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화보

사계절의 사나이

2023.02.20

by VOGUE

    사계절의 사나이

    톰 포드의 삶은 LA에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CFDA 회장으로 임명되면서 미국 패션계를 위한 야망을 세계적으로 펼치려 한다.

    LA로의 이사, CFDA 회장, 한 아이의 아빠. 톰 포드는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는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섹시한 패션의 황제에서 아이의 등교를 책임지는 아빠로 변신한 그의 이야기는 더욱 흥미롭다.

    공식적으로 장미 정원은 톰 포드(Tom Ford)의 남편인 리처드 버클리(Richard Buckley)의 소유다. 포드는 이 정원과 관련해 굉장히 유리한 조건으로 버클리와 거래했다. 패션 역사상 가장 기민한 사업가인 그조차 그런 거래는 처음일 것이다. 버클리가 그 장미 정원을 꾸미는 권리는 갖는 대신, 포드는 벳시 블루밍데일(Betsy Bloomingdale)이 반세기 넘게 소유했던 LA 홈비힐스(Holmby Hills)에 있는 부부의 새집에 관한 모든 결정권(장미 정원을 제외한)을 넘겨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통제권을 흔쾌히 넘기지 않는다.

    “저는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이죠.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기 힘든 스타일인 듯해요.” 그는 자신의 별자리 때문이라면서 처녀자리를 탓했다. 정확하고, 꼼꼼하며, 규칙을 잘 지키는 데다, 확실히 믿는 사람들에게는 야한 농담도 던지는 성격을 타고난 것이다(그의 절친이자 또 다른 처녀자리 태생 디자이너인 스텔라 맥카트니는 포드를, 그리고 그들 사이의 우정을 이해하려면 이 별자리에 관한 내용부터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또 그의 가장 창의적인 협업자이면서 처녀자리 태생 스타일리스트인 카린 로이펠트 역시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이미 작고한 그의 친구칼 라거펠트도 처녀자리 태생이었을 것이다).

    지난여름 어느 따사로운 저녁,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작가이자 30년 동안 포드의 파트너였던 버클리는 이 장미를 키우기 위해 샌타바버라의 한 장미 전문가로부터 상담을 받았다. 그는 오프라 윈프리 그리고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장미 재배를 도왔던 인물이다. 그들은 정원을 1.8m가량 파서 1만 마리 정도의 지렁이를 풀어주었다. 이제 7세가 된 이 부부의 아들 잭(Jack)은 굉장히 흥분했다고 한다. 포드는 열과 어둠의 꽃인 난초 애호가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정원 식물을 자연스럽게 색상이 바뀌는 스펙트럼으로 배치했다. 강박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책이나 앱을 정리하는 방식처럼 말이다. 사실 그는 붉은 장미가 뒷줄에서 자태를 제대로 뽐내지 못한다며 힘들어했다. 거친 관목 몇 그루가 다른 것보다 더 크게 웃자라서 말뚝 위에서 균형을 잡고 서 있었다. 이 불균형 때문에 괴로워했다. 그에게는 대칭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는 당연히 자신이 좋아하는 장미인 코코 로코(Koko Loko)가 베이지색이라는 것을 내게 알려주었다.

    포드는 무채색의 거실로 돌아와 곧바로 이렇게 설명했다. “아름다움은 제게 큰 기쁨을 주죠. 그렇지만 제게 큰 슬픔을 주기도 해요.” 우리가 거실에 앉자 그가 자신의 오른쪽 얼굴이 내 쪽으로 더 많이 보이도록 앉았다. 바로 사진에서 보는 모습일 것이다. 자기 자신을 이미지, 즉 제품으로 여기고 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가장 근사해 보이는 각도로 그 제품을 보여주는 법을 터득했다고 그는 말했다. “장미를 감상하고 향을 맡다 보면, 곧 시들어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그 점이 바로 장미가 아름다운 이유 중 하나죠. 장미가 영원히 살아 있다면, 그 누구도 눈길조차 주지 않겠죠.”

    포드는 죽음에 심취해 있다는 이야기를 종종 했다. 머릿속에서 쉴 새 없이 째깍거리는 시계 같다고 한다. 알코올 의존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타고난 수줍음을 억누르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술에 기대왔던 것이다(지난 5월 그는 금주 10주년을 기념했다). 아마 지금 이 두 가지, 즉 그의 뇌가 지닌 도파민을 향한 갈증과 기질에 따른 병적 특징을 보면 58세인 포드가 어느 때보다 더 바빠진 이유를 알 수 있다.
    포드가 13년 전 론칭한 브랜드가 현재 남성복과 여성복, 액세서리, 향수, 화장품, 선글라스 부문에 걸쳐 연간 20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100년 역사의 프랑스 브랜드와 견주는 경쟁자로서 말이다. 영화 두 편의 작가, 감독, 제작자로도 활동했고, 작품 두 편을 또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올봄,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의 뒤를 이어 CFDA, 즉 미국패션디자이너협회(Council of Fashion Designers of America)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늘 기분 저하 장애에 시달리죠. 조금 더 우울할 때 작업을 해요. 행복하면 바보가 된 느낌이 들거든요. 저는 여전히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우리 모두가 행복의 존재를 기대하지 않았다면 더 행복하겠다 싶은 거죠. 가장 창의적인 순간 중 상당수를 자극하던 것이 바로 음주와 약물이었습니다. 술에 취하지 않고는 창작할 수 없을 듯한 큰 두려움을 갖고 있었죠. 하지만 이제 그 중독 대상을 바꾸었어요. 지금은 일에 중독되어 있거든요. 다른 중독과 달리, 일 중독은 제게 커다란 즐거움을 가져다줘요. 그리고 우리가 무수히 많은 행성 중 하나인 지구에 사는 작은 입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게 해주죠. 또 우리가 지닌 모든 것,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우리는 왜 고군분투하는가, 우리는 왜 고통받고 있는가 등도 생각하지 않게 하죠. 예컨대 이런 식입니다. 그런 생각이 슬슬 들기 시작하면, 저는 정말 중요한 뭔가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면서, 2021년 새로운 립스틱 컬러를 고르는 거죠.”

    포드는 15년 전 LA에 사무실을 열었다. 그와 비즈니스 파트너 도메니코 데 솔레(Domenico De Sole)가 구찌의 새 소유주들과 힘겨루기를 하다 그곳을 떠난 직후였다. 당시 그는 자신이 패션 업계와 완전히 멀어지고 있다고 여겼다. 그와 버클리는 유명 건축가 리처드 노이트라(Richard Neutra)가 디자인한 집을 벨에어(Bel-Air)에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런던, 파리, 산타페에 있는 집과 미국 서부를 오가며 시간을 보냈다. 건축은 포드가 건전하게 중독되어 있는 또 하나의 분야 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는 일부 건축물을 매각하고 싶어 한다. 존 내시(John Nash)가 디자인한 더 리젠트 파크 타운하우스와 안도 다다오가 디자인한 산타페 목장(도처에 깔린 방울뱀 때문에 어린 아들에게는 좋지 않다)을 매물로 내놓았다.

    올 초에는 폴 루돌프(Paul Rudolph)가 디자인한 뉴욕 어퍼 이스트 사이드의 한 주택을 매입했다. 사실 이곳은 그의 우상인 디자이너 할스톤(Halston)이 소유했던 집으로, 포드가 뉴욕에서 유일하게 갖고 싶어 하는 주택이었다. 그는 20대 초만 해도 뉴욕을 로맨틱하게 묘사했지만 최근에는 피하고 싶어 한다. 홈비힐스는 1927년 지중해식 빌라로 지어졌다. 하지만 블루밍데일이 거주하면서 할리우드 모던 스타일로 새로 단장했다. 시누아즈리 벽지, 어두운 치펜데일식 가구, 그린 컬러 실크로 인테리어를 했던 것이다. 포드는 이처럼 뒤죽박죽이었던 스타일을 통일하고, 자신이 선호하는 모노톤을 입힌 뒤, 벨벳과 래커, 포니와 캐시미어의 촉각적 미니멀리즘을 적용하면서 고급스러운 절제미를 살렸다. “색상이 다채롭고 무늬가 있는 집이 좋아요. 하지만 그런 집에서는 생각에 잠길 수 없죠. 다채로운 색깔 때문에 정신이 분산되거든요.”

    버클리에 따르면, 적어도 얼마 동안은 색을 향한 포드의 자세가 잭 때문에 바뀌었다고 한다. “그의 2013 F/W 컬렉션이 보여준 멋진 컬러와 패턴은 잭의 존재로부터 도출된 직접적 결과라고 생각해요. 톰은 집에 있는 밝은색 플라스틱 장난감을 마음에 들어 하진 않아요. 하지만 아이가 좋아하는 것이니 어쩔 수 없죠.” 하지만 질서가 다시 잡혀가고 있다. “이제 잭이 블랙이 좋다고 사람들에게 말해요. 해머 뮤지엄(Hammer Museum)이 매년 기금 마련을 위해 개최하는 2017 K.A.M.P.(Kids’ Art Museum Project)에서 그렇게 말했죠. 어느 아티스트가 어린이들에게 무지개를 그려달라고 부탁했는데, 잭이 무지개 원호 하나하나를 검은색으로 그렸던 거죠.”

    포드는 집에서조차 과한 정장 차림이라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으면서도, 블랙 수트를 입고 있었다. “종종 매장에서 일하는 것처럼 입고 싶어요. 믿든 말든, 완전 새롭게 차려입을 에너지가 없어요.” 그가 설명했다. “그리고 제게 잘 어울리는 것을 알아요. 블랙, 브라운, 그레이죠. 테니스 칠 때는 화이트. 그나저나 이 바지는 아마 몇 달간 드라이클리닝하지 않은 것 같군요. 매일 똑같은 옷을 입거든요. 밤에 그 바지를 벗어서 다른 사람이 사용하지 않는 옷걸이 위에 얹어놓아요. 입던 재킷도 그 위에 올려놓죠. 바지를 거꾸로 놓아서 주머니에서 물건이 빠져나오기도 해요. 그렇게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면, 잭이 사방을 뛰어다니고 있어요. 그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줘야 하니까, 거기 있는 옷을 그냥 또 입는 거예요.”

    그 집의 단조로운 차분함은 고가 장식품이 내뿜는 분위기로 상쇄되고 있었다. 그가 소장한 작품 모두 엄청난 것이었다. 앤디 워홀, 프란츠 클라인(Franz Kline), 모리스 루이스(Morris Louis), 루치오 폰타나(Lucio Fontana)의 작품이다.

    신디 셔먼의 사진 그리고 잭의 공간에 놓아둔 장난감을 제외하고, 진한 핑크색 장미와 와인색 달리아가 키 낮은 꽃병에 한두 송이씩 꽂힌 채 유일하게 색을 띠고 있었다. 포드는 여러 송이의 꽃을 한꺼번에 꽂아두는 것을 싫어한다. 평론가들이 포드의 두 번째 영화 <녹터널 애니멀스>에서 트로피에 둘러싸여 고립된 채 살아가는 갤러리 주인인 주인공이 포드 자신인지 묻자, 그는 “그렇다”고 답했다. “다른 사람들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 완벽을 추구하는 것, 여성들을 우아한 존재처럼 바라봐야 하는 필요성. 그것이 그를 이끄는 원동력이죠.” 그의 오랜 친구이자 패션 스타일리스트인 엘리자베스 솔츠만(Elizabeth Saltzman)이 말했다. “그렇지만 톰은 부족한 자유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 같아요. 자기 광고에 직접 출연하면, 더 이상 자유로울 수 없죠. 그가 어디를 가든 여성들이 다가와 자신이 바른 립스틱이 어떤 색깔인지, 자신이 뿌린 향수가 어떤 건지 묻더라고요. 포드는 친절하게도 그런 질문에 일일이 상대해줘요. 자유를 흠모하지만 그렇게 많이 누리지는 못하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고요함을 좋아해요. 그래서 조용한 곳을 찾죠. 그러나 이런 경향이 호들갑을 떠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것이긴 하지만요.”

    얼마 전 포드는 잭을 데리고 디즈니랜드에 갔다. 다행히 여느 때와 달리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평소에 포드는 LA에서, 영화배우들이나 거물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환경에서, 그리고 평범하지 않은 삶 속에서 아이를 어떻게 양육해야 할지를 놓고 씨름하고 있다. 우리가 만나기 며칠 전, 포드는 풀장에 딸린 냉장고를 열었다. 보통 그 안에 잭이 좋아하는 아이스바 하나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주말이면 직원들이 모두 집에 가고 없다. 그러면 포드는 아들과 아이스바를 먹으며 풀에서 놀거나 모노폴리 게임을 즐긴다. 두 사람에게는 그 외에도 심플한 의식 같은 것이 있다. 이를테면 포드는 비건이지만 달콤한 간식을 즐긴다. 특히 옛날 스타일의 플레인 바닐라 와퍼를 좋아한다. 그래서 잭도 바닐라 와퍼를 좋아한다. 그는 에비앙, 페리에, 힌트 워터, 다이어트 콜라가 저 깊은 곳까지 일렬로 서 있는 냉장고의 냉동 칸에 아이스바 20개 정도를 쟁여놓았다. “아이스바를 끝없이 먹을 수 있는 어린 시절이라. 정말 굉장하죠.” 포드가 말했다. “제가 판매하는 것이 새로운 신발을 통해 얻는 행복이죠. 물론 실제로 가능하지는 않지만 말이죠.” 그러나 우리는 물질적 존재죠. 잭은 하루에 1달러를 받아요. 그 돈을 아껴두었다가, 그가 무엇을 원하든 상관없이, 아이스바를 사야 해요. 크리스마스나 생일이 아닌 한 말이죠. 정말 귀여워요. 하루를 마무리하는 밤이 되면, 저는 아이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아이와 앉아 책을 읽어주죠. 나중에 아이 방에 들어가 잠잘 준비가 제대로 되었는지 확인하면서 이불을 잘 덮어줘요. 아이는 의자에 앉아 있는 시간을 통해 그날 해낸 것, 그날 발견한 것, 그날 관심을 가진 것을 다시 한번 볼 수 있을 거예요. 저도 어린 시절에 너무나 마음에 들었던 새 신발이나 제가 샀던 물건을 가지고 그렇게 했어요. 그 시간을 굉장히 좋아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어요. 그런 물질적인 것이 당신에게 일종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거죠.”

    남편 리처드 버클리가 LA 저택에 심어놓은 만개한 장미꽃 사이에서 포즈를 취한 디자이너 톰 포드. 팬츠와 코트는 톰 포드(Tom Ford).

    심리학자 D.W. 위니콧(D.W. Winnicott)은 부모의 부재를 더 쉽게 견디도록 돕는 장난감, 인형, 담요 등의 물건을 이행 대상(Transitional Object)이라 불렀다. 포드에게서 하나 꼽아본다면, 그것은 응접실에 걸린 알렉산더 칼더(Alexander Calder)의 모빌일 것이다. 그가 떨어져 있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유일한 예술 작품이다. 그것은 원래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의 소장품이었다. 포드는 할아버지 소개로 어린 시절 산타페의 라 폰다 호텔 밖에서 그 여류 화가를 만났다. “제가 살면서 만나본 가장 독특한 사람인 것 같았죠.” 그가 회상했다. “할머니는 텍사스 출신이고, 메이크업을 하시고, 늘 머리를 손질하셨죠. 그러니 오키프는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던 거죠. 지금 우리가 산타페에 있다면, 화장실 앞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는 거울 옆에 걸린 조지아 오키프의 워홀 폴라로이드를 보여드렸을 텐데요. 그분은 주름이 자글자글했지만 굉장히 멋졌죠. 그녀가 찍은 수많은 사진 가운데 저 칼더의 모빌이 그녀 위에 매달려 있죠. 그 작품은 제게 감정적인 흥분을 유지해준답니다.”

    맥카트니와 포드가 만난 지는 20년이 넘었다. 처음 만났을 때 포드와 끌로에의 디자이너였던 맥카트니 모두 파리에 살고 있었다. 맥카트니가 보기에는 포드 주변의 물리적 세계가 그의 내적 삶을 더 세심하게 내면화한 것 같다. “그의 집에 가보면 취향의 수준이 고통스러울 정도죠.” 그녀가 말했다. “‘저 바위를 검은색으로 칠했어?’라고 농담을 하면, 그는 ‘물론, 그랬지’라고 말하는 식이죠. 그게 바로 톰 포드예요. 그는 어떤 특별한 여성을 표현하죠. 그 여성과 감정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그 여성의 어떤 부분도 놓치지 않죠. 냄새 맡고, 만져보고, 들어보는 거죠.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말이죠. 동시에 발칙한 어린아이 같은 특징도 지니고 있어요. 모든 것에 대해 반항하려는 성향이 있는 거죠. 그렇지만 점잖은 인물이에요. 그와 리처드가 제게 잭의 대모가 되어달라고 무릎을 꿇고 부탁하더라고요.”

    포드는 할머니가 보던 <W> 매거진을 읽으며 자랐다. 신문만 한 큰 종이에 발행되던 그 시절부터 말이다. 그는 베이브 페일리(Babe Paley)와 난 켐프너(Nan Kempner)의 사진을 마음껏 보고 즐겼다. “아마 요즘 사람들이 킴 카다시안을 볼 때와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 같아요. 제가 바즈 루어만의 영화에서 좋아하는 바로 그런 점이죠. 앞뒤가 안 맞는 추론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아요. <물랑 루즈>에 나오는 캉캉 장면을 보면, 그 장면의 음악과 분위기가 완전 현대적이죠. 그러면서도 그 장면은 관중에게 물랑 루즈에 갔다 온 듯한 흥분을 안겨주죠. <위대한 개츠비>의 파티 장면도 마찬가지죠. 저는 그 파티에 실제로 가고 싶어요.” 그것은 바로 포드가 1979년 맨해튼에 왔을 때 그에게 큰 영향력을 미친 스튜디오 54 의 맨 끝자리에서 경험한 것이다. 15년 후 그는 구찌를 소생시키면서 자신만의 청중을 그런 세계에 편입시키고자 노력했다.

    “제가 1994년에 성적 매력이 과하게 부가된 앰버 발레타를 런웨이에 세웠죠. 당시 그것은 굉장히 획기적인 것이었어요. 에이즈 때문이었죠.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은, 성적 매력을 과하게 어필하고, 술과 관련된 분위기가 배어 있고, 만질 수 있고, 키스할 수 있고, 블라우스 안으로 손을 넣을 수 있는 그런 것, 즉 70년대 쾌락주의를 다시 소개한 거예요. 그런 것은 오랫동안 아무도 런웨이에서 볼 수 없었죠. 성관계 때문에 죽을 수도 있는 시대에 성관계를 한 후 성생활이 완전히 차단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어요.” 그는 자신의 작품이 그때 이후로 크게 바뀌지 않았다고 확신하면서,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 파악하고, 그것을 반복하면, 실수 없이 그것을 잘하게 된다고 믿고 있었다. 로이펠트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결코 소매가 세 개 달린 재킷을 만들지는 않을 거예요. 유행을 추구하는 디자이너는 아니죠. 그는 아름다움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어요.” 포드는 ‘운이 좋은 경우, 자신이 하는 일로 다른 사람들을 흥미롭게 만드는 10년 정도 지속되는 기회의 창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 창이 닫힌 지 거의 20년이 지났고, 더 크게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포드가 말했다. “칭찬받거나 칭찬하는 것이 저한테는 꽤 어려운 일이에요. 하지만 가끔 멈춰서 생각해야 해요. 세상에나, 내가 지금 어떻게 톰 포드 속옷, 톰 포드 시계, 톰 포드 커프스, 톰 포드 셔츠, 톰 포드 신발, 톰 포드 수트, 톰 포드 안경, 톰 포드 보습제, 톰 포드 화장품을 사용하고 있지? 어떻게 ‘톰 포드’라는 제이 지의 노래가 있지? 12년 만에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지? 하고 생각하는 거예요.” 포드는 재능 있는 패션 디자이너들을 여럿 양성했다. 알레산드로 미켈레, 크리스토퍼 베일리, 스테파노 필라티, 바네사 시워드, 클레어 웨이트 켈러는 모두 그의 어시스턴트로 일했다. 그는 한때 자신을 위해 일하던 사람들이 유럽의 대형 패션 브랜드를 이끌어간다는 사실에 굉장히 자긍심을 느꼈다. 포드와 데 솔레는 구찌 그룹을 키워가면서 맥카트니와 맥퀸 같은 브랜드를 인수했다. “제가 해야 할 일은 그저 ‘지금 질투 나는 디자이너가 누구지?’라고 말한 뒤, 둥 둥 둥, 그들이 일하는 회사를 사들이는 것이었죠. 지금은 질투 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어쩌면 그것이 나쁜 것일지도 몰라요. 제가 다른 디자이너의 컬렉션을 보지도 않고 말한다는 뜻은 아니에요. 저도 상업적인 디자이너니까요. 제가 가진 가장 뛰어난 기술은 대중적 취향을 적중시킨 것이죠. 제 앞에 신발 다섯 켤레를 놓아보세요. 그러면 어느 것이 가장 잘 팔릴지 말해줄 수 있는 정도는 돼요.”

    구찌 시절부터 지금까지 포드와 공동 책임자로 일하고 있는 도메니코 데 솔레는 포드가 단순한 디자이너 그 이상이라는 점에서 다른 사람과 차별화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수많은 사람에게 어필하는 미학적 북극성을 지닌 것 같아요.” 데 솔레가 말했다. “하지만 그는 또한 타이밍도 굉장히 신경 쓰죠. 그리고 마케터로서도 굉장히 뛰어나고요. 그는 LA를 사랑해요.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국제적 디자이너였고 바로 그 점에서 미국 디자이너와 구분되죠.” 포드에게 LA는 영화 제작과 관계된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스스로 대가를 치렀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말이다. 그는 자신의 컬렉션이 <녹터널 애니멀스> 홍보 기간에 이래저래 시달렸다고 생각했다. 가까운 지인들에게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현재 시대극 각본 작업을 하는 중이다. “모든 에너지를 모아, 그 빌어먹을 것을 제작하고, 그다음 풀어놓죠. 이렇게 말하면 도메니코가 저를 죽일지도 몰라요. 그는 제가 다시 영화를 찍지 않을 것이라고 회사 관계자들에게 말하길 바라니까요.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죠.”

    10년을 거치며, 포드는 할리우드의 독특한 영화감독으로 자리 잡았다. 포드가 자신의 첫 영화 <싱글 맨>을 홍보하던 시기에, <프레셔스>를 홍보했던 그의 친구 리 다니엘스(Lee Daniels)는 영화 업계가 배타적이지 아니었더라면, 포드가 아카데미상을 수상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다면 포드는 장식품 하나 없을 그의 집에 아카데미 트로피 놓을 자리를 엄청 고민했을 것이다. 다니엘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 영화를 만든 사람이 톰 포드가 아니었다면, 그 영화감독은 당연히 아카데미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됐겠죠. 사람들은 이제 그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요. 그의 영화 제작에는 놀랄 만한 진정성이 담겨 있어요. 장난기 가득한 유머도 없죠. 그리고 대부분의 위대한 예술가들이 그러하듯 그 역시 고통을 이겨내고 있는 것 같아 요.” 톰 행크스와 그의 아내 리타 윌슨은 포드와 버클리가 LA에서 가장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이다. 톰 행크스가 이렇게 말했다. “<싱글 맨>과 <녹터널 애니멀스>는 근본적으로 싸구려 미학이나 풍자를 담지 않은 저예산 영화였어요. 좋은 각본을 부드럽게 터치하는 영화였죠. 저도 영화를 여러 편 만든 사람이지만, 포드가 디렉팅에 대해 이야기하면 귀 기울이게 돼요. 물론 저는 지혜를 찾아 산에 오른 순례자처럼 패션 관련 질문도 하죠. 그러면 그는 정말 심플하게 답해줘요. 이를테면, ‘재킷 단추를 채워야 날씬해 보여요. 재킷은 남자의 지갑과 같으니까 재킷 주머니를 사용해요. 하지만 주머니가 너무 빵빵해서는 안 돼요. 발가락을 덮는 신발은 어떤 것과도 잘 어울려요’라고 말해주는 거죠.”

    포드의 옷이 모든 사람에게 어울리는 것은 아니다. 그도 이 점을 흔쾌히 인정하고 있다. “잘록한 허리를 원하는, 자신의 몸매를 보여주고 싶은 여성을 위한 의상입니다. 그 여성은 분명 하이힐을 신고 있겠죠. 매끈한 매력을 마음에 들어 하죠. 25세일 수 있고 75세일 수도 있겠죠.” 그리고 레저용 의상과 캐주얼 의상이 꾸준히 대세를 이루는 동안, 그는 패션 문화가 캐주얼화되는 것에 대항해 오래 투쟁 중이다. “보다 더 젊은 여성들은 더 이상 옷을 입지 않아요. 제가 어릴 때는 평상복, 오후에 입는 의상, 칵테일 드레스, 이브닝 드레스가 따로 있었죠. 지금은 뉴욕 사교계의 명사든 영화배우든 상관없이, 레깅스를 입은 채 아이들을 등원시킨 뒤, 거기에 하이힐을 신은 채 점심 약속 장소에 나가죠. 재킷을 걸치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깜짝 놀랄 만큼 멋진 이브닝 드레스를 갖고 싶어 하죠. 그래서 2만 달러, 3만 달러, 4만 달러, 5만 달러를 호가하는 이브닝 드레스가 잘 팔리죠.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브랜드는 독특하고 굉장히 뚜렷한 비전이라는 강점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진정성을 유지한다면, 고객들도 충성심을 이어갑니다. 결국 세상은 당신이 반향을 일으키는 대로 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그런지 스타일의 뒤를 이어 패션계에 대담한 성적 취향을 접목한 디자이너에게 지금은 미묘한 시점이다. 구찌 걸 이후로 화려한 매력과 성적 매력의 정의가 진화되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포드의 여성복이 남성복이 거둔 상업적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런 시점임을 증명하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그는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한편 미투운동은 패션계의 깊은 고찰을 이끌어냈다. 그래서 포드는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할 때 주의 깊게 생각해야 했다. “더 이상 누군가의 생식기 털을 구찌 로고 모양으로 다듬어놓지 않을 거예요. 정치적 정당성이 패션계의 정당성이 되었어요. 그래서 이제 뭔가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어요. 하지만 제가 여성들의 몸을 보여주는 방식을 좋아하고 남성들의 몸을 보여주는 방식을 좋아한다는 것이 핵심이에요. 저만의 페르소나는 섹스예요. 비록 제가 제 현실에서는 다른 단계로 이동했지만 말이죠. 새로운 저는 58세이고, 위층에 일곱 살 된 아이가 있고, 70세 된 남편이 있는 사람이에요. 정말 다르죠. 하지만 우리도 사람이에요. 섹스는 애정의 부작용이랍니다.”

    CFDA는 미국 패션계의 인지도를 세계적으로 확대하고자 애쓰고 있다. 그리고 매년 미국의 최고 디자인을 기리기 위해 열리는 대형 시상식을 비롯해 꽉 찬 패션쇼와 세미나 일정을 관리하고 있다. 유럽에서 30년 정도 일한 포드가 이제는 배타적 미국 패션 산업에 드리워진 난제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특별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가 “내가 왔을 때 그들에게는 엄마가 필요했어요. 이제 그들에게는 정치가가 필요합니다”라고 표현하던 것과 일맥상통한 것이다). 그는 패션 위크 스케줄을 5일로 압축하고, 일 처리하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CFDA의 분산된 이벤트 일정을 몇 가지 컨퍼런스로 통합하는 데 주력했다. 이 회의 참석자들이 패션계 미래에 당면한 무수한 이슈에 대해 관심을 갖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 이슈로는 포괄성, 기술, 지속 가능성, 글로벌리즘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는 미국과 전 세계 언론을 초청한 자리에서 신인 디자이너 50명을 위한 만찬을 개최함으로써 뉴욕 패션 위크를 시작한다.

    “뉴욕이 지닌 창의성을 세계적으로 알리고 싶어요. 이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지나치게 내향적이에요. 그래서 미국의 스타 디자이너들이 떠나는 거죠. 버질 아블로, 그는 지금 어디 있나요? 루이 비통을 맡고 있죠. 파리로 가야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죠. 뉴욕에 머물면 그냥 뉴욕에 있게 되는데 말이죠.” 또한 CFDA 어워드를 전 세계 디자이너가 대상인 이벤트로 만들고 싶어 한다. 물론 위원회의 다른 의원들을 설득하는 것이 만만치 않다는 것은 알고 있다. “브리티시 패션 어워드는 영국인들에게 상을 줘요. 하지만 베스트 우먼스 웨어를 선정하죠. 그거 알아요? 모두들 그것에 관심이 많아요. LVMH 브랜드가 후보에 오르고, 구찌가 후보에 오르죠. 그래서 그런 브랜드 모두 그 시상식에 참석해요. 그렇게 기금이 모이고, 유명 인사와 모델들도 참석하죠. 그러다 보면 레드 카펫이 점점 커지고, 사진도 늘고, 사람들이 신경 쓰기 시작하는 거라고요. CFDA의 인지도를 올림으로써 미국 패션계에 대한 세계적인 인식을 높이는 거죠.

    “저는 정말 색이 다채롭고 패턴이 다양한 집이 좋아요.” 포드가 침실에 앉아 말했다. “하지만 그런 집에서는 생각을 할 수 없어요. 색깔 때문에 정신이 분산되거든요.”

    그는 구찌를 전성기로 이끌면서 클래식한 패션쇼를 만들어내는 데 한몫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브랜드를 위해서 사진작가 없는 은밀한 의상 발표, 레이디 가가가 등장하는 비디오 등으로 실험하기도 했다. ‘See Now, Buy Now’를 시도했지만 크게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다양한 도시를 옮겨 다니며 패션쇼를 열었다. 전통적 포맷이란 시대의 유물이라고 그는 확신한다. “이제 패션쇼의 포인트는 인스타그램에 올릴 만한 순간을 창조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가 말했다. “그리고 주요 도시에서 개최되는 패션 위크를 통해 컬렉션을 선보여야 하는 이유는 대중의 관심을 받는 사람들이 한 공간에 한 번에 많이 모이기 때문이며, 이때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갈 이미지를 촬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패션쇼, 객석 맨 앞줄, 백스테이지, 메이크업, 헤어, 의상, 사람들, 남자 친구들, 여자 친구들을 찍은 사진이 한번 포스팅되면, 계속 복사되어 재포스팅됩니다. 패션쇼란 바로 그런 거죠.”

    포드는 2018년 11월 런던 자택에서 미국 중간선거 결과를 지켜보았다. 그는 뉴스 중독자다. CNN과 MSNBC를 거의 중독 수준으로 시청하면서, 에크하르트 톨레(Eckhart Tolle)의 조언을 받아들여 몇 주에 한 번씩만 신문을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그는 거의 계속되는 긴장감에 불만을 호소한다. 그는 희망을 느끼고자 노력한다. 그는 ‘정치와 정부에 대한 관심을 대대적으로 재활성화한 것이 현 행정부의 가장 위대한 유산’이라고 확신한다. 그는 피트 부티지지(Pete Buttigieg)의 열렬한 팬이다. 그는 부티지지 출마 초기에 간단하게 함께 점심을 먹었다. 거기서 뭔가 알아챌 수 있었다. 부티지지는 유려한 말솜씨에 비해, 식탁에서, 무대에서 실제보다 더 작아 보였던 것이다. 그가 헐렁하게 재단된 수트를 입은 것이 원인이었다. 그래서 포드는 그 점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그는 부티지지의 남편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 선거 캠페인을 위한 의상 관련 조언을 해주었다.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포드가 말했다. “분명 그는 제 옷을 입을 수 없을 거예요. 너무 비싼 데다 적합하지 않죠. 미국에서 만든 것이 아니니까요. 게다가 그는 일하는 사람이니까요. 그렇다면 누구한테 그 옷이 필요할까요?”

    포드는 6월에 CFDA 어워드에 참석했다. 이번 시상식은 황혼을 필터링하는 거대한 채광창 아래 높은 천장을 자랑하는 브루클린 뮤지엄의 보 아트 아트리움(Beaux Arts Atrium)에서 개최되었다. 늘 그렇듯 그의 짙은 갈색 눈이 빠르게 움직이면서 무자비하게 지적했다. 조명을 더 낮춰야 하고, 테이블은 둥글어야 해, 왜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 있지 않는 걸까? (그날 저녁 그와 식사하던 친구 로이펠트는 ‘포드가 쳐다볼 때면 스캐너 안에 들어가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뉴욕의 디자이너 라콴 스미스(LaQuan Smith)가 뾰족한 깃의 포드가 만든 더블 수트를 입고 있었다. 소매를 돌돌 말아 올린 채 말이다. 포드는 그에게 정기적으로 옷을 보낸다. 맵시 좋고 전통적으로 매력적인 의상을 디자인하며, 톰 포드의 턱시도와 여성용 블랙 펌프스를 매치하는 것으로도 잘 알려진 스미스에게 포드 자신과 비슷한 뭔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날 수상자 중 아일린 피셔(Eileen Fisher)가 있었다. 35년 역사를 지닌 그녀의 브랜드는 패션계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젊은 여성들의 리더 역할을 지원하고 있다. 피셔는 은발의 단발머리로, 어떤 액세서리도 달지 않은 채 흰 가운에 검은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무대를 가로지르는 그녀의 모습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거의 비현실적으로 멋졌다. 로이펠트가 포드 쪽으로 몸을 돌려 속삭였다. “너무 시크하네.”

    그는 LA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말, 완전, 시크했어요. 그녀의 원래 모습이에요. 그녀는 원래 심플하고, 진정성 있는 사람이니까.” 편안함이 아니라 경쟁이 패션 업계를 부추겨야 한다고 오랫동안 느껴온 포드는 피셔의 생각뿐 아니라 새로운 견해를 가진 미국 패션계 동료들의 생각을 눈여겨볼 것이다. “패션은 거품이죠.” 그가 인정했다. “LA와 뉴욕, 런던은 버블 같아요. 하지만 이 버블이 지구를 뒤덮을 정도의 콘텐츠를 만들어내죠. 바로 우리가 패션쇼 런웨이에 올리고, 우리가 광고로 내보낸 것들이죠. 실제로 우리 사회는 자유주의 사회예요. 저는 우리 모두가 자신의 일을 함으로써, 우리 모습대로 존재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된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두려울 게 없는 거죠.”

      Rob Haskell
      포토그래퍼
      Annie Leibovi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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