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하균이라는 세계에 대하여

Fashion

신하균이라는 세계에 대하여

2018-04-02T22:45:29+00:00 2018.04.03|

연기하는 신하균은 예민하고 공격적이다. 일상의 신하균은 유연하고 안정적이다. 두 세계를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한 사람, ‘신하균’이라는 세계에 대하여.

투톤 실크 셔츠는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신하균이라는 배우에게 꽤 오랜 시간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그간 보여준 작품을 들여다보면, 그는 무겁고 진지하고, 자신만의 세계관을 확고하게 지닌 작가주의적 배우에 가깝기 때문이다. ‘신하균’이라는 이름 자체를 하나의 장르로 규정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작품에서 만나왔고, 그가 변주해낸 캐릭터의 폭 또한 쉽게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기 때문이다. 어느 하나 쉽지 않고, 뭐 하나 무겁지 않은 것이 없는. 말과 말 사이에 가장 무거운 추를 입에 매달고 내뱉는 것처럼 ‘인터뷰 또한 그럴 것이다’라고 단정 짓게 되는 사람. 스크린 속에서 움직이는 모습은 물론이거니와 오늘 같은 인터뷰 촬영에도 여느 배우와 달리 말을 아끼는 사람. 왜이렇게 오래 찍는지, 세트는 왜 그렇게 오래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해 준비된 답변을 풀어놓을 기회조차 주지 않는, 그저 조용히 자신의 차례가 다가오기를 묵묵히 기다리는 사람. 과연 이렇게 불평불만 없는 배우가 인터뷰이가 되어 둘만 있게 되는 공간에서는 어떻게 반격해올지 사뭇 걱정되는 마음으로 말을 걸었다.

화이트 티셔츠는 클레더(Klader), 블랙 레더 팬츠는 코치(Coach).

“말이 없다고는 볼 수 없는 타입인데요.(웃음) 제가 말을 아끼는 경우가 있다면 그건 앞에 카메라가 있을 때예요. 예를 들면, 배우들이랑 함께 나서는 홍보 토크쇼나 영화를 소개하는 TV 프로그램의 인터뷰 같은. 이상하게 카메라가 저를 담고 있다고 인지되면 입이 떨어지질 않아요. 어색하고, 울렁거리고 속이 답답하죠. 지금 같은 인터뷰는 뭐, 아주 편안합니다. 녹음기는 제 목소리만 가져갈 뿐이니까요.(웃음)” 단지 그의 목소리만 가져온 것이 안타까울 만큼, 인터뷰 내내 그가 쏟아낸 말과 표정은 다변가면서 달변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카메라라는 방어막을 털어내니 질문마다에 던져오는 답변이, 말재주도 연기력 못지않게 그가 지닌 재능처럼 느껴질 정도다. 오늘 인터뷰의 목적이자 개봉 준비 중인 영화 <바람 바람 바람>이 궁금해서 못 견디겠는 이유이기도 하다.

블랙 슬리브리스 톱은 알렉산더 왕(Alexander Wang), 블랙 레더 팬츠는 코치, 블랙 로브는 로리엣(Roliat), 샌들은 펜디(Fendi).

“제주도에 사는 두 커플에게 불어닥친 ‘바람’에 대한 이야기예요. 저는 요리사가 꿈이었지만, 부득이한 이유로 그 꿈을 접고 성실하게 처가살이를 하는 인물이죠. 그러다 공인된 바람둥이 처남의 영향으로 예정에 없던 일탈을 경험하는 캐릭터예요. 체코 영화가 원작인데, 저는 이미 원작을 본 상태였어요. 우리나라에는 익숙하지 않은 정서를 소재로 한 거라 잘 표현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이병헌 감독과 대화하면서 새롭게 해석할 수 있겠다 싶었죠. 아직 저도 완성본을 보지는 못했어요. 다만 ADR(후시 녹음)할 때 간간이 봤는데 어떻게 마무리됐을지 기대가 커요.”

체크 셔츠는 노앙(Nohant), 블랙 팬츠는 발렌티노(Valentino at Mue), 플립플랍은 버켄스탁(Birkenstock).

작년 상반기를 제주에서 보냈다. 영화 특성상 세트 분량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주로 제주도와 부산을 오가며 촬영했다. “저희 영화 장르가 굳이 분류하자면 코미디인데, 이 영화를 찍으면서 다리 수술까지 했네요.(웃음) 감독님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진 후에도 왠지 한 번 더 테이크를 가야 할 것 같아서 욕심을 냈는데 결국 다리가 부러졌어요. 과욕을 부린 거죠.(웃음)” 연기에 대해서라면 치밀하게 계산하고 움직일 것 같지만, 도무지 요령을 부리지 않는 타입이다. 그런 작은 속임수로 관객의 눈을 돌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덕분에 영화를 끝내고도 한참을 쉬어야 했고, 2월 한 달은 철심 제거 수술로 거의 집에만 있었다. 아직 빠지지 않은 수술 후의 부기가 오른쪽 발목을 두툼히 감싸 안고 있다.

네이비 슬리브리스는 오디너리 피플(Ordinary People).

<바람 바람 바람>을 포함, 최근 작품을 뒤적여보면 새삼 그의 모험심이 두드러진다. 안 해보고, 못해보고, 신하균이라면 다르게 만들어낼 수 있는 것들. 일단, 젊은 감독이거나 입봉하는 감독과의 작업을 서슴지 않는다. “감독님들이 젊어진 게 아니라 제가 나이 든 게 아닐까요?(웃음) 그러고보니 <악녀>랑 <7호실> <바람 바람 바람>까지 모두 80년생 동갑내기 감독님들이네요. 특별히 이래야지, 한 건 아니지만 작업하면서 대화를 하다 보면 놀랄 때가 많죠. 이렇게 접근할 수도 있구나,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구나 싶어요. 이병헌 감독은 코미디 감각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직접 작업해보니 확실히 본인만의 독특한 대화법 같은 게 있더군요. 음악으로 치면 리듬을 타고 간다고 해야 하나…” 여러모로 신하균은 이번 영화가 궁금하다. 신하균처럼 본능적으로 감지해내는 사람은 조금 과하거나 무리수를 두는 소재라 해도 분명 자신의 것으로 잘 소화해 안정적인 지점에서 관객의 선택을 기다릴 것이다.

블랙 티셔츠는 H&M, 블랙 팬츠는 닐 바렛(Neil Barrett).

배우로 활동하는 그 오랜 시간, 비어 있는 공간 없이 사이사이 드라마와 영화를 채워 넣으며 자신의 세월을 완성한 사람. 작품이 곧 신하균 자신이 되는 믿음직한 크레딧을 만들기까지 그는 무엇을 포기했을까. 대부분이 자신을 뛰어넘어야만 가능했을 캐릭터를 등에 지고, 매번 ‘새로움’이라는 산을 넘으며 달려왔으니 이젠 숨 고르기를 해도 되지 않을까. “앞으로는 선택할 수 있는 기회보다 선택을 받아야만 가능한 기회가 오지 않을까요?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의 차이를 이제는 아는 나이라고 생각해요. 언제까지 제가 선호하는 작품으로, 실험을 반복하며 욕심낼 수 있을까요. 지금은 주어진 것에, 주어진 역할에 저를 잘 끼워 넣으면서 순탄하게 굴러갈 수 있도록 맞추려고 해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진 게 있다면, 캐릭터와 자신의 일치성에 대해 고민했던 예전에 비해 지금은 그 연결 고리를 오래 가져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기가 맡은 역할이 곧 자신이 되어야만 완성된 캐릭터라고 생각하던 젊은 날에는 끊임없는 물음표로 자신을 괴롭히고 끝까지 몰아붙였다면, 지금은 종료와 동시에 그 고리들이 서서히 풀어진다는 것. “예를 들면 <복수는 나의 것>이나 <지구를 지켜라!> 같은 영화는 상황 자체가 일반적이지 않았으니까 사전에 충분히 제 자신에게 시뮬레이션해야 했어요. 아무리 제 안에 캐릭터를 동화시키고 가도 현장에 가면 의외의 변수가 터지기 때문에 그 변수까지 열어두고 연기하지 않으면 안 됐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작품 하는 동안엔 딴생각할 여유가 없었고, 그런 생각이 드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았죠. 당겼다가 몰아붙였다가, 그 안에 머무는 제 자신이 너무 힘들었나 봐요. 어느 순간, 제가 노력하지 않아도 저를 조이던 것들이 자연스럽게 흐려지더라고요. 이런 게 세월의 힘인지, 경험에서 오는 노하우인지는 모르겠지만 억지스러운 노력으로 얻어진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는 게 좋아요.”

핑크 재킷과 팬츠, 슬리브리스는 에르메네질도 제냐(Ermenegildo Zegna), 샌들은 펜디(Fendi).

그렇게 일상으로 자신으로 돌려놓는다고 해서 특별하게 자신만의 시간을 만끽하는 타입도 아니다. 다만, 몇 개월 동안 허락되지 않았던 자신만의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 애정하는 레고나 피규어를 조립하는 것 정도. 다리를 다친 이후로 좋아하는 스쿠버다이빙도 멈춘 상태다. 솔직히 연기 이외에는 특별히 뭔가에 열정적으로 빠져드는 타입이 아니라서, 싫증을 내거나 그만두는 경우도 거의 없다. 천천히, 진짜로 좋아하는 것들은 오랜 시간 옆자리를 내줘야 하기 때문에 급하게 빨려 들어가지 않으려는 것. 4~5년 전부터 시작한 운동이 지금은 일상이라고 말할 만큼 친근해졌고, 틈틈이 산책하는 것도 즐긴다. 머리 밖으로 생각을 쫓아내기에 걸으면서 호흡하는 것만큼 좋은 게 없단다. 그래서 진짜로 원하는 게 있긴 하냐고 직구로 물어도 대답하는 사람은 느긋하다. 그에게는 강제성을 부여하거나 당위성을 부여하는 게 통하지 않는다. 억지로 틀을 만들고 구겨 넣다가는 신하균이라는 배우를 잃을 수도 있겠다. 인터뷰 내내 그가 보여준 말과 표정이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당연한 듯 밤이 오고, 그러니까 봄이 온다 같은 기승전결식 대화법으로는 신하균이라는 배우를 설득할 수 없다.

플라워 패턴 재킷과 팬츠는 돌체앤가바나(Dolce&Gabbana), 플립플랍은 버켄스탁(Birkenstock).

필연보다 우연을 즐긴다는 이 배우는, 입으로만 연기와 자신을 분리하고 있을 뿐 배우로서의 중심축은 절대로 한 발짝도 이동할 마음이 없어 보인다. 결국 그가 가장 오랫동안 옆에 두고 애인 같은 마음으로 대하고 싶은 대상이 ‘연기하는 신하균’이라는 걸 우리만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최고가 아니면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사람, 무섭도록 날카롭게 달려드는 프레임 속 신하균과 공기를 타고 흐르는 웃음으로 유연함을 만들어내는 프레임 밖 신하균. 그는 앞으로도 이 두 세계를 격렬하게 오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