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해서 아름다운 소년 소녀의 서툴고 투박한 사랑. 영화〈순정〉에서 도경수와 김소현은 찬란하던 열일곱의 그 여름날로 돌아간다.

지난여름 소년은 처음 만난 소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소녀는 소년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얼굴은 붉어졌고 잡은 두 손엔 살짝 땀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멋쩍어서 올려다본 하늘은 눈부시게 파랬고, 괜히 신발 끝으로 툭툭 친 바닥에선 먼지가 피어올랐다. 공기는 낯설었고 소년 소녀는 어색했다. 영화 <순정>의 첫 장면은 아니다. <순정>의 두 배우 도경수와 김소현의 상상을 좀 보탠 실제 첫 만남 얘기다. 이은희 감독은 첫 촬영에서 다짜고짜 손을 잡으라는 디렉션을 내렸고 도경수와 김소현은 카메라가 돌아가든 돌아가지 않든 잡은 손을 놓으면 안 됐다. 두 배우는 입을 모아 “부끄러웠다!”고 그 순간을 돌아봤다. 당시 스물셋 도경수, 열일곱 김소현의 <순정>은 그렇게 시작됐다.

영화 <순정>은 애틋한 첫사랑과 다섯 친구의 우정 이야기다. 마흔 살인 2015년 현재, 열 일곱 살이던 1991년 과거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우리가 좋아하던 첫사랑 소녀 ‘수옥’은 김소현이, 수옥의 곁을 묵묵히 지키는 일편단심 열일곱 소년 ‘범실’은 도경수가 맡았다. 과거를 불러오는 건, 라디오 생방송 중 도착한 한 통의 편지다. 익숙한 듯 아련한 기분이드는 설정. 첫사랑을 다룬 영화나 드라마가 과거와 현재를 오고 가며 그때 그 시절을 얘기하는 건 아마 이뤄지지 않는 첫사랑의 속성 때문인지 모른다. 자신에게 피어난 감정임에도 이 감정의 정체가 뭔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풋사과처럼 서툴기만 하니까. 이은희 감독은 ‘달큰’하고 쌉쌀하던 열일곱 순정을 실제 배우로부터 찾았다. 영화에 맞는 배우를 찾기보다, 배우의 모습을 캐릭터에 녹여내고자 했다. 30대가 교복을 입어도 어색하지 않은 ‘동안 세상’이지만, 그들에게 순정은 이미 과거의 감정. 웃을 때면 입가에서 하트가 떠오르는 도경수와 김소현은 범실과 수옥 그 자체였다.

두 배우도 <순정>을 맞이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김소현은 시나리오를 읽고 계속 눈물이 났다. 살아보기는커녕 태어나지도 않았던 시절인데 한번 감정이 느껴지니 걷잡을 수가 없었다.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너무 예뻤고 너무 안타까웠어요. 정말 좋다, 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요.” 도경수에게 범실이는 가슴속에 훅 들어왔다. “아무 정보 없이 시나리오를 읽었어요. 그냥 첫 느낌에 범실이라는 캐릭터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그 자리에서 바로 하겠다고 말씀드렸어요.” ‘순정’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막연한 순수함도 ‘다시’ 느껴보고 싶었다.“고등학교 때부터 까불까불한 성격이라서 영화 같은 순수함은 거의 없지 않았나 싶어요. 순정을 잃었던 거죠.(웃음)”

도경수가 잃었다는 열일곱 살 추억을 찾아 영화는 전라남도 고흥군 득량도로 장소를 옮긴다. 서울에서 400km를 달린 뒤 배를 갈아타고 바닷길을 건너야 도착할 수 있는 섬. 지도상에는 ‘점’ 하나로 표현되는 곳이다. 갯벌과 논밭은 아름다웠고, 2015년 일상을 채우던 문명은 없었다. 슈퍼마켓 하나 없는 섬의 최고 쾌락은 밥차였다. 물리적인 거리는 배우들을 고흥에 살다시피 만들었다. ‘전라남도 작은 바닷가 마을, 다섯 소꿉친구들의 드라마’라는 영화 설정처럼 다섯 명의 또래 배우들은 그렇게 친구가 됐다. “진짜 시골 소년들이 할 수 있는 놀이를 하며 지냈어요. 바다에서 수영하고 낚시도 했어요. 물론 술도 마셨고요.” 평소 수영을 할 줄 몰랐던 도경수는 매일 조금씩 텀벙거리다가 수영을 배우면서 물을 좋아하게 됐다. 어릴 때 잠시 고흥에서 살았던 그는 어렴풋이 고흥이라는 곳이 주었던 따뜻하던 느낌도 기억이 났다. “제일 많이 한 건 ‘얘기’예요. 전등이 없으니 밤이 되면 너무 깜깜하고 비가 오면 나갈 수도 없었어요. 남자 셋이 마을회관에서 한 방을 썼는데 정말 많은 얘길 했어요. 연기 얘기, 그냥 남자들 하는 얘기, 야한 얘기… 속내를 숨김없이 다 털어놓은 거 같아요.” 매일 취침 시각은 새벽이었다. 낮에 촬영하면 저녁 먹고 들어가서 안 나오고, 밤에 촬영하면 새벽까지 찍고 또 들어가서 얘기했단다. 대한민국답게 휴대폰은 빵빵 터졌으나 언젠가부터 신기하게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없어졌다. 연기 연습 분위기를 이끈 건 도경수였고, 여가 담당은 이다윗이었다. 김소현에게 이다윗은 개그콘서트였다. “다윗 오빠가 흥이 정말 많아서 심심한 줄 몰랐어요. 노래 하나 틀어놓으면 10시간도 분위기를 이끌 사람이라니까요?”

합숙 생활은 사투리 연기에도 대단히 큰 효과를 발휘했다. 다섯 배우는 마치 어학연수 간 사람들처럼 ‘서울말 금지’를 규칙으로 정하고 따랐다. 좀더 네이티브 학습이 필요하다고 느껴질 때면 김소현은 동네 목욕탕에 가서 가만히 아주머니들 수다에 귀를 기울였다. “영화 촬영한다고 동네에 소문이 나서 마실 것도 챙겨주시고 계속 말을 걸어주셨어요. 목욕탕이라는 공간이 좀 부끄럽다 보니까 제가 적극적으로 나서진 못했지만요.(웃음)” 지금도 일상생활 속에서 “뭐여!”가 툭툭 튀어나오는 도경수는 전라도 사투리가 가진 미학에 감탄하곤 했다. “산돌이가 깁스를 하고 나오는 장면에서 한 주민분이 ‘아프겠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참말로 짠하게 생겨부렸네’라고 하시는 거예요. 와, 저렇게 말할 수도 있구나, 다양한 표현에 놀랐어요.”

범실, 수옥, 길자, 산돌, 개덕이가 진짜 친구가 되고 나니 친구끼리 주고받는 에너지 자체가 곧 연기가 되었다. 이은희 감독은 배우들에게 각기 다른 디렉션을 내려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자연스러운 리액션을 화면에 담곤 했다. 둘 사이 감정이 중요한 장면이면 범실에게 실제로 수옥이가 예뻐 보이는 옷을 물어보고 의상을 고르기도 했다. 그런 작은 선택이 배우들에게 실제 상황처럼 느끼게 했고 영화에는 순간의 진심이 가득 찼다. 리딩할 때면 식은땀을 흘렸다는 도경수도, 전 작품에서 연기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김소현도 <순정>에서는 연기에 부담감을 덜 느꼈다. 배우를 캐릭터 그 자체로 만들고자 한 이은희 감독의 시도는 대단히 잘 맞아떨어진 셈이다.

긴 생머리, 커다란 눈, 동그랗고 자그마한 얼굴, 가냘픈 팔다리. 새해가 되어 열여덟 살이 된 김소현은 국민 첫사랑의 계보를 잇는 외모를 완벽하게 갖췄다. 열 살에 <전설의 고향-아가야 청산가자>로 데뷔해 한 해도 빠짐없이 브라운관에 얼굴을 비친 국민 여동생이 국민 첫사랑으로 보이기 시작한 건 <보고 싶다>부터다. 당시 여진구와 풋풋한 키스 신에 심장을 내준 건 다 큰 어른들이었다. 하지만 ‘인형 소녀’에서 ‘만찢녀’로 자란 김소현은 외모 안에 자신을 가두는 역할에는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 <수상한 가정부> <후아유-학교 2015>까지 김소현의 동그란 눈동자에는 항상 결핍이 자리했다. 우리가 보내온 그 시절이 핑크빛으로만 가득 차 있지 않음을, 까끌거리는 무언가를 삼켜야만 통과할 수 있다는 걸 김소현은 작품으로 보여주곤 했다. 그래서일까. <순정>의 수옥은 마냥 첫사랑 이미지만 따라가지 않는다. “감독님이 수옥이는 어떤 옷을 입을 거 같아? 라고 물어보셨어요. 꽃무늬 원피스라고 대답했지요. 감독님은 첫사랑이 떠오르는 옷은 입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주변에 첫사랑에 대한 이미지가 뭔지 물어보고 다 배제하셨대요. 수옥이는 전형적인 첫사랑 여자아이와 달라요. 되게 강한 구석이 있는 친구죠. 힘든 상황을 장애물로 받아들이지 않을 정도로요.” 우윳빛 얼굴은 오히려 분장으로 덮었다. 김소현은 수옥의 다부진 내면이 마음에 들었다. 고등학교 진학 대신 홈스쿨링을 선택해 지금은 자주 만나지 못하지만 중학교 친구들이 떠오르는 설정도 좋았다. 무엇보다 김소현은 다섯 친구 중 유일하게 배역과 나이가 같았다. 열일곱 여름방학이 곧 고흥에 있었다. “아직 첫사랑 경험이 없어요.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 수옥이를 통해 처음으로 첫사랑 감정을 느껴본 거 같아요. 저에겐 정말 의미가 깊은 영화예요.” 촬영은 끝났고 그렇게 김소현의 첫사랑도 막을 내렸다.

아쉽게도 도경수에게 수옥은 첫사랑이 아니다. 범실을 연기하며 도경수가 내내 떠올린 건 고 3 시절 첫사랑 경험이었다. “범실이와 제가 닮은 점이 있다면 남자다운 면이에요. 일편단심인 성격도요. 첫사랑을 할 때 제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어떻게 상대방을 챙겼는지 떠올리며 범실이에게 다가갔어요. 짝사랑도 아니었는데 지금은 우울하고 슬픈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헤어질 때 슬픔이 커서 그런 거 같아요.” 시나리오상 범실은 도경수를 만나 살짝 변질도 됐다. “범실이는 남자답고 순수했는데 제가 들어가면서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약간 바보 같은 면? ‘멍충함’이 생긴 것 같아요. 맹하게 쑥스러워하게 됐다고나 할까요. 감독님은 좋아하셨어요.(웃음)” <괜찮아, 사랑이야> 당시 노희경 작가는 새하얀 도화지 같은 도경수를 만나고 “대본 리딩 때 어둡게 읽어보라고 시켰다가 진짜 어두워서 캐릭터를 좀더 밝게 바꿨다”는 얘길 전한 바 있다. 인기가 지구를 뚫고 나갈 듯한 아이돌 엑소 멤버지만 연기는 한 번도 배워본 적 없기 때문일까. 도경수는 인물에게 아무 선입견 없이 다가간다. 김소현 역시 현장에서 도경수를 보고 신선한 자극을 받았다고 말했다. “정극을 계속해온 저에 비해 경수 오빠는 자유로웠어요. 정말 진심으로 연기를 하더라고요. 마음으로 순수하게 연기하니까 그게 제 마음에도 와 닿았고 저도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연기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정말 잘 맞았어요.”

처음 도경수가 <카트>에 출연했을 때 엑소 멤버들의 얼굴을 구별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도경수를 ‘될 성싶은 신인 배우’로 꼽았다. 살면서 큰 소리 한 번 낸 적 없다던 그는 열패감으로 가득하던 태영이를 꾹꾹 눌러 담듯 연기했다. 도경수 인생 최초의 오디션을 본 부지영 감독은 “‘어, 뭔가 할 줄 아네’ 이런 느낌이 번뜩 들었다. 어떤 느낌을 보완하라고 하면 바로 반영되는 친구였다. 연기는 머리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나와야 하는 건데 그걸 해내더라”라고 캐스팅 이유를 말했다. <순정>에서 그런 본능은 도경수를 덮쳐오기도 했다. “수옥이 아버지에게 화를 내는 장면이 있었어요. 그런데 두 번째 테이크부터 몸이 이상한 거예요. 진짜로 화가 난 것처럼 눈이 확 커지고 몸이 굳었어요. ‘감독님, 저 이상해요’ 말씀드리고 10여 분간 몸을 주물러서 겨우 풀었어요.” 어릴 때부터 영화 보는 걸 아주 좋아한 덕분에 갖게 된 몰입력만은 아닐 것이다. 상처받은 소년이었던 <괜찮아, 사랑이야>, 섬뜩한 연기를 보여준 <너를 기억해>까지 도경수는 인물의 속내를 자기 마음처럼 들여다봤다. “기억력이 정말 안 좋은 편이에요. 하지만 무의식중에 남아 있는 감정이 연기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현장에서 도경수는 늘 묻고 조언을 들어 다시 고민을 가지고 온다. 요즘 연기에 관해 가장 의지하는 건 조인성이다. ”시나리오, 캐릭터, 설정까지 어려운 일 있으면 늘 인성이 형한테 연락해요. 제가 말하는 캐릭터, 인성이 형이 보는 캐릭터, 감독님이 말씀하시는 캐릭터, 그 사이에서 답을 찾도록 도와주세요. 공통분모가 많아서 말 안 해도 알 것 같은 사이예요.”

도경수의 차기작은 <형>이다. ‘잘나가는 유도 선수’ 역할이다. 덕분에 요즘 달라진 게 있다면 다부진 체격이다. “상의 탈의 장면이 있다고 해서 운동을 많이 했어요. 체격이 작았는데 저도 달라진 걸 느껴요. 물론 그래도, 작아요.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결국 영화에 제 몸이 안 나온다는 겁니다. 복근 운동까지 열심히 해서 아쉽긴 한데 한편으로 잘된 거 같습니다. 많이 부족했거든요. 하하하. 실제 유도 선수들과 함께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화면에는 뚝뚝 잘려서 나옵니다. 하하하.”

도경수가 어깨를 키우는 동안 김소현은 작년 한 해 <순정>을 포함, 다섯 편의 작품을 내리 찍었다. 1인2역 연기로 2015년을 화려하게 마무리하게 해준 <후아유-학교 2015>, 새로운 역할에 대한 망설임을 털어낸 <페이지 터너>, 평소 롤모델로 손꼽던 손예진의 아역을 연기한 <덕혜옹주>, 장르적인 변화를 준 웹드라마 <악몽 선생>까지. “매 작품을 할 때마다 잘한 부분과 못한 부분을 정확하게 판단하려고 해요. 그리고 못한 부분을 하나씩 개선해나가려고 하고요” 아역 배우로 시작, 꾸준함이 가져다줬을지 모를 관성을 김소현은 스스로 경계해왔다. 현장에서 감독님에게 연기 때문에 혼났다는 얘길 털어놓으면서도 큰 도움이 되었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작년 연말에는 2년간해오던 <쇼! 음악중심> MC 경력을 바탕으로 연기대상 시상식 진행자로도 나섰다. “앞으로도 맡겨만 주신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헤헤.”

반드시 돌아오고야 마는 방학 마지막 날처럼, 고흥에서 세 달간의 촬영도 끝이 났다. 서울로 돌아온 도경수는 여전히 지구에서 제일 바쁜 아이돌 엑소이고, 김소현은 차기작준비에 여념이 없다. 사랑과 우정은 늘 우리를 성장하게 한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 수 있는 능력은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다. 서툴기만 한 과거도 우리 등을 앞으로 떠민다. 한 걸음만 더 나아가보라고. 인터뷰를 따로 한 두 배우가 ‘앞날’에 대해 들려준 얘기는 신기할 정도로 똑같았다. ‘사람으로 멋있는 사람’. 푸르고 발그레하던 지난 여름날은 소년 소녀에게 무엇을 남겼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