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새로운 시간을 여는 ‘블랙 퀀텀 퓨처리즘’과의 만남

2025.09.18

새로운 시간을 여는 ‘블랙 퀀텀 퓨처리즘’과의 만남

마르셀 프루스트가 마들렌 한 조각에서 유년의 시간을 감각했다면, 블랙 퀀텀 퓨처리즘은 공동체적 기억과 감각 속에서 다른 시간의 문을 연다.

아티스트 듀오 블랙 퀀텀 퓨처리즘이 리움미술관에서 시간의 획일화된 역사를 전복시키는 다학제 예술을 선보인다.

약속된 시각에 서로를 마주하는 일은 분명 근대적 시간 체계가 만든 습관이다. 그러나 이 체계에 문제의식을 품으며 다양한 예술과 학제적 활동을 이어온 블랙 퀀텀 퓨처리즘(Black Quantum Futurism)을 프리즈 서울이 열리기 직전인 9월 1일 오후 2시, 리움미술관에서 만났다. 시간의 다차원적 감각과 개념을 이야기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24시간, 60분이라는 직선적 틀 안에서 움직였다. 그러나 자리에 모인 두 작가가 체감한 시간의 결은 달랐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평범한 오후의 한 조각이었지만,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시차에 대한 부담을 안고 도착한 이들에게는 몸과 감각을 뒤흔드는 낯선 흐름이 아니었을까? 같은 순간을 살아도, 그 무게와 속도는 삶의 맥락에 따라 다르게 흘러간다.

9월 4일부터 28일까지 리움미술관 M2에서 샤넬 컬처 펀드(Chanel Culture Fund)의 후원으로 열리는 중장기 연구 프로그램 ‘아이디어 뮤지엄(Idea Museum)’의 세 번째 프로젝트 <블랙 퀀텀 퓨처리즘: 타임 존 프로토콜>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카메이 아예와(Camae Ayewa)와 라시다 필립스(Rasheedah Phillips)는 양자물리학, 흑인 디아스포라의 시간 경험, 아프리카 고유의 시간 개념을 교차해 대안적 시간 정치학을 모색해왔다. 이번 프로젝트는 종교, 생태, 건축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참여해 시간의 여러 개념을 나누는 ‘본초자오선 언컨퍼런스(Prime Meridian Unconference)’와 함께 퍼포먼스와 시간을 감각할 수 있는 체험 공간으로 구성된다. 무엇보다 블랙 퀀텀 퓨처리즘은 제도화된 시간 체계와 과거·현재·미래를 수직으로 이어온 서구적 시간 인식에 질문을 던지며, 흑인과 아프리카 공동체의 역사와 기억 속에서 작동해온 다층적이고 체화된 시간성을 조명한다.

블랙 퀀텀 퓨처리즘 활동 전부터 시간이라는 개념에 특별히 몰입한 경험이 있나?

라시다 필립스 어린 시절부터 공상 과학과 시간 여행에 매료되었다. 그 안에는 나와 같은 흑인 여성의 자리는 거의 없었다. 옥타비아 버틀러 소설 <킨(Kindred)>의 흑인 여주인공이 시간 여행을 하는 이야기가 유일했다. 이후 변호사로 일하면서는 법과 제도 아래 시간이 어떻게 규율로 작동하는지 직접 목격했는데, 법정 출석 시간을 단 1분만 어겨도 집과 아이, 자유를 잃는 현실은 시간의 권력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런 경험이 자연히 시간에 대한 다차원적 사고로 이어졌다.

카메이 아예와 여러 세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에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할머니에게 “그때는 어땠어?”라고 자주 물었는데, 자연스럽게 시간과 역사로 관심이 기울었다. 또 가족의 일원이 수감되면서 ‘시간을 빼앗긴다’는 개념을 떠올리기도 했고, 어머니가 즐겨 보시던 브루스 리 영화를 통해 명상과 ‘시간을 늦추는 행위’가 치유와 자기 성찰의 방법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저마다 ‘시간’의 개념이 다르다. 두 사람은 ‘시간’을 어떻게 정의하나?

카메이 아예와 나는 시간을 세 가지로 규정한다. 물처럼 흐르고, 나선형으로 확장되며, 물과 밀접하게 연결된 개념이다. 권력에 의해 언제든 조작될 수도 있다.

라시다 필립스 내게 시간은 곧 공동체다. 개인의 시간은 공동체의 시간 안에, 공동체의 시간은 다시 우주의 시간 안에 놓인다. 시계나 달력은 단지 방향을 가늠하는 도구일 뿐이다. 그러나 표준화된 시간 체계는 노동과 생산의 논리를 중심으로 전 세계 공동체의 리듬을 억압했고, 흑인뿐 아니라 많은 유색인종 공동체의 시간을 평평하게 만들었다.

수직화된 시간을 살아가는 현대인으로서 공감하는 지점이 있다. 무엇이든 빠르게 변화하고 흐르는 도시 서울에서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라시다 필립스 이따금 사람들은 ‘모두에게 24시간이 동일하게 주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건 사실이 아니다. 누군가는 사회적·경제적 이유로 시간을 누릴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사실 시간은 특권이다. 우리는 각기 다른 시간의 특권을 누리며 살고 있다.

카메이 아예와 역사를 돌아보면 권력자들은 늘 시간을 정의하고 조작해왔다. 원주민 마을의 시계를 없애거나 달력을 강제한 사례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슬픈 일 아닌가.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시간은 우리 또한 새롭게 구성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시간을 대하는 태도 또한 각기 다르다. 두 사람이 각자 중요하게 여기는 시간의 원칙이나 가치는?

라시다 필립스 해방과 선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각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어야 하며, 공간과 공동체 역시 스스로 선택할 권리가 필요하다. 시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 선형적 시간만이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주어진 것은 아니다.

카메이 아예와 나는 죽음과 종말이라는 개념에 주목한다. 하지만 그것을 단순한 끝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변화와 변형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여긴다. 어린 시절 읽은 프리초프 카프라의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The Tao of Physics)>은 이런 관점을 키워준 책이다. 그 책은 세상을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서로 연결된 과정으로 바라본다. 나 역시 시간을 그렇게 이해한다. 그리고 과거의 기억과 경험, 역사를 공유하는 일은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세상을 더 가깝게 만든다고 믿는다.

시간의 새로운 가능성, 정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본초자오선 언컨퍼런스’가 열린다. 이를 준비하는 과정은 어땠나?

라시다 필립스 2022년 뉴욕에서 열린 언컨퍼런스를 근거로 리움미술관과 함께 새롭게 큐레이션한 것이다. 과거에 협업한 아티스트, 이를테면 시계 조작 작업을 함께 한 필라델피아의 노이즈 실천가 에이다 아디야트마(Ada Adhiyatma)를 다시 초대했다. 여기에 아시아, 특히 한국적 맥락을 반영하기 위해 현지 학자와 아티스트도 초청했다.

이번 프로젝트에는 관람객이 각자의 리듬, 감각, 기억에 따라 시간을 체험할 수 있게 했다. 공간은 어떻게 구성했나?

라시다 필립스 핵심은 ‘자기 주도성’이다. 관람객이 각자의 속도로 책, 영상, 음악, 문헌을 탐구하며 자신만의 시간 리듬을 체험할 수 있게 했다. 친구나 지인, 함께 방문한 이들과 새로운 타임라인이나 시간 프로토콜을 직접 설계할 수 있는 도구도 마련했다.

카메이 아예와 중요한 것은 이 경험이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각자가 속한 공동체로 가져가 시간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공유하고 확산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목표다.

블랙 퀀텀 퓨처리즘이 그리는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 미래 또한 시공간의 일부일 테니 말이다.

카메이 아예와 단순하게 말하자면 토지의 반환, 그리고 모두의 해방이다. 단순히 땅의 소유권 문제가 아니다. 식민주의와 노예제 속에서 공동체가 빼앗긴 역사와 시간, 삶의 터전을 되돌려받는다는 뜻이다. 토지의 회복은 곧 공동체의 기억과 자율성을 되찾는 일이고, 이것이야말로 해방된 미래의 출발점이다.

라시다 필립스 우리는 ‘대안적 미래’라는 표현을 지양한다. 그 또한 이미 하나의 지배적 미래를 상정했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들, 공동체와 함께 창조해나가는 것이 미래 아닐까? 미래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카메이 아예와 거대 담론을 이야기하는 정치인보다 가까운 친구, 이웃이 우리의 미래를 더 잘 안다. 공동체의 구성원인 그들이야말로 미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기반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VK

    피처 디렉터
    김나랑
    유승현(프리랜스 에디터)
    사진
    Courtesy of Chan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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