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패션 피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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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혁재, 김현철 같은 개그맨들이 말 그대로 ‘공기 반, 소리 반’ 같은 음성으로 생전의 앙드레 김을 흉내 낼 때만 해도 패션 디자이너는 대중 연예에서 희화화된 존재였다. TV 드라마나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디자이너는 늘 우스꽝스러운 인물. 성별이 모호하거나 지나치게 사치스럽거나 비현실적으로 묘사되곤 했으니까(디자이너는 물론, 헤어 스타일리스트나 메이크업 아티스트처럼 패션계 전역에서 활약하는 사람들의 캐릭터가 죄다 비슷했다).

몇 년 전, 디자이너 이상봉이 ‘한글’을 주제로 컬렉션을 발표하고 김연아 같은 국제적 스포츠 스타에게 옷을 입히며 국내외에서 이름을 날릴 때, 그가 연예계의 표적이 된 건 실력도 실력이지만 개성 넘치는 외모도 한몫 거들었다. 60촉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민머리, 캐리커처를 그릴 때 도움이 되던 동그란 뿔테 안경과 수염 등은 예능 PD들이 혹할 만했다. 대표적인 예가 <무한도전> 전격 출연이다. ‘무도’ 멤버들의 패션쇼 입문기를 다룬 에피소드에 그가 조력자 겸 협력자로 발탁됐을 때 말이다. 그리하여 이상봉 패션쇼에서 캣워킹한 유재석, 박명수, 하하 등을 전 국민이 구경할 수 있게 된 것도 사실이다. 이런 대중 친화적 이미지 덕분에 그는 앙드레 김의 뒤를 이어 국민 디자이너로 불렸다.

이상봉의 캐릭터(아시다시피 바로 그 신체 부위!)와 교차되는 인물이 얼마 전 공중파에 출현했으니, 짐작했다시피 디자이너 황재근이다. 그는 기발한 복면 제작과 만화 캐릭터 같은 외모 덕분에 ‘2015년의 인물’로 손색없을 정도다. 2011년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를 통해 ‘데뷔’한 이 디자이너는 몇 년 후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한 뒤 2015년 <마이 리틀 텔레비전>과 <복면가왕>을 통해 비로소 스타덤에 올랐다(새로운 공중파 프로그램도 예약돼 있다).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한 스타일리스트 한혜연은 케이블 채널과 홈쇼핑에서 패션 슈퍼스타로 통한다(인스타그램 팔로워는 곧 105K를 찍을 전망). 그래서 공중파 입성이 늦은 감도 없진 않지만, 아무튼 대국민을 상대로 패션 피플들의 선입견을 깨고 있는 그녀가 얼마나 감사한지! 사실 패션 피플들에겐 까칠하기 이를 데 없고, 자아도취 기질이 다분하며, 매우 시큰둥하다는 오해가 따른다. 그러나 한혜연의 여유만만한 유머 감각과 인간미는 방송 관계자는 물론 시청자들을 들었다 놨다 하며, 아이라인보다 더 치명적인 그녀만의 매력 속으로 모두를 침몰시키고 있다. 심지어 성우나 아나운서 못지않은 시원시원한 발성의 흡입력이란(라디오에도 그녀가 나온다면 정말 좋겠네).

뷰티 스페셜리스트들은 패션 쪽 사람들에 비해 한발 늦게 공중파에 투입됐다. 지금까진 케이블 채널에서 실용적 비법을 공개하거나 홈쇼핑에서 기발한 화장품을 최단 시간에 매진시켜왔던 그들 말이다. 한반도가 아끼는 두 남자가 드디어 공중파 입성에 성공했다! 손대식과 박태윤 듀오다. 천부적 패션 & 뷰티 감각을 기본으로, 색조 화장품을 통해 여자의 얼굴에 마법을 부리는 두 남자의 모습은 기다렸다는 듯 인기를 누렸다. 실력은 둘째 치고, 안문숙이나 황영희 못지않게 입에 착착 감기고 맛깔스러운 전라도 사투리의 입담과 알콩달콩 주고받는(손대식은 이래저래 툴툴대지만, 박태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만담 덕분에 댓글 폭주!

그렇다면 패션지에서 자주 봤던 인물들이 왜 느닷없이 방송에서 인기일까? 공중파와 패션계 사이엔 케이블 채널이라는, 비교적 표현이 자유롭고 열린 ‘가교’가 있었다. 말랑말랑하고 신선하며 ‘비주얼’에 관련되거나 ‘비주얼’이 흥미로운 사람을 찾는 그쪽 전문가들에게 패션 피플들이 포착된 것. 거기서 테스트를 거쳐 검증된 그들의 콘텐츠(대중이 호기심을 갖는 패션 쪽 사람들의 은밀한 일상이나 화법 같은 습관 등등)가 드디어 만인에게 먹혔다. 그러니 이제 몇몇 스타일리스트들의 배꼽 빠지는 유머 감각은 홈쇼핑에서만 보기엔 몹시 아까울 뿐이다. 또 스티브와 요니의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 박승건의 타고난 끼를 모두가 즐길 수 있기를! 대한민국에서 패션은 또 다른 엔터테인먼트로 통하고,그게 또 먹혔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