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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재킹’ 비행기에 올라탄 하정우, 여진구, 성동일, 채수빈

2024.06.21

‘하이재킹’ 비행기에 올라탄 하정우, 여진구, 성동일, 채수빈

모든 만남은 충격적이다. 하정우, 여진구, 성동일, 채수빈이 한 비행기에 오르자 발생한 비일상적 난기류.

언제나 기분 좋은 만남. 영화 <하이재킹> 홍보를 위해 <보그>에서 다시 한번 의기투합한 하정우, 여진구, 성동일, 채수빈이 촬영장에 낯선 기류를 일으킨다. 3개월간 대전에서 끈끈하게 교류했던 지난날의 기억이 기분 좋게 불어왔다. 하정우의 포플린 재킷, 팬츠는 프라다(Prada), 네크리스는 톰 우드(Tom Wood). 여진구의 가죽 재킷, 셔츠, 팬츠, 타이는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슈즈는 컨버스(Converse), 왼손에 착용한 링은 톰 우드. 성동일이 입은 재킷과 팬츠는 송지오 옴므(Songzio Homme). 채수빈이 입은 재킷 드레스는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 실버 이어링은 파인 오 카인드(Fine O’ Kind).
하정우는 삶에서 스릴을 추구하는 편이 아니다. 그런 그가 <하이재킹> 김성한 감독의 열정에 순종해 360도로 공중회전하는 ‘임멜만 턴’ 장면은 물론 짐벌에 안착한 비행기 세트에서의 촬영까지 군말 없이 완수했다. 오버사이즈 스트라이프 셔츠, 팬츠, 타이는 돌체앤가바나(Dolce&Gabbana), 왼손의 브레이슬릿과 링은 티파니(Tiffany&Co.).

하늘을 나는 하정우

하정우가 또 비행기를 탔다. 마라톤 영웅 손기정으로 출연한 <1947 보스톤>(2023)에서 미국 군용기에 몸을 싣고, 그보다 한발 앞서 개봉한 <비공식작전>(2023)에서는 외교관 신분으로 비장하게 베이루트행 비행기에 오르더니 이번에는 아예 조종사가 됐다. 새 영화 <하이재킹>의 시대 배경은 1970년대. 하정우가 연기하는 ‘태인’은 유망한 공군 전투기 조종사에서 이유 있는 불복종으로 강제 전역 당한 후 여객기 조종사가 되어 살아간다. 하이재킹이 의심되는 상황에서 납북을 시도하는 여객기 격추 명령을 거부한 것이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인지 김포행 비행에 나선 부기장 태인 앞에 또 한 번의 하이재킹 상황이 펼쳐진다. 이번에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보그> 촬영 직전, 영화에 대한 단서가 야금야금 공개되던 시점에 “평소보다 20배는 힘들었다”는 하정우의 발언이 소요를 일으켰다. 하정우는 익히 알려진 대로 삶에서 스릴을 추구하는 편이 아니다. 그런 그가 관객이 실제 기내에 함께 있는 것처럼 영화 속 일거수일투족을 생생하게 느끼길 바란 김성한 감독의 열정에 순종해 360도로 공중회전하는 ‘임멜만 턴’ 장면은 물론 짐벌에 안착한 비행기 세트에서의 촬영까지 군말 없이 완수한 것이다. “거꾸로 매달리는 장면을 앞두고 여러 번 물었어요. 안전상 괜찮은지, 안전벨트가 잘 버틸 수 있는지, 몸은 와이어로 잡아줄 건지··· 촬영 전에 무술 감독과 모든 게 완벽하게 구동되는지 낱낱이 확인했죠.” 수많은 재난 영화와 <신과함께> 시리즈로 한국 SF 영화의 발달사를 낱낱이 경험한 하정우는 편집본을 본 후 비로소 입봉작을 완성한 동갑내기 김성한 감독에게 “한국의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찬사를 건넸다. “일단 그만큼 외모가 출중하시고요.(웃음) 재난 블록버스터에 꼭 맞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극도로 제한적인 공간에서 전자공학과 출신의 감독이 재난 영화를 찍을 때 어떤 장면이 탄생하는지 바라보는 과정이 굉장히 새로웠습니다.”

<보그> 촬영까지 함께 한 성동일, 여진구, 채수빈과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뜨겁게 열정을 교류한 현장이었다. “저는 촬영지 대전에 아예 3개월 정도 아파트를 얻어서 살았어요. 촬영이 끝나면 배우는 물론 감독님, 프로듀서, 제작자분들까지 드나들며 다 같이 밥을 먹곤 했죠. 어떤 날은 속 시원히 촬영을 마무리하지 못한 장면을 두고 함께 밥을 먹으며 이야기하다가 결국 다시 세트장으로 가서 동선을 짜고 논의를 했어요.” 그 순간이 깊은 잔상으로 남았는지 여진구는 <하이재킹>을 촬영하며 훗날 이런 격의 없는 소통을 이끄는 선배가 되고 싶은 꿈이 생겼다고 했다. “(여)진구는 예능 프로그램 <두발로 티켓팅>에서 먼저 만났는데 진구의 우직함, 진지함, 불덩이 같은 에너지가 좋다고 느끼던 차에 같은 작품으로 만난다고 해서 참 반가웠어요. 게다가 왠지 모르게 진구가 이번 역할에 제격이라는 느낌이 들었죠.” 자신과 마찬가지로 연극을 통해 연기를 시작한 채수빈에게서는 흐뭇한 활력을 느꼈다. “외모는 굉장히 세련되고 20대 같은 모습도 보이지만, 무대에서 내공을 쌓아서인지 연기를 대하는 자세와 리허설에 임하는 모습에서 베테랑다운 클래식한 느낌을 받았어요. 수빈이가 이번 앙상블에 아주 좋은 한 축을 맡아줬죠.” 한국 영화계에서 활약하는 한 서로가 서로에게 결코 피할 수 없는 존재인 성동일은 두말할 필요 없는 든든한 동료였다. “많은 분이 (성)동일 형의 코미디를 좋아하겠지만 후배로서 저는 성동일 배우의 정극 연기를 참 좋아하거든요. <하이재킹>에서 그런 연기를 볼 수 있어서 저와 같은 분들은 참 반가워하실 거예요. 형이랑은 워낙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데 오랜만에 촬영으로 만나니 애틋하더라고요. 제가 어느덧 <국가대표> 때 동일이 형 나이가 됐거든요. 그런 감회를 느끼며 형과 함께 조종석에 앉아 있는데 코가 뜨뜻해지더군요.”

<하이재킹>을 촬영하며 훗날 이런 격의 없는 소통을 이끄는 선배가 되고 싶은 꿈이 생겼다고 고백한 여진구에 대해 하정우가 애정을 담아 이야기했다. “(여)진구는 예능 프로그램 <두발로 티켓팅>에서 먼저 만났는데 진구의 우직함, 진지함, 불덩이 같은 에너지가 좋다고 느끼던 차에 같은 작품으로 만난다고 해서 참 반가웠어요. 게다가 왠지 모르게 진구가 이번 역할에 제격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여진구의 오버사이즈 코트는 메종 마르지엘라(Maison Margiela), 팬츠는 루이 비통(Louis Vuitton), 네크리스는 베르사체(Versace). 하정우의 화이트 재킷, 와이드 니트 팬츠는 제냐(Zegna), 화이트 폴로 셔츠와 블랙 타이는 잉크(Eenk).

편안하면서도 절제된 올 블랙 스타일로 상쾌한 향을 휘감고 인터뷰에 임한 하정우가 충분히 진중하고 은근슬쩍 위트 있는 타고난 말솜씨로 대화를 부드럽게 이끌었다. 자신과 한국 영화에 대해 갈수록 높아지는 관객의 기대 속에 매번 새로운 배우들과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미션에 임하는 일은 만만찮다고 터놓는 순간에도 어쩐지 내 마음은 편안했다. 그가 이번에도 완벽하게 해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놀라운 싱크로율의 말년 병장 연기로 위대한 탄생을 알린 <용서받지 못한 자>(2005)부터 자신의 존재를 명징하게 각인시킨 <추격자>(2008)와 <국가대표>(2009), 천만 영화 <암살>(2015)과 <신과함께>(2017·2018) 등을 관통하며 차곡차곡 쌓인 신뢰였다. 그러나 하정우가 스스로에 대해 확신하는 것은 많지 않다. 촬영에 돌입하기 전, 그가 여전히 준비 과정에 많은 공을 들이는 이유다. “‘현장 가면 잘되겠지’라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아요. 예습을 많이 하고 회의도 꼼꼼히 합니다. 정말 사소한 것에서 사고가 발생하고, 촬영이 무산되는 일을 여러 번 겪어왔기 때문에 어떻게 연기해야 하는지, 어떤 걸 더 준비해야 할지 살뜰히 살피죠. 현장에서 준비가 미흡한 부분이 보이면 선뜻 제안하는 편이고요.” 현장의 즉흥적인 에너지를 사랑하고 동료와의 폭발적인 시너지를 기대하지만 하정우는 그것은 자신이 신경 쓸 일은 아니라고 못 박아 이야기한다. “물리적인 연습량과 감독과의 깊은 소통”의 힘을 믿는 하정우는 최선을 다하는 데 전념할 뿐이다.

<하이재킹>은 팬데믹이 끝난 후 하정우가 처음으로 촬영한 작품이다. “<1947 보스톤>과 <비공식작전>은 코로나19 이전에 찍은 영화이기 때문에 <하이재킹>은 배우 하정우의 새로운 파트를 여는 작품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웃음)” 그는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여러 곳에서 ‘이야기의 힘’을 강조했다. “영화의 바탕이 되는 이야기가 실화라는 점도 놀라웠지만 많은 사람이 힘을 합쳐서 위기의 순간을 극복하는 이야기 자체가 특별하게 느껴졌어요. 분리되고 단절되는 요즘 시대에 한 비행기 안에서 같은 위기를 맞닥뜨린 그 시절 승무원들과 승객들이 어떻게 함께 난관을 극복해나가는지 흥미롭게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게다가 빈틈없는 앙상블을 위해 김성한 감독이 한 명 한 명 공들여 캐스팅한 60여 명의 승객은 이야기의 밀도를 더욱 높여주었다. “내로라하는 선배님들과 극단 대표님, 연극계의 에이스까지 베테랑들이 다 모인 환경이었어요. 매일 오전 9시 정도에 촬영을 시작했는데 이분들은 보통 새벽 4시부터 오셔서 준비를 시작했죠. 리허설할 때마다 에너지가 정말 어마어마하게 느껴졌습니다. 저 혼자 연기하면 되는 장면에서도 그 좁은 기내에서 끝까지 다 지켜보고 계셨고요. 저보다 몇 시간씩 일찍 와서 준비한 선배님들 앞에서 리허설하는 기분은 정말··· 긴장도 되고, 책임감도 막중했죠. 정말 충실하게 연기해야겠다는 생각밖에는 안 들더라고요.”

출연·제작·기획·감독 등 다양한 직무를 맡아왔으며 올해 안에 자신의 세 번째 연출작 <로비>를 선보일 계획이지만 하정우의 본진은 배우다. 그가 뿔테 안경을 추켜올리며 확신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감독과 제작자로서의 경험이 정말 소중하긴 하지만 제 본업은 여전히 배우입니다. 아무리 좋은 작품이고 좋은 시간을 보냈다고 해도 관객에게 외면당하면 그건 그 나름대로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수도 없이 마주한 관객이지만 관객의 마음을 아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가슴을 뛰게 하며 항상 설렘을 안고 촬영장으로 향하게 한다. 그렇게 얻은 ‘최연소 1억 배우’라는 타이틀은 하정우가 언제나 맡은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왔으며 관객의 칭찬을 꾸준히 받아온 배우임을 보증한다. “20대에 영화에 출연해서 어느덧 40대 중반이군요. 30대 중반에 시작한 연출과 제작에 계속 도전하고 있고요. 어떤 배우가 20대부터 영화와 관련된 온갖 일을 벌이면서 어떻게 50대·60대·70대를 맞이하는지, 앞으로도 즐겁게 지켜보실 수 있을 거예요.”

연기 이외의 것들도 여정의 훌륭한 연료가 된다. 비공식 학교까지 세우고 주변의 모든 이에게 장려할 만큼 걷기를 즐기고, 두 권의 에세이를 집필한 하정우는 요리, 미술에도 능한 만능 재주꾼이다. 남다른 감각으로 도전할 때마다 기대 이상의 수확을 거둬온 하정우는 올해 <하이재킹> 후에도 세 번째 연출작 <로비>와 화가 하정우의 개인전을 선보이며 추가 소득을 노린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지금까지 잘 왔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 사이사이 수많은 고비와 슬럼프, 고민이 있었던 것도 분명하거든요. 그런 것으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워질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아요. 육체와 정신의 건강을 잘 지키면서 영화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죠.” 10년 전 동시에 모든 일이 한꺼번에 닥치며 과로와 부담감으로 숨이 ‘턱’ 멈췄던 과거가 재현되지 않도록 그는 달리는 템포와 이 모든 일을 감당하는 스스로의 한 발 한 발에 신경을 쏟고 있다. “워낙 가만있지 못하는 성격이라 요즘엔 무리해서 다른 일을 많이 안 벌이려고 노력해요.” 꽤 명성을 떨친 에세이집 <걷는 사람, 하정우>(2018)에서 하정우는 난기류에 대한 공포를 서서히 극복하는 중이라 털어놓았지만 2024년의 하정우는 여전히 난기류가 두렵다. 그러나 하정우는 이제 새로운 여정에 대한 설렘과 난기류에 대한 두려움은 공존하는 것임을 분명히 안다. 흔들리는 와중에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도. 류가영 <보그> 피처 에디터

여진구에게 연기란 애매모호한 지점을 해소하는 과정이다. “욕심인지도 모르지만 제 연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를 끄덕이게 만들기를 원해요. 캐릭터로 말하고 호흡하는 모든 순간에 어색한 기류는 전혀 없는지, 항상 그걸 날카롭게 포착하려고 신경을 많이 쓰죠.” 트렌치 코트는 버버리(Burberry), 스트라이프 셔츠는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팬츠는 송지오 옴므(Songzio Homme), 슈즈는 로스트가든(Lostgarden).

유리한 고도, 여진구

“열네 살 정도였던 것 같아요. 드라마 <자이언트>라는 작품을 하면서 처음으로 감독님께 ‘너라면 어떨 것 같아?’라는 질문을 받았죠. 배우로서의 접근이란 게 생긴 순간이었어요. 앞으로도 계속 이런 고민을 하는 배우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역 배우로 시작해 어느덧 20년 경력자가 된 여진구에게 연기를 운명으로 받아들인 시점을 묻자 여러 번 곱씹고 되뇌며 정리한 화두인 듯 그가 일목요연하게 대답했다. 그로부터 12년 후 <하이재킹>의 김성한 감독은 “역할에 대한 고민을 밤늦게까지 함께 나눠준 여진구에게 감사하다”고 이야기했다. 2년 만의 주연작인 <하이재킹>에서 여진구는 북으로 회항하라는 협박을 가하며 승객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여객기 납치범 ‘용대’로 등장한다. 처음엔 그저 생애 첫 악역이라는 새로운 도전 앞에 심장이 뛰었다. 그러나 촬영을 준비하며 만난 수많은 의문이 그를 괴롭혔다.

“용대의 모티브가 된 실제 인물의 나이도 20대 초반이었어요. 어린 나이에 그토록 엄청난 일을 감행한 그에게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더라고요. 제작진, 출연진과 함께 고민을 거듭한 끝에 ‘용대는 그냥 절박했던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삶을 놓지 않기 위해 겨우 찾아낸 방법이 그거였던 거죠.” 용대가 선택에 확신을 느끼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서스펜스. 결코 도망칠 수 없는 상황에서 승객들은 영문도 모른 채 목숨을 위협받게 된다. 어려운 가정환경, 북한 인민군 장교가 된 형으로 인해 남한에서 받아야 했던 참을 수 없는 차별과 괄시, 억울한 누명과 어머니의 죽음까지, 벼랑 끝에 몰린 용대를 만들어가는 작업은 끝없는 논의를 부추겼다. “용대에게 이입하다 보면 애처롭고 가슴 아픈 순간도 생겼지만 그게 관객이 느끼는 주된 감정은 아니길 바랐기 때문에 감독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배우로서 맡은 인물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무조건 옹호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그런 고민을 함께 나눠주신 감독님께 정말 감사했습니다. 함께 골몰할 수 있는 현장을 만나서 참 행복하기도 했고요.”

여진구에게 연기란 애매모호한 지점을 해소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기어이 찾아낸 답으로 현장의 모든 사람을 납득시킬 때 해피 엔딩을 맞이한다. “욕심인지도 모르지만 제 연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를 끄덕이게 만들기를 원해요. 캐릭터로 말하고 호흡하는 모든 순간에 어색한 기류는 전혀 없는지, 항상 그걸 날카롭게 포착하려고 신경을 많이 쓰죠.” 과거 어느 인터뷰에서 여진구는 “배우에겐 감각이 중요하다”는 소신을 터놓았다. 그리고 그 감각이란, 배우와 캐릭터로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영혼으로 한결같은 설득력을 유지하는 능력을 의미한다는 것을, 여진구는 바로 옆에서 수많은 선배의 연기를 바라보며 조금씩 깨달아갔다. “그런 감각을 키우려면 고민도 많이 하고, 많은 걸 경험해봐야 하는 것 같더라고요. 선배님들이 배우라면 연극을 한 번쯤 해봐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시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요. 바로바로 피드백이 오는 환경에서 긴 호흡의 연기를 펼치는 훈련을 해볼 수 있으니까요. 좋은 기회가 온다면 저도 꼭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드라마 <사랑하고 싶다>(2006)에서 부자 관계로 마주한 후 여전히 때때로 자신을 ‘아들’이라 부르는 성동일과 오랜 롤모델 하정우와의 만남은 가슴속 열의에 또 한 번 불을 지폈다. “두 선배님은 현장 전체의 감각과 공기의 흐름까지 읽는 것 같더라고요. 옆에 있으면 그냥 계속 바라보게만 돼요. 저도 어느덧 누군가의 선배로 촬영에 임할 때가 많아졌는데 두 선배님은 정말 ‘어나더 레벨’인 것 같습니다.” 촬영을 위해 대전에 머무는 동안 달리 할 일이 많지 않기도 했지만 유독 애착이 갔던 이번 현장에서 여진구는 언제 어디서든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지금도 <하이재킹> 홍보를 위해 다들 만나면 일단 기분이 아주 좋아요. 촬영 끝나면 다 같이 점심 먹고, 저녁까지 먹고, 술도 곁들이며 실컷 작품 이야기하다가 다음 날 또 촬영장에 가는 대전에서의 모든 시간이 너무 행복했거든요. 저는 그런 일상적 교류에서 비롯되는 시너지가 크다고 믿는 사람이에요. 갈수록 촬영 환경이 점점 더 깔끔하고 효율적으로 달라지면서 좋은 점도 많아졌지만 가끔은 끈끈하게 교류하며 무언가를 함께 만들어가는 사람 냄새 나는 현장이 그립더라고요.”

<하이재킹>을 촬영하며 훗날 이런 격의 없는 소통을 이끄는 선배가 되고 싶은 꿈이 생겼다고 고백한 여진구에 대해 하정우가 애정을 담아 이야기했다. “(여)진구는 예능 프로그램 <두발로 티켓팅>에서 먼저 만났는데 진구의 우직함, 진지함, 불덩이 같은 에너지가 좋다고 느끼던 차에 같은 작품으로 만난다고 해서 참 반가웠어요. 게다가 왠지 모르게 진구가 이번 역할에 제격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여진구의 오버사이즈 코트는 메종 마르지엘라(Maison Margiela), 팬츠는 루이 비통(Louis Vuitton), 네크리스는 베르사체(Versace). 하정우의 화이트 재킷, 와이드 니트 팬츠는 제냐(Zegna), 화이트 폴로 셔츠와 블랙 타이는 잉크(Eenk).

신하균, 주지훈, 조인성, 이준기, 김수현, 장혁… 수많은 ‘형들’의 아역을 독차지해온 여진구는 2013년 영화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와 시트콤 <감자별 2013QR3>으로 마침내 고유한 존재가 되어 우뚝 섰다. 이후 일인이역을 소화한 <왕이 된 남자>와 까칠하고 날카로운 매력을 선보인 <호텔 델루나>를 만난 2019년은 연기에서 자신감을 장착한 해다. “주연의 부담감과 책임감을 느끼게 된 시점에 또 고민이 시작됐어요. 단순히 재미로만 연기를 하는 단계를 벗어나 이런 삶을 얼마나 오래 지속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했죠.” 어릴 때부터 익숙하게 받아온 칭찬을 더 이상 당연하게 바랄 수 없게 된 순간, 여진구는 과거에 호소하지 않고 계속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어렵지만 보람 있는 길을 택했다. “성적이 좋지 않을 때도 있었고 혼날 때도 있었어요. 결과나 성과만 중요하게 여길 때도 있었죠. 하지만 수많은 현장에서 수많은 선배님을 만난 결과 훌륭하지 않은 배우는 단 한 명도 없었어요. 결국 과정이 행복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죠. 재능 있는 사람들과 이런저런 일을 함께 겪었다는 그 친밀감, 마지막에는 그 추억만 남더라고요.” 배우 여진구로서뿐 아니라 인간 여진구로서도 충만한 삶을 살고자 요리, 필름 사진, 플라모델 조립, LP 수집 등 수많은 취미에 도전했지만 그럴수록 연기에 대한 확신만 더해졌을 뿐이었다. “흥미를 느끼고 그때그때 배우고 싶은 것들은 많은데 평생 업으로 삼을 수 있겠다고 느껴지는 건 연기 말고는 없었어요. 그러니 배우로 살 수 있는 지금이 너무 감사하죠.” <하이재킹>이 삶의 전부였던 시간 속에서 여진구가 가장 자주 경험한 감정 역시 ‘고마움’이다. “우스운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살면서 용대와 같은 핍박과 차별은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다는 데서 위안을 느끼기도 했어요. 배우라는 직업의 가장 큰 매력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짜인 영화 <트루먼 쇼> 같은 상황에서 항상 새로운 삶을 살며 새로운 감정을 느끼게 되는 점이죠. 앞으로도 그런 설렘이 느껴지는 역할과 작품을 더 많이 만나고 싶어요.”

좋아해서 하는 일일 뿐인데 주어지는 찬사 역시 기적처럼 여겨진다. 여진구가 현장 바깥에서 개인적으로 벌이는 크고 작은 일들은 그 호응에 보답하기 위한 행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의 꾸준한 취미 생활인 필름 사진 역시 팬들과의 소통을 위해 시작한 도전. 최근에는 일본과 인도네시아에서 팬 미팅을 열고 팬들을 직접 마주하기도 했다. “배우이다 보니 무대에서 팬들과 만나는 게 처음에는 어색했어요. 그런데 이번에 팬 미팅을 열어보니 오히려 주기적으로 이런 기회를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그러지 않으면 저를 응원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없으니까요. 그런 마음이 드니 전보다 팬들을 훨씬 편하게 마주하게 됐어요. 가끔은 정말 보고 싶기도 해요.(웃음)”

자신을 둘러싼 외부 세계에 유연하게 반응하는 여진구의 세계는 아직 말랑말랑하다. 그는 <하이재킹>이 자신의 연기 인생에 변곡점이 될 작품이라 확신하면서도 10년 뒤, 20년 뒤에 이 필모그래피를 어떻게 평하게 될지는 모르겠다며 열린 결말을 드리웠다. “촬영하는 내내 배우로서, 인간으로서 맞닥뜨린 수많은 질문에 충실하게 답했어요. 그런 과정이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해준 작품이고, 훌륭한 배우가 아니라 행복한 배우가 되고 싶다고 다짐하게 해준 작품이기도 하죠. <하이재킹>은 저에게 채점은 다 되어 있되 점수는 기재되지 않은 시험지 같다고나 할까요. 시기마다 돌아봤을 때 채점 결과가 달라질 것만 같아서요. 좀 난해한가요? 하하.” 지금으로서는 꽤 많은 동그라미가 쳐져 있다고 그가 특유의 동굴 목소리로 덧붙인다. 그렇게 여진구가 유리한 고지를 점한다. 류가영 <보그> 피처 에디터

<하이재킹>의 이옥순이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책임감을 느끼는 승무원이듯 채수빈 역시 배우로서 자신의 직업에 대한 만만찮은 자부심과 책임감을 느낀다. 퍼프 슬리브 롬퍼스는 셀프 포트레이트(Self-Portrait), 보더 햇은 로저 비비에(Roger Vivier), 진주 이어링은 빈티지 헐리우드(Vintage Hollywood).

처음 느낌 그대로, 채수빈

‘만약’이라는 단어는 대체로 부질없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 부질없는 상상에 곧잘 빠져드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나’를 염두에 두고 떠올려본다는 건 오히려 지금의 ‘나’를 더 또렷하게 인식하고자 하는 열망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채수빈에게 던진 첫 번째 질문. 올해로 연기를 시작한 지 10년이 됐다는 그녀가 만약 배우가 되지 않았다면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실제로 그런 상상을 해본 적은 있을까? “정말 신기하게도 얼마 전에 떠올려본 주제예요! 사실 제가 쓸데없는 생각을 진짜 많이 하거든요. 배우라는 직업을 갖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와는 다른 사람으로 살고 있지 않을까요? 확실히 다르겠죠. 일반적인 회사원으로 살았다면 적어도 누가 갑자기 인사를 건넬 때 ‘안녕하세요’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사람은 아닐 테니까요. 속으로 ‘뭐지?’ 하며 그냥 지나쳤을 테고, 취향도, 분위기도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을 거예요.”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뚜렷한 계기는 없어요. 차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속으로 ‘아니, 잠깐만’ 이러면서 가늠해봤죠.(웃음) 사실 제가 완전 ‘N’이거든요. 매일매일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타입이에요.” 역할에 대한 고민도 버거운데 생각이 많아서 피곤하진 않을까? “생각이 많아서 잠이 안 온다는 친구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는데 잠은 또 잘 자요. 그런 것으로 스트레스 받진 않거든요. 늘 이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오히려 생각을 멈추는 법을 잘 모르겠어요.”

<하이재킹>에서 채수빈이 맡은 인물 ‘이옥순’은 민간 항공기 승무원이다. 둥글둥글한 보브 커트에 짙은 네이비색 유니폼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등장하는 이옥순은 비행기를 덮친 아슬아슬한 위기 상황을 꼿꼿하게 이겨낸다. 사실상 밀폐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공의 비행기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긴박한 위기 속에서 그 안에 자리한 승무원은 납치된 인원 중 하나이기도 하지만 비행 관계자로서 승객과 납치범 사이에 자리하는 가교 역할을 해내야 하는 인물로서 특별하다. 그만큼 특정한 시대와 특정한 직업, 특정한 사건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배우의 역할과 역량이 요구되는 인물이다. “1970년대에는 승무원이 꿈의 직업이었대요. 여성이 다양한 직업을 갖지 못할 때였고, 그만큼 승무원이 되는 것도 지금보다 더 힘들었기 때문에 일에 대한 자부심도 상당했을 거예요. 실제로 1970년대에 승무원으로 일하셨던 분을 만나 당시 어떤 환경에서 일했는지 자문을 받기도 했어요. 저는 기내에서만 등장하는 캐릭터라 촬영을 전부 세트에서만 진행했거든요. 무엇보다 세트 완성도가 정말 높았어요. 지금 우리가 타는 비행기와 다른 부분도 많더라고요. 예를 들어 지금은 좌석 위 짐칸 뚜껑을 닫잖아요. 당시에는 기차처럼 짐을 얹을 수 있는 선반만 있어서 그 위에 올려놓는 게 전부였고, 좌석 자체도 약간 버스 같은 느낌이랄까요? 그게 좀 신기했어요. 고풍스러우면서도 예뻐 보이더라고요. 맨 처음 ‘와, 예쁘다’ 감탄하며 세트장에 들어갔던 기억이 나요.”

흥미롭게도 채수빈이 배우로서 공항에 근무한 건 처음이 아니다. 2018년 방영한 드라마 <여우각시별>에서 연기한 한여름은 인천국제공항에서 일하는 여객서비스팀 직원이었다. 공항에서 일하느라 비행기를 타본 적은 없었지만. 문득 전생에 <하이재킹>에서 험한 비행을 겪은 이옥순이 다음 생에 비행기 탈 일이 없는 한여름으로 환생한 게 아닐까 하는 즐거운 상상이 이어졌다. <여우각시별>은 채수빈에게 SBS 연기대상 월화 드라마 부문 여자 우수 연기상 트로피를 안긴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물론 상을 받은 게 처음은 아니었다. 그보다 먼저 채수빈은 KBS에서 여자 신인 연기상을, MBC에서 여자 우수 연기상을 받았다. 수상 여부가 배우의 자격을 증명하는 절대 기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만들고 살아가는 데 격려가 되는 법이다. 기분 좋은 수상은 채수빈이 배우로 계속 살아가는 데도 힘을 실어줬을 것이다. “학교 다닐 때도 상은 많이 못 받아봤는데, 너무 힘이 되고 고마운 일이죠. 팬들과 소규모로 만나 얘기를 나눠보면 대외적으로 아주 잘된 작품이 아니더라도 인생 작품처럼 여겨주고 ‘소중하다’고 표현해주는 작품이 있더라고요. 그럴 때 정말 행복하고 감사해요. 이렇게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랍고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죠. 작품이 잘되고, 못되고, 이걸 떠나서 작품을 잘 만들고 캐릭터를 잘 표현할 수 있는 배우가 돼야겠다, 이런 마음이 더 커져요.”

<하이재킹>의 이옥순이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책임감을 느끼는 존재이듯 채수빈 역시 배우로서 자신의 직업에 대한 만만찮은 자부심과 책임감을 느낀다. 이는 지난 10여 년의 시간을 배우로서 지나오며 얻은 수확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부심과 책임감을 유지하기 위해 감당해야 할 것은 결코 적지 않다. 데뷔 초부터 재빠르게 드라마 주연을 맡아온 채수빈이 지난 10년 동안 연기하는 기쁨에만 젖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처음에는 연기하는 게 너무 재미있었어요. 살아보지 못한 삶을 겪어보고 표현하는 과정 자체가 즐거웠고 작품에 누가 되지 않게 내 몫을 잘하자는 생각만 했죠. 그런데 어떤 수치만 보고 ‘이건 망했네’라는 식의 이야기를 듣게 될 때는 속상하더라고요. 지금까지 출연한 걸 후회하는 작품은 전혀 없지만 그렇게 숫자로 쉽게 판단하는 걸 듣게 되면 상처가 됐어요. 차라리 못생겼다는 평가는 개인적인 취향이니까 인정할 수 있지만 연기나 작품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걸 듣게 되면 속상하더라고요. 그래서 언젠가부터 드라마를 찍는 게 조심스럽기도 했고, 그러면서 배울 점이 많은 선배들과 함께할 수 있는 작품에 참여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 같아요. 부담감이 없진 않았어요.”

하정우의 코트와 화이트 셔츠, 팬츠, 타이, 부츠는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 채수빈이 입은 시스루 슬리브의 블랙 미니 드레스는 발렌티노(Valentino), 진주 이어링은 데누(Denu). 성동일이 입은 재킷은 발로렌(Valoren), 팬츠는 써티원더(31The).

그런 의미에서 <하이재킹>은 흥미로운 이륙이자 착륙이었다. 러닝타임 내내 제한된 공간 안에 모든 인물을 몰아넣고 펼쳐지는 사건을 다룬 영화라는 사실은 촬영 내내 모든 배우가 한자리에서 의기투합하듯 촬영을 이어가는 새로운 즐거움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연극 <그와 그녀의 목요일>로 연기 경력을 시작한 만큼 무대 같은 공간 안에서 촬영하는 묘미가 있지 않았을까? “뭔가 따뜻했어요. 선배님들뿐 아니라 기내에 탑승하는 단역 배우분들도 계속 함께했거든요. 촬영하다 보면 신마다 환경이 바뀌니까 단역 배우들은 계속 바뀌잖아요. 그런데 <하이재킹>에서는 그분들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함께하다 보니까 점점 익숙해지고 어느새 장난칠 정도로 친해지고, 얘기도 많이 나눌 수 있었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연극 느낌이 있었죠.”

<하이재킹>의 옥순이 납치범과 직접적인 격투를 벌일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건 리암 니슨 같은 배우가 할 일이다. 하지만 비행기가 뒤집어지고 추락할 수 있는 극한의 위기 속에 자리한 캐릭터인 만큼 몸을 날려야 할 일이 생각보다 많았다. “체질에 맞지는 않았어요. 전 그냥 대사 주고받는 게 좋습니다.(웃음) 물론 끝내 부딪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최선을 다해 준비한 다음 더 깊이 고민하지 말고 직접 부딪쳐야겠죠.”

어느덧 연기를 시작한 지 10년이 됐으니 배우로서 좀 더 뚜렷한 욕심이 생기는 단계가 아닐까? 이른바 대표작 같은 것을 갖고 싶다는 욕심 말이다. “채수빈이라고 하면 ‘그 작품!’ 이렇게 기억할 수 있는 인생 작품을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지만 그 작품이 또 넘어야 할 산처럼 갑갑하게 느껴질 수도 있잖아요. 욕심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렇다고 욕심내서 그것만 바라보고 달려가고 싶진 않아요. 어떤 목표를 가졌다고 거기 매달려서 가는 건 제 정서에 맞지 않아요.(웃음)”

그렇다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채수빈에게 연기가, 배우가 매력적으로 다가온 첫 순간은 언제였을까? 무엇에 사로잡혔을까? “초등학교 3학년 때 드라마를 보는데 연기가 너무 재미있어 보였어요. 저 배우는 이 작품에서 이런 삶을 살다가 다른 작품에서는 또 다른 삶을 살 텐데, 그렇게 여러 삶을 경험할 수 있다니 너무 놀랍고 흥미로운 삶처럼 느껴지더라고요. 물론 배우가 된 후로는 연기가 또 다른 삶을 경험하는 데서 그치는 작업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됐지만 그래도 실제로 그런 매력이 큰 것 같아요. 살면서 깊은 관심을 갖지 못한 분야를 깊이 경험하는 직업이니까요.” <하이재킹>이라는 새로운 미션을 마무리한 채수빈은 여전히 원점에 머물기로 결심한다. 지금과 같은 삶을 살고 싶었던 이유가 오직 그 처음 때문이었음을 기억하며 구름에 가려진 알 수 없는 미래를 즐겁게 기대한다. 처음 느낀 그 설렘을 그대로 안고. 민용준 영화 저널리스트

언제나 확실한 개성으로 무장한 채 현장에 등장하는 성동일은 <하이재킹>에서 평소보다 힘을 뺐다. “‘노멀’하게 연기했어요. 특이한 목소리를 내거나 독특한 것 하나 보여줄 거라는 기대감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기장 역할에 충실했죠.” 화이트 코튼 트위드 집업 재킷, 셔츠는 써티원더(31The).

사계절과 스포츠를 위한 기술, 성동일

“고향이 전라도 맞지?” 성동일 배우 인터뷰가 예정돼 있다고 하니 아내가 대뜸 물었다. 덕분에 질문 하나를 건졌다. 아마 많은 이가 그렇게 확신하고 있을 것이다. ‘응답하라’ 시리즈를 비롯해 그간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몇몇 캐릭터를 연기하며 대중적으로 확실한 인상을 남긴 덕분이다. 전라도 토박이라는 확신을 갖게 할 만큼 능수능란한 사투리 연기가 성동일의 고향을 완전히 오해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성동일은 인천에서 나고 자랐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전라도 사투리에만 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입금만 되면 경상도, 충청도, 제주도, 닥치는 대로 하는 거죠.(웃음) 어느 지역 사투리를 배워야겠다 마음먹으면 5일장 같은 그 지역 장터를 방문하곤 했어요. 서너 시쯤 전통 시장 선술집에 노인들이 모여들어 술을 마시기 시작하거든요. 그러면 그쪽으로 카메라를 은근슬쩍 설치해놓고 계속 밥을 먹고 술을 마시는 겁니다. 예전에 그렇게 한창 다닐 때는 한 번에 테이프 3개 정도는 녹화해오곤 했어요. 나중에 보면 얼마나 재미있는지 몰라요. 진짜 사투리가 거기 다 있죠.”

성동일은 자신을 ‘기술자’라 정의한다. 물론 예술가로서 배우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저 연기를 대하는 배우 성동일의 관점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1년 일한 목수와 30년 일한 목수가 다를 수밖에 없잖아요. 연기도 많이 해봐야 해요. 그렇게 기술을 쌓는 거죠. 연기라는 게 몸으로만 하는 게 아니에요. 카메라도 알아야 하고, 오디오도 파악해야 하고, 이런 걸 알아야 하는데 이게 다 기술이라는 거죠. 그래서 종종 후배들한테 작품 가리지 말고 들어오면 다 하라고 해요. 어차피 나이 먹으면 안 들어와!(웃음)”

1984년부터 연극 무대에서 연기를 시작한 성동일은 1991년 SBS 1기 공채 탤런트 출신이다. 맨 처음 드라마 주인공을 맡았을 때, 내심 ‘고생은 끝났구나’ 여겼지만 그것이 되레 시작이었다. 대극장에서 선배들에게 호되게 배운 육성 발성, 소위 ‘목욕탕 목소리’가 걸림돌이었다. “감독님이 자꾸 ‘네 목소리로 해’라고 하는데 뭔 소리인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러다가 나중에 감독님께 하도 욕을 먹으니까 안돼 보였는지 동시녹음 감독님께서 내 목소리를 들려주더라고. 당시에는 릴 테이프로 녹음하던 시절이었잖아요. 그걸 듣고 깨달았지. 정말 너무 어색한 거야. 그걸 7년 만에 알게 된 거예요.”

“강한 자가 오래 살아남는 게 아니라 오래 살아남은 자가 강하다”는 말은 다소 음험한 의도가 담긴 듯해서 마냥 수긍하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 살아남는다’는 것과 ‘강하다’는 속성이 서로 어렵지 않게 연결된다는 데는 충분히 납득할 만한 구석이 있다. 오래 지속된 시간은 그 자체로 독별한 의미를 품고 낳는 법이니까. 성동일에게 그 시간을 지탱한 비결을 물었다. “제 연기는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사실 저 혼자 캐릭터를 만들어낼 수 없어요.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겠어요. 항상 주변에서 찾는 거죠. <추노>의 천지호도 저만 아는 모델이 있어요. <미스 함무라비>에서 판사 역할을 맡았을 때는 제가 아는 판사 친구 세 명을 불러서 이야기했죠. 이번에 판사 연기를 해야 하니까 너희 셋 중 누가 잘 맞는지 술 한잔 마시면서 보자고.(웃음) 그리고 방송 나가니까 한 명이 연락하더라고요. ‘형, 내 흉내 내더라?’ 물론 사기꾼 캐릭터를 연기한다고 사기꾼을 만날 수는 없겠죠. 그냥 주변에서 참고할 만한 말투나 버릇을 가진 사람을 최대한 찾아보는 거예요. 그래서 후배들에게 늘 강조하죠. 사람 가리지 말고 만나라. 대신 돈거래는 하지 마라.(웃음)”

영화 <하이재킹>에서 성동일이 연기한 ‘규식’은 비행기 기장이다. 그가 이번에는 또 얼마나 개성 있는 캐릭터를 연기했을까 궁금했다. “‘노멀’하게 연기했어요. 특이한 목소리를 내거나 독특한 것 하나 보여줄 거라는 기대감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기장 역할에 충실했죠. 나름 따뜻한 선배 역할이에요. ‘오늘은 네가 한번 해봐. 너한테 내 목숨 한번 맡겨보려고’라는 대사를 말할 땐 제가 맡은 역할이지만 규식이 되게 멋있다고 느꼈어요.”

비좁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극한의 상황을 그리는 영화인 만큼 캐릭터 간의 심리적 충돌과 갈등, 혼란을 치열하게 표현하는 배우들의 합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작품이기도 했다. 그만큼 배우들도 사전 리허설에 진심이었다. “내 것만 달달 외우고 가면 상대방이 어떤 톤의 대사를 내뱉는지, 거기에 담긴 감정을 모르잖아요. 그래서 리허설을 충분히 거듭해서 상대방과 톤을 맞추고 지금 촬영하는 장면의 전후 맥락에 맞게 톤의 변화도 잡는 거죠. 배우들끼리 감정을 받아줄 때는 받아주고, 밀어줄 때는 밀어주고. <하이재킹>에서 그런 과정을 유독 자주 경험한 것 같아요. ‘숨은그림찾기’ 하는 기분이었달까요. 어차피 전체 흐름이야 감독님이 잡아주는 것이니 배우는 빈틈을 찾아서 살짝살짝 디테일을 잡는 게 중요한데 그게 혼자서는 아무리 해도 잘 안 보여요. 하지만 리허설을 하면서 서로 호흡을 주고받다 보면 분명하게 보이거든요. 그러면 ‘오늘도 숨은 그림 하나 찾았네’ 싶어서 즐겁죠. 그러면 그날은 술도 더 당기고.(웃음)”

애주가로 알려진 성동일은 나이 불문하고 후배 배우들과 막역하게 어울리기로 유명하다. 한번은 친한 감독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어린 후배들이 그렇게 잘 따르고, 함께 잘 노는 비결이 뭐예요?” 답은 명확했다. “주사 없고, 연기 지적 안 하고, 술 잘 사주고, 그럼 돼요. 게다가 연기할 때는 자기 말 잘 들어주고, 선배로서 적절하게 반응해주고 그러니까 어린 후배들도 저를 미워할 이유는 없지 않겠어요?(웃음)” 술을 좋아한다면 사실 혼자 즐겨도 상관없을 것이다. 하지만 술자리를 즐긴다면 그건 단지 술만 좋아해서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사주를 보니까 외롭게 태어났다고 하던데, 기본적으로 모든 배우가 외로움을 타고나는 거 같아요. 특정 대상에 대한 외로움이나 갈망이 있다는 게 아니라 이 직업 가진 사람들이 대체로 그냥 옆에 사람이 있는 걸 좋아한다는 거죠. 아내가 유일하게 인정해주는 거 같아요. 그렇게 자주 술을 마셔도, 집에 손님이 많이 와도, 그게 제 유일한 ‘스포츠’라고 이해해줘요. 남들이 골프 치고 등산 다니듯이 ‘내 남편은 지인들과 맛있는 음식에 술 한잔하는 게 낙이다’ 헤아려주는 거예요. 아직까진 그만하라는 이야기를 일절 하지 않아요.”

그가 배우로 살아가는 동력은 바로 가족이다. 성동일이 기술자가 되기를 자처하며 작품 활동을 꾸준히 이어가는 것도 오직 그 마음에서 비롯된다. “배우이기 전에 부모로서 책임감이 점점 커져요. 눈뜨고 움직이는 활력소가 되는 것도 애들이니까. 내가 좋아서 이 일을 하고, 이 일로 먹고살며 가정을 꾸렸지만 자식들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난 거잖아요. 그러니까 애들이 성인이 돼서 안정될 때까진 제가 계속 잘해야죠. 그런데 자식이 셋이다 보니 하루에도 사계절이 다 있더라고요. 어제 집에 가니까 둘째가 다리에 깁스를 했어요. 발뒤꿈치에 금이 갔다나. 하루에도 겨울이 오다가 여름이 오다가 봄이 오다가, 여러모로 아주 활기차죠. 정말 ‘익사이팅‘한 삶이에요.”

나이를 거꾸로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이가 숫자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산다. 성동일은 배우라는 업과 가족이라는 삶, 두 층위가 맞물려 돌아가는 오늘을 성실하게 살아간다. 정직하게 흘러가는 시간 위에서 거듭 갱신되는 지금을 누구보다 즐기면서. “오늘 아침으로 돌아가는 것도 싫어요. <보그> 촬영 때문에 일찍 일어나는 게 너무 힘들었는데 또다시 그 고생을 하라고요? 그냥 지금이 너무 좋아요. 그리고 사실 제가 나이를 안 먹는 비결을 알고 있거든요. 철이 안 들면 돼요.(웃음) 철이 안 들려고 지금도 부단히 애쓰는 중이에요. 뭐든 길게 고려하지 않아요. 그래서 딱히 스트레스도 없어요. 그래서 현장 나가는 것도 늘 기대돼요. ‘오늘은 뭘 할까?’ ‘끝나면 누구와 한잔할까?’(웃음) 그런 상상을 하면서요.” 이토록 유쾌한 인터뷰를 언제 경험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성동일과의 대화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너무 웃었는지 턱이 얼얼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유쾌한 추억 하나가 얼얼한 감각으로 쌓여 있었다. 덕분에 그날 밤은 술맛이 얼큰했다. 기분 좋게 취할 수밖에 없는 밤이었다. 성동일이 말한 대로였다. 민용준 영화 저널리스트 (VK)

피처 에디터
류가영
포토그래퍼
장기평
컨트리뷰팅 패션 에디터
송보라
스타일리스트
이현하(하정우), 오채연(여진구), 홍수희(성동일), 남주희(채수빈)
헤어
임해경(하정우), 이민(여진구), 이수(성동일), 안홍문(채수빈)
메이크업
임해경(하정우), 이이슬(여진구), 이수(성동일), 오가영(채수빈)
세트
최서윤(Da;r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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