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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마부인’ 시리즈의 이상이 비로소 실현되었다, ‘애마’

2025.08.26

‘애마부인’ 시리즈의 이상이 비로소 실현되었다, ‘애마’

넷플릭스 시리즈 <애마>는 올해 가장 신선하고 대담한 한국 콘텐츠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꿔봤을 법한, 영화 만들기에 관한 메타드라마다. 1970년대 영화계를 풍자한 김지운 감독의 수작 <거미집>(2023)과 겹쳐 보이면서도 ‘지금 우리에게 왜 이 이야기가 필요한가’라는 고민을 담아내 한결 대중적이다.

넷플릭스 시리즈 ‘애마’

<애마>는 한국 영화사상 가장 파급력이 큰 시리즈 <애마부인>을 실명으로 거론하고 당대 정치, 문화 코드를 충실히 고증하는 작품이다. 한편 허구의 대형 사건을 하이라이트로 삽입해 팩션의 한계를 재설정했다. 과감한 상상력은 B급 유머 감각으로도 발현된다. 극 중 영화감독 곽인우(조현철)는 <애마부인> 시나리오에서 유럽 스타일 ‘에로 그로 논센스’를 구현하려 했다고 주장하다가 톱스타 정희란(이하늬)에게 구박을 받는다. 희란은 감독이 여자를 모르는 것 같으니 에로는 포기하라며 “그로테스크와 논센스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고 조언한다. 희란의 제안은 드라마 <애마>에서 현실화된다. 에로 영화 만들기에 관한 드라마지만 에로틱하지 않다. 대신 기이하고 부조리한 유머가 넘친다. 남배우의 성기 ‘공사’ 장면처럼 에로 영화 제작에 관한 궁금증을 해소해주거나, 1980년대 미디어용 말씨에 담긴 허위의식을 풍자하는 직관적인 유머도 있다.

<애마>는 정희란이 아시아영화제 주연상을 받고 금의환향하면서 시작한다. 비행기에서 그가 받은 시나리오는 지문에 ‘젖가슴’이 한가득이다. 열받은 희란은 파티에서 신성영화사 대표 구중호(진선규)를 두들겨 패고 기자회견을 열어서 더 이상 노출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구중호는 여배우 벗겨서 돈 벌 궁리만 하고, 어쩌다 감독이 멀쩡한 영화를 찍어오면 편집실에서 하루아침에 쓰레기로 만들어버리는 인물이다. 정희란과 구중호는 계약관계 때문에 영화 한 편을 더 찍어야 한다. 희란은 작가주의 감독 권도일(김종수)을 신성영화사로 데려와서 남은 한 편을 해결하려 하고, 구중호는 희란을 <애마>에 조연으로 세워서 욕보이려 한다. 한편 닭장 같은 집에 살면서 밤무대 댄서로 일하던 신주애(방효린)는 인생 역전을 위해 뭐든 할 각오로 <애마> 오디션에 응한다. 그러나 여배우의 삶은 주애의 생각보다 훨씬 험난하다.

넷플릭스 시리즈 ‘애마’ 스틸 컷.
넷플릭스 시리즈 ‘애마’ 스틸 컷.

드라마 초반은 여배우라는 종족에 대한 온갖 고정관념을 패러디한다. 희란은 카메라 앞뒤에서 목소리부터 달라지는 안하무인 ‘썅년’이다. 제 발로 <애마> 주인공 배역을 걷어차놓고 막상 신주애가 등장하자 “누구랑 잤니? 제작자건 감독이건!”이라고 비아냥댄다. 신주애는 이를 “제작님이랑 감독님이랑 둘 중 좆은 누가 더 커요?”라고 받아친다. ‘여배우의 기싸움’은 황색 언론의 스테디셀러다.

작품이 전개되면서 관객은 그 시대 여배우들이 처한 상황을 좀 더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영화는 가난한 소녀 가장들이 꿈을 좇아 모여드는 곳이었고, 여배우의 노출은 돈이 되었고, 언론은 여성 연예인을 희롱거리 삼았으며, 인권의 안전장치는 시스템화되지 못했고, 권력자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정희란이 ‘간지 나는 썅년’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가 에로 영화에서 벗어나려는 게 단지 허영심이나 까탈이 아니라 영화에 대한 애정 때문이라는 점이 차차 설명이 된다. 그러면서 희란과 주애 사이에도 동지 의식이 싹튼다. 그들의 연대에는 여성, 선후배 외에 예술가라는 접점이 작용한다. 극 중 희란, 주애, 인우는 핍박받고 망가지고 난도질당하더라도 영화를 지키려는 사람들이고, 제작자 구중호는 영화를 축재의 수단으로만 여기는 사람이다. 전자는 시대가 변해도 불변하는 가치, 후자는 시대와 함께 사라져야 할 가치로 표현된다.

작품 후반 <애마>는 소문만 무성했던 군부 정권하의 성 상납 문화를 소재로 가져와서 이에 맞서는 희란의 활약을 그린다. 실존 역사를 모티브로 한 작품에 반영하기는 민감한 선택이 아닌가 싶은데, 이해영 감독은 그럴듯한 상상과 확실한 판타지를 뒤섞어놓음으로써 솜씨 좋게 논쟁을 피해간다. <애마부인> 엔딩처럼 말을 타고 도망치는 희란과 주애의 모습은 이 작품 속 난센스 코미디의 정점인 동시에, 왜 이 시대에 <애마부인>이 소환되었나에 대한 답이다.

넷플릭스 시리즈 ‘애마’ 스틸 컷.
넷플릭스 시리즈 ‘애마’ 스틸 컷.
넷플릭스 시리즈 ‘애마’ 스틸 컷.

1980년대 군부 정권은 3S 정책(스포츠, 스크린, 섹스)을 추진하면서도 강력한 검열을 유지했다. <애마부인>은 통금 해제의 수혜를 받은 첫 심야 영화였다. 드라마 <애마>에서 신인 감독으로 설정된 것과 달리, 실제 <애마부인> 1편부터 3편까지 연출한 정인엽 감독은 1960년대부터 다작을 해온 베테랑이었다. 미국에서 유학하며 유럽 예술영화에 눈을 뜬 정인엽 감독은 <애마부인>에서 심한 노출 없이 에로틱한 분위기를 풍기는 데 성공했다. 1970년대 가난 때문에 팔려간 호스티스물이 득세했다면, <애마부인>은 아파트에 살며 자가용을 모는 유한부인의 성적 모험을 다룬다. 드라마 <애마>에서 정희란이 연기하는 에리카는 실제 <애마부인> 1편에서 김애경이 맡은 역할로, 박정자가 더빙을 했다. 드라마에서처럼 애마에게 “봉건사상을 탈피하고 주체적인 삶을 살라”고 부추기는 역할이다. 둘 사이에는 은근한 동성애 기류도 있다. 여러모로 <애마부인>은 성인영화의 패러다임 전환이라고 부를 만한 ‘사건’이었다.

문제는 <애마부인> 시리즈가 여성의 각성을 소재로 하면서도 여배우를 성적 대상화했다는 점이다. 애마가 가부장제로 돌아가는 1편의 엔딩도 시대의 한계를 드러냈다. 드라마 <애마>는 그것이 여배우들이 원한 엔딩이 아니었다고 가정하며 희란과 주애의 연대를 완성해낸다. 그들은 여성 착취 구조를 일거에 뒤집어엎거나 거기서 탈출하는 대신 기존 시스템을 약간 수정하는 데 그친다. 하지만 이것이 지금도 계속되는 유구한 싸움의 일부이며, 오늘날 주류 영화계의 윤리의식과 여성 예술가의 지위가 1980년대와 얼마나 달라졌나를 떠올리면 주인공들의 선택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 주애와 매니저 이근하(이주영)의 관계 역시 <애마부인>의 동성애 코드에 대한 오마주이자 오늘날에도 개선점이 남은 퀴어에 대한 인식을 돌아보게 만든다.

이처럼 <애마>는 험한 시대를 오롯이 개인의 기세로, 악으로, 깡으로 살아남은 여자들의 모습을 통해 과거에는 위로와 감사를, 미래에는 응원을 보낸다. 게다가 의미를 떠나 서사와 미장센의 완성도가 모두 뛰어난 작품이다. 이해영 감독은 연출 데뷔작 <천하장사 마돈나>(2006) 직후 <애마> 시놉을 썼지만 2시간짜리 영화로 만들 자신이 없어서 방치하다가 매체가 다변화되고 자신도 유연해져서 다시 꺼낼 수 있었다고 밝혔다. 과연 TV 미니시리즈보다 짧은 6부작으로 군더더기 없는 서사를 완성했고, 영화 못지않은 품질로 1980년대 연예계를 화려하게 재현했다. 넷플릭스 구독료의 가치를 느껴볼 좋은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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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시리즈 ‘애마’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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