지 몰리거나 신경쇠약에 걸리기도 했다. 엘레노어가 공동 연출한 다큐멘터리 <회상, 지옥의 묵시록>은 그런 프란시스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고통스러운 제작 과정을 담고 있는데 약간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한 영화감독의 종말’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을 정도다(여든넷의 나이에 프란시스는 자신의 새 영화 <메갈로폴리스> 제작비 1억2,000만 달러, 약 1,431억원을 사비로 충당하고 있다. 이 돈은 가족 소유의 와인 사업 일부를 매각해 마련했다). 소피아는 경영진이 연출자의 창의성에 대한 어리석은 요구를 할 경우 그것에 굴복할 가치가 없다는 아버지의 정신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2014년에는 유니버설 스튜디오로부터 <인어공주> 실사판 연출을 제안받기도 했지만, 제작 준비 과정에서 분쟁이 발생하자(한 임원이 “서른다섯 살의 남자를 관객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었다고 한다) 결국 하차했다. “사실 1억 달러를 벌려는 목적으로 영화를 만들고 싶지는 않아요.” 그녀는 영화사와의 계약에서 따라오는 개런티에 대해 말했다. “돈보다 자신의 것을 관철시켜나가야 한다고 배웠어요.” 그녀는 크리에이티브 팀을 선택하고 최종 편집까지 통제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는 영화에만 참여하고 있다.

    <그 지방의 관습>의 대체 자금을 확보하려던 그녀의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된 후, 2022년 1월에 소피아는 프리실라 프레슬리의 1985년 회고록 <엘비스와 나>를 각색한 독립 영화 연출에 돌입했다. 프리실라와 엘비스의 관계는 프리실라가 열네 살 때 시작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처럼 그녀는 불행하게도 왕과 결혼한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침대에 누워 책을 훑어보던 소피아의 머릿속에 곧바로 그림이 펼쳐졌다. “하루 종일 털 카펫 위에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어요.” 그녀는 재빨리 대본 초안을 작성하고 오랫동안 자신과 일한 제작자 유어리 헨리(Youree Henley)에게 연말까지 촬영을 끝내고 싶다고 말했다. 제작비 8,500만 달러, 약 1,136억원이 투입된 바즈 루어만 감독의 영화 <엘비스>가 몇 달 후 개봉할 예정이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바즈 루어만식 특유의 화려함으로 무장한 이 전기 영화는 프리실라를 주변 인물이자 행복한 조력자로 묘사했다. 소피아는 프리실라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생각하는 당신의 모습은 영화 <엘비스> 안에서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고 설득했고, 소피아의 견해를 경청한 프리실라는 제작자로 그녀의 영화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프리실라의 시선을 잔뜩 경계하던 엘비스 프레슬리 재단은 소피아의 ‘그레이스랜드’ 접근을 거부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실제 베르사유 궁전에서 촬영하며 영화사에 획기적인 일을 해낸 소피아는 실망했고, 제작 팀은 대신 토론토 외곽의 사운드 스테이지에 엘비스가 살던 멤피스 저택의 외관과 내부를 재현해 그곳에서 촬영을 진행했다. 한창 촬영 중이던 2022년 11월 어느 날 오후, 나는 그곳을 직접 방문했다. 촬영장 밖에서 마주한 쉰두 살의 소피아는 샤넬 슬링백에 칼라 블라우스를 입고 있어 절제된 우아함이 돋보였는데, 촬영장에서의 그녀는 그보다는 덜 세련된 캐주얼한 모습이었다. 회색 뉴발란스 운동화를 신고, 샤르베 셔츠 위에 검은색 칼하트 플리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격납고 같은 공간을 지나 재현된 프레슬리의 집으로 나를 안내했다. 입구에는 커다란 사자상 두 개가 나란히 서 있었다. 화려한 거실로 들어서자 그녀는 꽃꽂이가 되어 있는 꽃을 가리켰다. “저건 진짜 난초예요. 우리 예산으로 이게 가능하다는 데 정말 놀랐어요. 사치를 좀 부렸죠.”

    소피아 팀은 조달할 수 있는 예산이 많지 않아 촬영 기간을 총 40일로 잡았다. 하지만 일부 자금 지원이 마지막 순간에 취소되는 바람에 스토리를 축소해 2,000만 달러도 안 되는 예산으로 한 달 만에 촬영을 마쳐야 했다. 영화 대부분은 멤피스의 여름을 배경으로 하지만 실제로는 겨울에 촬영했다. 그 시기가 촬영 비용이 저렴하기 때문이다. 소피아는 촬영 때문에 수영복을 입고 야외에서 떨고 있는 배우들에게 ‘따뜻한 척하는 연기’를 주문해야 했다. 프리실라가 야자수가 늘어선 거리를 따라 컨버터블 차를 운전하는 장면과 수영장에서 백조처럼 다이빙하는 장면을 LA에서 롱 샷으로 촬영하고 싶었지만, 2018년에 자신이 촬영한 까르띠에 광고 영상을 영화에 삽입해 비용을 절감하기도 했다. 그렇더라도 삽입된 영상 속 배우의 뒤태는 <프리실라>의 여주인공 케일리 스패니(Cailee Spaeny)같이 보이긴 한다.

    도쿄의 고급 호텔을 배경으로 하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나 미시간 교외를 배경으로 하는 <처녀 자살 소동>처럼 소피아의 영화는 화려하지만 약간은 절제된 감정을 다루고 있다. 그녀 작품의 시각적 특징 중 하나는 바깥세상과 단절된 채 창밖을 바라보는 주인공의 모습이다. “갇힌 여성을 보고 있으면 못 견디겠어요.” 하지만 그녀의 여성 캐릭터는 갇힌 상황에서도 멋진 모험을 감행해 어느 정도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규정한다. 세상과 동떨어져 자신들의 세상에만 갇혀 있는 10대 소녀 시절의 폐쇄적인 분위기와 그것을 과시하려는 듯한 그들 특유의 표현력을 이토록 예리하게 묘사한 영화감독이 있을까. 그녀는 또한 옷 더미와 실용적이지 못한 신발, 포스터로 가득 찬 벽, 향수병과 도자기 인형으로 어수선한 화장대 등 어지러운 침실 미장센의 대가이기도 하다. 영화 <노매드랜드>로 2021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클로에 자오(Chloé Zhao) 감독은 ‘현실뿐 아니라 감정에 기반한 세계 구축’에 관련해 소피아를 존경한다고 나에게 말한 적 있다. “소피아의 작품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줘요. 그런 종류의 여성상을 잘 그려내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에요”라고 그녀는 덧붙였다. <처녀 자살 소동>을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로 꼽는 제인 캠피온(Jane Campion) 감독은 소피아가 배우의 연기보다 미장센에 조금 더 집중하는 것은 속임수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녀의 작품은 강렬한 인상을 줘요. 주제의 깊이라든지 모든 면에서 탄탄하기 때문이죠.” 제인은 말한다. 하지만 소피아의 영화는 때때로 비평가들에게 내용보다 스타일에 치중하는 영화로 평가받기도 한다. 어떤 비평가는 소피아의 영화 속 특권층이 소피아의 실제 삶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들어 그녀의 연출력을 비판한다. 몇 달 전, 소피아는 나에게 갑작스럽게 이런 이메일을 보냈다. 거기에서 그녀는 25년 경력 내내 줄곧 자신을 따라다닌 논쟁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피상적인 것을 본다고 해서 왜 그 사람이 피상적인 사람이 되는 건지 이해를 못하겠어요!”

    소피아는 자신이 다른 일을 했다면 어떤 모습일까 상상할 때 1960년대 <보그> 편집장 다이애나 브릴랜드 같은 매거진 에디터를 떠올린다. 이미지와 스타일에 대한 열정적인 큐레이터이기 때문이다. 캠피온은 소피아와 함께 심사위원으로 칸영화제에 참석하던 때를 즐거이 회상했다. 그때 소피아가 캠피온의 스타일링을 도와주겠다고 제안했고, 다음 날 커다란 셀린느 상자 두 개가 자신의 호텔에 도착했다고 캠피온은 이야기했다.

    소피아는 새로운 영화를 준비할 때 항상 시각 자료를 수집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프리실라>를 위해 사운드 스테이지에 마련한 임시 사무실에는 프레슬리 부부의 결혼식 사진, 10대 시절 프리실라의 매력적인 사진, 윌리엄 이글스턴(William Eggleston)이 촬영한 텅 빈 그레이스랜드의 사진 등 다양한 이미지가 대형 게시판에 붙어 있었다. <처녀 자살 소동>을 촬영할 당시 물건들이 스타일리시하게 놓인 소피아의 홈 오피스를 찍은 브루스 웨버의 유명한 사진이 있는데, 새 작업 공간도 그 사진과 닮아 있었다. 책상에는 분홍색 포스트잇 메모와 후지필름 인스탁스 카메라, 반쯤 타버린 딥티크 향초가 놓여 있고, 바닥에는 코폴라 포도밭(이 포도밭에서는 빨대가 달린 작은 분홍색 캔에 담긴 ‘소피아’ 샴페인을 생산한다)에서 생산되는 와인병이 놓여 있었다. 소피아가 2000년대에 교제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소피아가 <마리 앙투아네트>의 아이디어 북을 보여준 때를 언급한 적 있다. “정교하게 구성되었지만 수작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훌륭한 예술가의 사랑스러운 손길이 느껴졌어요. 그 아이디어 북의 한 페이지에 분홍색 글레이즈 도넛 사진이 있었어요. 그녀에게 ‘웬 도넛이냐’고 물었죠. 그러자 ‘분홍색이 마음에 들어 소파에도 그런 느낌을 주고 싶어요’라고 말하더군요. 그리고 나중에 영화를 보는데, 그 망할 가구를 먹어버리고 싶더라고요.(웃음)”

    소피아는 복도를 따라 나를 어느 방으로 안내했다. 방에서는 영화 의상 디자이너 스테이시 배탯(Stacey Battat)이 프리실라의 웨딩드레스를 손보고 있었다. 그녀가 영화를 위해 샤넬에 디자인을 부탁한 드레스였다. 하이넥 레이스 비브가 달린 그 드레스는 실제 프리실라가 결혼식에서 입은 드레스와 매우 흡사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다. 영화 연출가로서 소피아의 가장 자랑스러운 자산은 그녀가 원작을 활용할 때도 뛰어난 미학적 확신으로 자유롭게 영화를 연출한다는 점이다. “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늘 알고 있어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영화의 첫 장면은 넓게 펼쳐진 털 카펫 위를 걷고 있는 프리실라의 발을 클로즈업한 장면인데 실제 그레이스랜드에는 그런 색의 카펫이 없었지만 장밋빛으로 연출했다. “처음에는 분홍색을 떠올렸어요.” 그녀는 영화 준비를 위해 그레이스랜드를 직접 방문하지는 않았지만, 한 친구가 그곳을 둘러보고 푸들 무늬 벽지 사진을 보내줬다. 소피아는 프리실라가 엘비스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욕조에서 기운 없이 누워 있는 장면을 위해 그 장소의 분위기를 새롭게 창조하기로 결정했다. “분위기가 그레이스랜드의 욕실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뭐 어때요.”

    세트장 조명은 어두웠다. ‘분위기 조성’을 위해 소피아가 매일 선곡한 곡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커티스 메이필드(Curtis Mayfield)와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 토마스 마스(Thomas Mars)가 이끄는 프랑스 인디 록 밴드 피닉스(Phoenix)의 음악이 플레이리스트에 포함돼 있었다. 토마스는 소피아의 남편이자 그녀 영화의 음악감독이다. 한구석에서는 스태프들이 피클볼을 하고 있었다. 이 피클볼 코트는 소피아가 촬영 첫 주에 설치해달라고 고집했었다. 소피아는 스태프 토너먼트에 참가했는데, 그녀의 팀인 스매셔가 우승했다. “피클볼 패들(라켓)이 너무 안 예뻐요. 제가 한번 디자인해봐야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소피아는 따뜻한 분위기로 촬영장을 꾸리는 일의 중요성을 아버지에게서 배웠다고 이야기했다.

    소피아의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보통 말을 하기보다는 관찰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인지 소피아도 거의 같은 방식으로 촬영장에서 편안함을 추구한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 일한 사람은 그녀의 조심스러운 성향 이면에 인상적인 결단력이 있다고 증언하곤 한다. 영화 <썸웨어>와 <매혹당한 사람들>에 출연했던 배우 엘르 패닝은 “소피아는 절대 겁먹은 적이 없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누군가에게 소리 지르지 않아요. 흔들림이 없죠”라고 이야기했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와 <온 더 록스>의 스타 빌 머레이는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소피아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보고 그녀에게 ‘벨벳 망치’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카메라 모니터 옆 감독 의자에 앉아 있던 프로듀서 헨리는 소피아와 함께 <썸웨어>를 촬영하기 위해 아이스링크를 섭외하던 날을 회상했다. 소피아가 한 프로듀서에게 “정말 멋지군요, 음, 점심은 어디서 먹어요?”라고 물었다. 당황한 헨리가 몇 군데 더 방문할 만한 아이스링크를 언급하자 소피아는 더 당황한 표정을 지었는데, 이미 그녀는 첫 번째 아이스링크를 촬영 장소로 점찍었기 때문이었다. 헨리는 “그때는 소피아의 부드러운 표현을 지금처럼 잘 읽을 수 없었죠”라고 회상했다.

    소피아와 그녀의 팀은 침대 뒤에 커다란 거울이 걸린 프레슬리 부부의 침실에서 영화의 한 장면을 리허설하는 중이었다. 엘비스 역을 맡은 배우 제이콥 엘로디(Jacob Elordi)가 킹사이즈 매트리스에 자리를 잡았다. 198cm 장신이 침대 가장자리에 거의 매달리듯이 누워 있는 모습이었다. 스물네 살이지만 10대 청소년으로 보일 정도로 작은 체구의 스패니는 문 쪽에서 서성였다. 이 장면은 프리실라가 그레이스랜드에 도착한 직후 벌어지는 일을 담고 있다. 프리실라는 쇼핑하러 갔다가 드레스를 샀지만 엘비스가 그 드레스가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이자 환불한다. 프리실라는 회고록에 그 순간을 “또다시 내 취향을 타협한 순간”이라고 썼는데, 소피아의 세계에서는 최악의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캐슬린 터너는 <처녀 자살 소동>에서 소피아와 함께 작업했는데 그때의 작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배우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아요. 그건 배우에게 아주 힘들 수 있죠. 프란시스는 불도저, 그러니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고 있는 아주 훌륭한 불도저예요. 배우가 알아서 연기하게 하고, 그것이 그녀가 원한 연기인 경우에만 배우에게 호응하죠.” 올해 스물여섯 살인 엘로디는 소피아가 자신의 연기에 대해 아무 지시도 하지 않은 것을 신뢰의 표시로 해석했다고 고백했다. 소피아는 단 한 번 만난 후 그를 엘비스 역으로 캐스팅했다. “소피아는 촬영 전에 저에게 어떤 주문을 한 적이 없어요. 목소리나 표정, 걸음걸이를 어떤 식으로 연기해야 한다고 문자나 전화를 한 번도 하지 않았죠.” 그는 말했다. 엘로디는 몇 달 동안 연습한 엘비스의 억양을 소피아에게 보여줄 생각에 들떠 촬영장에 도착했다. 소피아는 “와, 말투도 모습도 정말 엘비스 같군요”라고 말했다. 그게 다였다.

    소피아가 “액션!”이라고 외치자 엘로디는 스패니를 바라보며 준비한 대사를 했다. “그 드레스는 뭐야? 네 몸매에 전혀 어울리지 않아.” 그리고 촬영감독과 함께 서 있던 소피아를 힐끗 쳐다봤다. “괜찮았어요, 소피아?” 그는 엘비스의 연기 톤으로 느릿느릿 말했다. “제가 그녀를 비웃어야 할까요? 너무 극적으로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데요.” 소피아는 “너무 과하지는 않았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잠시 멈추고 턱에 손을 얹었다. “조금 엘비스 같았던 것 같아요.”

    감독으로서 프란시스의 삶은 여행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겐 가족과 열흘 이상 떨어져 있으면 안 된다는 강한 신념이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 엘레노어와 자신의 형제 로만과 지안 카를로는 몇 달, 때로는 몇 년 동안 북부 캘리포니아에 있는 집을 떠나 프란시스 곁에 머물렀다. 소피아의 첫 번째 기억 중 하나는 아버지가 <지옥의 묵시록> 촬영 중 필리핀에서 헬리콥터를 탔던 일이다. 초등학교 4~5학년 때 아버지가 <마음의 저편>을 촬영할 때는 가족 모두 LA로 이사했다. 그 후 <아웃사이더>와 <럼블 피쉬>를 촬영할 때는 오클라호마주 털사로. “우리는 기본적으로 서커스단이었어요. 저는 작품으로 어린 시절을 기억해요.”

    이사를 많이 다닌 것은 어느 정도 학업에 영향을 끼쳤고 소피아의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녀는 곱셈을 깨치기도 전에 한 학교를 그만뒀고, 등록한 새 학교에서는 그 단원 수업이 이미 지나가버린 상태였다. “저는 수학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고, 소위 말하는 ‘학습 장애’가 있는 학생이었어요.” 소피아는 말했다. 40년 동안 프란시스와 함께 일해온 연구자이자 프로듀서인 아나히드 나자리언(Anahid Nazarian)은 소피아가 과제를 제출하지 않은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의 선생님이 말해준 적 있어요. 논문을 내지 않은 소피아에겐 모두를 납득시킬 만한 최고의 변명거리가 있는데 그건 바로 ‘오스카 시상식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 놓고 내렸어요’라고요.” 하지만 취향에 관한 한 소피아는 아이 같지 않고 확실했다. 소피아는 스스로에게 도미노라는 예명을 붙이고 아버지의 영화 몇 편에서 그 이름으로 출연하기를 요구했다. <마음의 저편> 세트장에서는 출연진과 제작진에게 배포용으로 자신의 간행물인 <딩뱃 뉴스(Dingbat News)>를 기획하기도 했다. 그녀는 온갖 사진을 모았고, 외국 잡지에서 오린 사진으로 벽을 빼곡하게 장식했다. “나파밸리에서 프랑스판 <보그>를 구독하는 여자아이는 제가 유일했어요”라고 소피아는 말했다. 프란시스가 회상했다. “자신이 무엇을 선호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고 있는 게 그 아이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어요.” 프란시스의 필모그래피 중 유명한 영화는 보통 군대, 마피아 등 남성성이 강한 배경의 이야기다. 그러나 소피아는 지극히 여성적인 스타일과 표현법에 이끌렸다. 부모님의 저녁 식사 모임에서 그녀는 항상 ‘남자들의 아내 그리고 여자 친구’에 관심이 더 많았다. “그들은 최고의 베이클라이트 보석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프란시스는 엘레노어와 함께 할리우드 외곽에 거처를 마련하고 아이들에게 평범한 일상을 선물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럼에도 소피아가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들려준 많은 이야기는 유명한 어른들의 세계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프란시스의 ‘코튼 클럽’의 스타 리처드 기어가 자신의 집 수영장에서 수영한 일이라든지, 조지 루카스를 ‘조지 삼촌’으로 부른 일, 안젤리카 휴스턴이 소피아의 코가 자신만큼 커질 거라고 장담한 일 등등. 지난해 어느 날, LA의 한 서점을 방문했을 때 소피아가 나에게 유명인들의 가장 스타일리시한 스냅사진을 모은 이라는 책을 소개해준 적이 있다. 책에 수록된 소피아의 사진은 그녀가 열네 살 때 찍힌 사진이었다. 사진 속 소피아는 마른 몸에 밝은 표정을 짓고 있으며 비대칭 헤어스타일을 한 채 파리의 유명 레스토랑 다베(Davé)에서 고인이 된 패션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 옆에 앉아 있다. “그는 부모님 친구의 친구였어요.”

    소피아 코폴라 가족 역시 가업을 이어가는 옛날 방식을 따르고 있다. 구두 수선공이 구두 수선공을 낳는 것처럼 영화인이 영화인을 낳는 것이다. 소피아와 자주 협업하는 오빠 로만은 영화 제작자이며 웨스 앤더슨과 함께 각본을 쓰기도 한다. 영화 <대부>와 <록키> 시리즈에 출연한 탈리아 샤이어(Talia Shire)는 그녀의 고모다. 조카 지아도 두 편의 장편영화를 연출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에서 루이 16세 역할을 했던 배우 제이슨 슈왈츠먼과 니콜라스 케이지는 사촌이다. 코폴라 집안은 배우가 되거나 배우를 코치하고, 시나리오를 쓰고, 음악을 만들고, 영화를 제작하거나 배급한다. 소피아는 가족 가운데 영화계에 대한 인기가 높은 까닭은 프란시스의 전염성 있는 열정 덕분이라고 밝혔다. “아버지는 누구나 영화 제작을 해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영화 만드는 일에만 푹 빠져 있어요.” 심지어 작곡가였던 프란시스의 아버지도 아들의 영화 음악 작업에 참여해 <대부 2>로 (니노 로타와 함께) 오스카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소피아의 어머니 엘레노어 역시 영화계에서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두 권의 회고록을 썼는데 첫 번째 회고록 <Notes>에서 1962년 프란시스의 데뷔작인 공포 영화 <디멘시아 13> 촬영장에서 그와 처음으로 만난 이야기를 공개했다. 두 사람은 감독과 미술 조감독으로 만났다. 그녀는 앞으로 몇 년 동안 그와 함께 영화 작업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여겼다. 하지만 몇 달 지나지 않아 지오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둘은 그다음 주말에 결혼식을 올렸다. 엘레노어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프란시스는 제 역할이 아내이자 엄마라는 것을 분명히 했어요.” 그녀는 <Notes>에서 기다림 속에 사는 감정을 털어놓았다. 프란시스가 연출할 기회를 얻기를 기다리고, 촬영 가기를 기다리며, 집에 가기를 기다렸다. (프란시스는 이메일을 통해 “당시에는 내가 직업을 가질 수 있을지도 몰랐고, 아내가 직업을 가질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은 더 없었다”고 말하면서 “아내가 창의적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전일 육아 도우미를 고용하고 엘리의 작품 활동을 위한 제작사를 제공했다”고 덧붙였다.) 소피아는 어머니가 <프리실라> 촬영장을 방문했을 때의 일화를 이야기했다. 당시 촬영 중이던 장면은 투어를 준비하는 엘비스 뒤로 프리실라가 딸 리사 마리와 함께 집에 남게 될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엘레노어는 그 장면을 보고 소피아에게 “내가 바로 프리실라였어”라고 이야기했다. 바로 다음 날, 엘레노어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엘비스가 프리실라에게 ‘당신은 행복해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갖고 있어’라고 말했을 때, 그것이 당시 정확하게 제가 느낀 감정이었어요. 저는 정신과 의사에게 가서 ‘도대체 내가 왜 불행한가’라고 물었어요. 저에게 ‘당신은 창의적인 사람’이라고 말해준 사람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프란시스는 딸과 함께 그녀가 창의적인 일을 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아내가 자신의 형제들과 함께 영화 제작에 참여하도록 한 것도 이런 지원의 일환이었다. “이탈리아에서 여성은 역할에 대한 전통적인 관습에 얽매여 있지만 저는 그렇게 살지 않았어요. 남자아이들과 똑같이 자랐죠.” 소피아와 엘레노어는 자신이 경험한 성별과 세대의 차이에 대해 토론해본 적이 없었고, 당연히 소피아는 자신의 작품 주제를 그런 차원에서 분석하는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소피아가 ‘이 작품을 통해 고립감을 보여주고 싶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로만이 증언했다. 프란시스는 늘 소피아에게 영화 제작은 완전하게 개인적인 것이어야 하며, 개인적인 것일수록 좋다고 조언했다. 내가 소피아에게 그녀의 영화에 들어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배경에 대해 물었을 때, 그녀는 종종 추상적인 표현에 빠지거나 말을 중단하고 자신의 생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다른 작가들은 그녀의 소통 스타일이 교묘하게 회피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언어보다 시각적 요소를 중시하는 태생적인 문제인지를 추측하곤 한다. 영국의 영화학자이자 <소피아 코폴라: 소녀 시절의 영화> 저자인 피오나 핸디사이드(Fiona Handyside)는 이렇게 말한 적 있다. “때때로 그녀는 응답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사람들 스스로 구덩이를 파게 하는 것 같아요.” 엘레노어가 소피아의 영화를 통해 인지했고 나에게 언급했던 “갇혀 있는 것 같은 감정”에 대해 소피아에게 이야기하자 소피아는 “많은 사람, 특히 여성이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답했다.

    지난 7월 리츠 파리 로비에서 소피아를 다시 만났다. 그녀는 샤넬이 소유한 스코틀랜드 니트웨어 브랜드 배리를 위해 새 컬렉션을 디자인했고, 출시 관련 회의를 위해 그 호텔에 머물고 있었다. (그녀는 와인과 호텔을 통해 많은 재산을 모은 아버지가 “다른 일로 돈을 버는 방법을 가르쳐주셨기 때문에 영화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리츠는 방돔 광장 근처에 있는 배리 사무실과 더 가까웠고, 그래서 그녀는 그곳에서 혼자 지낼 수 있는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와 <썸웨어>는 호텔을 무기력한 멈춤과 역동적인 잠재력이 있는 장소로 묘사한다. “그 중간의 어디쯤이 좋아요.” 소피아가 말했다.

    소피아가 열다섯 살이던 1986년 프란시스는 그녀를 위해 샤넬에 여름 인턴십을 주선했다. 파리로 떠나기 한 달 전, 그녀의 큰오빠 지오가 사고로 사망했다. 당시 스물두 살이던 그는 아버지를 도와 알링턴 국립묘지를 배경으로 한 영화 <병사의 낙원> 촬영을 돕고 있었고, 쉬는 날 영화의 공동 주연 중 한 명인 그리핀 오닐(Griffin O’Neal)과 보트를 타러 나갔다가 사고를 당했다. 오닐이 다른 두 척의 보트 사이로 지나가려 했고 지오는 그 사이에 있던 견인 줄에 치였다(오닐은 영화에서 교체되었고 나중에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결국 무죄판결을 받았다). 제작자들은 영화 촬영을 중단할 것을 제안했지만 프란시스는 계속하기를 원했다. 엘레노어는 회고록에서 “프란시스는 바쁘게 지내면서 지오를 잃은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랐다”고 썼다. 당시 뉴욕 대학교 영화학과 학생이었던 로만은 지오가 하던 일을 대신하기 위해 여름방학 계획을 취소했지만, 소피아는 원래 계획대로 해외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엘레노어는 이렇게 말했다. “소피아는 저에게서 멀어지려고 하는 딱 그 나이였기 때문에 집으로부터, 그 사고 후의 모든 것으로부터, 엄마인 저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프란시스와 엘레노어 부부는 프란시스의 영화사에서 일하던 수지 랜도 핀치(Susie Landau Finch, 배우 마틴 랜도(Martin Landau)의 딸로 당시 20대였다)를 파리에서 소피아의 보호자로 고용했다. 당시 딸 지아를 임신 중이던 지오의 젊은 약혼녀 자키 드 라 퐁텐(Jacqui de La Fontaine, 현재 자키 게티(Jacqui Getty)로 불린다)도 그들과 함께 지내기 위해 파리로 왔다. 랜도 핀치는 두 사람이 오후를 대부분 멍한 상태로 아파트 주변에 누워 시간을 보냈다고 회상했다. “두 사람의 모습은 훗날 소피아가 <처녀 자살 소동>에서 그렸던 모습이었어요. 감정으로 극복되는 지루함, 비극의 내면화 같은 것이죠.” 랜도 핀치는 말했다. 수지 랜도 핀치는 남편의 조카이자 조각가 도널드 저드의 딸인 레이너 저드(Rainer Judd)를 초대했다. 레이너와 소피아는 그 후 몇 주 동안 “크루아상을 먹고 오랑지나를 마시며 새벽까지 클럽에서 놀았다”고 레이너는 회상했다. “상실감과 중압감이 있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남자아이들과 멋진 옷에 관심을 기울이는 장난기 많은 아이들이었어요.”

    배리 사무실에서는 한 무리의 직원들이 모델 피팅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음 날에는 소피아가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의 파티 장면을 촬영한 호텔 드 크리용에서 그녀의 배리 컬렉션 광고를 촬영할 예정이었다. 소피아는 옷이 걸린 행어 쪽으로 걸어가 3,000유로에 달하는 분홍색 캐시미어 점프수트를 만져봤다. 테이블에 놓인 벨벳 안감 트레이에는 ‘SC’라고 새긴 금과 자기로 만든 단추가 놓여 있었다. 한 직원이 더블 브레스트 재킷을 꺼내 소피아에게 건넸다. 그녀는 재킷을 어깨에 걸치고 거울을 보았다. “세상에, 정말 마음에 들어요.” 그 후 우리는 운전기사가 있는 검은색 차를 타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콩코르드 광장을 지날 때쯤,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던 소피아가 설명했다. “저곳이 바로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 올랐던 곳이에요. 저는 이곳을 지나가는 걸 좋아해요.”

    <대부 3>(1990)에서 소피아는 마이클 코를레오네의 딸 메리로 등장한다. 영화사 경영진은 메리 역할에 위노나 라이더를 캐스팅할 것을 권했지만, 영화 촬영지인 로마에 도착한 라이더가 과로로 쓰러져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상태였다. 마침 미술사를 공부하기 위해 오클랜드의 밀스 칼리지에 입학한 소피아가 겨울방학을 맞아 로마에 머물고 있었다. 프란시스는 그녀에게 메리 역을 대신 맡아야 한다고 알렸다. 파라마운트 경영진은 시네시타 스튜디오로 날아가 프란시스에게 소피아는 적임자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프란시스의 생각은 확고했다. 소피아는 프란시스의 거의 모든 전작에 출연했지만 작은 역할에 불과했다. <대부 2>에서 맡은 배에 탄 아이 역할 역시 이름도 없는 단역이었다. 그녀는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고, 영화 촬영장에 자주 갔던 이유는 주로 의상실에서 놀기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메리 역을 받아들인 이유는 대학 생활이 지루했고 다시 돌아가지 않는 것을 허락하겠다고 한 아버지의 약속 때문이었다.

    연기 및 연설 코치 팀이 급히 구성되었고, 그중에는 다이애나의 아들인 프렉 브릴랜드(Freck Vreeland)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메리가 코를레오네 가족 재단에서 연설하는 장면을 위해 소피아를 훈련시켰다. 브릴랜드는 소피아가 처음에는 수줍음이 너무 많아 “성공적인 연설가처럼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것은 고사하고 목소리조차 내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소피아는 “아빠가 지켜보고 있는 데다 앤디 가르시아의 아내 앞에서 자신이 그에게 키스를 요구하는 장면을 찍는 것이 수치스러웠다”고 증언했다. 엘레노어의 회고록에는 당시 자신이 썼던 일기가 인용되어 있는데, 소피아가 촬영 중간중간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는 내용(모든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소피아는 평소 잘 울지 않는다)이 기록되어 있다. 팔레르모의 마시모 극장 계단에서 메리 코를레오네가 아버지를 노리는 살인 청부업자의 총에 맞아 죽는 클라이맥스 장면은 소피아의 압박감을 더 가중시켰다. 파치노가 이 장면에서 그만의 특유의 소리치는 신들린 연기를 선보인 것에 비하면 소피아는 거의 연기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영화가 개봉하자 엘레노어의 두려움은 근거가 있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1991년 소피아는 골든 라즈베리에서 최악의 여우조연상과 최악의 신인상을 수상했다. <엔터테인먼트 위클리>는 “그녀는 대단한가, 아니면 대단히 끔찍해서 아빠의 새 서사시를 망친 것인가?”라는 티저 문구로 커버스토리를 장식했다. 소피아의 연기에 대해 어떻게 여기든(영화 비평가 폴린 카엘(Pauline Kael)은 그녀의 ‘특별한 존재감’만큼은 높이 평가했다), 이런 논쟁은 메리가 극장 계단에서 쓰러지기 직전 마이클을 바라보며 “아빠?”라는 믿기지 않는 말을 하는 마지막 장면에 통렬함을 더했다. 프란시스는 훗날 <타임스> 인터뷰에서 “마이클 코를레오네를 위해 딸이 총알을 맞은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나의 딸이 총알을 맞은 것”이라고 인정했다. 소피아는 특유의 침착함으로 나쁜 언론 보도를 흡수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영화를 망쳤다는 공개적인 비난을 받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면서도 “연기가 내 꿈이 아니었기 때문에 크게 절망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그 경험이 감독으로서 도움이 되었어요.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이 얼마나 상처받기 쉬운 일인지 잘 알고 있거든요.”

    그 후 몇 년 동안 소피아는 할리우드의 엘리트 자녀 특유의 목표 없는 성인기를 보냈다. 유화를 공부하기 위해 아트 센터 디자인 대학에 입학했지만 “화가로서 재능은 없다”는 선생님의 말에 중퇴했다. 그 후 사진가 폴 재스민(Paul Jasmin)의 수업을 들었는데, 소피아는 “가족 외에 처음으로 내게 취향이 있다고 말해준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이후 뮤직비디오에 카메오로 출연하고 일간지의 스타일 섹션에 빠짐없이 소개되는 등 LA 잇 걸의 라이프가 펼쳐졌다. 인터뷰에서 그녀의 발언은 거침없었다. (좋아하는 것: 칼 라거펠트, 핫로드(고속 주행이 가능하도록 개조된 차), 싫어하는 것: 브래지어, 12단계 중독 회복 프로그램 참가자) 그녀는 스물셋에 검은색 캐딜락 세비야를 사서 ‘마피아 공주 차(Mafia Princess Car)’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녀는 샤토 마몽의 회원권를 구입해 수영을 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1994년에는 ‘밀크페드’라는 패션 브랜드를 론칭해 ‘I ♥ Booze(나는 술을 사랑해)’라는 문구가 프린트된 베이비티(Baby Tee) 같은 아이템을 선보였다. 같은 해 그녀는 친구 조이 카사베츠(Zoe Cassavetes)와 함께 코미디 센트럴 채널에서 <Hi Octane>이라는 시리즈를 진행했다. 조이는 감독 존 카사베츠와 배우 제나 로우랜즈의 딸이다. (소피아에게 유명인을 부모로 두지 않은 친구가 있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다소 모호하게 “모든 친구가 다 그런 건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마초적이고 영향력 있는 예술가 아버지를 둔” 친구들에 대한 특별한 친밀감은 인정했다.) 두 사람이 아찔한 모험을 하고 유명 지인들을 인터뷰하는 이 시리즈는 몇 회 방송 후 곧바로 폐지됐다. 이런 연유로 소피아는 프란시스에게 이렇게 묻기도 했다. “아빠, 전 평생 아마추어로 끝나는 걸까요?”

    소피아는 단편영화 각본을 쓰며 돌파구를 찾았다. ‘릭 더 스타’라는 제목의 단편영화는 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학생을 숭배하다가 아주 폭력적으로 배척하는 10대 소녀들의 이야기다. 학교 교장 역의 피터 보그다노비치를 비롯해 아버지의 동료들이 대거 출연했다. 1998년에 완성된 이 영화의 러닝타임은 14분에 불과하며 흑백으로 촬영되었지만, 소피아의 풍부한 영화적 어휘의 근원을 담고 있다. “사진에 대해 조금, 의상 디자인에 대해 조금, 음악에 대해 조금 알고 있었어요. 한 가지를 고를 수 없어서 짜증이 났죠. 그러다 단편영화를 만들면서 영화가 이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거예요.”

    소피아는 마스, 10대의 두 딸과 함께 뉴욕에 있는 붉은색 벽돌의 타운 하우스에 살고 있다. 집은 앞쪽이 좁아 정면에서 보면 작아 보였다. 지난 3월 뇨키라는 이름의 골든리트리버와 함께 현관에서 나를 맞은 소피아가 벽이 하얀 널찍한 거실로 나를 안내했다. 소피아의 패션 감각과 마찬가지로 클래식하면서도 기발한 여성적 감각의 인테리어가 돋보였다. 회색 대리석 벽난로 위 선반에는 시누아즈리 무늬가 있는 커다란 도자기 화병이 놓여 있었는데 핑크색 장미와 아네모네(정교하게 만들어진 조화였다)가 사랑스럽게 꽂혀 있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이어지는 책장에는 패션, 뉴욕, 사진, 프랑스 역사에 관한 책이 섹션별로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책 사이사이 예술품 액자도 눈에 띄었다. 그중에는 마이크 밀스 감독의 영화 <처녀 자살 소동> 포스터와 앤디 워홀이 촬영한 하노버의 캐롤라인 공주의 폴라로이드 사진도 포함되어 있다.

    소피아는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연출작으로 자신의 다섯 번째 장편영화 <블링 링>을 꼽았다. 영화 배경이 되는 세계가 자신의 취향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유한 유명인의 집을 털었던 LA 고등학생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의 일부는 패리스 힐튼의 저택에서 촬영했다. 사실 영화는 소셜 미디어 태동기에 유명인 숭배와 소비주의가 뒤섞인 밀레니엄 시대의 단면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하지만 소피아는 어그 부츠를 신은 10대들과 그들이 숭배하는 리얼리티 스타들이 설치는 시대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게 흉물스럽다고 보지는 않아요. 거만하게 들릴 수 있지만 모든 동기의 큰 부분은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니까요.” 아이러니하게도 소피아의 딸들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도 <블링 링>이다. “딸들은 이 영화가 정말 화려하고 멋지다고 생각해요. 최근에는 영화 속 부츠컷 청바지를 사달라고 조르더군요.” 그녀는 몸서리를 치며 덧붙였다.

    소피아는 딸들의 침실을 보여주지 않았지만, 나중에 후손을 위해 그들의 지저분한 모습을 사진으로 찍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영화 세트장 같아요.” 소피아는 18세가 될 때까지 딸들이 소셜 미디어 계정을 갖는 것을 엄하게 금하고 있다. 그러나 큰아이 로미는 지난해에 잠시 화제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그녀는 “캠프 친구와 저녁을 먹고 싶어서” 아빠의 신용카드로 헬리콥터를 빌리려다 외출이 금지됐다고 말하는 대담한 틱톡 영상을 올렸고, 이를 본 많은 사람이 그녀가 소피아 영화의 불안한 주인공 같다고 댓글을 달았다. 사생활 보호와 그것이 사람들에게 주는 호기심을 중시하는 소피아는 그런 영상이 “나에게 반항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하지만 그녀는 로미가 곧 개봉할 프란시스의 영화에 등장할 거라는 사실을 알릴 수 있어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소피아는 고상한 접시 위에 쇼트브레드 쿠키를 내놨다. 바로 옆엔 지난가을 출간된 그녀의 책 <소피아 코폴라 아카이브(아카이브)>의 원고 더미가 얼기설기 쌓여 있었다. 프린세스 케이크 한 조각처럼 두툼한 분홍빛의 책은 소피아의 커리어를 정리한 스크랩북으로, 각 영화에 대한 짧고 함축적인 소개와 함께 현장 폴라로이드 사진, 손 글씨 메모, 영화 장면 사진, 대본 여백에 썼던 메모, 의상 스케치 및 기타 영화 관련 자료로 수놓여 있었다. 첫 장은 축구장 잔디밭에서 미소 짓고 있는 던스트의 비하인드 신 이미지로 시작된다. 소피아는 20대 초반에 제프리 유제니디스(Jeffrey Eugenides)의 1993년 작 소설 <처녀들, 자살하다>를 읽었는데, 이 소설은 1970년대 미시간주에 사는 다섯 명의 사춘기 자매가 극도로 보수적인 부모의 강압에 시달리다 1년 만에 모두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소피아는 이 책을 읽으면서 누가 영화로 각색하든 망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여겼다고 말했다. 그러다 자신이 그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피아는 이미 어떤 제작자들이 이 책의 판권을 구입해 남성 작가 겸 감독과 함께 작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전부터 대본을 쓰고 있었다. “아버지가 ‘판권이 없는 것을 각색하려고 하지 말라’고 했어요. 아버지는 저에게 다른 일로 넘어가라고 하셨죠.” 대신 소피아는 자신의 대본을 그 제작자들에게 보내고 현재 계약이 무산될 경우 자신에게 감독을 맡겨달라고 요청했다. 1년 후 전화를 받았다. “어리고 순진해서 제가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잘 몰랐어요. 하지만 ‘젠장, 괜찮아, 지금부터 해봐야지’라고 결심했죠.”

    <처녀 자살 소동>은 1998년 여름, 400만 달러의 예산으로 한 달에 걸쳐 촬영했다. 오프닝 장면부터 놀랄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밴드 에어(Air)의 신시사이저 사운드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영화 <로리타>의 현대판처럼, 던스트가 체리 아이스 캔디를 먹으며 더운 길거리를 서성이고 있다. 그 장면부터 영화는 느긋한 속도로 전개된다. 자매들의 슬픔은 거의 드러나지 않지만, 서서히 진행되며 흐르는 그들의 절망이, 말리기 위해 나무 십자가에 걸쳐놓은 분홍색 레이스 브래지어의 인상적인 장면을 비롯해 모든 장면마다 스며들어 있다. 유제니디스는 소녀들을 우상화하지만 그들의 내밀한 삶은 전혀 모르는 동네 소년들이 들려주는 그들의 흐릿한 기억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그런데 소피아의 각본에서는 내레이터가 등장해 카메라가 소년들이 절대 넘볼 수 없는 소녀들의 사적인 공간을 들여다볼 수 있게 했다. 소피아의 책 <아카이브>에는 1998년 유제니디스로부터 받은 이메일도 들어 있다. 그 메일에서 그는 각본에 “소년들, 시간의 흐름, 단절된 내러티브, 적절한 톤 등 이야기에 필요한 지지대가 부족하다”는 우려를 표명한다. 그녀는 또한 최근 유제니디스와 주고받은 메시지도 책에 실었다. 그는 자신이 보낸 메일을 책에 넣어도 될지 묻는 소피아의 요청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때 내가 엄청 징징거렸네.” 영화는 선댄스영화제에서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지만, 소피아에 따르면 미국 배급사인 파라마운트 클래식은 홍보에 소극적이었다. “그들은 10대 소녀들이 이 영화를 보면 자살할 거라고 했죠. 그래서 이 영화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어요.”

    소피아는 차기작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를 자신의 가장 사적인 부분을 담은 영화로 소개했다. 자신의 밀크페드 컬렉션을 홍보하기 위해 떠난 여행을 바탕으로 일본을 배경으로 삼았고, 20대 미국 여성 샬롯이 파크 하얏트 도쿄에서 밥이라는 연로한 유명 배우와 인연을 맺는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녀는 밥 역에 빌 머레이를 염두에 둔 채 대본을 썼고, 1년 동안 그를 쫓아다녔다. 소피아의 친구이자 공동 작업자였던 배우 라시다 존스(Rashida Jones)에 따르면, 그녀는 보조원 한 명을 고용했는데 전화기를 들고 있다가 빌 머레이가 전화하면 그녀에게 알려주는 것이 업무였다. 스칼렛 요한슨이 연기한 샬롯은 똑똑하지만 목적의식이 부족하다. 그녀는 밥에게 “사진을 찍어봤지만 너무 평범해요”라고 말한다. 그녀는 잘나가는 음악 사진가 지오바니 리비시(Giovanni Ribisi)와 결혼했고, 그가 할리우드 유명인, 업계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을 때 호텔 바에서 지루하게 앉아 있을 뿐이다.

    당시 소피아는 스파이크 존즈 감독과 결혼한 후 별거 중이었다. <처녀 자살 소동>의 첫 시사회가 있던 해에 존즈는 자신의 장편영화 감독 데뷔작 <존 말코비치 되기>를 개봉했고, 소피아의 영화는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지만 존즈는 독립 영화계에서 이슈가 되었다. 그녀는 두 사람의 관계에서 자신의 어머니가 겪은 것 같은 그런 감정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존즈와 몇몇 그의 친구들은 감독 모임에 대해 논의했지만, 소피아에 따르면 그들은 그녀에게 함께하자고 권하지는 않았다. “스파이크와 친구들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것은 단지 그곳의 분위기를 이해해야 하는 문제예요. 딱 1990년대 남자들만의 클럽 분위기였어요. 저는 스파이크와 함께 그의 영화를 홍보하러 다녔고, 일종의 아내 역할을 했죠.” (존즈와 인터뷰를 시도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오스카상을 수상했을 뿐 아니라 400만 달러의 예산으로 1억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렸을 때 그녀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제가 정말 제멋대로인 작품을 쓰고 있다고 느꼈어요. 부유한 소녀가 자아를 찾으려는 이야기를 누가 신경이나 쓰겠어요?” 하지만 관객은 영화의 방향성 상실에 대한 흐릿한 분위기와 길을 잃은 두 사람이 잠시나마 서로를 찾는 비극적인 즐거움에 공감했다. 영화 마지막에 밥과 샬롯은 키스를 나누고 밥은 샬롯의 귀에 들리지 않는 무언가를 속삭인다. “심지어 그 대사를 쓴 적도 없어요. 빌은 항상 그 말은 둘만 공유해야 한다고 말했죠.”

    할리우드에는 유명한 격언이 있다. 배우들은 자존감을 올리기 위해 상을 받고 싶어 하는 반면, 감독들은 예산을 늘리기 위해 상을 받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이후 그녀는 많은 대형 영화 제작사로부터 구애를 받았다. 당시 소니 픽처스의 최고 경영자였던 제작자 에이미 파스칼(Amy Pascal) 역시 “그녀와 함께 일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2004년에 두 사람이 마주했을 때 파스칼은 소피아에게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은지 물었다. 소피아는 즉시 대답했다. “마리 앙투아네트 이야기요.”

    <처녀 자살 소동>이 개봉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소피아는 영국 역사학자 안토니아 프레이저(Antonia Fraser)가 쓴 프랑스 왕비 전기의 견본을 읽고 프레이저에게 편지를 보내 영화로 각색하고 싶다는 의견을 전했다. 처음에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생애부터 단두대에 오르기까지를 포괄적으로 다루며 전기적인 각본을 쓰려고 노력했다. 프레이저는 소피아가 ‘성숙한 여성의 비극적 운명’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대본이 마지막 부분에서 에너지를 잃은 것 같다고 그녀에게 말했는데 이것은 그가 나중에 <베니티 페어>에 기고한 글에서 밝힌 부분이다. 또한 그 글에서 프레이저는 “소피아가 ‘정치적인 부분을 빼도 괜찮은지’ 가볍게 물었을 때 ‘마리 앙투아네트도 좋아했을 것’이라고 정직하게 대답했다”고 말했다.

    2006년에 개봉한 소피아의 영화는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사치스럽고 감정 없는 여왕의 이야기를 친밀한 성장 이야기로 보여준다. 열네 살 때 국가 간 평화의 제물로 오스트리아의 집에서 베르사유로 간 순간부터 19년 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면서 왕궁을 떠날 때까지의 이야기다. 소피아는 ‘아이들이 왕국을 장악하는’ 모습을 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던스트가 미국식 억양을 유지하도록 했고, ‘I Want Candy’의 리믹스 음악을 배경으로 한 열광적인 쇼핑 장면을 비롯해 시대를 넘어선 음악과 에너지 넘치는 몽타주로 영화를 가득 채웠다. (영화의 클로즈업 장면 대부분을 촬영한 그녀의 오빠 로만은 로코코 시대 신발 사이에 컨버스 운동화 한 켤레를 슬그머니 끼워 넣었다.) 이 영화는 정말 말도 안 되게 아름답다. 모든 장면이 쁘띠 푸르 한 상자처럼 구성된 달콤함을 지니고 있다. 소피아가 심혈을 기울이는 멋진 오프닝 시퀀스는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델을 촬영한 기 부르댕의 사진에서 영감을 얻었는데, 던스트가 연기한 마리는 페티코트를 입고 있고 하녀는 그녀의 발을 마사지하고 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샌드위치 케이크의 겉 부분을 문지르며 카메라를 향해 거만한 눈빛을 보낸다. 소피아가 아버지에게 영화의 초기 편집본을 보여주었을 때, 그는 루이 16세의 대사를 더 늘리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유제니디스처럼 그도 남성의 관점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피아는 “아빠, 그건 안 돼요”라고 말한 걸 기억하고 있었다. “솔직히 다른 사람의 관점은 신경 쓰지 않아요. 영화에 등장하는 그녀들의 것만이 중요하죠.”

    소피아와 마스는 영화를 제작하며 데이트를 시작했다. 베르사유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마스는 이렇게 회상했다. “박물관에 사는 것 같았어요. 아무것도 어지르면 안 됐죠. 편한 환경이 아니었어요.” <마리 앙투아네트>와 함께 베르사유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는 것은 흥분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모든 프랑스인이 그 결과를 환영한 것은 아니다. 칸에서 열린 언론 상영회에서 일부 관객은 야유를 보냈다. 많은 비평가는 이 영화를 분위기만 앞세운 영화, 비역사적·초현실적 영화라고 폄하했다. 한편에서는 걸작이라고 평했다. 반응이 극명하게 갈리자 <타임스>는 서로 격렬하게 부딪치는 두 명의 수석 영화 평론가의 리뷰를 게재하는 이례적인 결정을 내렸다. ‘안티’ 진영의 마놀라 다기스(Manohla Dargis)는 “공주는 거품 속에 살았고, 소피아 코폴라는 그 거품 안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썼다. (그녀의 절친한 친구 중 한 명인 패션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는 이렇게 말했다. “‘금수저’ 같은 딱지를 붙이는 것은 너무 쉬워요. 뭘 해야 해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자살하라는 건가요? 그냥 예술을 하지 말아야 해요?”) 로저 에버트(Roger Ebert)는 일관된 관점을 이 영화의 강점으로 꼽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이 영화에 대해 읽은 모든 비평은 이 영화의 깨지기 쉬운 마법을 바꾸고, 로맨틱하고 비극적인 신랄함을 교훈적인 영화 수준으로 떨어뜨릴 것이다.”

    스토리텔링에 대한 소피아의 일관된 접근 방식을 어떻게 느끼는지는 관객이 어떤 입장인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가 개봉했을 때 일부 아시아인과 아시아계 미국인 비평가들은 이 영화가 서양인의 시선으로 일본 문화를 묘사한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영화에서는 웃음을 주기 위해 억양 있는 영어가 사용되었다. 브린 모어의 영화학 교수인 호메이 킹(Homay King)은 영화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도쿄의 업소들이 “피상적이고 부적절하게 에로틱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묘사되었다”고 지적했다. 킹은 소피아가 이 묘사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하며 이런 질문을 했다. 당황스러운 오리엔탈리즘의 어조는 영화 속 인물의 것일까, 아니면 그녀의 것일까? 소피아는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며 그녀의 묘사에 대해 변명했다. “제 이야기는 도쿄에 있는 미국인에 관한 것입니다. 결국 그게 제가 아는 전부죠.” 하지만 그녀는 다른 문화를 멀리서 묘사할 때 내재된 민감성을 고려하지 않은 것 같다. “모든 ‘r’과 ‘l’이 바뀌는 것이 불쾌하지 않을까 걱정했죠. 하지만 제작진은 재미있게 느꼈어요.” 그녀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다른 시대였어요. 지금 시대에 그것에 어떻게 접근할지에 대해 가늠해보진 않았지만 아마 같은 방식은 아닐 겁니다.”

    소피아는 최근 미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도 비슷한 반발에 직면했다. “2017년 개봉한 영화 <매혹당한 사람들>은 남북전쟁 당시를 배경으로 한 1971년 영화를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외딴 저택의 기숙학교에 다리를 크게 다친 연합군 병사가 도착하면서 에로틱한 열광에 빠진 남부 백인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또한 원작 영화와 원작 소설에 모두 이 저택에서 일하는 흑인 노예 여성이 등장한다. 고정관념이 지속되는 것을 두려워한 소피아는 이 캐릭터를 완전히 생략하기로 결정하고, 영화 초반에 “전쟁이 거의 끝날 무렵이었고 노예들은 떠났다”는 대사로 그 부재를 설명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영화가 개봉된 후 삭제된 인물에 대한 뜨거운 담론이 일었고, 작가 코리 아타드(Corey Atad)는 <Slate>에서 이 영화가 “노예제도를 화이트워싱했다”고 비난했다.

    그 결과 소피아는 불편한 복잡성을 없애기 위해 자신이 아는 것만 쓰거나, ‘정치를 배제’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걸 깨달았다. <뉴욕> 매거진과 <Vulture>의 비평가 안젤리카 제이드 바스티엔(Angelica Jade Bastién)은 “소피아가 가장 잘하는 것은 현대 백인 여성성에 대한 우화를 만드는 것이지만, 이것은 그녀의 가장 큰 약점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녀는 “예술은 예술가가 원하든 원치 않든 정치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소피아는 백인 문화를 연구하는 사람이지만 자신을 둘러싼 백인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으며 그런 모순 때문에 그녀의 작품이 더 깊어지지 않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소피아 역시 “남북전쟁을 소재로 작업한 것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소피아는 주변에 남자도 없고 돌봐줄 노예도 없는 상황에서 코르셋을 입은 여성들이 해방되는 과정을 묘사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그것은 제가 좋아하는 그런 세계죠. 밀실 공포증을 일으키는 그런 세계요. 돌봄을 받는 데 너무 익숙해져 스스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여자들이 있었던 세상 말이죠.”

    언젠가 소피아는 “가끔 같은 영화를 반복해서 만들다 보면 나 자신이 진부해지는 것같이 느껴진다”고 고백했다. <프리실라>는 어떤 면에서는 그녀의 전작과 닮았지만, <마리 앙투아네트>와 같이 값싼 장신구와 양단으로 장식된 영화와 달리 새 영화는 금빛 새장 안의 삶에 대한 묘사가 놀랍도록 무미건조하다. 소피아가 엘비스 음악의 사용을 거부당했기 때문에 영화에서 로큰롤의 활기찬 분위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프리실라는 주로 엘비스와 집에서 대화를 나누는데, 집에서 엘비스는 편안한 옷차림에 공허해하며 간간이 폭력을 휘두른다. 소피아는 제3의 인물들의 중얼거림을 통해 프리실라의 순진하던 어린 시절을 관객에게 상기시키며 영화를 풀어나간다. 엘비스가 없는 동안 그레이스랜드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려는 스패니의 모습은 영화의 가장 강렬한 장면이다. 그녀는 흰색 드레스와 발에 맞지 않는 헐렁한 하이힐을 신고 인형처럼 돌아다닌다. 거실 이곳저곳에 앉았다가 엘비스의 소형 그랜드피아노의 건반 하나를 누른다. 그녀는 왕국을 장악하는 아이라기보다 집에 혼자 남겨진 아이처럼 보인다.

    소피아가 자신의 영화 속 인물들의 고립된 세계 너머의 사건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 것처럼, 긴 기다림으로부터 탈출한 인물들에게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한 내용은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레이스랜드의 정문을 빠져나가는 스패니의 모습을 비춘다. 그리고 돌리 파튼의 ‘I Will Always Love You’가 애절하면서도 승리에 찬 목소리로 들려온다. 소피아는 한 인터뷰에서 사춘기를 넘어 “성장한 인물의 이야기를 다루고 싶다”는 바람을 내비쳤지만, 그 모습이 어떤 것일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은 거의 없었다.

    소피아는 이제까지 영화에서 나이 많은 유명인과 젊은 여성의 유대를 로맨틱하게 그렸지만, 시대에 따라 그런 관계에 대한 태도도 조금 달라졌음을 고백한다. 〈온 더 록스〉(2020)는 마흔 살의 작가 로라(음악 프로듀서 퀸시 존스의 딸 라시다 존스)와 거물급 미술품 딜러 아빠 펠릭스(빌 머레이)가 중심이 되는 작품이다. 소피아가 ‘자신의 아버지와 그의 친구들’을 모티브로 삼았다고 밝힌 펠릭스는 실크 스카프를 두르고 캐비아를 길거리 간식으로 여기는 사교적인 남성이다. 또 아무에게나 추파를 던지고 남성 우월주의에 빠져 있다. <썸웨어>에는 아버지와 딸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달콤함이 깃들어 있다. 주인공이 이혼한 영화배우 자니 마코(스티븐 도프)와 그의 열한 살짜리 딸 클레오(엘르 패닝)에게 룸서비스로 모든 맛의 젤라토를 주문하게 하는데 이것은 그녀의 아빠가 했을 만한 행동이다. 또한 작고한 샤토 마몽의 ‘노래하는 웨이터’ 로물로 라키(Romulo Laki)에게 엘비스의 노래 ‘(Let Me Be Your) Teddy Bear’를 클레오에게 불러주도록 했는데, 그것 또한 라키가 어린 시절 소피아에게 불러주던 노래다. 다시 <온 더 록스>로 돌아와 소피아는 아버지의 압도적인 궤도에서 벗어나 자신을 정의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로라의 모습을 재미있고 날카롭게 보여준다. 로라는 영화 말미에 자신이 여성 목소리의 주파수에 귀가 먹고 있다고 툴툴거린 아빠에게 “딸과 손녀가 있으니 이제부터라도 딸과 손녀의 목소리를 듣는 방법을 알아내는 게 좋을 거야!”라고 소리친다.

    엘레노어는 프란시스를 위해 그랬던 것처럼 종종 소피아 영화의 비하인드 영상을 촬영했다. 엘레노어는 소피아의 <마리 앙투아네트>에 관한 80시간의 비하인드 영상을 찍었고, 소피아는 현재 그 영상을 다큐멘터리로 만드는 엄마의 작업을 돕고 있다. (2016년 엘레노어는 80세의 나이에 첫 장편 코미디 영화 <파리로 가는 길>을 개봉하며 감독으로 데뷔한 최고령 미국 여성이 되었다.) 최근 엘레노어의 병세가 악화되어 가족들은 그녀를 만나기 위해 캘리포니아에 있는 병원에 자주 방문하고 있다. 어머니의 날과 겹친 지난해 소피아의 생일에 두 사람은 “병원에 앉아 참치 샌드위치를 먹었다”고 엘레노어는 말했다.

    지난해 10월 뉴욕영화제에서 <프리실라>의 미국 시사회가 열렸다. 할리우드의 파업으로 레드 카펫에 선 배우들이 거의 없을 때였다. 하지만 <프리실라>는 대형 영화 제작사의 자금이 투입되지 않은 영화다. 따라서 소피아는 영화에 출연한 스타들과 영화 홍보를 위해 부담 없이 나설 수 있었다. 엘로디와 스패니는 시사회에 참석했지만 소피아는 참석하지 못했다. 제작자인 헨리가 대신해 소피아의 말을 전했다. “여러분과 함께하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이 영화를 지금 제 옆에 함께 계신 제 어머니께 바칩니다.”

    어느 날 저녁, 수백 명의 소피아 팬들이 <아카이브> 책 사인회를 위해 LA 중심가에 있는 반스앤노블에 줄을 서고 있었다. 딸들이 알려준 바에 따르면 소피아는 현재 ‘틱톡의 유명 인사’이며, 일부 Z세대 팬들은 소피아를 인플루언서들의 인플루언서를 칭하는 단어인 ‘엄마’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서점에 모인 이들은 대부분 10대 청소년들이었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마리 앙투아네트 스타일을 연상시키는 반짝이는 분홍색 발레 스커트를 입고, 커다란 리본과 <프리실라>의 스패니가 착용한 하트 펜던트가 달린 초커 등의 액세서리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소피아의 패션 브랜드 밀크페드의 빈티지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이 브랜드는 수년 전부터 판매되고 있었지만 최근 팝 스타 올리비아 로드리고를 비롯한 신세대 뮤지션들에게 인기 있는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처녀 자살 소동>의 스틸 컷이 프린트된 스커트를 입은 한 여성이 자신의 차례가 되자 손을 가슴에 대며 소피아에게 외쳤다. “감독님은 말 그대로 ‘(시대적) 갬성(Aesthetic)’을 만들어냈어요.” 이 여성은 10대들이 소셜 미디어에서 추구하는 정교하게 큐레이팅된 스타일을 가리키는 속어를 사용했다. 팬들의 열광과 소피아의 차분한 에너지 사이에 재미있는 부조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소피아는 팬들의 칭찬을 받으면서도 “오, 고마워요” 또는 “너무 감사한 말씀이에요” 같은 다정한 말 외에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저물 무렵 서점을 나서면서 소피아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영화 이야기를 나누며 아침을 먹곤 했던 베벌리힐스 호텔에서 룸서비스와 함께 보내는 하루를 고대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그곳의 에그 베네딕트는 확실히 최고다). 나는 소피아와 함께 도로변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검은색 차를 향해 걸어갔다. 서점의 강렬한 형광등 불빛이 꺼진 LA 거리에는 한결 차분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나는 말없이 연분홍빛으로 물든 석양을 가리켰다. “아, 그렇군요.” 소피아가 무심하게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다정하게 덧붙였다. “제가 연출한 장면 같군요.” (VK)

      사진
      THEA TRAFF
      RACHEL SY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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