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정원의 꽃

올봄 유행은 꽃보다 아트를 선택했을지 몰라도, 디자이너들은 여전히 정원 가꾸기에 푹 빠져 있다. 정원과 꽃에 대한 이들의 예찬이 계속되는 한, 패션 정원의 꽃은 영원히 지지 않을 것이다.



지난 1월 25일 오후, 우중충한 날씨 속에서 기적과 같은 햇살이 밀라노의 호화로운 펜트하우스 속 유리 천장 위로 쏟아졌다. 잿빛 도시라는 별명답게 하루 종일 흐리던 하늘이 돌체앤가바나 오뜨 꾸뛰르인 ‘알타 모다’ 컬렉션이 시작되는 순간 거짓말처럼 환해졌다. 유럽의 귀족, 미국과 중국과 러시아 갑부들, 그리고 선택받은 <보그> 에디터들만이 감상할 수 있었던 이 비밀스러운 패션쇼는 따스한 유리온실 속 햇살과 꼭 어울렸다. 이번 시즌 테마는 다름 아닌 꽃이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 지금 막 따온 꽃송이들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스테파노 가바나가 미국 <보그> 에디터에게 설명했다. 컬렉션엔 집 앞 정원에서 막 따온 꽃송이를 옷에 장식한 듯한 자수 장식이 넘쳐났다. 이 이탤리언 듀오는 한술 더 떠 전 세계 미술관과 협력, 전설적인 예술가들의 꽃 작품을 드레스로 환생시켰다. 오딜롱 르동의 아네모네, 구스타프 클림트의 해바라기, 에두아르 마네의 새하얀 라일락이 드레스에 장식된 것(50년대 무슈 디올을 위해 꽃 장식을 만들던 이태리 비첸차에 자리한 공방 장인들의 솜씨). 연분홍과 연보라색 장미가 기둥을 덮은 19세기풍 장미 정원으로 변신한 그날의 펜트하우스는 그야말로 정원과 패션의 만남이었다.

패션 디자이너들이 정원에서 아이디어를 얻는 건 흔한 일이다. 50년대 크리스찬 디올은 어머니의 정원에서 무도회 드레스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고, 이브 생로랑은 아티스트 이브 앙리에뜨 브로쌩이 그린 정원 그림을 이브닝 재킷에 담았다. 크리스찬 디올 하우스를 이끌던 당시 존 갈리아노는 거대한 정원을 닮은 세트(그의 디올 데뷔 무대 역시 정원이었다)에서 쇼를 선보이곤 했다. 케케묵은 패션사를 뒤적일 필요도 없다. 지금 디자이너들은 그 어느 때보다 정원 가꾸기를 즐기고, 그곳에서 옷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는다.

“정원을 가꾸기 위해선 인내심이 있어야 해요. 또 어느 정도는 거기에 미쳐 있어야 해요.” 17년간 가꿔온 거대한 정원을 가진 드리스 반 노튼이 자신의 정원 사랑에 대해 설명했다. 그만의 로맨틱한 플라워 프린트는 저 멀리 인도양 섬이 아닌, 그의 17세기 저택을 포함한 앤트워프 외곽 정원에서 가져온 것. 7만3,000평이 넘는 광대한 그의 정원에는 강이 흐르고, 인공 정원과 인공 섬까지 있다. 무려 45종이 넘는 수국 정원이 따로 있고, 그는 매년 봄마다 꽃의 테마를 정해 정원을 꾸민다. 근사한 장미 정원을 새로 마련하면, 그의 다음 컬렉션 속에 새로운 장미 프린트가 등장하는 식이다.

지난해 갑작스레 자신의 브랜드를 떠난 앤 드멀미스터 역시 정원 가꾸기에 푹 빠져 있다. 흑백으로 가득한 그녀의 런웨이에 등장했던 프린트는 종종 그녀의 정원에서 탄생한 패션 열매. 예를 들어 몇 년 전 등장했던 수국 프린트는 남편과 함께 곱게 기른 꽃을 말린 후 사진을 찍어 완성한 것이었다 “자연 그대로의 상태만큼 아름다운 컬러의 소재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 정원 사진을 찍어 프린트했죠.” 은퇴 후 더더욱 정원 가꾸기에 열심인 그녀는 가끔 드리스 반 노튼을 만나 꽃과 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우리가 함께 이태리에 가면 둘 다 토마토씨를 사와요. 앤은 온실에서 그걸 멋지게 키워내죠. 그리고는 토마토 요리 레시피를 교환하기도 하죠.” 반 노튼은 벨기에 디자이너들이 여가를 보내는 방법을 이렇게 공개했다.

패션쇼를 열 때마다 모델에게 행운의 표식으로 은방울꽃을 손에 쥐어주고 워킹하게 할 정도로 꽃과 정원을 사랑했던 무슈 디올은 온통 꽃으로 무대를 장식하는 지금의 라프 시몬스가 사랑스러울 것이다. 100만 송이 꽃으로 장식했던 첫 번째 꾸뛰르 컬렉션부터(올봄 꾸뛰르 컬렉션에선 꽃 대신 조형적인 회벽 동굴을 선택했지만!), 수천 송이 덩굴식물과 난초, 등꽃으로 공중 정원을 완성한 2014년 봄 프레타 포르테 컬렉션까지. 이 쇼에선 세트뿐만이 아니었다. ‘Hyperrose’란 문구가 새겨진 드레스 위엔 새로운 꽃 프린트가 장식됐다(시몬스의 절친인 플로리스트 마크 콜레와 머리를 맞댄 결과물일지도 모를 일).



라프 시몬스에게 마크 콜레가 있다면, 또 다른 파리의 로맨티스트, 니나 리치 피터 코팽에겐 램버트 리고가 있다. 이브 생로랑과 디올의 오뜨 꾸뛰르 아틀리에 디렉터로 일하던 리고는 2년 전 마흔 살 생일을 맞이하면서 패션 대신 꽃을 선택, 생제르맹 지역 코너 ‘Rambert Rigaud Fleuriste en Herbe’란 근사한 꽃집을 열었다. 베르사유 정원에서 뛰어놀며 자란 그는 정원용 꽃과 식물, 아름다운 난초를 가꾸며 제2의 행복을 찾았다. 파트너인 피터 코팽과 함께 꾸민, 영국 정원을 닮은 노르망디 별장이 바로 그에게 있어 새로운 커리어의 시작이었다. “전 언제나 플로리스트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별장의 정원을 가꾸면서 용기를 냈죠.” 리고는 이제 니나 리치는 물론, 지방시, 셀린 등의 파리 브랜드들이 꽃을 필요로 할 때 가장 먼저 찾는 플로리스트가 됐다. 물론 니나 리치의 하늘하늘한 시폰 드레스에서 보이는 꽃 프린트 역시 코팽과 리고의 정원에서 가져온 것일 것이다.

정원을 가꾸는 것에 있어 영국 출신 디자이너들을 빼놓을 순 없다. ‘영국 정원’이란 근사한 디자인 유산을 지닌 이들은 정원에서 얻은 아이디어로 런던 패션을 꽃 프린트로 물들이곤 한다. 새초롬한 꽃 장식 드레스로 유명한 어덤, 인테리어와 우표를 지나 꽃 잔치를 벌인 매리 카트란주, 실크 봄버 위에 꽃무늬 자수를 놓은 조나단 선더스까지, 런던에서 컬렉션을 선보이는 디자이너들에게 꽃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다. 크리스토퍼 베일리라는 요크셔 출신의 가녀린 청년을 버버리 CEO까지 만들어준 데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컬렉션 역시 영국 정원에서 영감을 얻은 2006년 ‘가든 컬렉션’이었다.

“전 정원에서 평소라면 생각하지 못할 컬러를 발견합니다.” 영국 교외에 근사한 농장과 정원을 완성한 스텔라 맥카트니가 정원의 미덕을 이렇게 강조했다. “어느 날 패션을 보는 것이 지겨워, 50년대 정원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했죠. 그 책에서 오래된 식물 그림을 발견했고, 거기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식물학자와 거대한 수직 정원을 무대에 세우는가 하면, 매번 자신의 정원에서 발견한 식물들(2년 전 레몬과 오렌지 프린트를 비롯해)을 컬렉션 곳곳에 선보이기도 한다. 도회적인 팬츠 수트와 세련된 체크를 선보여도 영국적인 감수성을 잃지 않는 맥카트니만의 능력은 어쩌면 그녀의 정원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패션과 꽃의 끈끈한 관계를 아는 이들은 이 둘의 역학 관계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느꼈음이 분명하다. 런던의 ‘가든 뮤지엄’에서 2월 중순부터 시작되는 <Fashion&Gardens> 전시가 그 예다. “패션과 원예는 수세기 동안 서로의 옷을 훔쳐온 것처럼 보였지만, 그런 주제가 실린 책이나 기사는 전혀 없었다.” 전시를 기획한 역사학자 니콜라 슐만(영국 <보그> 편집장 알레산드라 슐만의 여동생)이 전시 취지를 설명했다. 지난 500년간 영국 여성과 패션을 상징해온 정원, 아름다운 장미, 근사한 덩굴식물을 패션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전시를 준비한 것. “갈리아노는 꽃을 디자인할 때 식물 견본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디자인을 전개하곤 했죠. 차가운 블루와 바이올렛 컬러의 줄기가 열리고, 그 속으로 줄무늬가 들어가고, 그다음 얼룩을 만들고, 페인트를 뿌리고, 러플을 소재로 아네모네와 튤립, 아이리스를 완성하고, 술 모양 주름이 들어가도록 하고, 줄기처럼 가느다란 모델의 허리를 금색 꽃가루 하트로 장식하고. 그는 정원과 꽃 시장, 17세기 식물 수채화에서 훔쳐온 꽃을 옷으로 피어나게 했다.”

단순히 장식뿐만 아니라 정원과 패션에서 사용되는 소재와 패턴의 방식까지 살펴보게 될 이번 전시는 정원 가꾸기에 푹 빠진 디자이너들에게 특히 어필할 듯하다. 그리고 그들은 필립 트레이시의 난초 모자, 알렉산더 맥퀸의 생화 드레스 등이 정원과 패션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기록했음을 눈으로 확인할 것이다. 물론 바버 방수 재킷, 헌터 부츠, 승마 바지 등으로 대표되는 정원사 스타일 역시 새롭게 각광받을지도 모른다. “가드닝은 패션과 마찬가지로 놀라운 예술 형태 중 하나입니다.” 슐만은 전시를 위해 정원과 관련된 패션을 연구한 후 이렇게 정의 내렸다.

지난달 <보그>는 이번 시즌 트렌드를 “꽃보다 아트!”라고 선언했다. 이번 시즌만큼은 흐드러지게 피어난 난초보다, 갤러리에 걸린 그래픽적인 회화 작품을 닮은 옷들이 더 시선을 끄는 게 사실. 하지만 지금 백화점과 멀티숍 진열장을 가득 채우기 시작한 봄옷엔 어김없이 꽃이 활짝 피었다. 회화적인 그래피티의 셀린 재킷만큼이나 시선을 끄는 건 마르니의 추상적인 식물 도안 프린트 드레스다. 물론 다음 시즌에도 꽃과 식물은 캣워크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무엇보다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들이 지금 정원 가꾸기에 푹 빠져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