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스트의 패션

선동적인 표어, 옷깃의 핀, 얼굴을 가린 마스크, 거리의 그래피티! 권력에 대한 저항 정신으로 똘똘 뭉친 아나키스트들이 패션의 한가운데서 혁명을 노래한다.

 

분더샵의 ‘고급진’ 내부 한가운데를 장악한, 굵직한 체인과 철근을 얼기설기 엮은 이 구조물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입구를 잘못 찾아 들어온 불청객? 본부 로비를 점거한 한 무리의 시위대? 슬로건이 적힌 깃발처럼 전위적으로 진열된 가지각색의 가죽 재킷이 매끈하고 새침한 신상 사이에서 한껏 거칠고 반항적인 태도로 으스대고 있다. 겨우 4평 남짓한 규모지만 분더샵을 통째로 집어삼킬 듯한 에너지를 내뿜은 디자이너 박종우의 99%IS- 캡슐 컬렉션은 7월 말의 열기만큼이나 인스타그램을 뜨겁게 달궜다. 빈티지 바이커 재킷을 커스터마이징하는, 작지만 특별한 컬렉션의 로고는 아나키즘의 마크 ‘서클 A’. “나의 법칙과 체계를 99%IS-만의 방식으로 실현한다는 것, 그리고 삶에서 자신의 의지와 신념을 중시하는 ‘DIY 라이프’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라고 디자이너는 말했다.

MBM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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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기존 체제와 권력에 저항하고 직접 나서는(Do It Yourself) 무정부주의가 패션의 또 다른 이름이 되고 있다. 금방이라도 봉기할 듯 일촉즉발 호전적인 분위기의 패션의 제군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케이티 힐리어와 루엘라 바틀리의 마지막 MBMJ 런웨이다. 체 게바라처럼 풀어 헤친 머리칼 위에 비뚜름히 베레모를 얹은 젊은 여성 운동가들은 소매와 치맛단, 스카프 자락에 ‘연대’ ‘우리의 미래’ ‘선택’ 같은 선동적인 문구를 휘날리며 녹색 잔디 위를 행군했다. “젊음의 긍정적인 에너지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느낌이 곳곳에 스며들게 하는 게 중요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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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 걸친 스카프에는 ‘서프러제트(Suffragette)’라는 표현이 적혀 있었는데, 선거권을 뜻하는 영어 단어 ‘Suffrage’의 여성형으로 20세기 초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을 이르는 말이다(이에 대해 다룬 영화 <서프러제트>가 메릴 스트립, 캐리 멀리건, 헬레나 본햄 카터 주연으로 10월 개봉 예정). “여자 영웅이자 투쟁하는 사람입니다. 더 이상 보호의 대상이 아닌, 직접 밖으로 나가서 행동하는 여자들이죠.” 바틀리의 코멘트에 힐리어가 제안했다. “베레를 사세요! 배지도 만들고요. 낡은 진을 가져다가 그 위에 패치들을 붙여봐요. 그런 디자인의 옷을 사는 것도 방법이죠, 나만의 것을 만들 때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으니까요.”

내 앞가림하기도 바쁜 세상에 사회운동이라니 시대착오적이라고 코웃음 칠 수도 있지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사소한 부조리에 일일이 분노하고 봉기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SNS 덕분에 예전보다 훨씬 더). <개그콘서트>의 ‘횃불투게더’를 떠올려보라. 눅눅한 치킨, 상추 없는 삼겹살, 짬뽕 국물 없는 볶음밥. 여러분, 일어나십시오! 횃불을 높이 듭시다! 절대 말로 해선 안 되는 바, 입니다!

 

“누군가는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경찰이 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더 좋아 보이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거리의 테러리스트가 된다.” 그래피티 아티스트 뱅크시의 말처럼 그래피티는 대표적인 반문화와 저항의 예술. 제레미 스캇은 매끈한 헤드쿼터 빌딩 같은 새틴 실크 위에 뉴욕 거리의 그래피티를 프린트한 이브닝 드레스로 모스키노의 피날레를 ‘도발’했다(부주의하게 도용하는 바람에 원작자인 그래피티 아티스트에게 소송당한 상태). 쇼장에 입장하는 이들 모두에게 마스크와 보호용 비닐수트를 나눠준 A.F. 반더보스트의 앤 반더보스트와 필립 아릭스는 벨기에 아티스트 요리스 반 데 무어텔(Joris Van de Moortel)을 섭외, 캣워크가 진행되는 동안 모델과 라이브 공연을 한 밴드의 검은 의상에 하얀 스프레이를 뿌리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좋은 방식으로 모두에게 충격을 줬다고 생각해요.” 벨기에의 인디 록 밴드 ‘인터갈락틱 러버스’는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스프레이 페인트 때문에 쇼장에 온 사람들 모두가 몽롱한 상태가 돼서 돌아갔지만요.

한밤중에 담벼락에 스프레이로 낙서를 하거나 무리 지어 시위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건? 바로 마스크! 아나키스트들이 복면을 쓰는 이유는 첫째, 두말할 것 없이 신분을 감추기 위해서고 둘째, 사회적 지위나 계층에서 벗어나 동등한 연대감을 형성하기 위해서다. 쇼에 성 구분이 모호한 이들을 세우는 후드 바이 에어의 셰인 올리버는 모델들의 얼굴에 스타킹을 씌워 사회가 만들어낸 잣대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고전적이고 엄숙한 가레스 퓨의 잔 다르크들은 가면 대신 얼굴을 가로지르는 붉은 십자가를 그렸다. 붉은 십자가로 하나가 된 여군들은 좌파의 상징인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전진, 또 전진!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죠. 의미있는 게임에 참여하는 겁니다.”

 

펑크 록 없이 저항 정신을 논할 수는 없다. 펑크 록 중에서도 무정부주의, 동물 보호, 급진적인 환경 보호에 대한 내용을 가사에 담은 아나코 펑크(Anarcho-Punk) 로커들은 기존 펑크 패션보다 조금 더 거친 룩으로 반사회적 성향을 드러낸다. 머리카락을 뾰족하게 세운 모호크나 리버티 스파이크 헤어스타일, 메탈 스터드는 기존 펑크족들과 다르지 않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통일하거나 카무플라주 팬츠와 인조가죽(아쉬시의 스팽글 카모 팬츠), 구멍 나고 너덜거리는 낡은 옷, 치실로 비뚤배뚤 거칠게 꿰맨 자국(하이더 아커만의 굵고 하얀 스티치) 등 좀더 ‘남루’하고 거칠게 스타일을 연출하는 게 차이다.

온몸으로 외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기존 체제에 저항하는 존재였던 이들도 이번 시즌 아나키스트 룩에 영감을 더한다. “그는 자유의 지론자이자 무정부주의자였습니다. 사회를 바꿨고 여자들을 강하게 했죠.” 패션계에 발을 담그기 전 좌파 무정부주의 운동가였던 피에르 베르제는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그리고 그 아나키스트의 피가 생로랑 하우스를 타고 흐르는 것처럼 에디 슬리먼은 우아한 마담들의 세계였던 YSL 하우스를 배드 걸 로커들의 천국으로 전복시켰다. 가죽 레깅스, 찢어지고 너덜거리는 타이츠와 검정 앵클 부츠, 훤히 드러난 가슴, 박쥐 날개 같은 눈 화장의 생로랑 가을 컬렉션은 로커 수지 수, 크리시 하인드, 데비 해리, 조안 제트 같은 70년대 위대한(!) 여자 로커들에 대한 오마주다.

 

이 혁명의 여인들은 당대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전통적인 여자의 역할에 반기를 들었으며, 오늘날 뮤지션들이 추구하는 것과는 다른 독자적인 스타일을 고수했다. 크리시 하인드, 그린 데이 등 유명 로커들과 작업해온 스타일리스트 디 앤더슨은 요즘 유명한 팝 뮤지션일수록 스타일리스트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고 평했다. “나만의 스타일을 찾기 위해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는 것과도 같아요. 가장 중요한 건 다른 사람들이 당신이 입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방식에 따라 입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 입어야 한다는 거죠.” 이번 시즌 아나키스트 룩을 제안한 디자이너들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바로 그것이다. 투쟁하는 사람처럼 입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스스로 투쟁하는 자가 돼야 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