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일러드수트를 탐구하는 서울 디자이너 1

저지 원피스나 스웨트셔츠의 무분별한 남발 틈에서 젊은 서울 디자이너들이 옷의 기본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테일러드수트를 위해 골몰하는 일곱 명의 젊은이들을 <보그>가 만났다.



오전 11시. 또 하루 일과를 위해 방금 막 문을 연 이곳은 한국에 그럴듯한 신사 문화를 계몽 중인 남훈(서울 패션 쪽 사람들은 그를 클래식 전도사라고도 지칭한다)의 편집매장 ‘알란스’ . 논현동 매장 2층에 오르면 ‘Del Dio’라는 간판 아래 청년 한 명이 반듯하게 앉아 있다. 질 좋은 셔츠를 만들기 위해 여기 머무는 스물여덟 살의 윤성남이다. 바리스타에 이어 스타일리스트 김하늘과 일하며 패션계에 입문한 그는 지금껏 간직한 남자 복식의 지대한 관심을 셔츠에 쏟기로 했다. “셔츠는 남자들에게 소모품으로 인식되고 있어요. 전문성이 떨어지는 게 아쉬워 셔츠 한 벌에 좀더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한국 고위층의 셔츠를 제작해온 ‘드림 팩토리’와 의기투합해 브랜드를 냈다. “‘딜라이트 스튜디오’의 앞과 뒤를 딴 이름입니다. ‘남자를 위한 꿈의 공작소’라는 뜻이죠.” 그는 살갗과 가장 밀접한 데다 재킷에 비해 속옷에 더 가깝다는 면에서 셔츠야말로 아주 예민한 품목이라고 전한다. “사실상 100% 몸에 완벽한 맞춤 셔츠는 불가능합니다. 먹는 음식이나 운동량에 따라 그날그날 몸이 다르니까요.” 그는 드레스 셔츠와 클래식 셔츠를 기본으로 패딩을 가미하는 식의 변형과 진화를 기획 중이다. 또 셔츠 한 벌 제작 가능한 옷감 2야드를 자그마한 상자에 담아 선물할 수 있는 패키지도 마련했다.



홍순규는 ‘모노 갤러리’의 수트 디자이너다. 테일러드 수트가 더없이 잘 어울리는 그는 스트리트 스타일을 테일러드 수트에 접목하길 원한다. 그의 재기발랄한 시도에 의해 서울의 멋쟁이 남자들은 곧 새로운 스타일을 경험하게 될 듯.

‘델디오’와 벽 하나로 구획된 건너편을 슬쩍 엿보니 역시 배우 뺨칠 만한 훤칠한 청년들이 침착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모노 갤러리’에서 수트 디자이너로 일하는 서른두 살의 홍순규는 드라마의 말쑥한 패션 회사 본부장 같은 외모다. 그러나 20대 후반까지 국내 스트리트 브랜드를 준비 중이었던 자칭 스트리트 키즈. “힙합, 팝아트 같은 아메리칸 문화에 젖어 20대를 보냈어요. 스투시, 나이키 등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랄프 로렌으로 확장됐죠. 그때 아메리칸 클래식에 눈을 떴습니다.” 그리하여 스물여덟 살의 청년은 원점에서 다시 시작했다. 어느 양복 아틀리에에서 1년 이상 ‘구르며’ 처음부터 일을 배운 것. “잘 재단된 수트를 사 입는 것과 직접 만드는 일은 천지 차이입니다. 화려한 외양만 보고 덤비는 또래 젊은이들이 많더군요. 제가 배울 때도 도중하차 하는 사례가 많았죠.”

보시다시피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지방시 티셔츠나 셀린 코트처럼 ‘유행 타는 물건’이 아닌 정통과 본질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은근슬쩍 흉내 낸 수트가 아닌, 저마다 정서와 철학이 뚜렷한 수트 제작에서 쾌감을 느끼는 중. ‘테일러링’에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것 말이다. 그래서 여기 뿌리내린 채 기질과 취향을 반영해 동시대적으로 다듬는 과정이 한국 패션 전문가들의 눈엔 기특하고 대견하게 보일 수밖에. 게다가 젠틀우먼, 놈코어 같은 ‘기본’이 가치 있고 숭고한 시절이 왔으니 잘 재단된 수트 한 벌을 맞추려는 사람이 여기저기서 느는 건 예고된 수순. 심지어 여자들도 남성복 매장에서 똑 떨어진 팬츠 수트를 주문하는 경우도 빈번해졌다. 그래서 <보그>는 서울에서 이런 현상을 일으키는 20~30대들을 만나보기로 했다.

 

아버지 세대의 양복점이나 라사 시대와 어떻게 다른지, 또 젊은이들이 왜 테일러드에 조용히 열광하는지 주의깊게 지켜보기로 한 것. 모노 갤러리 홍순규의 체험에 따르면 수트는 파고 들면 들수록 변수가 많은 종목. 그런 면에서 수트는 과학처럼 공부하고 공부해도 끝이 없다고 겸손하게 소감을 전한다. “여러 수트를 충분히 입어보고 이 일에 뛰어드는 것도 물론 좋습니다. 하지만 기술적으로 충분히 습득한 뒤에 시작해야 합니다.” 영국 같은 유럽 남성지에서나 볼 듯한 외모지만 그는 뼛속까지 스트리트 키즈답게 자신의 성향을 수트와 절충시킬 거라고 덧붙인다. “맞춤 수트에 스투시 티셔츠를 입고 에어 조던을 신는 거죠!” 물론 자신의 옷차림일 수 있고 또 기회가 된다면 론칭할 수 있는 신개념 수트 브랜드일 수도 있다(그에 의해 ‘Suitreet’라는 신개념이 유행할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현재 준비 중인 토트백 전문 브랜드의 가방을 곁들이면 딱일 듯. “바스켓의 이니셜 B와 재즈에서 프리 스타일로 흥얼댄다는 용어 ‘스캣’을 결합해 ‘비스캣’이라는 가방을 곧 선보일 겁니다.” 수트에 운동화, 여기에 스케이드보드를 꽂아 넣은 ‘비스캣’ 가방을 멘다면, 21세기 존 F. 케네디 주니어처럼 끝내주지 않을까?





수트 좌표에서 홍순규와 윤성남이 정통에 밀접하다면, 장형철은 좀더 트렌드에 가깝다. ‘젊은 테일러링’을 수소문할 무렵, 서울 패션계에 현재적인 기운을 수시로 주입하고 있는 스타일리스트 채한석이 그를 추천했다. “스웨트셔츠나 빅 사이즈 코트가 히트치고 또 그의 이력 때문에 캐주얼한 옷으로 알려져 있지만, 가만 보면 수트를 잘 만듭니다. 게다가 2AM이 입을 수트도 만들고 있죠.” 비욘드클로젯에서 4년 넘게 일한 ‘오디너리 피플’의 장형철은 첫눈에 누구라도 호감이 갈 만한 ‘웃는 상’이다. 게다가 요즘 젊은이들의 화법(“아 맞아요?” “아 진짜요?”라는 식의 리액션)까지 갖춘 서른한 살의 청년. 그런데 예상과 달리 서울 패션 위크를 통해 발표한 네 차례의 런웨이 컬렉션을 다시 훑어보니 기본은 철저히 보수적인 수트였다. “젊어 보이는 수트, 어른스러워 보이는 수트. 이 두 가지를 끊임없이 실험 중입니다. 물론 현재까지 정답은 얻지 못했어요. 과정을 찾는 중이죠.” 요즘엔 지인들로부터 예복 맞춤이 밀려들고 있다. “몇 달 째, 열 벌 이상 예복 수트를 매달 만들고 있어요. 고객이 만족할 때까지 만들고 또 만들죠.”

한편 2AM을 위해선 무려 50여 벌의 수트를 제작했다고 털어놓았다. “네 명이 전부 다른, 12개 이상의 디자인이 필요했어요.” 내친김에 이를 활용해 캡슐 컬렉션을 기획한다면? “아 진짜요? 그런데 될까요?”라며 여전히 명랑한 듯 약간 괴짜 소년 같은 표정으로 그가 대답했다. 그러더니 최근 2AM 멤버들의 근육질 체형에 맞춰 모델 사이즈의 수트 제작 때와 달리 좀더 많은 신체 공부를 경험했다고 덧붙였다. 서울에 불어온 오버사이즈 코트 신드롬의 주역답게 코트에 대한 애착도 곁들인다. “수트 그 자체만으론 테일러링의 묘미를 보여주는데 아쉬움이 있어요. 잘 재단된 코트 한 벌을 걸쳐야 그만이죠.” 신사동 사무실의 책장에는 지난가을 컬렉션 초대장이 놓여 있었다. 두 벌의 수트와 한 벌의 코트, 한 벌의 테일러드 셔츠 차림의 모델들이 뮤지션처럼 도열한 장면. 장형철이 지향하는 ‘Ordinary’ 피플들이 얼마나 수트를 원하는지 알 수 있던 대목이다.



‘뮌’이라는 독립 브랜드를 서울 패션 위크를 통해 발표하고 있는 디자이너 한현민. 30대 초반의 젊은이답게 수트에 아이디어와 파격을 더한 것이 특징이다.

장형철처럼 서울 패션 위크는 젊은이들이 수트를 ‘클래식’에서 ‘트렌디’한 쪽으로 옮겨 테일러드수트의 이미지를 대중에게 좀더 패셔너블한 쪽으로 전환시킬 기회다. 그런 관점에서 DDP 근처의 서울 패션 창작 스튜디오에도 수트 삼매경에 빠진 서른한 살의 젊은이가 있다. 우영미, 레이 등에서 일했던 한현민은 세 번의 컬렉션 이후, 서울 패션 위크를 통해 ‘뮌’을 두 시즌째 공개했다. “테일러드 재킷의 변형을 시도하며 ‘어딘지 낯설게 하기’가 브랜드 철학입니다.” 한쪽 라펠 가장자리에 옷감 표기를 그대로 이용한 재킷을 입은 그가 설명했다. “수트는 만드는 사람의 손끝에 따라 전부 다릅니다. 어떤 장인들과 함께 일하느냐가 중요하죠.” 그래서 그에게 수트란 기본은 준수한 채 진화시키는 생명력 있는 오브제. “부위별 부자재도 다르니, 각각의 부위를 통해 터득하는 것 역시 다를 수밖에요.” 그는 시각디자인과 사진을 전공한 뒤 SADI에서 패션을 공부했기에 룩북 작업도 스스로 진행한다. 다재다능한 그의 이력은 수트 한 벌은 물론 컬렉션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