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화보

려원

2023.02.26

by VOGUE

    려원

    파리 근교의 현대적인 저택에 혼자 남은 려원. 이토록 미묘한 몽상의 기록.

    STARK LINE 파리의 모던한 주택에서 만난 정려원. 그녀는 클레어 웨이트 켈러가 디자인한 지방시의 2019 프리-스프링 컬렉션을 입고 있다. 은빛 인조 모피 코트 안에 숨은 카멜 코트와 팬츠가 현대적이다.

    PARIS
    2019 S/S 지방시 컬렉션 참석차 파리를 찾은 정려원은 늘 그래왔듯 빈티지 마켓에 갔다. 3월 파리에 갔을 땐 아트북에 집중했다면, 이번에는 조명과 의자, 테이블을 고르고 골랐다. “다 사서 컨테이너로 보낼 순 없잖아요.” 손수 포장해 어렵게 들고 온 ‘친구들’은 정려원이 최근 마련한 ‘내 집’에 놓일 거다. “누군가에게 귀하지 않은 것이, 내게는 엄청 귀할 수 있죠.” 정려원이 기억하는 인생의 결정적 장면에는 파리가 있다. 그녀가 속한 크루 ‘드리머스(Dreamers)’는 파리에서 아카이브를 만들곤 했다. 모두가 좋아하는 리처드 링글레이터 감독의 <비포 선라이즈> 속 장소를 찾아가, 영화 장면을 연출하고, 대화를 나누고, 사진을 찍는 등 각자의 방식으로 파리를 기록했다. 한번은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오웬 윌슨을 1920년대 파리로 데려가준 자동차를 만났다. “정말 영화 속 그 장소에 올드 카가 오는 거 있죠! 관광객을 위한 것인지, 비밀스러운 퍼포먼스인지는 모르겠어요. 너무 신기했어요.”

    TAPESTRY ROOM 반짝이는 플리츠 드레스와 같은 컬러의 체인 벨트 백은 요즘 여성들이 원하는 캐주얼한 이브닝 스타일에 가깝다.

    카페 레뒤마고에서 헤밍웨이와 피카소를 만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에어비앤비로 돌아와 2018년 르네상스를 만들기 위해 잠이 들었다. 드리머스는 정려원과 사진 작가, 영상 감독, 예술 작가, 배우 등 여러 분야의 예술가가 속한 ‘모임’이다. “배우끼리는 무리 지어 친해지기 어려워요. 드리머스도 각자 개성이 다르지만 취향은 완벽하게 맞아요. 이런 친구들을 찾는 데 굉장히 오래 걸렸어요. 인생의 선물이죠.” 드리머스란 이름의 유래는 다소 싱겁고, 그래서 산뜻하다. “‘그룹 이름 같으면 웃기지 않을까, 이를테면 드리머스 말야.’ 이렇게 얘기하다 정말 드리머스가 된 거예요. 우리가 꿈을 꾸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드리머스가 어떤 모임인지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어요. 그저 예술과 음악, 패션, 삶이 주는 영감과 메시지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재미있는 일을 하려 하죠. 죽기 전에 우리만의 추억을 만들자 했던 의도의 결과가 조금씩 파생되고 있어요. 시간이 지나고 아카이브가 쌓이면 우리가 어떤 모임인지 규정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드리머스에서 정려원의 포지션은 시안 찾기다. 본래 핀터레스트 같은 사이트에서 이미지를 즐겨 수집하고, ‘이미지’를 주제로 하는 아이디어도 많다. 생일날 ‘혁오의 아버지 정장’ ‘맨 인 블랙’ ‘위대한 개츠비’ 등 유쾌한 드레스 코드를 정해 입고 파티를 했던 것처럼. “맨날 예쁜 옷만 입기보단, 개성 있고 다소 우스꽝스러운 스타일링을 해도 재미있잖아요. 다음 주 친구 생일엔 형광이 컨셉인데, 세상에 어떻게 형광을 준비하죠? ‘컬러풀’로 바꾸자고 해봐야겠어요.”

    RED BLOOD “매일 입을 수 있는 일상적인 디자인부터 환상적이고 근사한 무언가를 선보이는 것 모두 즐겁습니다.” 이번 컬렉션 속 상반된 디자인의 스펙트럼에 대해 웨이트 켈러는 이렇게 설명했다. 붉은색과 검은색의 인조 모피는 분명 환상적인 아이디어에 더욱 가까울 것.

    HOUSE
    “공간은 주인을 닮는 거 같아요.” 정려원이 한창 인테리어 중인 집의 테마는 ‘빈티지’가 될 듯하다. 방송에서 직접 공사하는 모습을 공개했는데, 닳은 느낌이 나도록 벽의 칠을 벗겨내고 있었다. “너무 깔끔하면 저답지 않거든요. 저처럼 ‘헐랭방구’ 같은 것, 손 탄 것들이 좋아요. 새 티셔츠를 사면 입고 자요. 좀 늘어지고 주름이 잡힌 뒤에야 밖에 입고 나가죠. 남들은 낡았다고 버리라는 가구도 제겐 너무 예쁜걸요. 본래 빈티지 패션을 좋아했지만 인테리어까지 이런 스타일일 줄은 이번에 알았어요.” 작은 고민이 있다면 “한번 빠지면 답이 없다는” 가구의 세계로 진입할지 모른다는 것. “그저 예뻐서 마음에 담아둔 가구인데, 알고 보면 가구마다, 디자이너마다 히스토리가 엄청나더라고요. 아, 이건 그냥 의자가 아니라 작품이구나. 인테리어 하는 친구가 많이 가르쳐주고 있어요. 같은 가구라도 사용자의 라이프스타일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 또한 매력이고요.”

    SUIT UP 글렌 체크 팬츠 수트에선 지방시 하우스의 테일러링이 돋보인다. 플리츠 소재를 활용한 커다란 리본 장식은 여성미를 더한다.

    정려원이 집 외에 가장 많이 방문한 공간은 평창동의 가나 아뜰리에일 거다. 이곳에 정려원의 미술 작업실이 있다. “그곳에서 무수히 많은 일이 일어났고 많은 대화를 나눴죠.” 정려원은 그림에도 ‘완벽’이란 강박이 있다. 한 점의 그림을 다섯 번쯤 다시 그리긴 예사다. 혹 마음에 들어 벽에 걸어두고 싶은 그림일지라도 공식적인 외부 외출은 없다. 한 번도 화가로서 전시를 열지 않았다. “친구들은 작업실에 찌그러져 있으면 누가 알아주냐고 하지만, 제 만족이에요. 아티스트와 교류하면서, 그들이 데뷔하고 전시를 열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요. 제가 히스토리 없이 나서기가 조심스러워요. 상처받는 사람들이 생길 수 있잖아요.” 소중한 친구에겐 종종 그림을 선물한다. 절친인 손담비를 위해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휴대전화로 보여줬다. 첫 번째 사진의 화폭에는 무수히 많은 글이 쓰여 있다. 두 번째 사진에는 다른 글이 덧입혀졌다. 그렇게 글이 글을 덮고 반복되다가 마지막에 친구의 얼굴이 드러난다. “이렇게 계속 덧입히면 다른 사람들은 어떤 글인지 알아볼 수 없어요. 그림에 저만 아는 이야기가 숨어 있죠. 캔버스를 일기장 삼아 감정을 적곤 해요. 미술이란 언어로 얘기한다 치면 엄청 수다스러운 작가죠.”

    지그재그 패턴의 인조 모피 코트는 새로운 시대의 럭셔리를 대변한다.

    ACTOR
    정려원의 필모그래피에서 인상적인 작품을 꼽는다면, 처음 배우의 얼굴을 각인시킨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의 유희진, 웰메이드 작품을 만났을 때 배우가 얼마나 빛을 발하는지 보여준 영화 <김씨 표류기>의 여자 김씨, 혼자서도 극을 끌어갈 수 있음을 확인시켜준 드라마 <마녀의 법정>의 마이듬이 있을 것이다. (<보그> 편집장은 컬렉션장에서 만난 정려원에게 2005년 작 드라마 <가을 소나기>가 인상적이었다고 인사를 건넸고, 정려원은 그 작품을 거론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녀는 사극, 코믹, 멜로, 의학 등 다양한 장르와 역할을 해왔고, 초반 몇 작품을 제외하곤 안정된 연기력을 선보였다. 개인적으로 그녀의 강점은 슬퍼 보이는 얼굴(영화 <통증>이 그랬다)이다. 만약 한국 영화계가 재능 있는 여배우를 활용하는 센스가 더 있었다면, 정려원의 필모그래피는 달라졌을 거다. 정려원에게 만약 자신만의 축제를 연다면, 어느 작품을 걸고 싶은지 물었다. 그녀는 듣자마자 몸서리치듯 떨며 웃었다. “그런 걸 왜 해요. 너무 낯간지러워요.” 어렵게 들은 대답은 역시나 <김씨 표류기>. 그녀가 폐막작으로 하고 싶은 작품은 “배우로서 마지막으로 찍는 작품”이다. “필모그래피는 배우의 삶을 은연중에 보여주잖아요. 어떤 장르일진 모르지만 마지막으로 찍는 작품이 그때의 저를 말해주겠죠.”

    KITCHEN AID 지난 3월 세상을 떠난 위베르 드 지방시의 우아함은 이제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 날개처럼 자리한 케이프 장식을 더한 드레스와 로고 장식 스톨의 만남이 그것.

    BREAK
    드리머스의 크루이기도 한 뮤직비디오 감독 허남훈과 작가 김모아는 1년여 동안 캠핑카를 거처 삼아 여행했다. “영감을 주는 친구들이죠. 말로만 하고 싶다는 것과 실천해서 결과물을 내는 건 다르잖아요. 저라면 못할 것 같아요.” 하지만 정려원도 6개월짜리 항공권을 끊어 뉴욕으로 가 숙소를 옮겨가며 산 적 있다. 이전에 잡힌 스케줄을 소화하려고 아침에 입국해 저녁에 출국하는 식으로 잠깐 들렀을 뿐이다. “배우로서 어느 정도 잘되고 나서 오히려 고충과 우울증 비슷한 것이 왔어요. 한국에 머물 수 없을 지경이었죠. ‘지금 나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지자’ 한 곳이 뉴욕이었어요. 한국에서 쓰던 휴대전화는 꺼놓고, 이메일로만 소통하며 본래의 자리를 차단했어요. 뉴욕에선 글을 많이 썼어요. 처음에는 여행기를 쓰려고 했는데, 이미 여행기는 너무 많고 정보를 정리할 자신도 없어서 포기했죠. 당시에는 싸이월드의 미니홈피가 유행이어서 그곳을 창구 삼아 이야기를 썼어요. 그것을 묶어 <정려원의 스케치북>이란 책도 냈죠.” 그녀를 치유한 것은 뉴욕이라기보다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요즘 번아웃 증후군이 많잖아요. 저도 그럴 때가 있어요. 여행을 가든, 집에 있든 혼자 지내면 조금씩 풀리더라고요. 진정한 쉼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평안을 느끼는 거잖아요. 때론 쉬는 것도 부산할 때가 있거든요. 몸도, 감정도 혼자 있게 해야 진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물론 외롭죠. 조금 힘들더라도 외로움을 곁에 둬야 궁극적으론 유익한 것 같아요.”

    PLAY IT AS IT LAYS 웨이트 켈러가 지방시에서 선보인 가장 큰 변화는 인조 모피만 사용하겠다고 선언한 것. 온몸을 감싸는 이 코트 역시 인조 모피. 여기에 슬라우치 부츠를 매치했다.

    SPOKESPERSON
    정려원은 공식 석상에서 ‘사회적인 발언’을 해왔다. 2012년 <샐러리맨 초한지>로 SBS 연기대상 최우수연기상과 10대스타상 수상 시엔 “말로만 스태프에게 감사하다고 하지 말고, 실질적으로 많은 도움을 드렸으면 좋겠다”고 드라마 제작 환경을 얘기했고, 작년 <마녀의 법정>으로 KBS 연기대상 여자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하며 “사실 (성범죄가) 감기처럼 이 사회에 만연하게 퍼져 있지만, 가해자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 드라마를 통해 성범죄에 대한 법이 강화되어서 가해자들이 처벌을 받고,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더 높이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배우가 사회적인 발언을 할 때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지만, 정려원은 상관없어 했다. “누구라도 저처럼 보고 들었다면 했을 말이고, 저라서 하고 누구라서 하지 않은 게 아니에요. 다른 범죄에 비해 왜 유독 성범죄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인지 의문이었어요. <마녀의 법정>을 준비하면서 심각성을 알았죠. ‘나도 이런데, 당사자들은 얼마나 그러실까’란 마음에서 얘기했어요.”

    THE WHITE ALBUM 바스락거리는 캔버스 소재 화이트 점프수트. 여성적인 면 속에 록 스타를 위한 매력을 숨기고 있다. 화보 속 모든 의상과 액세서리는 지방시(Givenchy).

    어머니가 어릴 때부터 정려원에게 한 당부는 ‘Spokesperson(대변인)’이다. “엄마가 ‘진짜 너무 아프면 말을 하지 못한다.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하셨죠. 제가 호주에 살 때만 해도 인종차별이 심해서, 영어를 하지 못하면 무시했어요. 저는 영어를 빨리 배운 편이었지만, 그러지 못한 친구들은 괴롭힘을 당했죠. 제가 나서서 싸우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친구를 돕고 싶다는 마음은 늘 있었어요. 초등학교 졸업식 때 아시안 대표로 나가서 ‘타국에서 왔다고 우리를 무시하면 안 된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죠. 저는 앞으로도 ‘Spokesperson’으로 살아가고 싶어요. 누군가가 겪는 부당함을 얘기하며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일은 의미가 있어요.”

      에디터
      손기호 (패션 에디터), 김나랑 (피처 에디터)
      포토그래퍼
      JDZ CHUNG
      스타일리스트
      이윤미
      헤어
      이순철
      메이크업
      이명선
      프로덕션
      배우리(Woori Bae)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