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할배

패션 마을에 ‘꽃할배’들이 떴다! 라거펠트, 아르마니, 로렌, 힐피거 등이 모여 패션 유람을 떠난다면? 그들만의 여행에 꽃짐꾼으로 〈보그〉만한 존재가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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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4가 아닌 H4 일당이 아테네로 떠났다. 그들 곁엔 멀끔한 짐꾼 외에 생기 가득한 아가씨 꽃짐꾼도 동행 중이다. 현지에 도착하자 아크로폴리스 같은 세계문화유산 앞에서 다들 입을 다물지 못하는가 싶더니, 근대올림픽이 열렸던 경기장에서 냅다 뜀박질하는가 하면, 하늘의 기둥으로 불리는 메테오라까지 정복한다. 어딘지 모르게 그들이 여행의 달인처럼 보이는 이유? 사실 H4는 프로 짐꾼과 함께 재작년 대만 여행을 시작으로 작년엔 스페인으로 떠났었다. 아무튼 그리스에서 열흘쯤 머문 멤버들은 각각 현장감 넘치는 별칭까지 하사받았다. 이름하여 순재우스(이순재), 구세이돈(신구), 근폴론(박근형), 헤라클레섭(백일섭)!

그나저나 <보그>가 별안간 물오른 할배 4인방의 배낭여행을 추적하는 배경이 궁금할 것이다. <꽃보다 할배> 시즌 3 목적지인 아테네와 패션의 상관관계를 파헤치기 위해? 그래서 그리스 출신의 실력파 소피아 코코살라키가 웨딩드레스 디자이너로 재기하려는 몸부림을 전하려고? 그게 아니면 ‘할배투어’를 본 다음 몇 달 전 실은 기사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다’의 시즌 2를 쓰려고? 발단은 서울에 온 칼 라거펠트의 최근 행적들이다. 이순재의 정력 넘치는 여정 못지않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라! 아울러 지난달 게재한 조르지오 아르마니 40주년 패션 인생 스토리, 5월호 컬렉션 북에 실은 타미 힐피거 30주년 기념쇼 내용까지. 정말이지 새파란 디자이너들이 판치는 패션 생태계에서 ‘노병은 살아 있다’라거나 ‘백전노장’ 같은 묘사를 실감할 수 있는 요즘 아닌가. 그러니 누군가 <꽃보다 할배> 포맷을 구입해 패션판을 찍어볼 만하다는 얘기다.

LVMH나 케어링 그룹이 프로그램 제작을 후원하거나, 프랑스 아르떼 채널 혹은 루퍼드 머독 정도면 패션 할배 드림팀을 구성할 수 있을 듯 하다. 누가 됐든 패션판 <꽃보다 할배>를 제작한다면 섭외 0순위는 단연 칼 라거펠트. 1935년생 이순재보다 두 살 형뻘인 그는 이순재가 두바이에서 산토리니까지 ‘무한 직진본능 대폭발’로 인해 ‘직진’ 순재, 직진의 신으로 불리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라거펠트 비서실로부터 입수한 문건은 아니지만, 이 어르신께서 올 상반기에 얼마나 가열차게 일했는지 공식 공개된 자료만 봐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

시간을 리와인드해보면 4월 23일, 30회 이에르 페스티벌 참석. 22일, 피렌체에서 열린 콘데나스트 콘퍼런스에서 수지 멘키스 여사와 대담. 1일, ‘Art Shoppe Lofts+ Condos’ 건물 로비 디자인 기념차 캐나다 방문. 3월 31일, 파리-잘츠부르크 컬렉션의 뉴욕 패션쇼. 28일, 그레이스 왕비 재단을 돕기 위한 연례 행사인 모나코 로즈 볼 참석. 10일, 파리 샤넬 쇼. 5일, ‘Tiffany Cooper × Karl Lagerfeld’ 전시&꼴레트와 레포시 협업 행사 참석. 2월 28일, 한때 그의 곁을 주야장천 지키던 모델 밥티스트의 ‘GiabiconiStyle.com’ 론칭 파티 참석. 26일, 밀라노 펜디 쇼. 19일, 샤넬 디너. 13일, 펜디 뉴욕 플래그십 스토어 오픈. 3일, ‘Corsa Karl&Choupette’ 특별전(자동차 회사 ‘Opel’을 위해 슈페트를 주인공으로 한 달력 촬영과 제작). 1월 27일, 샤넬 꾸뛰르쇼와 다샤 주코바의 <WSJ> 표지 기념 파티. 24일, 디올 옴므 패션쇼 참석 등등. 와우! 웬만한 국가 원수가 봐도 울고 갈 만한 일정 아닌지.

꽃할배 서열 2위인 신구(1936년생)의 패션 버전이라면 조르지오 아르마니(1934년생)다. 신구가 ‘구세이돈’이란 별명을 지닌 채 바다보다 넓고 큰 호기심을 가졌다는 수식을 받듯, 아르마니가 오대양육대주에 펼치는 의식주의 스케일 역시 포세이돈 뺨친다. 자기 이름으로 된 숙박업소면 숙박업소, 속옷이면 속옷, 심지어 초콜릿이면 초콜릿 등등. 게다가 올해는 그의 패션 제국 설립 40주년이 되는 해. 아르마니로 말할 것 같으면 진정한 ‘쇼 마스터’로 부를 만하다. 1년에 시그니처 컬렉션의 남녀 패션쇼 4번, 엠포리오 아르마니 역시 4번과 꾸뛰르쇼 2번, 이것도 모자라 런웨이쇼는 아니지만 조르지오와 엠포리오의 프리폴과 리조트 컬렉션, 이와 함께 수많은 브릿지 라인까지. 이 모든 것들을 기리고 업적을 길이 보존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박물관을 밀라노에 개관한다. 이쯤되면 아르마니 곁에서 꽃짐꾼들의 환호가 들릴 듯하다. “브라아보, 아르마아니!”

유럽에서 패션 꽃할배 2인의 섭외가 완료됐다면, 세 번째 멤버는 대서양을 건너 뉴욕 현지에서 길거리 캐스팅해도 된다. 랄프 로렌(39년생)의 아메리칸 드림은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니까. 지난 4월 말, 미국 경제뉴스 전문 방송은 주가가 17%나 하락한 마이클 코어스에 대해 다루던 중 랄프 로렌을 언급했다. 방송 중 일부를 발췌해보자. 조시 브라운(리츠홀트 자산운용 CEO: “제가 이번 주에 쇼핑을 갔는데요. 마이클 코어스 셔츠와 타이 등이 테이블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쌓여 있었습니다. 전부 25~50% 세일 태그가 붙어 있었는데 이는 지난 1년 반에서 2년을 생각하면 마이클 코어스라는 브랜드 위상이 얼마나 변했는지를 나타냅니다. 이제 마이클 코어스가 가장 자신 있게 내놓던 액세서리들도 티제이맥스 같은 아웃렛 매장에 진열되는 상황입니다.” 미셸 카루소-카브레라(CNBC 앵커): “패션계의 문제점은 바로 이거죠. 기업공개(IPO)가 되는 즉시 편재성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정작 편재성을 갖추게 되면 아무도 그 종목을 원치 않게 되는 신기한 현상이 벌어집니다.” 조시 브라운: “그 균형을 맞추는 게 정말 힘들죠.” 미셸 카루소-카브레라: “랄프 로렌이 성공하긴 했죠.” 조시 브라운: “그렇습니다. 랄프 로렌은 그 균형을 잘 맞췄죠.” 요약하자면, 코어스와 달리 위대한 패션 개츠비는 성공적으로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

독일인 한 명, 이탈리아인 한 명, 미국인 한 명으로 패션판 <꽃보다 할배>가 다국적 진용을 갖췄다고 치자. 마지막 네 번째 후보 선정은 유난히 치열할 전망(패션 골수들에겐 <무한도전>의 여섯 번째 멤버 발굴을 위한 ‘식스맨’만큼 흥미진진한 프로젝트). 자, 네 번째 희망 후보로는? 로베르토 카발리(40년생), 요지 야마모토(43년생), 폴 스미스(46년생), 쟝 샤를르 드 카스텔바작(49년생), 타미 힐피거(51년생), 장 폴 고티에(52년생) 등등. 나이 순이나 캐릭터 면으로 볼 때 카발리를 제치고 야마모토가 발탁될 확률이 높다. 카발리는 지난 2월 밀라노 쇼를 끝으로 하야 성명을 발표했으니까(심지어 아르마니와 출신지도 같다). 반면 야마모토는 아시아 대표 패션 꽃할배. 그래서 육대주의 형평성을 위해서든 패션 캐릭터 면에서든 여러모로 야마모토가 유력하다는 얘기다. 3월에 발표한 그의 파리 컬렉션은 전에 없는 창의성으로 관객들을 전율케 했다(쇼가 끝나자 안나 델로 루쏘를 비롯한 몇몇 관객들은 감동의 눈물을 찔끔 흘렸다). 또 만화 캐릭터가 인기 절정인 지금, 산리오의 아이콘인 헬로 키티와 요지 야마모토의 협업이 이뤄진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 물론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어쨌든 야마모토를 향한 식지 않은 열기가 짐작되는 대목이다.

랄프 로렌과 캐릭터가 겹치긴 하나, 타미 힐피거 역시 유력하다. 올해 브랜드 30주년을 맞은 그 역시 뉴욕의 라거펠트를 자처하듯, 올 상반기에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 4월 16일, Dress for Success(저임금 여성 근로자들을 위해 기부받은 옷을 제공하고 스타일 조언까지 겸하는 비영리단체) 주최 2015 ‘Something to Share Gala’ 참석. 8일, ‘Dee Ocleppo’ 핸드백 론칭 행사 참석. 3월 31일, 자신의 파리 매장 오프닝. 6일, 스와로브스키와 랑방 협업 기념 칵테일 파티 참석. 4일, Macy’s Herald Square에서 열린 ‘Thalia’ 패션쇼 참석. 2월 28일, 미국 코미디 채널 ‘코미디 센트럴’ 자폐증 치료 기금 조성 행사 참석. 22일, 2015 <베니티 페어> 오스카 파티 참석. 21일, 아카데미 후보들과 함께 파티 참석. 17일, 레이첼 조 프레젠테이션 참석. 16일, 자신의 30주년 칵테일 리셉션. 16일, 자신의 패션쇼. 12일, ‘Dee Ocleppo’ 프레젠테이션 참석. 1월 24일, 런던에서 열린 Lisa Tchenguiz의 50세 생일 파티. 11일, 런던 남성복 컬렉션을 위해 영국 <GQ> 편집장과 공동 주최한 디너파티 등등. 이렇듯 자축은 물론, 후배들 격려하랴 사교 생활 즐기랴 사회공헌에 이바지하랴, 65세의 디자이너는 홍길동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라거펠트, 아르마니, 로렌 등이 어딘지 점잖고 카리스마가 넘치다 보니, 어떤 패션 팬들은 막내 특유의 귀염둥이 캐릭터가 필요하다고 지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장 폴 고티에는 어떤가? 패션 신사 폴 스미스 경이나 파리의 재치 만점 이야기꾼 카스텔바작보다 역시 고티에가 한 수 위다. 그의 이름 앞에 늘 붙어 다니는 ‘악동’이라는 별명만 봐도 그렇다. 기성복 라인을 접긴 했으나, 그는 라거펠트, 아르마니 등 이방인들로부터 패션 수도를 지키는 파리 순수 혈통으로서 여전히 에너지 넘친다(패션쇼 피날레 인사 때 늘 뛰어나오는 그를 떠올려보시라!). 그 역시 4월 10일엔 5회 amfAR(AIDS 연구 후원 단체) 갈라에 참석하는가 하면 3월 30일엔 파리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다. 또 16일엔 베를린의 환상적인 파티로 유명한 클럽 ‘SchwuZ’을 드나드는 모습이 파파라치에게 찍혔고, 20일엔 40회 세자르 영화제 초대됐다. 그리고 1월엔 자신의 꾸뛰르 컬렉션까지. 고티에 정도면 막둥이 멤버로서 캐릭터 특징 하나는 잡을 수 있지 않겠나.

칼, 조르지오, 랄프, 로베르토, 요지, 폴, 타미, 장 폴! 지금껏 우리는 패션 위인들을 거론할 때 간단히 이름만 불렀다. 요즘 패피들은 ‘옹’, 그러니까 남자 노인을 높여 이르는 삼인칭 대명사를 자주 붙여 존경심을 담아 호명하곤 한다. 라거펠트 옹은 일생일대 첫 개인전을 열었고, 아르마니 옹은 40주년 기념 박물관을 곧 개관한다. 또 힐피거 옹은 30주년을 맞았고, 야마모토 옹의 창의력은 도무지 꺼질 줄 모른다. 이들이 죄다 모여 만고강산 패션 4대 도시를 유람한다면 요즘 말마따나 얼마나 ‘꿀잼, 핵잼, 완전잼’을 선사할까. 그나저나 자신의 작업실로 친구들을 자주 초대해 이런저런 음식을 푸짐하게 장만하는 아제딘 알라이아(39년생)는 어떤가. 새까만 마오 재킷을 입은 채 사람 좋은 웃음으로 주위를 무장해제시키는 바로 그 전설의 패션 할배 말이다. 갑자기 패션판 <꽃보다 할배>가 패션판 <삼시세끼>로 바뀌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