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 알게 되는 것
제 책장에는 꽤 인상 깊게 읽은 제니 오델의 에세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이 꽂혀 있습니다. ‘우당탕당 일상’의 한가운데서 가끔 이 책을 들춰보면서 호흡을 가다듬곤 하지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무는 것”이라고 말하는 오델은 맨 먼저 소셜 미디어를 비롯한 관심 경제에 사로잡힌 ‘관심의 주권’을 찾아 다른 방향으로 확장하자고 제안합니다. 특히 저자는 실제 세계의 시공간, 특히 새를 관찰하는 시간을 자신만의 해독제로 제시하는데요. 오델이 공원을 찾듯이 저는 파운드리 서울에 전시를 보러 갔습니다. ‘Dolce Far Niente’라는 제목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달콤함(The sweetness of doing nothing)’이라는 이탈리아 개념에서 차용한 겁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를 비활동의 무기력함이 아니라 감각과 인식이 응축되고 머물러 있는 상태로 재정의하는 거죠. 생산성, 속도, 효율성이 요구되는 동시대 조건에 저항하기에 앞서서, 먼저 내가 스스로 이런 조건이 더 공고해지는 데 동참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더군요.


파운드리 서울은 한남동 한가운데 있지만, 이상하게도 저는 그곳에 갈 때마다 작품의 성격과 구성에 상관없이 고요함을 느끼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시장에 찬찬히 흐르는 그 멈춤의 시간이 더더욱 와닿더군요. 회화, 사진, 조각, 영상, 설치 작업 등 참여 작가 11명의 작품은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도 지나치는 시공간의 결을, 행위와 행위 사이 목적 없는 시간을, 의도적으로 선택한 공백 상태를, ‘함께 존재함’이라는 고요한 시간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친밀감을 이야기합니다. 미술가들이 제시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은 시각예술의 특성상 더 직관적이고 은유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감각과 사고, 사유와 느낌의 경계가 이곳에서는 별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전시를 돌아보니 머물고,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다시 걷고, 돌아보는 전시 관람의 단계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행하고 있다는 걸 새삼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저는 히만 청의 회화 연작이 인상 깊었습니다. 이 연작은 지치거나 영감을 기다리는 순간에 제작되었는데요. 침묵을 살아 있는 진동의 장으로 본 존 케이지의 사유가 작가에게 영감을 선사했고, 자신의 캔버스를 행위가 감각으로 전환되는 장소로 활용합니다. 작가는 이 작품을 ‘다운타임 회화’라 일컫는데, 치열한 고민과 실천 사이 쉬어 가는 순간조차 작품이 된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더군요. 반면 조니 네그론의 회화는 강제된 멈춤의 시간에서 출발합니다. 로스앤젤레스 산불로 인해 개인적으로도, 집단적으로도 모든 것이 멈춰 선 상태에 직면한 작가는 그 혼란 속에서 회복할 수 있는 방식을 작품으로 모색합니다. 그의 회화는 무의식 사이를 부유하는 듯 몽환적이면서도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맞추고자 하는 작가의 마음을 그려내고 명상, 연금술, 타로에서 차용한 도식은 내적 변화의 가능성을 상징합니다.

Jonny Negron, ‘Ich Ruf Zu Dir(Herr Jesu Christ)’, Acrylic on linen, 163×137.4×3.5cm, 2024.

Jonny Negron, ‘Reflection’, Acrylic on linen, 38.3×38.5×3.8cm, 2026.
아침 김조은 작가의 작업 앞에서는 한참을 서 있기도 했는데요.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를 넘어 작가는 ‘자신을 돌보는 행위, 고치고 잇는 일, 모으고 함께 하는 행위’ 같은, 반복적이고 사소해서 언뜻 별 의미 없어 보이는 몸의 움직임을 담아냅니다. 실제로 분주하고 긴박한 일상을 살다 보면, 나를 비롯해 어떤 대상을 돌보는 행위는 자꾸만 미루게 되죠. 그러다 불현듯 나의 삶이 놀라울 정도로 납작하게 메말라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본의 아니게 마주한 성찰의 순간 앞에서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자괴감과 서글픔이 몰려들기도 하고요.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건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놓치거나 미루거나 도외시한 돌봄과 유대의 시간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큐레이터 이리나 스타크가 썼듯,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오히려 모든 것을 마주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도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 노력은 맹렬하고 치열하게 달리는 에너지만큼 가치 있을 겁니다. 전시는 오는 5월 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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