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풀고 싶은 패션 패키징
유튜브에서 ‘Unboxing’이란 키워드를 검색하면 놀라운 세상이 펼쳐진다. 장난감이나 휴대폰 등의 제품 포장을 풀어보는 영상이 끝없이 이어진다. <토이 스토리> 피규어 박스 개봉 영상은 조회 수가 1억 뷰를 넘겼고, 아이폰 6 박스를 개봉한 영상은 1,000만 뷰에 가깝다. 포장을 벗기는 것조차 콘텐츠가 되는 세상이 신기하다고? 그 감상을 입으로 뱉는 순간 주위에서 구시대 유물로 취급받을지 모른다. “스티브(잡스)와 저는 많은 시간을 포장에 보냈습니다.” 애플 디자이너 조나단 아이브는 현세대가 왜 포장에 열광하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저는 포장을 푸는 과정을 사랑합니다. 제품이 특별하게 여겨지도록 만들기 위해 포장을 푸는 의식을 디자인하는 셈이죠. 포장 하나가 연극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만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창조할 수 있어요.” 보이는 것과 스토리텔링을 강조하는 패션계 역시 포장에 관한 한 질 수는 없다(유튜브에서 패션 ‘언박싱’을 구경하고 싶다면, ‘Haul’이란 검색어를 사용하면 된다). 무엇보다 패션 브랜드가 사랑하는 건 한 번에 브랜드를 알릴 수 있는 ‘시그니처 패키징’. 180년 역사의 ‘티파니 블루’가 없는 티파니를 상상할 수 있을까? 에르메스 박스가 오렌지색이 아니라면? 샤넬이 더 이상 쇼핑백에 까멜리아를 달지 않는다면? “포장이란 고객이 매장에 없을 때도 브랜드를 떠올리게 하는 중요한 장치입니다.” 발렌티노, 알렉산더 왕, DVF 등의 포장 디자인에 참여한 크리스 터비필(Chris Turbyfill)은 브랜드에서 전통을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누구나 알아챌 수 있는 포장은 중요한 자산입니다.”
물론 패션계 모두가 전통적 포장을 고집하진 않는다. 구찌의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조용히 구찌의 모든 것을 바꿨다. 그의 입성과 함께 사라진 건 브라운 쇼핑 박스와 쇼핑백. 지난 2월 25일 밀라노 스칼라 극장 뒤편의 구찌 본사 쇼룸에서 변화를 목격할 수 있었다. 전날 열린 가을 컬렉션을 다시 살펴보는 리시(Re-See) 현장에 모인 기자들이 그래피티로 장식한 가죽 재킷과 귀여운 호랑이가 그려진 모피 코트를 매만지며 미켈레의 감각에 찬탄을 보냈다. 그 와중에 내 눈에 포착된 건 따로 있었다. 옷마다 다른 옷걸이, 구두마다 다른 프린트의 슈박스. 가령 시폰 드레스는 붉은색 벨벳 옷걸이, 터프한 바이커 재킷은 스터드 장식 가죽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구두 역시 마찬가지. 호랑이가 그려진 화려한 프린트 박스는 구두만큼 소유욕을 불러일으켰다.
“기본적으로는 옅은 베이지에 검정 라인을 그린 상자와 쇼핑백으로 교체했습니다.” 새로운 패키징을 매장에서도 만날 수 있을지 묻자 구찌 측은 답했다. “패션쇼 의상의 경우 좀더 색다른 옷걸이와 박스로 포장합니다. 모두 밀라노 본사의 방침에 따르죠.” 좀더 특별한 컬렉션 피스는 그만큼 더 특별한 포장에 담겨 내 품에 안길 거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실제로 이런 독특한 포장이 매출로 연결될까? 크리스 루스가 디자인한 로고와 디자인으로 무장한 10 꼬르소 꼬모는 포장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1,000원짜리 제품을 구입해도 우리만의 로고와 디자인이 담긴 포장지로 정성껏 포장해드립니다. 포장 덕분에 같은 제품인데도 일부러 10 꼬르소 꼬모에서 구입한다는 고객이 많을 정도죠.” 10 꼬르소 꼬모 김효신 부점장의 얘기다. 보석 상자, 액세서리 파우치, 티셔츠 박스, 동그란 박스 등 제품과 사이즈에 따라 준비된 상자는 기본이다. 밀라노에서 특별히 지정한 컬러 리본과 10여 종의 포장지와 습자지 등이 계산을 마친 고객 앞에 준비된다. 그리고 방금 구입한 제품을 섬섬옥수로 포장하는 걸 바라보는 또 하나의 의식이 펼쳐진다. 물론 완벽한 포장을 위해 필요한 건 숙련된 기술.“밀라노에서 지정한 패키징 방식이 있습니다. 사각형 납작한 박스 포장은 대각선과 일자 리본만 쓴다, 십자 리본은 묶지 않는다 등등.” 신입 사원의 경우 각기 다른 형태의 제품을 포장하는 트레이닝을 거쳐야 한다. “누구라도 10CC 패키징을 보는 순간 ‘가치 있는 선물’을 받았다고 느끼길 원합니다.”
10 꼬르소 꼬모 포장이 더 인기를 끄는 건 SNS 덕분이다. 자랑이 일상이 된 세대에게 거금을 들여 새로 구입한 아이템이 담긴 상자와 쇼핑백을 온라인에 전시하는 건 더없이 자연스럽다. 패션 브랜드는 포장에 더 많은 공을 들일 수밖에. 4년 전 아크네 스튜디오는 브랜드 이름을 바꾸며 모든 패키징 디자인도 다시 작업했다. 마침 내가 방문한 스톡홀름 본사의 어느 회의실은 온통 새로운 포장 프로토타입으로 가득했다.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SNS에서 유난히 인기인 핑크빛 패키징을 완성하는 실험실이 그곳. 벽에 걸린 다양한 톤의 핑크색 쇼핑백을 보고 내가 궁금해하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니 요한슨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고객이 좋아할 만한 완벽한 핑크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한편 오프라인 매장에서 직접 쇼핑백을 들고 나설 때만큼 기분 좋은 건, 온라인 쇼핑몰에서 날아온 근사한 포장이다. 점점 더 온라인 쇼핑이 익숙해지면서 남들과 다른 포장이 눈에 띄는 일도 늘고 있다. “우리 고객과 공유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실질적 ‘터치 포인트’이기에 패키징은 더없이 중요합니다.” 마이테레사(mytheresa.com) 매니징 디렉터 옌스 리에벤헤름(Jens Riewenherm)은 온라인 쇼핑에서 포장의 중요성을 묻는 내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혹시 세일하는 제품을 구입하면, 포장이 달라지는 건 아닐까? “이브닝 드레스를 구입하는 고객부터 티셔츠를 구입하는 고객 모두 아름다운 포장을 경험해야만 합니다. 그렇다고 제품 가격에 따라 포장을 차별하진 않습니다.”
그렇다면 영화 <인턴>의 앤 해서웨이처럼 직원들이 직접 모든 포장을 담당하고 있을까? 알파고 시대에 포장 역시 로봇의 몫일까? 온라인 패션의 시작이었던 네타포르테(net-a-porter.com)는 런던, 뉴욕, 홍콩의 물류 센터에서 특별한 트레이닝을 준비한다.“제품을 찾아 습자지를 이용해 다양한 크기의 상자에 담고, 로고 장식 리본으로 마무리하는 방법까지 세심하게 교육합니다.” 네타포르테 VIP 고객을 담당하는 글로벌 디렉터 루페 푸에르타(Lupe Puerta)의 대답이다. 그가 강조한 것 역시 특별한 고객 경험.“우리를 대표하는 블랙 박스의 로고 장식 리본을 풀어 자신이 구입한 제품을 처음으로 맞는 과정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을 풀어보는 것과 같죠.”
“정품이 아니면 환불합니다. 이건 개인 컬렉션 제품이고, 수집가들에게만 판매합니다.” 지난 4월 중순 이베이닷컴에는 이런 설명을 곁들인 제품이 올라왔다. 예술품이라도 판매하듯 거창한 설명의 주인공은 공작새와 나비가 노니는 그림의 구찌 구두 박스. ‘애완동물과 담배 연기에 손상되지 않았음’을 강조한 박스가 판매될진 두고 봐야 할 일이다. 그러나 허풍이 심한 이 판매자는 요즘 패션의 핵심 중 일부를 꿰뚫고 있는 듯했다. 훌륭한 포장은 쇼핑은 물론 패션을 더 즐겁게 한다는 사실 말이다. 세련된 패키징 자체가 아름다운 오브제가 되는 시대가 왔다.
- 에디터
- 손기호
- 포토그래퍼
- CHA HYE KY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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