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화보

설현의 세계

2023.02.26

by VOGUE

    설현의 세계

    반대말을 공존하게 하는 ‘설현’의 현현한 세계.

    달이 하늘을 가리기라도 한 듯 밝고도 어두운 날이 있다. 드라마 <낮과 밤>을 마친 설현을 만난 날도 그랬다. 낮과 밤, 선과 악, 흑과 백, 명백히 반대되는 말이지만 드라마 <낮과 밤>은 그 경계에 대해 질문했다. 하루를 마치고 모두가 푹신한 이불 속으로 들어갈 시간, 우리는 분주한 스튜디오 한구석에 마주 앉았다. 어쩐지 시간이 뒤엉켜버린 기묘한 감각 속에서 설현의 분명한 음성만 낮을 건너온 밤임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낮과 밤>에서 우리가 본 건 무한한 삶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었다. ‘하얀밤 마을’과 연관된 다른 인물과 달리 어쩌면 유일하게 평범하던 공혜원은 우리가 이 서늘하고 종잡을 수 없는 사건의 호흡을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게 했다. 우리를 대신해 궁금증을 가졌고 망설임 없이 질문했으며 곧바로 행동했다. 사건의 실마리는 결국 공혜원을 통해 풀렸다. 호기심이 많은 설현의 눈동자는 드라마에서 내내 진실을 갈구하고 있었다. 김정현 감독은 이런 공혜원을 두고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의욕으로 똘똘 뭉친 캐릭터가 실제 설현과 많이 닮았다”고 말했다.

    화장기 없는 얼굴로 만화 프린트 티셔츠에 베이지색 니트를 걸친 채 공혜원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는 설현으로부터 나는 무모함을 엿볼 순 없었다. 설현은 배시시 웃으며 ‘성실’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제 장점 중 하나가 성실이거든요. 꼼수 부리기 싫어하고 정석으로 성실하게 쌓아가는 걸 좋아해요. 그러다 보니 연습도 많이 하는 편이라 감독님께서 의욕에 불탄다고 봐주신 것 같아요.” 설현은 뛰어난 신체 능력을 가진 혜원에게 동경을 느꼈고 사이다 발언을 하는 혜원에게 통쾌함을 느꼈다. “이번에 제가 말이 정말 느리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어요. 정말 혜원이 대사가 가득 있었거든요. 저는 빨리 말한다고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듣기엔 전혀 빠르지 않았대요(웃음).” 설현은 정말이지 누가 들어도 절대 빠르지 않은 속도로 말했다.

    블랙 오버사이즈 재킷과 화이트 슬리브리스, 블랙 레더 팬츠는 루이 비통(Louis Vuitton), 화이트 스니커즈는 끌로에(Chloé).

    반전을 거듭하는 복잡한 스토리와 별개로 ‘형사의 정석’으로 공부라도 한 듯 정의감에 불타는 설현을 지켜보는 건 시원한 구석이 있었다. 지난 9개월 동안 설현은 누구보다 유연하게 발 차기를 날렸고, 빠르게 뛰었으며, 힘차게 주먹질을 했다. 돌이켜보면 설현은 육체로 전하는 메시지에 익숙했다. 여군 부대의 수장으로서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검을 휘둘렀던 <안시성>의 그녀를 기억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퍼포먼스로 어떤 감성을 전달해온 뮤지션이다. 그런 설현에게 액션이란 또 하나의 몸짓 언어다. “남들보다 기술이 뛰어나다거나 감이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하지만 경력이 있다 보니 액션 연기를 할 때 외우는 속도가 빠르다거나 합을 맞출 때 수월하게 넘어가요. 아마 가수로 활동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동선을 맞춘 경험 덕분이 아닐까요. 사극 연기할 때를 돌이켜보면 따귀를 많이 때렸어요. 세게 때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아프지 않은 기술을 습득했는데 액션 연기의 노하우죠.” 마음보다 몸이 앞서는 혜원 탓에 얼굴 정중앙을 가격하는 연기도 여러 차례 등장했다. 설현은 정말이지 ‘찰지게’ 때렸다. “처음에는 때리기 죄송스러워 우물쭈물하기도 했는데 그냥 한 번에 확실히 끝내야 한다는 걸 알았어요. 상대 배우께서도 맞아도 안 아프다고 제발 세게 때려달라고 하세요. 어느 정도 힘을 줘서 가격해야 그에 맞는 리액션도 나오니까요. 그런데 사실 우리는 사람을 때려본 경험이 거의 없잖아요. 처음에 어떻게 때려야 할지 감도 안 왔어요. 현장에서 다 같이 머리를 싸매고 연구해주셨어요. 이렇게도 때려보고 저렇게도 때려보면서 가장 익숙한 느낌이 오는 컷을 골랐어요.” 공인된 액션이 한편으로 쾌감을 선사할 것 같지만 사실 현장은 긴장으로 가득하다. 설현은 더없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부상자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어요. 동선 하나만 틀어져도 누군가 쓰러지거나 맞게 되거든요. 외운 대로 하기 위해서 엄청 긴장하면서 임했어요.”

    최근 몇 년 사이 우리는 계속 여자 형사를 만났다. 영화나 드라마에는 트렌드가 분명히 존재하고, 장르물의 범람 속에 형사 캐릭터는 해결해야 할 사건이 많았다. 설현은 이 대목에서 아쉬움을 많이 드러냈다. “그동안 여자 형사 캐릭터에 대한 고정값이 생기는 것 같았어요. 형사 하면 대개 터프하고 털털한 느낌을 떠올리잖아요. 그래서 처음에 혜원이를 연구할 때 전형적인 캐릭터를 만들지 않겠다고 결심했어요. 직업이 경찰일 뿐 성격은 다 다를 테니까요. 현장 경험이 많지 않아서 사건을 추리하는 능력은 없지만 열의가 엄청나 결국 해내는 그런 경찰 느낌을 잡았어요. 호기심이 많고 사랑스러운 인물을 풍부하고 다양한 모습으로 보여주고 싶었는데 표현이 잘 안 된 듯해서 속상했어요.” 중심이 되는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야 하는 역할에 충실해야 했던 것 아니냐는 내 말에 설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해도 보시는 분들이 제 의도를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제가 연기를 잘못한 거예요. 제가 더 잘했어야죠.”

    화이트, 그레이 홀 니트 톱과 리나일론 롱스커트, 블랙 스니커즈는 프라다(Prada).

    사실 설현은 이번 작품에 들어가기 전 실제 경찰을 만나 그동안 품어온 질문을 쏟아냈다. 특수팀이 실존하진 않지만 어떤 팀이 가장 비슷한지, 어떤 사건을 주로 다루는지, 성별 때문에 받는 불이익이 있는지, 실제로 어떤 옷을 입는지까지. “주변과 잘 섞일 수 있도록 입는다고 말씀하셨어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복장. 형사라는 신분이 티 나지 않으면서도 활동성 있게.” 그러고 보면 공혜원은 늘 어딘가 늘어진 티셔츠에 직장인으로서 최소한의 격식을 드러내는 재킷 그리고 180도로 발 차기를 날려도 거뜬한 팬츠 차림이었다. 어쩌면 <낮과 밤>은 설현이 세상과 가장 가까이에서 어우러진 작품인지도 모르겠다. 주변에 있을 법한 모습으로. “형사라는 직업은 증거물을 채취하고 분석하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촉이 되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모두 다 팀장님이 범인이라고 생각할 때도 혜원이는 촉 하나만으로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는데 결국 그게 맞거든요. 또 현장에서 고생하시는 경찰에 대한 감사함을 많이 느꼈어요. 간접적으로 겪어보니 더 존경심이 생기더군요.”

    9개월에 걸친 촬영이었기에 설현은 장거리달리기를 마친 듯 숨을 고르는 상태다. “드라마 마치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쉬었어요. 그리고 부족하다고 느낀 점, 개발하고 싶은 점을 연구해보려고 연기 레슨도 다니고 있어요. 에너지를 뿜어내는 데 서툴다고 느꼈거든요. 평소에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데 익숙해서 생각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혜원의 성격 표현이 어렵게 느껴지더라고요.” 설현의 아쉬움대로 공혜원은 새로운 형사 캐릭터 창조에 일조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설현의 얼굴에는 신념에 진심인 20대 언젠가의 우리 얼굴이 있었다. 전작 <나의 나라>에서 설현은 적폐에 환멸을 느끼고 끝내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총명했고 강인했다. 9년 전 <내 딸 서영이> 서은수 역으로 연기를 시작한 이 배우는 비범하게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지만 배우란 누군가를 연기로 대변하는 사람이라는 정의를 떠올리게 하는 보편성 또한 지녔다. 지켜주고 싶었지만 시대의 희생양이기도 했던 <강남 1970>의 선혜, 살인자 아버지의 딸로 한없이 맑았던 <살인자의 기억법>의 은희, 여군 부대의 수장으로 꼿꼿했던 <안시성>의 백하까지 늘 설현은 내가 품었던 공포심, 나약함, 순수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냈던 용기 같은 정서를 환기시켰다.

    그동안 설현이 연기한 인물로부터 목소리가 크든 작든 주체성이라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 건 설현이 동경의 대상에 마음을 줬기 때문이다. “제가 갖지 못한 부분을 가진 캐릭터에 마음이 많이 갔어요. 그런 연기를 하면서 대리 만족을 했는데 최근에 좀 변했어요. 빈틈이 있는 캐릭터에 눈길이 가요. 공감이 많이 가고 감싸 안아주고 싶은 느낌이 들어서요.”

    언밸런스 데님 드레스와 블랙 벨트, 워커는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

    3년 전 <보그> 인터뷰에서 설현은 연기할 때 더 ‘나다워진다’는 얘길 들려준 적 있다. 설현은 부연 설명을 들려주었다. “캐릭터를 연구할 때 나라면 어땠을까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저 자신을 더 잘 알게 돼요. 현장의 분위기와 공기에 집중하려면 정말 태초의 상태가 되어야 하거든요. 모든 감각을 열고 굉장히 예민하게 다 하나하나 느껴야 하는 순간이 있는데 그럴 때 본능적이 되는 걸 느끼곤 해요.”

    연기할 때 가장 재미있는 순간은 “연기를 마치고 컷 사인을 들었는데 내가 어떻게 연기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몰입했을 때 그리고 그 장면을 모니터링했는데 내가 모르는 나의 모습이 나왔을 때”다. “연기하면서 느꼈던 희열을 잊을 수가 없기 때문에 또 느끼기 위해서 연습을 해요. 그 성취감이 제일 큰 행복이에요. 그걸 안 이상 연기를 포기할 수가 없어요.” 설현은 연기를 계속해나갈 생각이다. 사실 하면 할수록 욕심이 나고 잘하고 싶다. 하지만 한계를 느낄 때도 있다. 방어적이고 폐쇄적인 성격은 매번 새로운 현장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작업을 어렵게 한다. “사람들과의 호흡이 부족하다고 느꼈을 때 가장 한계를 느껴요. 인간적으로 교류가 있어야만 카메라에 잡히는 것들이 있거든요. 이런 제 성격 때문에 이 일이 적성에 맞지 않나 고민도 했어요. 그런데 얼마 전 <펜트하우스>에서 김소연 선배님을 보고 용기를 얻었어요. 연기하지 않을 때는 수줍음이 많으신데 카메라 앞에서는 엄청난 연기를 펼쳐 보이세요. 저도 경력을 쌓아 하고 싶은 연기를 마음껏 펼치고 싶어요.”

    앞서 성실한 편이라고 밝혔듯 설현은 모든 일에 ‘최선’을 우선순위로 둔다. 이제 ‘열심히’만으로 안 되는 일도 있음을 알지만 후회를 덜 남기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고 했다. 할 수 있는 게 열심히 하는 것밖에 없다는 말까지도. 그 과정에서는 스스로에 대해 냉정해질 수밖에 없다. “‘이 정도 해서 발전을 바라는 거니? 잘하고 싶으면 더 열심히 해야지’ 하며 저 자신을 많이 채찍질해요. 그 과정을 겪고 나서 결과가 나왔을 때는 그래도 칭찬해주는 편이에요. 열심히 했던 시간을 나는 알고 있으니까. 열심히 했으니 됐다고 안아주죠.” 과정에서 의미를 찾는 그이기에 내가 당신의 연기에 대해 대중이 유독 엄격한 잣대를 들이민다고 생각하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렇게 생각하면 발전이 없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부족한 부분을 많이 느끼기 때문에 당연히 감수해야 할 평가예요. 부족하면 질타를 받아야 하고요.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드리면 되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도록 노력해요.”

    <낮과 밤> 종영 후 설현은 인스타그램에 살 수 있는 큰 힘이 됐다고 소감을 남겼다. “모두에게 굉장히 힘든 해였잖아요. 이 작품을 하면서 저를 바라봐주고 응원해주시는 분들도 많다는 걸 느꼈어요. 그런 책임감이 저를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됐어요. 힘들 때는 이 작품만 끝나면 힘들어해야지 그런 생각으로 버텼어요. 정말 큰 버팀목이었어요.”

    익히 알려졌듯 메모광 설현은 다양하고 창의적인 방법으로 오늘을 기록한다. 스마트폰 메모장에 그때그때 감정을 적고, 책을 읽은 후에는 독후감을 쓰는 인스타 계정에 감상을 남기며, 특별한 일이 있을 땐 개인 일기장에 쓰고, 친언니와 교환 일기까지 쓴다. 최근 관심사를 묻는 질문에 설현은 아주 오래된 농담처럼 ‘항상 나 자신’이라고 답했지만 ‘개인주의’로 들리지 않은 건 자신을 통해 세상을 신중하게 보고자 하는 속내가 읽혀서였다. 최근 메모를 읽어달라는 요구에 설현은 유치하고 오글거린다며 “청춘은 조바심과의 싸움”이라고 간신히 입을 뗐다. “올해를 시작하면서 조바심과의 싸움을 이겨내자고 결심했거든요. 좋은 일이 있건 나쁜 일이 있건 흘러가잖아요. 그런데 전 흘러가는 게 무섭더라고요. 붙잡을 수도 없는 시간이니까. 하지만 ‘조바심’이 산다는 느낌인가 싶기도 해요. 너무 생각이 많죠?(웃음)”

    꽃망울이 터지고 온 세상이 핑크빛으로 물들면 설현은 무엇으로든 자신을 채우고 싶다. 그녀에게 연기는 그녀가 가진 것을 모두 쏟아내는 과정이다. “채우는 과정이 없으면 다 비워지고 아무것도 남지 않잖아요. 다시 나를 채우고 토대를 만들어야 더 많은 일을 겪어도 단단하게 설 수 있지 않을까요. 많이 채우면 또 많이 비울 수 있겠죠?”

    샌드 컬러 재킷과 팬츠는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피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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